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고난 받으신 예수그리스도
본문
이번 주간을 '종려주일' 이라고도 하고 '고난주간' 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종려주일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펴고, 손에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의 입성을 축하한 것을 기념하여 부르는 명칭입니다. 즉 고난을 향한 예수님의 결단을 찬송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갖자는 의미입니다.
또한 고난주간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앞서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시고, 유다에 의해서 배신을 당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고, 마침내 대제사장과 헤롯과, 빌라도의 법정으로... 이리저리 끌려 다니시다가 채찍에 맞으시며,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고 최후를 맞이하신 고난의 주간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해서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며, 묵상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 오늘은 이사야 53장에서 예언한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약 700여년 전의 사람이었지만 구약성경 중에 예수님에 대하여 가장 많은 예언을 남겼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사7:14-15),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사9:6), 그의 낮아지심과 나사렛에서의 유년기 시절(사11:1-2, 53:2),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사42:1, 50:4-5), 이방인에 대한 그분의 특별한 사역(사9:1-2), 그분께서 행하신 기적들(사36:5-6), 그분의 메시지(사61:1-2), 주의 고난받으심과 죽음(사50:6, 52:14, 53:1-10), 그분의 부활, 승천 및 높임을 받으심(사52:13, 53:10-12, 52:15), 그분의 천년통치(사9:7, 11:3-5; 32:1; 33:22; 42:4-7; 49:1-12; 59:16-21) 등... 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들은 얼마나 정확한지... 지나간 것은 그 예언의 말씀대로 그대로 이루어졌으며, 앞으로 되어질 일들도 그대로 이루어 질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고난과 우리를 위한 구속의 사실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고난은 나와 우리를 위한 고난.... 우리와 모든 인간을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고난을 받으셨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1. 멸시를 받으신 예수님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그는 멸시를 받아서" 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멸시를 당해 보셨습니까 멸시라는 것은 무시하는 것보다 더 심한 것입니다. 쉬운 표현으로 아주 짓이기는 것이 멸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처럼 멸시를 당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멸시는 거부와 배척의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온갖 멸시와 천대로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하였습니다.
일제시대에 일본사람들이 걸핏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조센징, 빠가야로" 라고 하면서 멸시했습니다. 이 말은 "조선놈, 바보새끼" 라는 말입니다.
자기들은 힘있는 국민이니까 조선사람은 저항하지 못할 줄 알고 완전히 무시하고 욕하며 멸시한 것입니다.
언젠가 TV에서 보도가 되었습니다만,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일을 시키고 임금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협박하고 때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면 안됩니다.
힘이 없고 가난하다고 해서 멸시하고 업신여기는 일이야말로 참으로 못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 멸시를 당하면 가슴에 한을 품게 되는 법입니다.
어느 학교에서 공부도 못하고 힘없고 가난한 어느 학생을 왕따 시키고 얼마나 괴롭혔던지... 견딜 수 없어서.... 그 아이가 자살해 버린 사건이 있지 않았습니까....
미국에서는 왕따 당하던 학생이 견디다 못해 분풀이로 집에서 총을 가지고 와서 무차별 사격하여 죄 없는 학생들을 여러 명 죽인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멸시는 견디기 힘든 것입니다.
3절 말씀을 다시 보세요....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라고 했습니다. '싫어 버린바 되었다'는 말은 사람 취급을 안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분...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신 그분...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가 되시는 주님이신데.... 여호와 하나님으로 대접하기는커녕.... 사람 대접도 안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0절에도 보면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 하였다" 그랬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저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고 심지어는 예수님을 동네 낭떨어지에 떨어 뜨려 죽이려고 까지 하였습니다.
옛날에 가난한 사람은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부잣집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거지 취급했습니다. 부잣집 아들이 가나한 집 아이를 때려줘도 그냥 맞기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2000년 전에 로마의 지배를 받았던 이스라엘 땅에서... 가난한 사람은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이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고 예수님을 멸시하고, "가난한 것이 무슨 구세주냐"고 죽이려고 까지 한 것입니다.
또 "간고를 많이 겪었다"고 하였습니다. '간고'란 말은 가난하여 심히 고생스러운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헐벗고 굶주려서 고생했다는 말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얼마나 철저하게 멸시를 당하셨느냐 하면... 예수님이 체포되었을 때 제사장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으로 뺨을 때렸습니다.
사람의 신체 부위 가운데서 얼굴을 때리는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더구나 그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은 치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처럼 온갖 모욕을 다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는 희롱을 하였습니다. 이 때는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고, 그렇게 믿음직스러웠던 베드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선생님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도망가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며 저주까지 하였습니다.
3절 하반절에 보면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메시아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우리가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주일날 예배 안 드리고 예식장 가고, 놀러 가고, 자기의 일을 더 우선으로 여기는 것이 바로 주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러 와도 예배 시간을 잘 지키지 않는 것.... 이런 것도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만약 귀한 손님이나 높은 사람을 만나려고 한다면 약속시간 전에 가서 기다릴 것입니다. 선을 보기로 했는데 상대방이 나오지 않았다면 얼마나 무시하는 겁니까... 그런데 주님과의 약속시간은 번번히 지키지 않고... 늦게 나온다든가... 주님을 바람 맞추면.... 이런 것이 다 주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또 예배를 드리면서 자세를 바르게 하지 않는 것도 주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으로 대접하지 않는 것이... 다 여호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유대인들의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번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고난 당하신 주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경건한 예배 자세를 회복하고...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섬기는 그런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의 고난을 오해한 사람들
4절 말씀을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계를 받아서 여호와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랬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도 그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마태복음 27:39절 말씀에 보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면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욕하며 말하기를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네가 스스로 너를 구원하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한번 내려와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려올 수 없어서 못 내려온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주님의 사명이었기 때문에... 마치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어린양과 같이 묵묵히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와는 상관이 없고, 죄를 짓지도 않으셨는데.... 인간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을 모욕하고 멸시하던 자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 말씀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랬습니다.
베드로전서 2:24절 하반절에서도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그랬습니다.
참으로 이것은 놀라운 선언이요, 놀라운 축복의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는 죄의 짓눌림으로부터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의 영혼과 육신은 죄의 권세가 입힌 상처로부터 나음을 입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우리 인간은 죄의 권세로부터 어떠한 영향이나 상처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은 상처나 영향들은 인간의 영혼과 인간의 삶 깊숙한 곳에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 권세 아래 놓인 인간에게 온갖 질병이 있고, 고독이 있고, 두려움이 있고, 외로움이 있고, 슬픔이 있고, 분노가 있고, 악한 감정이 있고, 미움과, 시기와, 다툼.... 그리고 욕심과 같은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가 가져다준 것들이요. 인간이 죄의 영향아래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사례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것들을 당신의 죽으심을 통하여 해결하셨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선언입니다. 할렐루야!
3. 나를 위한 주님의 고난
계속해서 오늘 본문 6절을 말씀에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랬습니다.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였다' 라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지 않은 인생이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예외가 없이... 모두가 다 여호와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또 '각기 제 길로 갔거늘…' 그랬습니다. 이는 인생이 여호와 하나님을 떠남이 전체적인 동시에 각 개개인이 개인적으로 떠났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랬습니다.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여기서 '그' 란 다름 아닌 예수님을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가 담당해야 할 죄의 대가를 대신하여서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이사야서 53장만 살펴보아도 예수님이 당하신 죄의 대가를 알 수 있습니다.
4절에 보면 주님은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5절에서는 그가 찔리시고, 그가 상하셨으며,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7절에서는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워하였으며,
8절에서는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습니다.
9절에서는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고,
12절에서는 그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고난은 사실 우리가 담당해야 할 고통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죄의 대가를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골고다 언덕에서 다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에게 용서와, 부요와, 자유와, 평화와, 건강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허물을 사하시고 나 같은 죄인,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물과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저와 여러분이 져야 될 그 죄의 짐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지워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함께 따라하겠습니다. "나 때문입니다!" 예... 주님의 이 모든 고난은 바로 나 때문입니다.
나의 죄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4-6절에 보면 '우리'라는 말이 9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이유는 우리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나'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고난은... 나의 허물, 나의 죄악, 교만, 혈기... 나의 더럽고 추한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와 우리.... 우리와 모든 인간을 위하여... 고난과, 굴욕... , 멸시와 천대, 십자가를 지시고 물과 피를 다 흘려주셨습니다. 이 모두가 바로 나 때문임을 가슴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어느 일류 대학에 다니는 아름다운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다재다능하여 학교에서도 늘 인기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얼굴이 일그러지고 심한 흉터가 있어서 정말 못 봐줄 정도로 흉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학생은 어머니가 친구들 앞에... 특히 학교에 오는 것이 딱 질색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이 어머니가 딸이 하도 보고 싶어서.... 비행기를 타고 버스를 타서.... 딸이 다니는 대학에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이 딸은 어머니를 보고서도 말도 안하고... 아는 척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이들 앞에서 자기 어머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싫어서 어머니가 왔어도 모르는 척 합니다. 어머니는 얼마나 섭섭했는지...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방학이 되어서 딸이 집에 왔을 때... 어머니는 젊은 시절의 사진을 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사진은 너무나도 예쁜 모습이었습니다.
딸이 묻습니다. "엄마! 엄마는 젊었을 때에는 이렇게 예뻤는데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딸의 질문에 어머니가 설명을 합니다.
"네가 아주 어렸을 때 한번은 잠든 너를 집에 두고 밖에 나간 적이 있었단다. 잠깐 나갔다가 온다는 것이 그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집에 돌아 와 보니 그 사이에 집에 불이 났고 소방관들과 온 마을 사람들이 나와서 구경하는 큰 화재가 일어났단다. 그런데 나는 집안에서 잠자고 있는 너를 그냥 놔둘 수가 없어서 말리는 소방관들을 밀치고 방에 들어가서 너를 담요에 싸고 나오다가 이렇게 얼굴에 화상을 입었단다" 하고 말해 주었습니다.
어머니의 말을 들은 딸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루룩 흐르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이 아니었다면 살아날 수 없었고, 이처럼 건강하고 예쁘게 자랄 수 었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내가 존재하고... 이렇게 살아있는 것은 모두 어머니의 은혜요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딸이 어머니를 부둥켜 안고.... 어머니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죄송하다고.... 그리고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후로.. 딸은 어머니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자기 친구들에게 자기 어머니같은 사람이 없다고, 자기 어머니는 자기를 구하려다가 저런 얼굴이 되었다고 하면서 어머니를 자랑하며 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고난을 받아서 그 흉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들의 죄 때문에, 우리의 허물 때문에 그 험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에 못박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놀라운 사랑의 의미를 아는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고난주간을 맞으면서.. 주님의 이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깊이 새기고 이 놀라운 사랑... 복된 소식, 이 복음을 널리 전하는 기회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종려주일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펴고, 손에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의 입성을 축하한 것을 기념하여 부르는 명칭입니다. 즉 고난을 향한 예수님의 결단을 찬송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갖자는 의미입니다.
또한 고난주간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앞서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시고, 유다에 의해서 배신을 당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고, 마침내 대제사장과 헤롯과, 빌라도의 법정으로... 이리저리 끌려 다니시다가 채찍에 맞으시며,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고 최후를 맞이하신 고난의 주간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해서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며, 묵상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 오늘은 이사야 53장에서 예언한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약 700여년 전의 사람이었지만 구약성경 중에 예수님에 대하여 가장 많은 예언을 남겼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사7:14-15),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사9:6), 그의 낮아지심과 나사렛에서의 유년기 시절(사11:1-2, 53:2),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사42:1, 50:4-5), 이방인에 대한 그분의 특별한 사역(사9:1-2), 그분께서 행하신 기적들(사36:5-6), 그분의 메시지(사61:1-2), 주의 고난받으심과 죽음(사50:6, 52:14, 53:1-10), 그분의 부활, 승천 및 높임을 받으심(사52:13, 53:10-12, 52:15), 그분의 천년통치(사9:7, 11:3-5; 32:1; 33:22; 42:4-7; 49:1-12; 59:16-21) 등... 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들은 얼마나 정확한지... 지나간 것은 그 예언의 말씀대로 그대로 이루어졌으며, 앞으로 되어질 일들도 그대로 이루어 질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고난과 우리를 위한 구속의 사실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고난은 나와 우리를 위한 고난.... 우리와 모든 인간을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고난을 받으셨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1. 멸시를 받으신 예수님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그는 멸시를 받아서" 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멸시를 당해 보셨습니까 멸시라는 것은 무시하는 것보다 더 심한 것입니다. 쉬운 표현으로 아주 짓이기는 것이 멸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처럼 멸시를 당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멸시는 거부와 배척의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온갖 멸시와 천대로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하였습니다.
일제시대에 일본사람들이 걸핏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조센징, 빠가야로" 라고 하면서 멸시했습니다. 이 말은 "조선놈, 바보새끼" 라는 말입니다.
자기들은 힘있는 국민이니까 조선사람은 저항하지 못할 줄 알고 완전히 무시하고 욕하며 멸시한 것입니다.
언젠가 TV에서 보도가 되었습니다만,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일을 시키고 임금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협박하고 때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면 안됩니다.
힘이 없고 가난하다고 해서 멸시하고 업신여기는 일이야말로 참으로 못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 멸시를 당하면 가슴에 한을 품게 되는 법입니다.
어느 학교에서 공부도 못하고 힘없고 가난한 어느 학생을 왕따 시키고 얼마나 괴롭혔던지... 견딜 수 없어서.... 그 아이가 자살해 버린 사건이 있지 않았습니까....
미국에서는 왕따 당하던 학생이 견디다 못해 분풀이로 집에서 총을 가지고 와서 무차별 사격하여 죄 없는 학생들을 여러 명 죽인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멸시는 견디기 힘든 것입니다.
3절 말씀을 다시 보세요....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라고 했습니다. '싫어 버린바 되었다'는 말은 사람 취급을 안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분...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신 그분...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가 되시는 주님이신데.... 여호와 하나님으로 대접하기는커녕.... 사람 대접도 안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0절에도 보면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 하였다" 그랬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저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고 심지어는 예수님을 동네 낭떨어지에 떨어 뜨려 죽이려고 까지 하였습니다.
옛날에 가난한 사람은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부잣집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거지 취급했습니다. 부잣집 아들이 가나한 집 아이를 때려줘도 그냥 맞기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2000년 전에 로마의 지배를 받았던 이스라엘 땅에서... 가난한 사람은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이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고 예수님을 멸시하고, "가난한 것이 무슨 구세주냐"고 죽이려고 까지 한 것입니다.
또 "간고를 많이 겪었다"고 하였습니다. '간고'란 말은 가난하여 심히 고생스러운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헐벗고 굶주려서 고생했다는 말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얼마나 철저하게 멸시를 당하셨느냐 하면... 예수님이 체포되었을 때 제사장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으로 뺨을 때렸습니다.
사람의 신체 부위 가운데서 얼굴을 때리는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더구나 그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은 치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처럼 온갖 모욕을 다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는 희롱을 하였습니다. 이 때는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고, 그렇게 믿음직스러웠던 베드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선생님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도망가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며 저주까지 하였습니다.
3절 하반절에 보면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메시아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우리가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주일날 예배 안 드리고 예식장 가고, 놀러 가고, 자기의 일을 더 우선으로 여기는 것이 바로 주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러 와도 예배 시간을 잘 지키지 않는 것.... 이런 것도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만약 귀한 손님이나 높은 사람을 만나려고 한다면 약속시간 전에 가서 기다릴 것입니다. 선을 보기로 했는데 상대방이 나오지 않았다면 얼마나 무시하는 겁니까... 그런데 주님과의 약속시간은 번번히 지키지 않고... 늦게 나온다든가... 주님을 바람 맞추면.... 이런 것이 다 주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또 예배를 드리면서 자세를 바르게 하지 않는 것도 주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으로 대접하지 않는 것이... 다 여호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유대인들의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번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고난 당하신 주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경건한 예배 자세를 회복하고...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섬기는 그런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의 고난을 오해한 사람들
4절 말씀을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계를 받아서 여호와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랬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도 그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마태복음 27:39절 말씀에 보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면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욕하며 말하기를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네가 스스로 너를 구원하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한번 내려와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려올 수 없어서 못 내려온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주님의 사명이었기 때문에... 마치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어린양과 같이 묵묵히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와는 상관이 없고, 죄를 짓지도 않으셨는데.... 인간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을 모욕하고 멸시하던 자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 말씀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랬습니다.
베드로전서 2:24절 하반절에서도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그랬습니다.
참으로 이것은 놀라운 선언이요, 놀라운 축복의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는 죄의 짓눌림으로부터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의 영혼과 육신은 죄의 권세가 입힌 상처로부터 나음을 입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우리 인간은 죄의 권세로부터 어떠한 영향이나 상처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은 상처나 영향들은 인간의 영혼과 인간의 삶 깊숙한 곳에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 권세 아래 놓인 인간에게 온갖 질병이 있고, 고독이 있고, 두려움이 있고, 외로움이 있고, 슬픔이 있고, 분노가 있고, 악한 감정이 있고, 미움과, 시기와, 다툼.... 그리고 욕심과 같은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가 가져다준 것들이요. 인간이 죄의 영향아래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사례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것들을 당신의 죽으심을 통하여 해결하셨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선언입니다. 할렐루야!
3. 나를 위한 주님의 고난
계속해서 오늘 본문 6절을 말씀에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랬습니다.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였다' 라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지 않은 인생이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예외가 없이... 모두가 다 여호와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또 '각기 제 길로 갔거늘…' 그랬습니다. 이는 인생이 여호와 하나님을 떠남이 전체적인 동시에 각 개개인이 개인적으로 떠났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랬습니다.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여기서 '그' 란 다름 아닌 예수님을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가 담당해야 할 죄의 대가를 대신하여서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이사야서 53장만 살펴보아도 예수님이 당하신 죄의 대가를 알 수 있습니다.
4절에 보면 주님은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5절에서는 그가 찔리시고, 그가 상하셨으며,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7절에서는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워하였으며,
8절에서는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습니다.
9절에서는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고,
12절에서는 그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고난은 사실 우리가 담당해야 할 고통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죄의 대가를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골고다 언덕에서 다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에게 용서와, 부요와, 자유와, 평화와, 건강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허물을 사하시고 나 같은 죄인,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물과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저와 여러분이 져야 될 그 죄의 짐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지워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함께 따라하겠습니다. "나 때문입니다!" 예... 주님의 이 모든 고난은 바로 나 때문입니다.
나의 죄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4-6절에 보면 '우리'라는 말이 9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이유는 우리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나'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고난은... 나의 허물, 나의 죄악, 교만, 혈기... 나의 더럽고 추한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와 우리.... 우리와 모든 인간을 위하여... 고난과, 굴욕... , 멸시와 천대, 십자가를 지시고 물과 피를 다 흘려주셨습니다. 이 모두가 바로 나 때문임을 가슴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어느 일류 대학에 다니는 아름다운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다재다능하여 학교에서도 늘 인기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얼굴이 일그러지고 심한 흉터가 있어서 정말 못 봐줄 정도로 흉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학생은 어머니가 친구들 앞에... 특히 학교에 오는 것이 딱 질색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이 어머니가 딸이 하도 보고 싶어서.... 비행기를 타고 버스를 타서.... 딸이 다니는 대학에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이 딸은 어머니를 보고서도 말도 안하고... 아는 척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이들 앞에서 자기 어머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싫어서 어머니가 왔어도 모르는 척 합니다. 어머니는 얼마나 섭섭했는지...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방학이 되어서 딸이 집에 왔을 때... 어머니는 젊은 시절의 사진을 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사진은 너무나도 예쁜 모습이었습니다.
딸이 묻습니다. "엄마! 엄마는 젊었을 때에는 이렇게 예뻤는데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딸의 질문에 어머니가 설명을 합니다.
"네가 아주 어렸을 때 한번은 잠든 너를 집에 두고 밖에 나간 적이 있었단다. 잠깐 나갔다가 온다는 것이 그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집에 돌아 와 보니 그 사이에 집에 불이 났고 소방관들과 온 마을 사람들이 나와서 구경하는 큰 화재가 일어났단다. 그런데 나는 집안에서 잠자고 있는 너를 그냥 놔둘 수가 없어서 말리는 소방관들을 밀치고 방에 들어가서 너를 담요에 싸고 나오다가 이렇게 얼굴에 화상을 입었단다" 하고 말해 주었습니다.
어머니의 말을 들은 딸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루룩 흐르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이 아니었다면 살아날 수 없었고, 이처럼 건강하고 예쁘게 자랄 수 었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내가 존재하고... 이렇게 살아있는 것은 모두 어머니의 은혜요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딸이 어머니를 부둥켜 안고.... 어머니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죄송하다고.... 그리고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후로.. 딸은 어머니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자기 친구들에게 자기 어머니같은 사람이 없다고, 자기 어머니는 자기를 구하려다가 저런 얼굴이 되었다고 하면서 어머니를 자랑하며 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고난을 받아서 그 흉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들의 죄 때문에, 우리의 허물 때문에 그 험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에 못박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놀라운 사랑의 의미를 아는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고난주간을 맞으면서.. 주님의 이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깊이 새기고 이 놀라운 사랑... 복된 소식, 이 복음을 널리 전하는 기회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