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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고난의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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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명희저 "나로 인하여"
주님의 몸이 나로 인하여 버리움을 당하셨네
주님의 살이 나로 인하여 욥과 같이 되시었네
주님의 온 몸은 피로 물들었음이여
주님의 살이 상처투성이가 되었도다
주님이 나로 인하여 저주를 당하셨네
주님이 나로 인하여 무덤에 들어가시었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번 주간은 주님께서 우리는 위하여 모진 고욕을 다 겪으신 고난주간입니다. 2000년 전 이 주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오늘을 우리는 종려주일 혹은 고난주일이라고 합니다. 2000년 전 오늘 예수님께서는 새끼 나귀를 타시고 사람들의 호산나 외침 속에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읍니다. 이날 예수님은 성전에 올라가셔서 둘러보신 후에 베다니로 물러 가셨습니다.
그 이튿날 월요일 아침 다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셔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쫓으시면서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일로 해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어떻게 잡아 없앨까를 의논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월요일 밤은 다시 베다니에서 쉬시고 화요일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셔 서 하루종일 비유로 가르치시기도 하고, 반대하는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종말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수요일에는 베다니에 머무시면서 쉬셨고, 저녁식사 때에 마리아가 예 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이 있었으며, 가룟 유다는 그 밤에 대제사장을 찾아가 예수님을 넘겨줄 것을 제안하였던 것입니다. 목요일,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음모가 점점 구체화되고 있는 중에 예수 님은 제자들을 보내어 예루살렘 성내에서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게 하셨 습니다. 이날 저녁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에 예비된 유월절 식탁 에 둘러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섬김 의 본을 보여주셨고, 이어 떡과 잔을 나누시면서 예수님의 몸과 피를 기념할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자리에서 유다의 배신과 제자들 이 배신, 베드로의 부인을 예언하셨습니다. 이 때에 유다는 대제사장들에 게로 가고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은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갔습 니다. 예수님은 밤을 새워 홀로 고통스러운 기도를 드리셨던 것입니다.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워 기도하신 예수님은 금요일 새벽에 찾아온 유다의 배반의 입맞춤으로 제사장들이 보낸 무리들에게 체포되셨 습니다. 제자들은 뿔뿔이 다 도망가 버리고 예수님 홀로 붙잡히셔서 대제 사장 가야바의 집에 끌려가 심문을 받으신 후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지셨 습니다. 이 때에 가룟 유다는 자기가 한 일을 뉘우치고 목매어 자살을 하였고, 예수님은 빌라도나 헤롯의 심문에 침묵으로 일관하셨으며, 빌라도 는 죄를 찾지 못하겠노라며 놓아주려 하였으나 제사장들에 의해 동원된 무리들의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외침에 못 이겨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 도록 내어 주었던 것입니다.
 오전 9시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오후 3시 경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울부짖으신 후 숨을 거두셨습니다. 저 물었을 때에 예수님의 시신은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청하여 바위 속에 판 새 무덤에 장사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인 토요일이 지나고 그 이튿날 이른 새벽 예수님은 부 활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1. 그것은 죄로 인하여 죽음의 길로 달려가는 우리를 대신한 죽음이었습니다.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죄가 초래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는 죽음을 초래합니다. 우리 인생은 모두 죄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바울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빌리선데이라는 미국의 유명한 부흥강사가 한 도시에서 집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부흥집회 직전에 그 도시의 시장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시장님! 이제 곧 놀라운 부흥집회를 그 도시에서 개최하려고 합니다. 그 전에 그 도시에 시장님이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 영적인 문제가 있고, 도움이 필요하고,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의 명단을 보내주십시오!
시장이 답신을 보내왔는 데 놀랍게도 거기에는 그가 재직하고 있는 도시민 전체의 전화번호부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죄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성경의 말씀과 같이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결국 모든 사람이 죄의 형벌을 받을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반드시 죄를 벌하셔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지 않는 한 이 죄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인생들은 없습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인생은 영원한 지옥형벌을 면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이런 문제를 예수께서 해결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신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그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을 대신 희생할 터이니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께서 우리는 위하여 대신 희생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고난주간인 것입니다.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어느 예배당 종탑을 건축하는 공사 현장입니다. 높고 뽀죡한 첨탑에서 일하던 인부 한 사람이 그만 실족하여 아스팔트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그 엄청난 높은 곳에서 떨어진 광경을 본 사람들은 아우성을 쳤습니다. 아! 저런! 저런! 아이고 불쌍해라! 즉사를 했겠네! 사람들은 몰려들었습니다.
납작하게 깨어져 죽었어야 할 사람이 툭툭 털면서 말짱하게 일어납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그 사람이 일어난 그 자리에는 양 한 마리가 죽어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떨어질 때 마침 그 곳으로 양떼들이 지나갔습니다. 그 중 한 마리가 그 사람을 살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 종탑 밑에 그 양을 그려 넣고 그 교회의 이름을 양의 교회라고 붙였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저 사망의 깊고 깊은 지옥으로 떨어질 때 우리의 죄짐을 대신 지시고 깔려죽으신 한 마리의 어린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고난 주간에 내가 담당해야할 죄악의 고난을 예수님은 대신하여 다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망의 늪으로 떨어질 때 즉사할 때 예수님은 우리 밑에 깔려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타락의 바닥으로 떨어질 때 예수님은 어린양으로 단번에 죽임을 당한 대속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2. 주님의 고난당하심은 자기 생명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의 표현입니다.
주님의 고난은 너무나도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이 무서운 고난을 당하신 것은 우리는 너무나도 사랑하신 까닭이었습니다. 자기 생명보다 주님은 우리를 더 사랑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비유될만한 이 세상의 어떤 비유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상황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조금은 유추할 수 있습니다.
1988년 12월에 소비에트 아르메니아에서 최악의 지진으로 5만5천명이 희생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삽시간에 9층짜리 아파트 건물이 무너졌습니다. 수잔나의 가족들도 콩크리트와 철근속에 뒤덮였습니다. 사방은 어두워서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던 수잔나라는 여인은 엄마를 부르는 4살난 딸아이가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꼼짝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 곁에는 시누이가 시체로 변해있었습니다. "엄마! 목말라 죽겠어요! 물 주세요!" 애절하게 소리치는 딸아이에게 아무것도 줄 수도 없었습니다. 어둠 속을 더듬다가 겨우 유리병 하나
를 찾았습니다. 죽어가는 자신의 몸을 겨우 조금 움직여 목말라 죽겠다는 딸아이를 살리고 싶었습니다.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흑암의 공포에서도 딸아이를 살려내고 싶은 모성애의 사랑! 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유리병을 깨뜨려 손가락을 사정없이 잘라서 딸의 입에서 넣었습니다. 추위로 감각을 잃어버린 손가락은 고통은 없었지만 "엄마! 제발 좀 더 주세요!" 울부짖는 딸아이를 위해 몇 번을 잘랐는지 모릅니다. 유일하게 줄 수 있었던 것은 손가락을 잘라낸 피! 피! 뿐이었습니다. 이것만이 사랑하는 딸아이의 생명을 살려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이 모성의 사랑보다 더 극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찾는 자기 자녀를 위하여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원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주는 이는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의 원수된 자들, 죄인들을 위하여 거룩하신 자신의 몸을 다 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 죄인들을 위하여 조금의 아낌도 없이 자신의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고난 주간에 그 깊으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랑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주님의 고난은 우리에게 주님 사랑하며 살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실로 주님은 자신의 생명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주셨습니다. 이런 주의 사랑을 아는 우리는 주님께 보답하는 생을 살게 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할 것입니다.
웰츠 남작은 그의 작위와 부동산, 소득의 총액을 포기하고 기아나에 가서 외로운 사람들을 돌보며 지냈읍니다. 그의 작위를 포기할 때 그는 "내가 예수께로 다시 태어난 지금 가문이 좋다는 것이 나에게 무엇이냐
내가 그리스도의 종이 되고자 할 때 귀족의 작위가 나에게 무슨 소용이냐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을 필요로 할 때 각하라고 불리우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 이 모든 허영을 버리고 나는 경애하는 예수님 발아래 모든 것들을 바치겠다. "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놀라운 사랑을 안 자들의 반응인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 안에 이런 주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깊이 자리하는 은혜로운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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