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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예수의 복은 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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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일부터 사순절 첫째 주일이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일생동안, 시작에서 끝까지 고생하시다가, 고난의 역정 속에 삶을 두시고 친히 그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복이 되는 비결을 알려주신 것을, 우리는 성서를 통해 익히 알고 있습니다. 신약성서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8복의 산상수훈이 나옵니다.
 ‘복’이라고 하는 신약성서의 의미는 ‘마카리오스’라고 하는 헬라어에 뜻이 담긴 대로, 오늘 그 8복에 나열된 복을 통하여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린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이러한 모든 복들은, 예수님이 고난의 복으로 진정한 인간의 삶의 복을 제시해 주시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입니다. 고난을 가장 영광스러운 축복으로 믿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러한 기독교의 특색은 일반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고 그렇게 바라는, 예를 들면, 고통을 피한다든가 쾌락을 추구하는 보통 사람들의 인간심리에 역행하는 것임을 눈에 띄게 알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나가면서 괴로움을 피하고 저 피안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이 바라는 종교적인 욕구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여기에 역행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는 개인 혈육의 축복에만 사로잡힌 이기적인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흔히 4월 초파일에 불자들이, 1년 내내 가만히 있다가도 등을 사들고 절에 가는 할머니와 아낙네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또 우리는 설날이나 명절 때 점쟁이나 작명소를 찾아가서, 보통 사람들의 마음을 갖는 일반적인 행위 작태를 보게 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악귀를 쫓아내기 위해 무당 판술을 불러들이는 사람들도 있게 됩니다. 악귀를 쫓아내기 위해 도모하는 짓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서 화와 저주와 고통을 피하고 안락과 영광을 값싸게 얻으려고 하는, 보통 사람들의 심리, 또 생활자세를 우리는 엿볼 수 있습니다. 이 같은 것은 값싼 은총을 바라는 마음과 같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심성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저 높은 곳, 영광스러운 곳, 황홀한 곳, 안전한 곳에 정착하고자 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그런 피안적인 안위와 자기의 이익추구를 위한 욕구 충족에 급급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은 비역사적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비사회적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탈역사적이요 탈사회적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께서 잘 아셨습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을 지나가게 되셨습니다. 갑자기 예수님은 그 자신에 대한 세상 여론을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제자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넌지시 물어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여러가지로 세상 사회 여론을 생각하면서 들은 대로 말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가장 성질이 급한 베드로가 하는 말이 명답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사실 이 정답을 말한 것은, 그가 평소에 예수님을 알고 있던 것과는 정반대의 입장으로 말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네 혈육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힘으로 그런 대답을 하는구나. ”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베드로의 혈육적 관심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이 세상에서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라가실 때, 한자리해야 되겠다. 내가 수제자니까!’. 이 마음은 비단 베드로뿐만 아니라 예수의 모든 제자들에게 있어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혈육의 동기를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어 보니까, 자기들의 욕구충족을 채워주는 일을 항상 예수님이 해주신 것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허기진 배를 채워주었습니다. 잔칫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만들어 주었습니다.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또 기가 막힌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더구나 앞으로는 메시아로 오셔서 왕이 될 것이라고 하는, 왕에 대한 권력에 대한 기대가 곧 혈육의 관심이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혈육적 관심거리였지만, 그러나 허울좋게 말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속보이는 대답을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반항, 이 말을 뒤집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 내가 앞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지고 죽을 것을 예고해야겠구나. ’ 하고 생각하신 예수님께서, “내가 앞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당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깜짝 놀랐습니다. “주여, 그리하지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 예수를 혈육의 축복을 안겨다 주는 분으로 믿고 따랐던 모든 무리들을 대표해서 하는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각 밖으로 노발대발하시면서 큰소리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 저는 이 장면에서 우리나라 말의 ‘동상이몽(同床異夢)’을 떠올리게 됩니다. 같은 잠자리에서 다른 꿈을 서로 꾸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같은 행동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각각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인드와 베드로의 마인드, 세상 사람들의 마인드, 제자들의 마인드는 동상이몽이었습니다. 혈육적인 관심에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는 질타를 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무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고난과 무관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고난을 피하는 길로 착각하는 베드로와 제자들과 세상 사람들의 마인드를, 사탄의 마음으로 알고 단호히 꾸짖으신 예수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를 잘못 믿고 있는 한국 교회 교인들의 신앙에 던지는 예수의 준엄한 말씀인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민중을 깔보고 억누르고 수탈하는 잘못된 지배집단이 있습니다. 인간을 부당하게 비뚤어지게, 권력을 누수시키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시, 오늘의 우리와 똑같은 현실 속에서 민중들이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예수 스스로 고난을 질 수밖에 없었다는 예수님의 마인드를 읽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역사를 어둡게 하고 사회를 부패시키고, 인간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위선자들, 억압자들을 용기있게 대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친히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지 않을 수 없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위선자들, 압제자들, 그리고 수탈하는 자들이 판치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내려가 고난을 당하고 죽을 수밖에 없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여기서 예수님에 대하여, “그리하지 마옵소서!”라고 했으니,
얼마나 웃기는 동상이몽인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갈 골고다의 길이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 널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 골고다의 길 끝에는 죽음을 이긴 제3일의 삶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가야 하는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가 당한 고난과 핍박과 죽음을 피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의 그 아픔을 함께하고 예수의 고난을 함께 짊어져야겠습니다. 예수의 그 죽음을 즐겁게 받아 죽어야 합니다. 예수의 그 부활을 우리의 온 존재로 맞이해야 됩니다. 이 자랑스러운 고난이 예수의 축복임을 우리는 믿어야겠습니다. 예수는 권위와 영광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음을 기억하십시다. 고난과 슬픔의 종으로 오셨음을 결코 잊지 마십시다.
오늘 구약 본문에서 이사야는 고난의 종으로 오시는 메시아의 모습을 생생하게 예언했습니다. 이사야는 메시아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질고와 슬픔을 당하신 것을 말했습니다. 또 그는 우리를 위하여 징벌과 고난을 당한 것을 말하였습니다. 또 그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인하여 찔림과 상함을 받고, 우리의 평화와 나음을 위하여 징계와 채찍에 맞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슬픔과 죽음에 대하여 생생하게 묘사한 이사야서입니다. 그리스도의 겸손과 복종은 십자가상의 절정으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를 주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슬픔과 죽음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길은 하늘의 영광과 이 세상의 행복을 누리는 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영광과 행복을 누리기 전에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고백하셨습니다.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와 땀을 흘리는 기도와 로마군인들에 의해 체포되어 헤롯 법정, 빌라도 법정으로 끌려다니면서 재판을 받으셨고, 판결에 의해 십자가를 지시고 12번 넘어지면서 골고다 언덕으로 가시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의 처형에 피와 물을 다 쏟으시고 “다 이루었다. ”는 말을 남기고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이렇게 고난의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라고 전제하고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죄가 있으셔서 고난을 당하셨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진리와 정의를 위해 스스로 희생하신 고난이었음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될 줄로 압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따르는 자로서, 이 세상에서 정의롭고 진리대로 바르게 살려고 하면 고난이 기필코 따르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워가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시는 말씀은,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내가 고난으로 채워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모든 생명은 고난을 통해서 태어납니다. 어떤 생명이든 고난 없이 태어난 생명은 없습니다. 인간이 태어날 때도 모체는 고난을 겪습니다. 산실은 고통과 신음소리로 꽉찹니다. 동물뿐만 아니라 초목도 그렇습니다. 한 국가나 사회가 태어날 때도 그렇습니다. 어떤 제도나 질서가 창조될 때도 그렇습니다. 고통과 고난 없이 태어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고난은 인간 생명의 시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난주간에 들어가기 전에 사순절에 예수님의 고난을 우리의 삶으로 다시 정화시켜서 소망의 구현을 위한 사순절을 우리는 가져야 되겠습니다.
모든 생명은 고난을 통해 성장합니다. 그리고 성숙해 갑니다. 고난을 겪지 않은 인격과 고난을 통해 연단받은 인격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고난보다도 안일한 축복 속에 자리를 펴고 안주하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복을 잘 파는 사람들이 인기가 있는 것을 우리 주변에서도 보게 됩니다. 진실로 아무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거룩한 대속의 죽음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의 의미 안에 있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영생이라는 귀한 열매를 창출해 내었습니다.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만민에게 부활과 영생을 준다는 이 희생의 원리는, 그분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삶의 원리를 가르쳐 줍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서, 더 이상 자기 생명을 살아가는 이기심과 자기 생명만을 보존하려는 안전욕에서 탈피해야겠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역사의 고비마다 나타난 순교자들의 죽음으로 자라나고 있음을 부흥으로 여겨, 우리는 간증해야 될 줄로 압니다. 순교자의 피가 바로 교회의 씨가 된 것입니다. 신앙 선배들이 순교를 각오하지 않았다면, 어찌 오늘 우리의 교회들이 이처럼 힘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꺾고, 오직 주님의 자신을 내놓는 그 거룩한 희생이 있었기에, 수많은 주의 백성들이 생겨났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겠습니다.
요즘의 신앙인 중에서 고통과 시련을 당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저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곤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선조들은 모두 고난 속에서 시련을 겪으면서 신앙을 가졌던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욥도 그랬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고난 속에서 피흘리는 눈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지금의 세상은 수많은 범죄와 나쁜 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고해와 같은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나는 고통하는 고로 존재한다. ”고 말했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이 고난과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겠습니까 성서적 입장에서 고난이란 성숙에 필요한 과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사람을 성장성숙시키기 위해서 고통과 시련이라는 과정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뀌어야겠습니다. 가령 우리 집에서 우리 자녀 중에서, 군대에 갈 아들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후방의 편안한 부대에서 안전하게 근무하게 해달라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는데, 그 아들이 후방에 배속되지 않고 전방에 떨어졌을 때, 오늘 우리 신앙의 주변에서 평가하면 그것이 축복입니까, 저주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화로, 저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공의롭게 생각해보면, 저 국방의 의무 가운데 최전방에서 지키는 군인을, 저주받는 사람들이 가 있는 곳이라고 본다고 하면, 오늘 우리가 전방에서 수고하는 사람들 때문에 안전하게 평안을 누리고 있는데, 그들은 저주꾼이라고 일컫는 잘못된 오류가 생겨나지 않겠느냐는 지적입니다.
기독교는 결코 쉽게 사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의 신앙인들이 잘못 길들여져 있습니다. 자기만이 잘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화려한 교회로 장식되어 있다고 해도 교회가 되려면 십자가를 걸어두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곧 고난의 상징입니다. 옛날에 방영되었던 MBC 방송의 ‘절망은 없다’라는 프로그램에서, 절망을 딛고 일어선 주인공의 80% 가 기독교인이었다고 하는 사실은 기독교인은 고난을 추스를 줄 알았음을 보여줍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도 질적으로 성숙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각을 교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관을 바꾸어야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생각도 없는 무용지물, 기계와 같은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람이 때가 되면 불어 나무를 쓰러뜨리려고 할 때도 나무는 바람에 쓰러지지 않으려고 버티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인간 자체의 의지를 강조하신 것을 우리는 알아야겠습니다. 알찬 신앙인이란 바로 열매 맺는 신앙인입니다. 열매 맺는 신앙인이 되기 위하여 내리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예수의 고난은 곧 축복임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복은 ‘고난’입니다. 그 고난의 복으로 사순절을 지켜 갑시다. 고난의 주일로 가는 사순절에 고난의 메시지가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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