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고난 받으신 예수님
본문
우리 중부은혜교회가 위치한 전민동은 약 7천세대가 살고 있고, 인구수로는 약 2만 5천명 가량의 많은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한 동에서 2만명이 넘는다면 큰 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구가 많으면 시장경제가 활성화되고, 교육과 문화시설도 발전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단점도 생기게 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주차문제입니다. 땅은 제한되어 있고 차량은 늘어나기 때문에, 주차하는데 퍽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지난 몇 일전에 유성구청에서 안내문이 한 장 날아왔는데, 지역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서 '공용주차장'을 확보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통지문이었습니다. 앞으로 전민동에 공용주차장이 생기면, 다소나마 주차난이 해소될 것입니다. 그 때까지는 주차 경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전민동에는 5일장이 서는데, 장날이 되면 장사하는 사람들의 차가 늘어나기 때문에, 주차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지난 금요일은 전민동 5일장이었습니다. 주차할 공간이 마땅치 않아서- 저녁에 연구단지 담쪽으로 주차를 시켰습니다. 그곳은 주차금지구역이라서, 저는 이른 아침에 다른 곳으로 차를 옮기려고 나가는 중이었는데, 1층에서 평화 방앗간 이찬식 집사님이 화초를 가꾸고 있었습니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저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화초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천리향"이라는 화초라는 것이었습니다. 냄새가 너무 좋고 그 냄새가 천리까지 간다고 해서 이름이 '천리향'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제 머리속에 문뜩, 성경 한 구절이 아른 거렸습니다. 고후2:15 말씀인데, 거기에 보면,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며 살아야 합니다. 믿습니까
요즘 한창, 산과 들에는 봄 나물들이 파릇 파릇 돋아나 있고, 거리에는 노란 개나리들이 활짝 펴 있고 하얀 목련 꽃이 만발하였습니다. 그래서 오고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합니다.
이처럼 봄의 향기를 전해 주는 아름다운 꽃과 나물들처럼,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내 주위에 있는 이웃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섬김과 봉사의 향기를 발하며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바라기는, 우리들의 생활이- 이웃들에게 덕을 끼치고 선한 본을 보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사랑의 향기를 발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대아 지방에서 많이 자라는 나무중에 '종려나무'라고 있습니다. 잎의 길이가 약 1m정도 되고, 딱딱하고 밑으로 쳐지지 않는 것이 특징인데, 이 종려나무는 '신부의 품위', '의인', 또 '이스라엘의 통치자'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이 나무를 신성시하는 관습까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요12:13) 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맞이 한 것입니다. 그날을 기념하는 주일을 가리켜서 우리는 '종려주일'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이 바로 그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 지나고 나면 곧 바로-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고난 주간으로 이어집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이 고난주간을 매우 뜻깊은 절기로 지킵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를 되새겨 보면서, 우리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 보고, 나태한 신앙생활을 재 점검해 보는 매우 중요한 절기라 하겠습니다.
평소에도 항상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지만, 특히 이 고난주간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피흘려 죽으신 그 고난의 의미를- 더욱 가슴깊이 되새기면서, 한 주간을 보내야 합니다.
그래서 고난주간은 성도들로 하여금- 더욱 더 자신들의 신앙을 여호와 하나님앞에서 경건된 삶을 살도록 촉구하는 아주 중요한 기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이 주님께서 고난받으신 그 고난의 의미를 바로 깨닫고, 예수님의 고난에 조금이라도 동참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으로 선택한 사53장 말씀과 마27장 말씀은, 역사적으로 볼 때, 약 740년이라는 긴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선지가 이사야가 사53장 말씀을 기록한 때는, B C. 740년경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 약 740년 전에-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실 것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잠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은 언젠가는 분명히 성취된다"는 교훈을 깨닫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일년 이년, 아니 한달 두달만 기다려도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쉽게 짜증을 내고 이내 포기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정하신 약속은,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 뭡니까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당장에는 눈앞에 나타나지 않고 아른 거려도, 언젠가는 반드시 나타날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만사는 주님이 정하신 때가 있습니다. 전3:1에 보니,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너무 성급하거나- 조급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지 않아도 인생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그것마져 신속히 날아가는 것 같다고 말씀했습니다(시90:10).
길이 참으시는 '주님의 인내'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만약 주님께서, 참지 않으시고 매 순간순간마다 우리가 범하는 죄를 벌하신다면, 우리 중에 과연- 살아남을 자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탕자와 같이 방황하는 어리석은 인생들이, 주님품으로 온전히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들도 이와같은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야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50년전에, 주님의 충실한 종으로 널리 알려진 '조지 뮬러'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자신과 매우 친한 친구 5명을 위해서 날마다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시작한지 5년후에 1명이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10년후에 나머지 중 2명이,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친구들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한지 25년이 지난후에, 네 번째 친구가 구원을 받고 마음에 평화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한 친구는, 끝까지- 예수님을 부인하며 살았습니다. 뮬러 목사님은, 죽기 바로 직전까지 마지막 한 친구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뮬러 목사님이 죽는 그 순간까지 그 마지막 친구는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죽는 지 몇 달이 지난 후에야, 이 마지막 친구는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이 마지막 친구를 위해 뮬러 목사님은, 거의 52년 동안을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끈기있게 인내하며 기도할 때, 언제가는 그 영혼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을 믿고, 형제와 이웃들과 친구들의 영혼을 위해서- 인내하면서 끊임없이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이사야 선지자에 의해 예언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740년이란 긴 세월이 지난 후에야- 성취되었습니다.
약속하신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구세주로 오셨고, 모든 죄인들을 위해서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고난과 수모를 겪으셨고, 결국 죄인들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 놀라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잊지 말고,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여서,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에, 수 많은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큰 소리로 찬양을 부르며 외치던, 그 날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이다.
우리는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메시야'로서 '그리스도'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내구주로 영접하고, 그 놀라운신 이름을 진심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차마 고개를 바로 들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삶이 우리의 입술에서 나오는 찬양과는 별개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마치, 복음성가 가사처럼 "나의 입술은 주님 닮은 듯 하지만, 내 마음은 아직도 추한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수 많은 무리들이 주님을 향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찬양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예수님께서, 혁명을 일으켜서 임금이 되시고 로마 제국으로부터 해방되고, 세상을 바꾸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도리어 죽기위해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셨습니다. 따르던 그 무리들은, 자신들의 뜻이 관철되지 않자, 예수님에게서 고개를 돌렸고 외면했습니다. 급기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까지 소리 질렀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서슴치 않고 교회를 떠나는- 참으로 안타까운 현상을 보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뜻과 일치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부하려고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약한 중에 겸손하기를 원하시고, 우리는 건강한 몸이 되기를 원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육체의 가시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더욱 더 신뢰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믿는 성도들을 보다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죽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주님의 모습이었지만, 결국,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온 인류를 구원을 성취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왜 고난을 받으셨는지, 또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면서,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아가는, 참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합시다. "고난 받으신 예수님" 오늘 말씀의 제목입니다.
유대나라의 수도였던 예루살렘은, B. C.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완전 함락되었고, 그 이후에 '바사'와 '헬라'와 '로마'라고 하는, 거대한 주변 열강들에 의해서 착취와 억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암담한 시점에서, 유대 민족의 희망이란, 메시야가 와서 억압당하는 자신들을 구원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메시야'는, 히브리어 인데, 헬라어로는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이 뜻은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구세주' 또는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 대다수 민중들은, 그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줄, '정치적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마을로 들어가실 때,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예수님의 질문을 받고 대답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례 요한'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나 혹은,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대한 선지자나 뛰어난 인물로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선뜻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선망하고 기다리던 "그리스도! 메시야! 그분이 바로, 예수님 당신이시다"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이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곧 이어서 예수님께서,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결국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조금전까지만 해도,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던 베드로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예수님을 붙들고 펄쩍 뛰며 말했습니다. "고난을 받고 죽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어찌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다니요 절대로 그러실수 없습니다. "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했지만, 고난을 당하고 죽게되는 그리스도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그 당시 팽배했던 '정치적 메시야'를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메시야를 힘의 상징으로만 생각했을 뿐이지, 고난받다가 죽는 그런 나약한 메시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훗날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오순절 성령강림을 체험한 후에, 그리스도께서 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는지, 그 의미를 깨닫게 되었고, 자신들도 주님이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따라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결코 패배가 아니라,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고, 죽을 자를 살려 주시고, 이미 죽은 자도 부활케 하시는 능력이며 완전한 승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우리 앞에 당하는 여러 가지 인생의 고난과 어려움도, 능히 믿음으로 극복해 내고, 언제나 감사함으로- 주님을 따라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왜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셔야만 했는가
오늘 본문 말씀 마27:27-31 말씀에 보면, 하챦은 인간들에게 희롱 당하시는 예수님의 처절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군병들에 의해서 채찍에 맞고, 이리 저리 끌려 다니고, 옷 벗김을 당하고, 가시 면류관을 머리에 쓰게 되고, 침 음을 당하면서, 또한 갈대로 머리를 맞으면서 온갖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못박힘을 당하여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는 당시 최고의 흉악범이나 정치범들에게 지우는- 가장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같이- 십자가의 형틀을 당하셔야만 했던 엄청난 죄인이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죄를 범하시기를 커녕,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셨습니다(고후5:21). 그런데 왜 고난을 받으셔야만 했겠습니까
이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왜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셔야만 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만왕의 왕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보잘 것 없고 비천한 사람들의 손에 의해-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옷 벗김을 당하는 수모를 겪고 희롱을 당하신 것은,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영광의 면류관을 쓰셔야- 지극히 마땅하신 그리스도께서 날카롭고 뽀족한 가시 면류관을 머리에 쓰시고, 얼굴에 침 음을 당하신 것은, 바로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입니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하신 그리스도의 이름이, 희롱과 모욕을 당하신 것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입니다. 내 허물과 내 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온갖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허물과 죄악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거스리는 '불순종'을 말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늘 본문 사53:6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 '양'으로 비유하면서, 그들의 고집과 독선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의 길로 치닫고 있음을 예언했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다- '양'같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흔히 생각하기를, '양'이란 동물은, 양순하고 사람의 말을 잘 듣고, 다른 가축들에 비하면 순하다고 흔히 생각합니다. 또한, 잘 길들여지는 짐승이고, 비교적 친근하고 깨끗한 짐승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푸른 초원위를 한가로이 뛰노는 어린 양들의 모습을 연상하면서, 목자되시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접목해 보기도 합니다.
Ex) 그러나, 성경기록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스라엘과 중동 지방에서는, 우리의 이러한 생각을 완전히 뒤바꿔어 놓습니다. 이란과 이라크와 같은 중동지방에서는, 가장 상스러운 욕설중에 하나가, "양 같은 놈"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멍멍이 같은 놈"이라고 하면, 가장 듣기 싫어하는데, 중동지방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양 같은 놈"이라고 하면, 가장 치욕스럽고 상스러운 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목자'라는 직업은, 유대 사회에서는 가장 비천한 직업중에 하나였습니다. 예전에 우리나라에- '백정'이라는 신분이 있었는데, 마치 그 '백정'과도 비교될 수 있는- 아주 천시받던 직업이 목자였습니다.
여하튼 중동지방에서는 이 '양'이라는 동물은, 생각이 모자라고 어리석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도 모르고, 매우 지저분한 짐승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온순하고 연약한 동물이라기 보다는, 덩치 큰 양은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한 번 앞발을 쭉 뻗으면 어지간해서는 끌려가지 않는- 매우 고집스러운 짐승중에 하나가- 바로 양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고집과 독선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법을 거역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죄인들을 가리켜서, 이사야 선지자는, "다 양 같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들의 불순종! 우리들의 어리석음! 그리고, 양처럼 제 고집만 부리는 우리들의 '자아'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바로 '내 죄' 때문에,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같은 주님의 사랑과 그 크신 은혜를 분명히 깨닫고- 마음속에 확실히 믿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아직도 버리지 못한- 아집과 고집, 어리석음과 여호와 하나님을 거역하는 불순종, 이러한 옛 모습들을 완전히 털어 버려야만 됩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충성된 여호와 하나님의 일꾼들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셔서 얻어진 결과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이유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로 인해서 얻어진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 사53:5절 중반에 보면 그 결과가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합시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평화를 얻게 되었고, 예수님께서 그 처절한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의 형벌에서 풀려나서, 감히 엄두도 못냈던-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권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지신 그 고난의 십자가는, 우리의 허물과 상처를 깨끗이 싸매어 주셨고, 영원한 참된 안식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그 십자가의 피를 믿기만 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권세가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님을 믿는 자 심령속에 넘치는 줄로 믿습니다. 이 평강이 지금 저와 여러분 심령속에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징계와 채찍은, 단순한 상처나 또는 가벼운 매질이 아니라, 매우 격렬하고도 고통스러운 형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그 징계와 채찍은, 생명이 끊어지는 죽음이었습니다.
본래 예수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과 본체셨습니다. 그러나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비천한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그것은 커다란 수치였고 고통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뿐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멸망받아야 마땅한,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고난의 종이 되기를 자청하셨고,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면서, 십자가에서 생명까지도 내어주시는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전도하면, "내가 지은 죄 내가 지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형벌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면- 차마 그 소리를 꺼낼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법으로도 죄를 범하면, 몇 십년을 감옥에서 살아야 하고, 극악무도한 죄를 범하면,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언도합니다.
아무리 강심장을 가졌어도, 사형날짜를 기다리는 사형수는 초조하고 두려움과 공포에 떨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죽음을 모면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어떤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이 죽는 것입니다. 일순간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죽는 것 조차도 문제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내가 지은 죄 내가 지겠다"고 담대히 말할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만 넘기면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죽음 이후에 영원한 지옥의 형벌로 떨어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사망'은 영원한 지옥 형벌에 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죄를 범한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지옥의 형벌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지를 알면, 감히 "내가 지은 죄 내가 감당하겠다"는 소리는 결단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20년간 감옥생활을 해야 될 사람에게- 몇 년간 형량을 감축해 준다고 하면, 지푸라기라도 잡을 심정일 것입니다. 하물며, 영원한 지옥에서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해 주겠다는데, 그것도- '값없이' '공짜로' 주겠다'는데 이것보다 더 크고 놀라운 기쁜 소식이- 또 어디있겠습니까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고 우매하고, 미련하고 불쌍하기 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분명히 마음속에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무고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어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의로운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죄인들의 허물과 죄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이며 형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제 육시부터 구시까지, 즉 우리 시간으로 정오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다"고 마27:45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환한 대낮에 캄캄한 어둠이 깔리고 음산한 기운이 도는 그 순간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외면하신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나의 여호와 하나님, 나의 여호와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죄을 대신 짊어지셨기 때문에, 처절한 그 절규의 소리앞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이 당할 '죄의 대가'를 찾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정하신 불변의 법칙가운데 하나는, 반드시 죄는 그 대가를 치루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은 가장 공의롭고 가장 무서우며, 모든 죄를 미워하시고, 결단코 죄는- 면죄함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달리신 그 십자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면서, 동시에 죄를 심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의 완성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대신 지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와 안식을 주셨습니다. 이 평화와 안식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환경과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합니다. 또는 물질과 장소와 시간에 따라서 현저하게 차이가 납니다. 물질이 넉넉하고, 좋은 배경과 환경에 놓인 사람은 평화한 듯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배경 좋고 많은 물질을 소유한 사람들도,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주변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와 안식이 그 심령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는, 물질과 환경에 지배되지 않습니다. 비록 호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못하고, 배경이 그리 좋지 못해도, 또한 상황이 어렵고 힘들어도,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평강의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평화와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 죄인들이, 이제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여호와 하나님과 평화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어떤 원수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해 주고 그들과 화목하게 살수 있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믿는 자는, 잃어버렸던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게 되는 축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바라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셨던 영원한 평화와 참된 안식이, 오늘 저와 여러분 심령속에 충만하여서, 구원의 기쁨과 감격속에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어떻게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는가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바라볼 때, 우선 먼저, 고난은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우연이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는 우연이 없습니다. 오직 필연만이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 바로, 고난의 의미가 있으며, 고난의 이유가 있습니다. 성도에게 당하는 고난은, 필연적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임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고난은 잠시 지나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은 목적이 아니라 지나가는 과정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연단시키시고, 우리를 생명으로.. 영광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고난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감지해야 합니다. 어떤 고난을 당하더라도 그 속에는 반드시, 우리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깨닫고,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 두고,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 18:11)"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엄청난 십자가의 고난도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수용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고난이 있을지라도 선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인내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막8:34에 보면,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따라가는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골고다의 언덕길을 오르셨던 주님!' '자신을 부인하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던 주님!' 우리는 이와같은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서 주님의 발자취를 묵묵히 따라가야 합니다.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내게 주어진 생활속에서 내게 맡겨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주님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질의 달란트, 건강의 달란트. 지식과 재능을 달란트를 가지고, 주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물질에 인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자가 드린 많은 액수보다도 과부의 두 렙돈을 주님은 칭찬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원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게 주신 지식과 재능을 가지고, 선한 일에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당장에는 손해처럼 느껴질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며 결국- 심령속에 커다란 축복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건강할 때, 열심히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실족한 이웃들을 찾아가서 위로하고, 넘어진 심령들을 붙잡아 세워주시기 바랍니다. 시간과 정성을 다해서, 주님이 기뻐하실만한 일을 찾아서 행동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자존심도 버리고, 주님을 따르기로 작정하는 삶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삶입니다.
또한,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난을 만나더라도 끝까지 인내하면서, 원망하기 보다는 감사하고, 불평하기 보다는 도리어 기뻐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영원한 생명과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는, 고난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고난을 통해서야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깨닫고, 고난을 통해서 믿고, 고난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자 베르나르(Bernard)는 가슴을 치며 탄식하기를, '나의 여호와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려 계시는데, 나는 어찌하여 여전히 쾌락만을 즐기고 있는가' 라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간직하고 느낀다고 자부하면서도, 매일처럼 반복되는 죄의 습성속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여전히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또 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어리석은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살기 위해서는 죽어야 합니다.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희생을 해야 합니다. 사랑을 위해서는 피를 홀려야 합니다. 죄 용서함을 받기 위해서는, 희생의 피가 필요합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도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를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를 위해 길이 참으신- 고난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속에서, 우리도 사랑과 희생을 실천하면서,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달게 지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 몇 일전에 유성구청에서 안내문이 한 장 날아왔는데, 지역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서 '공용주차장'을 확보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통지문이었습니다. 앞으로 전민동에 공용주차장이 생기면, 다소나마 주차난이 해소될 것입니다. 그 때까지는 주차 경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전민동에는 5일장이 서는데, 장날이 되면 장사하는 사람들의 차가 늘어나기 때문에, 주차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지난 금요일은 전민동 5일장이었습니다. 주차할 공간이 마땅치 않아서- 저녁에 연구단지 담쪽으로 주차를 시켰습니다. 그곳은 주차금지구역이라서, 저는 이른 아침에 다른 곳으로 차를 옮기려고 나가는 중이었는데, 1층에서 평화 방앗간 이찬식 집사님이 화초를 가꾸고 있었습니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저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화초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천리향"이라는 화초라는 것이었습니다. 냄새가 너무 좋고 그 냄새가 천리까지 간다고 해서 이름이 '천리향'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제 머리속에 문뜩, 성경 한 구절이 아른 거렸습니다. 고후2:15 말씀인데, 거기에 보면,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며 살아야 합니다. 믿습니까
요즘 한창, 산과 들에는 봄 나물들이 파릇 파릇 돋아나 있고, 거리에는 노란 개나리들이 활짝 펴 있고 하얀 목련 꽃이 만발하였습니다. 그래서 오고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합니다.
이처럼 봄의 향기를 전해 주는 아름다운 꽃과 나물들처럼,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내 주위에 있는 이웃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섬김과 봉사의 향기를 발하며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바라기는, 우리들의 생활이- 이웃들에게 덕을 끼치고 선한 본을 보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사랑의 향기를 발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대아 지방에서 많이 자라는 나무중에 '종려나무'라고 있습니다. 잎의 길이가 약 1m정도 되고, 딱딱하고 밑으로 쳐지지 않는 것이 특징인데, 이 종려나무는 '신부의 품위', '의인', 또 '이스라엘의 통치자'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이 나무를 신성시하는 관습까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요12:13) 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맞이 한 것입니다. 그날을 기념하는 주일을 가리켜서 우리는 '종려주일'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이 바로 그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 지나고 나면 곧 바로-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고난 주간으로 이어집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이 고난주간을 매우 뜻깊은 절기로 지킵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를 되새겨 보면서, 우리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 보고, 나태한 신앙생활을 재 점검해 보는 매우 중요한 절기라 하겠습니다.
평소에도 항상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지만, 특히 이 고난주간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피흘려 죽으신 그 고난의 의미를- 더욱 가슴깊이 되새기면서, 한 주간을 보내야 합니다.
그래서 고난주간은 성도들로 하여금- 더욱 더 자신들의 신앙을 여호와 하나님앞에서 경건된 삶을 살도록 촉구하는 아주 중요한 기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이 주님께서 고난받으신 그 고난의 의미를 바로 깨닫고, 예수님의 고난에 조금이라도 동참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으로 선택한 사53장 말씀과 마27장 말씀은, 역사적으로 볼 때, 약 740년이라는 긴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선지가 이사야가 사53장 말씀을 기록한 때는, B C. 740년경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 약 740년 전에-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실 것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잠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은 언젠가는 분명히 성취된다"는 교훈을 깨닫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일년 이년, 아니 한달 두달만 기다려도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쉽게 짜증을 내고 이내 포기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정하신 약속은,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 뭡니까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당장에는 눈앞에 나타나지 않고 아른 거려도, 언젠가는 반드시 나타날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만사는 주님이 정하신 때가 있습니다. 전3:1에 보니,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너무 성급하거나- 조급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지 않아도 인생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그것마져 신속히 날아가는 것 같다고 말씀했습니다(시90:10).
길이 참으시는 '주님의 인내'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만약 주님께서, 참지 않으시고 매 순간순간마다 우리가 범하는 죄를 벌하신다면, 우리 중에 과연- 살아남을 자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탕자와 같이 방황하는 어리석은 인생들이, 주님품으로 온전히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들도 이와같은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야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50년전에, 주님의 충실한 종으로 널리 알려진 '조지 뮬러'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자신과 매우 친한 친구 5명을 위해서 날마다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시작한지 5년후에 1명이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10년후에 나머지 중 2명이,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친구들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한지 25년이 지난후에, 네 번째 친구가 구원을 받고 마음에 평화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한 친구는, 끝까지- 예수님을 부인하며 살았습니다. 뮬러 목사님은, 죽기 바로 직전까지 마지막 한 친구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뮬러 목사님이 죽는 그 순간까지 그 마지막 친구는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죽는 지 몇 달이 지난 후에야, 이 마지막 친구는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이 마지막 친구를 위해 뮬러 목사님은, 거의 52년 동안을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끈기있게 인내하며 기도할 때, 언제가는 그 영혼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을 믿고, 형제와 이웃들과 친구들의 영혼을 위해서- 인내하면서 끊임없이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이사야 선지자에 의해 예언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740년이란 긴 세월이 지난 후에야- 성취되었습니다.
약속하신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구세주로 오셨고, 모든 죄인들을 위해서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고난과 수모를 겪으셨고, 결국 죄인들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 놀라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잊지 말고,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여서,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에, 수 많은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큰 소리로 찬양을 부르며 외치던, 그 날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이다.
우리는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메시야'로서 '그리스도'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내구주로 영접하고, 그 놀라운신 이름을 진심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차마 고개를 바로 들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삶이 우리의 입술에서 나오는 찬양과는 별개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마치, 복음성가 가사처럼 "나의 입술은 주님 닮은 듯 하지만, 내 마음은 아직도 추한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수 많은 무리들이 주님을 향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찬양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예수님께서, 혁명을 일으켜서 임금이 되시고 로마 제국으로부터 해방되고, 세상을 바꾸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도리어 죽기위해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셨습니다. 따르던 그 무리들은, 자신들의 뜻이 관철되지 않자, 예수님에게서 고개를 돌렸고 외면했습니다. 급기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까지 소리 질렀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서슴치 않고 교회를 떠나는- 참으로 안타까운 현상을 보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뜻과 일치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부하려고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약한 중에 겸손하기를 원하시고, 우리는 건강한 몸이 되기를 원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육체의 가시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더욱 더 신뢰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믿는 성도들을 보다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죽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주님의 모습이었지만, 결국,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온 인류를 구원을 성취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왜 고난을 받으셨는지, 또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면서,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아가는, 참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합시다. "고난 받으신 예수님" 오늘 말씀의 제목입니다.
유대나라의 수도였던 예루살렘은, B. C.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완전 함락되었고, 그 이후에 '바사'와 '헬라'와 '로마'라고 하는, 거대한 주변 열강들에 의해서 착취와 억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암담한 시점에서, 유대 민족의 희망이란, 메시야가 와서 억압당하는 자신들을 구원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메시야'는, 히브리어 인데, 헬라어로는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이 뜻은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구세주' 또는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 대다수 민중들은, 그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줄, '정치적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마을로 들어가실 때,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예수님의 질문을 받고 대답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례 요한'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나 혹은,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대한 선지자나 뛰어난 인물로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선뜻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선망하고 기다리던 "그리스도! 메시야! 그분이 바로, 예수님 당신이시다"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이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곧 이어서 예수님께서,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결국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조금전까지만 해도,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던 베드로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예수님을 붙들고 펄쩍 뛰며 말했습니다. "고난을 받고 죽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어찌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다니요 절대로 그러실수 없습니다. "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했지만, 고난을 당하고 죽게되는 그리스도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그 당시 팽배했던 '정치적 메시야'를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메시야를 힘의 상징으로만 생각했을 뿐이지, 고난받다가 죽는 그런 나약한 메시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훗날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오순절 성령강림을 체험한 후에, 그리스도께서 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는지, 그 의미를 깨닫게 되었고, 자신들도 주님이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따라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결코 패배가 아니라,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고, 죽을 자를 살려 주시고, 이미 죽은 자도 부활케 하시는 능력이며 완전한 승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우리 앞에 당하는 여러 가지 인생의 고난과 어려움도, 능히 믿음으로 극복해 내고, 언제나 감사함으로- 주님을 따라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왜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셔야만 했는가
오늘 본문 말씀 마27:27-31 말씀에 보면, 하챦은 인간들에게 희롱 당하시는 예수님의 처절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군병들에 의해서 채찍에 맞고, 이리 저리 끌려 다니고, 옷 벗김을 당하고, 가시 면류관을 머리에 쓰게 되고, 침 음을 당하면서, 또한 갈대로 머리를 맞으면서 온갖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못박힘을 당하여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는 당시 최고의 흉악범이나 정치범들에게 지우는- 가장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같이- 십자가의 형틀을 당하셔야만 했던 엄청난 죄인이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죄를 범하시기를 커녕,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셨습니다(고후5:21). 그런데 왜 고난을 받으셔야만 했겠습니까
이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왜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셔야만 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만왕의 왕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보잘 것 없고 비천한 사람들의 손에 의해-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옷 벗김을 당하는 수모를 겪고 희롱을 당하신 것은,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영광의 면류관을 쓰셔야- 지극히 마땅하신 그리스도께서 날카롭고 뽀족한 가시 면류관을 머리에 쓰시고, 얼굴에 침 음을 당하신 것은, 바로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입니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하신 그리스도의 이름이, 희롱과 모욕을 당하신 것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입니다. 내 허물과 내 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온갖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허물과 죄악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거스리는 '불순종'을 말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늘 본문 사53:6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 '양'으로 비유하면서, 그들의 고집과 독선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의 길로 치닫고 있음을 예언했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다- '양'같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흔히 생각하기를, '양'이란 동물은, 양순하고 사람의 말을 잘 듣고, 다른 가축들에 비하면 순하다고 흔히 생각합니다. 또한, 잘 길들여지는 짐승이고, 비교적 친근하고 깨끗한 짐승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푸른 초원위를 한가로이 뛰노는 어린 양들의 모습을 연상하면서, 목자되시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접목해 보기도 합니다.
Ex) 그러나, 성경기록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스라엘과 중동 지방에서는, 우리의 이러한 생각을 완전히 뒤바꿔어 놓습니다. 이란과 이라크와 같은 중동지방에서는, 가장 상스러운 욕설중에 하나가, "양 같은 놈"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멍멍이 같은 놈"이라고 하면, 가장 듣기 싫어하는데, 중동지방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양 같은 놈"이라고 하면, 가장 치욕스럽고 상스러운 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목자'라는 직업은, 유대 사회에서는 가장 비천한 직업중에 하나였습니다. 예전에 우리나라에- '백정'이라는 신분이 있었는데, 마치 그 '백정'과도 비교될 수 있는- 아주 천시받던 직업이 목자였습니다.
여하튼 중동지방에서는 이 '양'이라는 동물은, 생각이 모자라고 어리석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도 모르고, 매우 지저분한 짐승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온순하고 연약한 동물이라기 보다는, 덩치 큰 양은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한 번 앞발을 쭉 뻗으면 어지간해서는 끌려가지 않는- 매우 고집스러운 짐승중에 하나가- 바로 양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고집과 독선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법을 거역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죄인들을 가리켜서, 이사야 선지자는, "다 양 같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들의 불순종! 우리들의 어리석음! 그리고, 양처럼 제 고집만 부리는 우리들의 '자아'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바로 '내 죄' 때문에,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같은 주님의 사랑과 그 크신 은혜를 분명히 깨닫고- 마음속에 확실히 믿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아직도 버리지 못한- 아집과 고집, 어리석음과 여호와 하나님을 거역하는 불순종, 이러한 옛 모습들을 완전히 털어 버려야만 됩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충성된 여호와 하나님의 일꾼들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셔서 얻어진 결과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이유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로 인해서 얻어진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 사53:5절 중반에 보면 그 결과가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합시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평화를 얻게 되었고, 예수님께서 그 처절한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의 형벌에서 풀려나서, 감히 엄두도 못냈던-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권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지신 그 고난의 십자가는, 우리의 허물과 상처를 깨끗이 싸매어 주셨고, 영원한 참된 안식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그 십자가의 피를 믿기만 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권세가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님을 믿는 자 심령속에 넘치는 줄로 믿습니다. 이 평강이 지금 저와 여러분 심령속에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징계와 채찍은, 단순한 상처나 또는 가벼운 매질이 아니라, 매우 격렬하고도 고통스러운 형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그 징계와 채찍은, 생명이 끊어지는 죽음이었습니다.
본래 예수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과 본체셨습니다. 그러나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비천한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그것은 커다란 수치였고 고통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뿐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멸망받아야 마땅한,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고난의 종이 되기를 자청하셨고,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면서, 십자가에서 생명까지도 내어주시는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전도하면, "내가 지은 죄 내가 지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형벌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면- 차마 그 소리를 꺼낼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법으로도 죄를 범하면, 몇 십년을 감옥에서 살아야 하고, 극악무도한 죄를 범하면,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언도합니다.
아무리 강심장을 가졌어도, 사형날짜를 기다리는 사형수는 초조하고 두려움과 공포에 떨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죽음을 모면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어떤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이 죽는 것입니다. 일순간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죽는 것 조차도 문제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내가 지은 죄 내가 지겠다"고 담대히 말할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만 넘기면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죽음 이후에 영원한 지옥의 형벌로 떨어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사망'은 영원한 지옥 형벌에 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죄를 범한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지옥의 형벌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지를 알면, 감히 "내가 지은 죄 내가 감당하겠다"는 소리는 결단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20년간 감옥생활을 해야 될 사람에게- 몇 년간 형량을 감축해 준다고 하면, 지푸라기라도 잡을 심정일 것입니다. 하물며, 영원한 지옥에서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해 주겠다는데, 그것도- '값없이' '공짜로' 주겠다'는데 이것보다 더 크고 놀라운 기쁜 소식이- 또 어디있겠습니까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고 우매하고, 미련하고 불쌍하기 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분명히 마음속에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무고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어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의로운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죄인들의 허물과 죄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이며 형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제 육시부터 구시까지, 즉 우리 시간으로 정오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다"고 마27:45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환한 대낮에 캄캄한 어둠이 깔리고 음산한 기운이 도는 그 순간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외면하신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나의 여호와 하나님, 나의 여호와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죄을 대신 짊어지셨기 때문에, 처절한 그 절규의 소리앞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이 당할 '죄의 대가'를 찾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정하신 불변의 법칙가운데 하나는, 반드시 죄는 그 대가를 치루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은 가장 공의롭고 가장 무서우며, 모든 죄를 미워하시고, 결단코 죄는- 면죄함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달리신 그 십자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면서, 동시에 죄를 심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의 완성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대신 지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와 안식을 주셨습니다. 이 평화와 안식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환경과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합니다. 또는 물질과 장소와 시간에 따라서 현저하게 차이가 납니다. 물질이 넉넉하고, 좋은 배경과 환경에 놓인 사람은 평화한 듯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배경 좋고 많은 물질을 소유한 사람들도,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주변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와 안식이 그 심령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는, 물질과 환경에 지배되지 않습니다. 비록 호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못하고, 배경이 그리 좋지 못해도, 또한 상황이 어렵고 힘들어도,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평강의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평화와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 죄인들이, 이제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여호와 하나님과 평화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어떤 원수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해 주고 그들과 화목하게 살수 있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믿는 자는, 잃어버렸던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게 되는 축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바라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셨던 영원한 평화와 참된 안식이, 오늘 저와 여러분 심령속에 충만하여서, 구원의 기쁨과 감격속에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어떻게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는가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바라볼 때, 우선 먼저, 고난은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우연이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는 우연이 없습니다. 오직 필연만이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 바로, 고난의 의미가 있으며, 고난의 이유가 있습니다. 성도에게 당하는 고난은, 필연적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임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고난은 잠시 지나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은 목적이 아니라 지나가는 과정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연단시키시고, 우리를 생명으로.. 영광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고난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감지해야 합니다. 어떤 고난을 당하더라도 그 속에는 반드시, 우리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깨닫고,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 두고,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 18:11)"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엄청난 십자가의 고난도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수용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고난이 있을지라도 선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인내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막8:34에 보면,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따라가는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골고다의 언덕길을 오르셨던 주님!' '자신을 부인하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던 주님!' 우리는 이와같은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서 주님의 발자취를 묵묵히 따라가야 합니다.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내게 주어진 생활속에서 내게 맡겨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주님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질의 달란트, 건강의 달란트. 지식과 재능을 달란트를 가지고, 주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물질에 인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자가 드린 많은 액수보다도 과부의 두 렙돈을 주님은 칭찬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원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게 주신 지식과 재능을 가지고, 선한 일에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당장에는 손해처럼 느껴질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며 결국- 심령속에 커다란 축복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건강할 때, 열심히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실족한 이웃들을 찾아가서 위로하고, 넘어진 심령들을 붙잡아 세워주시기 바랍니다. 시간과 정성을 다해서, 주님이 기뻐하실만한 일을 찾아서 행동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자존심도 버리고, 주님을 따르기로 작정하는 삶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삶입니다.
또한,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난을 만나더라도 끝까지 인내하면서, 원망하기 보다는 감사하고, 불평하기 보다는 도리어 기뻐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영원한 생명과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는, 고난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고난을 통해서야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깨닫고, 고난을 통해서 믿고, 고난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자 베르나르(Bernard)는 가슴을 치며 탄식하기를, '나의 여호와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려 계시는데, 나는 어찌하여 여전히 쾌락만을 즐기고 있는가' 라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간직하고 느낀다고 자부하면서도, 매일처럼 반복되는 죄의 습성속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여전히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또 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어리석은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살기 위해서는 죽어야 합니다.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희생을 해야 합니다. 사랑을 위해서는 피를 홀려야 합니다. 죄 용서함을 받기 위해서는, 희생의 피가 필요합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도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를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를 위해 길이 참으신- 고난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속에서, 우리도 사랑과 희생을 실천하면서,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달게 지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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