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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고난받는 종의 노래

본문

원래 초대교회에서 사순절은 세례 받을 사람들에게 준비기간으로 정해서 그들의 삶을 경건하도록 만드는 절기였습니다. 이것이 후대에는 비록 세례 받을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중심을 가지고 부활절을 기다리는 그런 절기로 사순절이 진행되어 왔습니다.
이 사순절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에 머무르게 되고, 또 주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깨닫고 감사하는 그런 기회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경건한 삶과 모든 죄를 참회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사순절을 지켜야 할 줄 압니다.
우리 개신교는 물론 어떤 의식을 많이 추구하지는 않지만은 특히 부활절을 앞두고 이 사순절은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가져다준다고 봅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쁘게 살다 보면 자기를 성찰할 만한 기회가 많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의 신앙이나 또 자신의 삶에 대해서 돌아보고 깨우치고 회개하고 새롭게 다짐 할 수 있는 기회가 이 사순절기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 사순절 기간을 통해서 우리 자신들을 쳐서 복종시키는 삶을 결단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야 할 줄 압니다.
그래서 이 사순절은 절기 중에 가장 경건하게 살 수 있는 좋은 시간들이 되는 겁니다.
마치 에베소 교회에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세상을 바쁘게 살다 보니까 우리의 처음 사랑이 식어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식어지고 기쁨이 메마르고 감격과 감사가 자취도 없이 감쳐진, 그래서 신앙을 형식과 외식으로 의무적으로 하고 있는 이런 상태가 아닌가를 생각해 볼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에베소 교회에 권면하신 것처럼 어디서 떨어진 것을 빨리 깨닫고, 어디서부터 내가 이렇게 메말라졌는가, 어디서부터 이렇게 의무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됐는가를 다시 한번 깨닫고, 처음의 그 뜨거움을 회복하고 처음의 그 감격을 회복하는 그런 기회로 삼아야 할 줄 믿습니다.
계시록 2장에 나타난 에베소 교회에 주신 말씀 속에 "만약에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
우리가 만약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우치고 돌이켜 회개하지 아니하면 우리에게 주신 금 촛대를 옮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 기회를 통해서 다시 한번 우리를 정리하는 그런 기회로 삼아야 할 줄 압니다.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먼저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할 수밖에 없죠.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오시 750년 전에 살았던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지시고 고난 당 할 것을 예언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53장을 고난받는 종의 노래라고 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고난받는 종으로서, 인생의 모든 문제를 대신해서 고난받을 종으로서, 그 삶을 사실 것을 말씀하고 있다는 내용이죠.
그래서 오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이 말씀을 상고해 볼려고 합니다.
 첫째로 보면 예수님이 고난받기 전에 어떤 준비를 하셨는가 여기 오늘 본문 1절로 3절 가운데는 예수님이 어떻게 준비하셨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보면 종의 외모가 매력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2절을 보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여러분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가 이렇게 강건하거나 하겠어요. 모양이 그렇게 있었겠어요.
그래서 이사야서 52장 14절도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얼마나 예수님의 모습이 기대한 것만큼 안 되는지 사람들이 놀랄 정도였다는 겁니다. 이 '놀란다. '는 말의 원 뜻이 아주 질리듯 놀란다, 자지러지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외적으로 볼 때에 내세울 것이 없는 분으로 오신다는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분은 이 땅에 오셔서 백성들에 배척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3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그래서 예수님을 환영하고 인정하는 사람이 없고 예수님을 오히려 싫어 버린바되는 상태를 당한다는 겁니다.
"또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게 오셔서 배척을 당할 것이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대로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철저하게 배척받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 26장 67절에 보면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여러분 사람의 얼굴에 침 뱉는 것만큼 모욕적이고 또 비참하고 불쌍한 경우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얼굴에 침 뱉고 또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예수님을 향해서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면서 네가 선지자면 너를 친 자가 누군가 알 것 아니냐 우리에게 너희를 친 자가 누군가 알려달라 이런 식이에요. 그렇게 예수님을 멸시하고 조롱하고 천대하고 배척한다는 것을 말씀한대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마 27장 28-30절에도 보면 그에 옷을 벗기고 여러분 사람들 앞에서 그 옷을 벗긴다는게 가장 치욕적인게 아닙니까, 홍포를 입히며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우리 몸에 가시가 하나만 박혀도 고통스럽고 힘들텐데 그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씌우며 그리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리고 그 앞에 무릎을 끓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 할지어다. "
예수님이 왕이라고 말하니까 이렇게 조롱을 하는 거죠.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예수님은 이렇게 멸시를 당하고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마 27장 35절에 보면 예수님의 옷을 벗겨서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눠 가져요.
그런데 더 안타까운 일은 예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이 이렇게 하는 것도 안타까운 일인데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3년 반이나 애지중지 길렀던 제자들까지도 지극한 정성을 들여서 길렀던 제자들까지도 막상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게 되니까 도망을 쳐버립니다.
마 26장 56절입니다. "이에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다 도망하니라. " 언제는 다 도망할지라도 나는 예수님을 안 버리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까지도 도망쳐 버렸습니다.
26장 75절로 가운데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씩이나 부인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가장 비참한 지경까지 이르신 분이십니다. 어떤 사람도 예수님 만큼 이런 배척과 멸시와 비웃음과 조롱을 받을 수 없을 만큼 그런 어려움을 예수님이 겪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49장 7절은 예수님을 말하면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에게 종이 된 자'라 그렇게 예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주 만물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이 사람에게 이르는 가장 비참한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받는 종이라고 우리가 부를 수 있는 겁니다.
그럼 두 번째로 왜 예수님께서 이런 많은 고난을 겪어야 됐을까요.
오늘 4절로 6절 가운데 보면 종이 받는 고난의 의미와 목적과 결과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를 보면 특히 우리에게 많이 언급되는 말씀이 '그'라는 말과 '우리'라는 단어입니다. '그'라고 하는 3인칭 단수하고 '우리'라고 하는 1인칭 복수가 많이 나옵니다.
특별히 5절에 보니까 '그'라는 말이 네 번씩이나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
바로 '우리', '그' 이런 말, 또 여기 보니까 고통과 징벌을 암시하는 명사와 동사가 빈번하게 기록이 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질고'라는 단어, 또 '간고'라는 말, '징벌'이라는 말, 고난, 찔림, 상함, 징계 이런 용어들이 집중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종이 고난을 당하는데 그것은 바로 죄된 징벌과 연관이 있게 된다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종의 고난이 인간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받는 대리적 형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바로 자신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닌 죄인들을 위한 대리적 고난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죄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면 죄 없는 분은 안 당해야 마땅한데, 그 큰 고난을 우리들을 대신해서 받으심을 믿으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대리적인 고난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를 대신하신 고난임을 여러 번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고린도후서 5장 21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여러분 예수님이 죄 없는 분이심을 믿습니까, 여러분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인데 우리를 대신해 죄를 지시려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3장 13절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여러분 예수님은 철저하게 우릴 대신해서 그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고 멸시와 천대를 받으신 그 이유가 바로 우리를 대신한 대리적인 형벌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런 얘기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대리적인 형벌을 받은 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겁니다.
계속해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벧전 3장 18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해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
히 9장 28절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었고
허물과 죄로 죽었던 인생인데 예수님이 우리의 죄 값을 다 갚아주신 줄 믿습니다.
바로 십자가위에서요.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는 예수님과 여호와 하나님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죄인과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도 십자가만은 외면하셨어요.
예수님이 아버지를 부릅니다.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은 한번도 예수님을 떠나보신 적이 없는 분이십니다. 성경의 언제든지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님과 함께 계셨어요.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을 믿으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고 아버지는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 언제든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번도 예수님을 떠나본 적이 없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만은 아니었어요. 거기는 죄인과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님을 거절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정도로 예수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 받으셨어요. 왜냐 우리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서 죄인의 자격으로 십자가에 올라가셨기 때문입니다.
벧전 2장 24절도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입었도다. "
계속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5절도 "그가 우리 죄를 없이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본문을 한번 보십시오. 4-6절에 보니까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기서 양은 짐승 같다는 겁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존귀하게 지은바 되었으나 깨닫지 못하는 자는 짐승과 같다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짐승과 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짐승 같아서 이런 얘기입니다.
"그릇 행하여" 이 말은 죄를 짓고 여러분 우리는 모두 죄인임을 시인해야 될 줄 믿습니다.
롬3장 10절에 보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어요.
롬3장 23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범죄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다 짐승 같아서 죄를 짓고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기는 제 길은 원문에 보면은 이리 저리 뛰놀았다는 뜻입니다.
마치 망아지가 뛰노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모르는 자들은 이리저리 방탕하고 죄짓고 하쟎아요.
그래서 우리는 모두 짐승 같은 존재로 죄를 짓고 뛰놀았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철저하게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실려고 이 땅에 오셨고 그 목적을 가지고 십자가에 올라가신 거예요.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붉은 피를 보시고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신 줄 믿습니다.
구약에 그래서 많은 피를 흘리게 했어요. 구약성경의 가장 중심은 피입니다. 창3장 21절에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짐승의 가죽옷을 지어주셨는데 그 때의 피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더니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까지 해서 결국은 인생의 구원이 완성됐습니다.
구약은 철저하게 피 사건을 통해서 인생의 죄악을 해결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유월절 사건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나올 때에 바로의 강퍅함을 꺾기 위해서 장자를 모두 죽이는데 그 장자가 죽는 날 밤에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었을 때에, 죽음의 사자가 애굽의 장자를 찾아가 죽이는 그 시간에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 사람도 죽음을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죠.
이 유월절 사건이야말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도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유월절을 지키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매 순간마다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해야 하는 영적 유월절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롬5장 6-8절 가운데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여러분 예수님의 죽음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대로 되었다는 겁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런 말씀입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 대신 죽으셨다는 얘기를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아니 여러분을 위해서 죽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들어보셨습니까, 우리는 다 죄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할 자격이 없습니다.
여러분 그래서요. 행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준 일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구원하실 유일한 분임을 믿습니다. 우리가 교훈을 받을 만한 분은 많습니다. 그분들은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주고 좋은 삶의 모범을 보일 수는 있지만은 우리 대신에 죽을 수는 없는 겁니다.
여러분 어때요
여러분이 세상에서 알고 있는 분들 가운데 제일 훌륭한 분이 누구라고 생각됩니까
여러분 우리는 다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들을 대신해서 죽을 수는 없는 겁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죄를 대신 할 수 있고 그분만이 십자가를 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세주가 되시는 겁니다.
요 14장 6절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큰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죄악에서 영원토록 멸망 받을 우리인생과 오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들을 위해서 당신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바쳐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 희생의 대가로 구원의 은총을 입게 된 줄로 믿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이렇게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말씀하시길 누군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은 생애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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