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누구를 위한 고난인가?
본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올해도 어김없이 고난주간을 주셨습니다. 고난주간은 주님의 아픔을 동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울지말고 너와 너희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영적인 재정비와 재충전이 이루어 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초점이 희미한 것을 다시 교정하고 우리 심령이 정화되고 질서가 회복되고 예수믿는 기쁨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신약성경에서 여러번 인용이 되었을뿐 아니라 구약의 전체계시의 정점이 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창세기로부터 내려오는 고난당하는 메시야에 대해 압축해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53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52장 13절부터 먼저 보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보라"는 단어는 새로운 대상을 지적할때나 감탄사로 쓰입니다.
세례요한도 광야에서 세례를 베풀 때 수많은 사람들이 나아오는 것을 보았지만 특별히 예수님께서 나아오실 때 "보라 세상죄를 지고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한복음1:29)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사도요한도 요한일서3:1에서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서 전체를 통해 70번이나 '보라'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만큼 중요하고 우리 마음을 열어 주님을 영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종이 형통하리니"는 주목해야할 대상을 말해줍니다. '종'을 보아야 합니다. 직접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 형틀에 희생의 제물이 되도록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종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내 종'이라고 하십니다. 인류의 모든관심을 집중시켜야할 종은 인류를 위해 고난당한 종입니다.
특히 사도행전8:35은 본문의 말씀을 '복음'이다고 했습니다. 26절 이하를 보면, 하루는 성령께서 빌립에게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하셨습니다. 일어나서 가보니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며 병거위에서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본문의 7절말씀이었습니다. 말씀을 읽는중 '그가'라는 단어에 과연 '그'가 누구인가에 걸렸습니다. 빌립이 가까이 가서 '읽는말씀을 깨닫습니까'하고 묻자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찌 깨달을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빌립을 병거에 같이 올라 앉도록 청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그'가 누구인지를 8:35에서 이사야서 53장을 중심으로("이 글에서 시작하여") 말해주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이사야서 53장의 중심이시고 신구약의 중심이 되시기 때문에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그리스도를 가르쳤습니다. 복음을 전해들은 내시가 물이 있는곳에 이르러 세례를 요청해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사야서 53장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주님이 당한 고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1. 누가 당한 고난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종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입니다(52:13).
52:14은 고난의 모습을 이야기 합니다. 믿는마음 때문이 나이라 동정의 마음으로 놀라고 무시와 멸시하기 때문에 놀라는 것입니다. 메시야에 대한 조롱입니다.
당시 헬라의 지혜가 있다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무시했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어리석다고 했습니다.
15절은 주님의 영광을 이야기 합니다.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다". 십자가의 권능과 지혜를 가지고 온 열방을 놀라게 하고 열방은 할말이 없어 입을 봉하게 됨을 말씀합니다. 십자가가 미련하게 보이지만 구원얻은 우리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52:13-15절까지가 예수님을 소개하는 서론입니다. 본문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1:1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셨고,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셨습니다. "본래 여호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8절).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께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깨닫게 되었고, 여호와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예수님을 통해 새롭고 산 길 생명의 길이 열린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당한 고난입니까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당한 고난입니다.
2. 왜 예수님께서는 멸시를 당하셨습니까
1절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선지자들을 이스라엘에게 많이 보내주셨습니다. 영적인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믿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5:38에 "그 말씀이 너희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자를 믿지 아니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안믿는 것뿐 아니라 신앙의 위대한 선배들의 말도 즉 복음전파도 믿지 않습니다.
이때로부터 2,800여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역사적인 사건으로 분명하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눈이 이 복음에 대해 감겨진채로 있습니다. 마음은 굳어져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감겨진 눈의 비닐을 벗겨 주시고 마음을 녹여주시지 않으면 여전히 믿지 못하게 됩니다.
2절마른땅에서 나는 볼품없는 줄기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태어나시고 말구유에 누이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무시했습니다. 고운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사람들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으십니다. 나사렛에서 목수의 아들로 자라셨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수 있겠느냐'고 사람들은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편견은 그 뿌리가 대단히 깊습니다.
3절그는 멸시를받아 사람들에게 싫어버린바 되었고, 고통을 많이 겪었고, 질병을 아는 자이며,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같아서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4절누구를 위한 고난이며 누구를 위한 십자가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생각하기를 주님이 자기의 죄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 징벌을 받으며 고난을 당한다는 철저한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희생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번 고난주간에 주님께서 우리의 편견과 아집을 깨뜨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스스로 묶여있는 쇠빗장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복음으로 참 자유를 얻는 복된 고난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 무엇을 위한 고난입니까
4절우리의 질고와 슬픔을 대신 짊어지시기 위한 것입니다. '질고'는 육체적인 질병을 말합니다. '슬픔'은 정신적인 아픔과 내면의 고통을 말합니다. 둘다 인간의 유한함을 의미합니다. 죄의 깊은 뿌리 때문입니다.
5절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입니다. '허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것입니다. '죄악'은 마땅히 해야할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율법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율법을 깨뜨리는 자는 율법의 정죄를 받고, 율법의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내가 받아야할 율법의 정죄와 심판을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오르셔서 징계와 채찍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질고의 짐을 지고, 슬픔의 짐을 지고, 허물과 죄악의 짐을 지고 주님앞으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로 나음을 입고 평화를 누리게 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 언덕을 오르셔서 인생 마지막순간에 하신 말씀이 "다 이루었다!"입니다. 이 말은 형벌을 받아 지옥의 자식이 되어야 마땅한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에 모든 조건을 만족시켰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모든 조건을 구비시켜 주셨습니다.
4. 누구를 위한 고난입니까
주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은 "궤사가 없으신 분"9절이셨습니다. 인격적으로 완전한 분이고 죄를 알지도 못한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죄인의 괴수처럼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누구를 위한 고난입니까
이사야53장에는 '그'라는 단어와 '우리'라는 단어가 교차적으로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은혜를 받고 속죄를 받아야할 당사자는 나 자신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11절하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십자가를 올바로 만나기만 하면 내 인생이 달라집니다. 내 삶의 깊이가 새로워 집니다. 주님께 값진 인생으로 쓰임을 받을수 있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800여년전에 살던 이사야도 복음을 나의것으로 소화를 시켰다면 성령의 시대, 말씀이 충만한 시대는 얼마나 주님을 따르며 주의 고난 의미를 깨닫고, 이것이 나를 위한 고난인 것을 알고 주앞에 헌신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고난을 올바로 깨달은 사람들은 나를 위해 살기를 포기합니다. 주를 위해 살기를 작정합니다고린도후서5:14,15. 그런데 왜 우리는 아직도 내 자신에 붙잡혀 살고, 내 자신을 추구하며 삽니까 십자가의 고난이 나의 고난으로, 십자가의 은혜가 나의 은혜로 나의 영혼 전체를 장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번 고난주간에 십자가의 은혜와 감격이 우리 속사람을 새롭게 변화시키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전서2:24,25 말씀같이 이번 고난주간을 보낼 때 길을 잃어버린자처럼 살았다면 더 이상 인생을 허비하지 말고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 되시는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방황의 종지부를 찍고 남은 인생을 주님을 위해 가장 가치있게 헌신하며 사는 결단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은 신약성경에서 여러번 인용이 되었을뿐 아니라 구약의 전체계시의 정점이 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창세기로부터 내려오는 고난당하는 메시야에 대해 압축해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53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52장 13절부터 먼저 보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보라"는 단어는 새로운 대상을 지적할때나 감탄사로 쓰입니다.
세례요한도 광야에서 세례를 베풀 때 수많은 사람들이 나아오는 것을 보았지만 특별히 예수님께서 나아오실 때 "보라 세상죄를 지고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한복음1:29)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사도요한도 요한일서3:1에서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서 전체를 통해 70번이나 '보라'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만큼 중요하고 우리 마음을 열어 주님을 영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종이 형통하리니"는 주목해야할 대상을 말해줍니다. '종'을 보아야 합니다. 직접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 형틀에 희생의 제물이 되도록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종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내 종'이라고 하십니다. 인류의 모든관심을 집중시켜야할 종은 인류를 위해 고난당한 종입니다.
특히 사도행전8:35은 본문의 말씀을 '복음'이다고 했습니다. 26절 이하를 보면, 하루는 성령께서 빌립에게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하셨습니다. 일어나서 가보니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며 병거위에서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본문의 7절말씀이었습니다. 말씀을 읽는중 '그가'라는 단어에 과연 '그'가 누구인가에 걸렸습니다. 빌립이 가까이 가서 '읽는말씀을 깨닫습니까'하고 묻자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찌 깨달을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빌립을 병거에 같이 올라 앉도록 청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그'가 누구인지를 8:35에서 이사야서 53장을 중심으로("이 글에서 시작하여") 말해주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이사야서 53장의 중심이시고 신구약의 중심이 되시기 때문에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그리스도를 가르쳤습니다. 복음을 전해들은 내시가 물이 있는곳에 이르러 세례를 요청해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사야서 53장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주님이 당한 고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1. 누가 당한 고난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종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입니다(52:13).
52:14은 고난의 모습을 이야기 합니다. 믿는마음 때문이 나이라 동정의 마음으로 놀라고 무시와 멸시하기 때문에 놀라는 것입니다. 메시야에 대한 조롱입니다.
당시 헬라의 지혜가 있다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무시했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어리석다고 했습니다.
15절은 주님의 영광을 이야기 합니다.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다". 십자가의 권능과 지혜를 가지고 온 열방을 놀라게 하고 열방은 할말이 없어 입을 봉하게 됨을 말씀합니다. 십자가가 미련하게 보이지만 구원얻은 우리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52:13-15절까지가 예수님을 소개하는 서론입니다. 본문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1:1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셨고,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셨습니다. "본래 여호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8절).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께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깨닫게 되었고, 여호와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예수님을 통해 새롭고 산 길 생명의 길이 열린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당한 고난입니까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당한 고난입니다.
2. 왜 예수님께서는 멸시를 당하셨습니까
1절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선지자들을 이스라엘에게 많이 보내주셨습니다. 영적인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믿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5:38에 "그 말씀이 너희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자를 믿지 아니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안믿는 것뿐 아니라 신앙의 위대한 선배들의 말도 즉 복음전파도 믿지 않습니다.
이때로부터 2,800여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역사적인 사건으로 분명하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눈이 이 복음에 대해 감겨진채로 있습니다. 마음은 굳어져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감겨진 눈의 비닐을 벗겨 주시고 마음을 녹여주시지 않으면 여전히 믿지 못하게 됩니다.
2절마른땅에서 나는 볼품없는 줄기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태어나시고 말구유에 누이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무시했습니다. 고운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사람들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으십니다. 나사렛에서 목수의 아들로 자라셨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수 있겠느냐'고 사람들은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편견은 그 뿌리가 대단히 깊습니다.
3절그는 멸시를받아 사람들에게 싫어버린바 되었고, 고통을 많이 겪었고, 질병을 아는 자이며,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같아서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4절누구를 위한 고난이며 누구를 위한 십자가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생각하기를 주님이 자기의 죄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 징벌을 받으며 고난을 당한다는 철저한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희생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번 고난주간에 주님께서 우리의 편견과 아집을 깨뜨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스스로 묶여있는 쇠빗장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복음으로 참 자유를 얻는 복된 고난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 무엇을 위한 고난입니까
4절우리의 질고와 슬픔을 대신 짊어지시기 위한 것입니다. '질고'는 육체적인 질병을 말합니다. '슬픔'은 정신적인 아픔과 내면의 고통을 말합니다. 둘다 인간의 유한함을 의미합니다. 죄의 깊은 뿌리 때문입니다.
5절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입니다. '허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것입니다. '죄악'은 마땅히 해야할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율법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율법을 깨뜨리는 자는 율법의 정죄를 받고, 율법의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내가 받아야할 율법의 정죄와 심판을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오르셔서 징계와 채찍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질고의 짐을 지고, 슬픔의 짐을 지고, 허물과 죄악의 짐을 지고 주님앞으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로 나음을 입고 평화를 누리게 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 언덕을 오르셔서 인생 마지막순간에 하신 말씀이 "다 이루었다!"입니다. 이 말은 형벌을 받아 지옥의 자식이 되어야 마땅한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에 모든 조건을 만족시켰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모든 조건을 구비시켜 주셨습니다.
4. 누구를 위한 고난입니까
주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은 "궤사가 없으신 분"9절이셨습니다. 인격적으로 완전한 분이고 죄를 알지도 못한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죄인의 괴수처럼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누구를 위한 고난입니까
이사야53장에는 '그'라는 단어와 '우리'라는 단어가 교차적으로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은혜를 받고 속죄를 받아야할 당사자는 나 자신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11절하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십자가를 올바로 만나기만 하면 내 인생이 달라집니다. 내 삶의 깊이가 새로워 집니다. 주님께 값진 인생으로 쓰임을 받을수 있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800여년전에 살던 이사야도 복음을 나의것으로 소화를 시켰다면 성령의 시대, 말씀이 충만한 시대는 얼마나 주님을 따르며 주의 고난 의미를 깨닫고, 이것이 나를 위한 고난인 것을 알고 주앞에 헌신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고난을 올바로 깨달은 사람들은 나를 위해 살기를 포기합니다. 주를 위해 살기를 작정합니다고린도후서5:14,15. 그런데 왜 우리는 아직도 내 자신에 붙잡혀 살고, 내 자신을 추구하며 삽니까 십자가의 고난이 나의 고난으로, 십자가의 은혜가 나의 은혜로 나의 영혼 전체를 장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번 고난주간에 십자가의 은혜와 감격이 우리 속사람을 새롭게 변화시키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전서2:24,25 말씀같이 이번 고난주간을 보낼 때 길을 잃어버린자처럼 살았다면 더 이상 인생을 허비하지 말고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 되시는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방황의 종지부를 찍고 남은 인생을 주님을 위해 가장 가치있게 헌신하며 사는 결단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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