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고난을 축복으로 바꾸는 비결
본문
축복의 월요일 아침입니다. 귀한 한주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오바댜 강해 두 번째 시간으로 고난을 축복으로 바꾸는 비결에 대해서 오바댜 1장 10절에서 14절의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과 함께 은혜의 시간을 나누겠습니다.
세상에서 귀한 것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감추어져 있습니다. 고귀한 것은 아무나 볼 수 있도록 내팽개쳐 있지 않습니다. 고귀하면 고귀할수록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사람, 남이 깨닫지 못하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 귀한 사람입니다. 누가 깊이 있는 사람입니까 감추인 것을 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이 땅에서 깊이 있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고자 마태복음13장 44절에서 이렇게 비유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어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샀느니라'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하는 인생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감추어진 보화를 소유하는 백성뿐만 아니라 그것을 누리고 활용할 줄 아는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감추인 보화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 담긴 의미를 발견하면 누구 못지않은 보화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5장에 보면 바로가 가장 큰 실수를 한 것 중의 하나가 고난의 유익을 무시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고난을 가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가 멈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고난의 겉만 보았지 고난속에 있는 파워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5장 19절을 보니까 심지어 이스라엘 자손도 이렇게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이 너희의 매일 만드는 벽돌을 하나도 감하지 못하리라함을
듣고 화가 몸에 미친 줄 알고'
고난이 재앙이라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점점 학대가 심해 지고 고난이 찾아오니까 이스라엘 민족마저 이 고난이 우리에게 화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결론적으로 한 번 얘기해 봅시다. 이스라엘 민족이 당한 고난이 그들에게 재앙이었습니까, 아니면 축복이었습니까결론은 축복이었습니다. 400년 동안 노예 생활하고, 400년 동안 종 노릇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고 가나안 땅의 자유민이 되고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그 출발점이 어디였습니까 처음에 고난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난은 감추어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얘기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예수 믿으면 고난이 없고 만사 형통할 것이라는 신앙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시험이 없는 평탄한 삶을 성도의 가장 이상적인 삶으로 이해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왜곡해도 가장 심각하게 왜곡한 것입니다. 성경은 평탄한 삶이 아니라 시험과 환난을 이기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이 축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징계를 받는 것이 심판이 아니라 최고의 심판은 여호와 하나님이 죄인을 그냥 내버려 두는 유기라고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주의 택한 성도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시험과 훈련을 통해서 정금같이 만드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광야 학교는 영적 용사를 길러 내는 훈련장이요, 성도를 정금으로 변화시키는 축복의 장소인 것입니다.
만사형통만을 부르짖는 저속한 신앙인이 아니라 어떠한 장애와 난관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뚫고 나아가 쟁취하는 강한 그리스도인으로 키우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목표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깊은 감사를 느낄 때가 언제입니까 바로 역경을 극복할 때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우리가 어려움을 당해 보고 그 깊은 어려움에서 벗어난 경험이있어야만 생겨나는 것입니다. 즉, 어려움의 위기를 극복한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감사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에돔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하는 것을 너무나 좋아하고 기뻐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라'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하는 것이 너무나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철천지 원수가 망하는 것처럼 입을 벌리고 기뻐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보면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했던 이 고난이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는 은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당한 모든 고난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는 은혜가 되는지 그리고 그 고난을 축복으로 바꾸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여호와 하나님은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을 더욱 생각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말고 기억해야 됩니다.
고난 중에 감추어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는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을 더욱 사랑한다는 이 사실, 여기에는 처음으로 발견될 수 있는 요소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자를 사랑하신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고난과 고통 가운데 있는 자를 더더욱 사랑하십니다. 출애굽기 4장 31절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보시고 그 고난을 감찰하셨도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고난 당하는 자를 감찰하셨다는 것이지요. 여호와 하나님은 고난 당하는 자를 보시고 고난 당하는 자를 주목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청취자 가운데 고난과 고통 가운데 계신 분이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지금 그 고난을 보고 계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알고 계십니다. 특별히 많은 자녀들이 있지만 그 부모님들은 그 자식 중에 병이 있고 나약한 자녀와 어려운 자녀에게 더 관심이 있고 애정이 큰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 건강한 아이와 장애아를 가진 부모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어머니는 장애아를 더 열심히 품고 다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많은 자녀 중에서도 아픔을 가진 아이에게 더 정이 가기 때문입니다. 그 어머니는 장애 아들이 드리는 아름다운 예배를 위해 교사를 하시기도 합니다. 부모의 마음이 이렇듯이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도 다르지 않습니다. 연약한 가운데 있고 어려움 가운데 있는 주님의 자녀들에게 몇 배의 관심과 애정을 쏟는다는 것입니다. 그대로 품는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철없는 어린 시절에 그랬지 않았습니까 나도 아팠으면 좋겠다. 내가 병상에 누워 있으면 누가 꽃다발 사 주고 통조림 따 주고 먹여 줄텐데 하며 그것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까 여자아이들이 보통 하고 노는 것이 그것 아닙니까 병상에 누워 있으면 꽃다발 가져다가 주면 고마워하며 캔디 같이 노는 것 이런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짜 그렇습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약함이 있을 때 사랑이 집중되고 관심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여러분이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여호와 하나님의 관심이 깊어 집니다. 여러분이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깊어집니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모든 문제는 문제로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이것을 나중에 깨달았기에 에돔의 그런 괴롭힘이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별명이 무엇입니까 “나는 과부의 남편이요, 고아의 아버지이시다”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깊은 체험이 있는 축복의 기회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를 며칠 전에 읽게 된 기사가 있었습니다. 강아지를 무척 좋아하는 한 아이가 있었는데 이 아이는 나름대로 강아지를 사기 위해 열심히 돈을 모았습니다. 강아지를 파는 애견 센터에 자주 들르면서 그 기대를 가지고 그는 매일매일 살아갑니다. 어느 정도 돈을 모아 애견 센터에 가서 강아지를 사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건강한 강아지가 많이 있는데 유독 이 아이는 구석에 있는 절름발이 강아지를 택한 것입니다. 그 주인 아저씨는 이상하다는 생각에 그 아이가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도 소아마비를 가진 아이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아이는 절름발이 강아지를 보면서 ‘저 강아지는 내가 사랑해야 할 강아지이다. 내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다. ’ 라는 생각을 하면서 강아지를 품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내가 아픔을 체험했기 때문에 고독하고 외로운 강아지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이 능력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랑이 깊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 하나를 배우기 위해서 아니, 아주 보잘것없는 것 하나를 배우려고 해도 얼마나 수많은 시간이 걸립니까 찬송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오래 걸립니다. 예배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도 오래 걸립니다. 하다못해 어떤 그리스도인은 십일조 하나를 배우는 데에만 십 년이 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녁 예배 한 번 나오는 데에도 20년 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별것 아닌 주변적인 것을 배우는 데에는 이렇게 오래 걸리는데 핵심중의 핵심인 사랑을 배우는데 얼마나 오래 걸리겠습니까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이 중요한 사랑을 깨우치기 위해서 쓰시는 최고의 원자탄 같은 폭로가 무엇입니까 아픔이라는 것입니다. 고난받고 아픔이 있는 사람이 사랑할 수 있는 그릇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사람의 특권을 보십시오. 성경이나 역사를 보십시오. 하나같이 아픔이 있고 고난 당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통과하고 그 사람이 어떻게 변화되었느냐 그릇이 커 진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다 품을 수 있는 넓은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가 됩니다. 이것이 고난이 주는 최고의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고난과 아픔을 통해서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연약하고 고난 중에 있던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 당하는 사람을 보면 동질감을 느낍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아픔을 당하셨던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배신당하셨습니다. 고초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가슴에 상처가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가슴을 보면 시퍼런 멍이 있었을 것입니다. 온갖 상처들, 인간 관계의 어려움, 제자들마저 다 떠날 때가 있었습니다. 가난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고통을 당하시고 주의 백성들에게, 특히 고난 당하는 자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명이 무엇입니까 아픔과 고난을 당한 백성을 품어 주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4절에 보니까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픔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명 감당하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말씀이 오랫동안 뿌리를 내린 나라를 가 보면 자기의 아픔이 사명이라는 것을 다 압니다.
저는 이번 주에 구제 사업을 하는 몇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면 어렸을 때 굉장히 가난해서 그 일을 감당한다 라고 말하는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장학 사업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분은 내 돈 가지고 공부를 못 해 보았습니다.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했기 때문에 그 아픔 당하는 사람을 돕기 위해서 장학사업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픔을 사명으로 여겼습니다.
제너럴 일렉트릭 회장 같은 분은 고아 출신입니다. 그 사람은 고아를 가장 많이 품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고아출신이기 때문에 고아들을 돌보는 것을 사명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배경을 가진 나라의 사람들은 내 이 아픔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품어 줘야지 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반면에 우리 나라는 어떻습니까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깨달아야 할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6. 25 이후에 전부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특별히 가난한 사람 중에 법관이 나오고 의사, 교수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미국에서 어렵게 정말로 어렵게 어렵게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다음에 지위가 생기고 돈이 생기면 자기가 어렸을 때처럼 아픈 사람을 품어 주고 사명을 감당해야 할 텐데 오히려 그런 사람을 더 멸시합니다. 과거의 자기의 모습을 본다고 해서 쳐다보는 것도 싫어합니다. 근처도 안 갑니다. 관계를 끊어 버립니다. 군림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천박한 인생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연약한 것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에돔이 그랬습니다. 여러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픔을 겪어 본 사람이 아픈 자를 품어 주지 않으면 에돔과 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 전체는 문제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품고 있었던 아픔을 가지고 사명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아픔을 가지고 배운 지식이 최고로 큰 것입니다.
고물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은 자동차 전문가가 됩니다. 왜 고물 자동차를 몰고 다니게 하십니까 고장 나면 고쳐 주라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얘기입니다. 그런 아픔을 가지고 남을 도울 수 있는 것, 제 자신은 나름대로 어려운 환경 가운데 살았기에 그런 아픔이 있는 사람을 상담할 때 눈물을 흘릴 정도로 상담을 해 줍니다. 그들의 아픔을 들을 때 위로자가 됩니다. 우리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이런 아픔을 통해 위로자가 되는 능력들을 체험하게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아픔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아픔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아픔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사명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둘째로 고난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을 강성하게 만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을 강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으면 평탄한 길이 생긴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옛날에 신경쓰지 않고 싸우지 않았던 문제들이 엄습해 오기 시작합니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현실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역설적인 진리는 우리에게 닥쳐오는 모든 고난들을 감수하고 극복할 때 더 강건해 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이기면 세상이 우리를 두려워합니다. 출애굽기 1장 12절에 보니까,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고 창성하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여'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 믿었더니 부자가 되고 출세했더라 이것이 아닙니다. 학대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 번식하는 것, 고난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강해지고 창성해 지는 것, 바로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무서워한다는 것입니다. 누르면 누를수록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서 있는 것, 그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두렵게 만드는 능력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핍박 중에서 믿음 지키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 찬송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니까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 갇혔을 때 가장 큰소리로 소리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교도관들이었습니까 그렇게 떵떵거리던 교도관들이 바울과 실라가 찬양함으로 옥문이 열리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제일 먼저 부들부들 떨고 바울과 실라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찬송할 때 떨게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48장 10절에 보니까,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여호와 하나님 백성들을 택하신 장소가 어디입니까 고난의 풀무 속에서 우리를 택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난 가운데 있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이 택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편안함이 축복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편안함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편안함을 포기해야 합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바로의 공주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 것을 거절하고 그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강건해 지는 것입니다. 문제가 하나도 없으면 행복할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가 하나도 없으면 오히려 죽습니다. 문제와 싸우는 중에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강건해지고 거물이 됩니다.
우리 생애 최고의 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2차 대전 중 헤롤드 러셀이라는 공수부대원이 전투에 나갔다가 포탄에 맞아 두 팔을 잃어버려 불구자가 됩니다. 그가 참혹한 좌절에 빠집니다. '나는 이제 쓸모없는 하나의 고깃덩어리가 되었구나' 그런 가운데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그에게 차츰 진리의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잃은 것보다 가진 것이 더 많다고 자각하게 됩니다. 의사가 그에게 의수를 만들어 주고 그것으로 글을 쓰고 타이프도 치기 시작합니다. 그의 이야기는 영화화되어 직접 불구자의 모습으로 출연하게 됩니다. 그는 정성을 다해 연기를 합니다. 그 해 그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주연상을 타게 되고 그 상금은 상이 용사를 위해서 전부 기부하게 됩니다. 어떤 기자가 찾아가 물었습니다. "당신의 신체적인 조건이 당신을 절망케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그는 결연히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나의 육체적인 장애는 나에게 도리어 가장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
여러분은 언제나 잃어버린 것을 계산할 것이 아니라 남아있는 것을 생각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며 남은 것을 사용할 때 잃은 것의 10배를 보상받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만 눈을 돌릴 때 그곳에는 오직 절망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불가능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잃은 것을 넘어 가진 것을 세어 보면 더 많은 가능성이 언제나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주의 백성들을 강건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고난이 오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기면 되지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고난보다 더 큰 힘을 주십니다. 이 힘을 가지고 극복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백성들에게 반드시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신나는 고난입니다. 이기는 고난입니다. 통쾌한 고난입니다. 감격스러운 고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를 이런 강한 자로 만드시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고난 속에서 더 강건해 지고 고난 속에서 더 눌리는 것이 아니라 밟고 일어서는 승리자의 모습이 되는 여호와 하나님의 종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고난은 여호와 하나님을 찾게 만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난 속에 감추어진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 처해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장 14절에 보니까,
'고난의 날에 그 남은 자를 대적에게 붙이지 않을 것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결국 고난 당하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가운데 모든 것이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이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재앙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기도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고, 기도를 잃어버린 사람에게 다시 되새기게 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고난은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을 만나면 위를 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위를 쳐다보라, 쳐다보라 해도 땅만 쳐다보는 인생들이 고난 당하면 그때부터 고개를 듭니다. 시편 121편 1절,2절에 보니까,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에서 올꼬'
누가 이 고백을 합니까 고난 당하는 사람이 이 고백을 합니다. 답이 무엇입니까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소이다'
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초월적인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니 내 문제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위를 쳐다보면 사는 길이 생깁니다.
인생이 때로는 사면초가 아닙니까 그러나 위를 쳐다보면 살아남습니다. 우리가 왜 기도합니까 우리가 기도하면 위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여호와 하나님과 같은 안목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취자 여러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 중에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기도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하는 것을. 고난 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기도하면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비행기를 타고 위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참으로 시시하지 않습니까 큰 건물이 하나의 점으로 보이고 넓은 땅이 몇 미리 되지 않게 보이지 않습니까 재물이 그렇습니다. 위에서 보면 그것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게 여겨집니다. '우리가 저런 것 가지고 아옹다옹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인생이 달라집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눈으로 변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최고의 유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의 영적 시력을 높여 준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보기는 본다고 하면서다 소경이었는데 고난 당하면 영적인 깊이를 보게 됩니다. 이제까지 안 보이던 것이 보입니다. 가치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가치있는 인생으로, 더 빨리 가는 인생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 고난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놀라운 가치를 발견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눈과 같이 고공 비행할 수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눈을 갖는 귀중한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말씀의결론을 맺겠습니다.
고난은 재앙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의 기회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원래 애굽에 내려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뭄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가뭄이 끝나면 되돌아와야 되지 않았습니까 애굽에 안주했습니다. 안주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신앙이 정체 가운데 있고 안주 가운데 있는 분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왜 고난을 주시는지 아시게 될 것입니다.
다시 옛날 땅으로, 축복의 땅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언제 성장했습니까 고난이 있을 때 성장했고 고난이 있을 때 전진했습니다. 성경과 역사를 보건대 예수 믿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해서 손해를 본 경우는 한 번도 없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고난을 통해서 손해를 본 경우가 없지요. 다 승리했지요. 고난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유익을 누릴 수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난이 올 때 위를 봅시다. 고난이 올 때 십자가를 붙드십시다. 고난이 올 때 물러서지 아니하고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고난 속에서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과 승리를 누리는 주의 종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 한 주간 어떤 고난이 있어도 그 고난의 유익을 생각하며 이기는 청취자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오늘은 오바댜 강해 두 번째 시간으로 고난을 축복으로 바꾸는 비결에 대해서 오바댜 1장 10절에서 14절의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과 함께 은혜의 시간을 나누겠습니다.
세상에서 귀한 것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감추어져 있습니다. 고귀한 것은 아무나 볼 수 있도록 내팽개쳐 있지 않습니다. 고귀하면 고귀할수록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사람, 남이 깨닫지 못하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 귀한 사람입니다. 누가 깊이 있는 사람입니까 감추인 것을 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이 땅에서 깊이 있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고자 마태복음13장 44절에서 이렇게 비유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어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샀느니라'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하는 인생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감추어진 보화를 소유하는 백성뿐만 아니라 그것을 누리고 활용할 줄 아는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감추인 보화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 담긴 의미를 발견하면 누구 못지않은 보화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5장에 보면 바로가 가장 큰 실수를 한 것 중의 하나가 고난의 유익을 무시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고난을 가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가 멈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고난의 겉만 보았지 고난속에 있는 파워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5장 19절을 보니까 심지어 이스라엘 자손도 이렇게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이 너희의 매일 만드는 벽돌을 하나도 감하지 못하리라함을
듣고 화가 몸에 미친 줄 알고'
고난이 재앙이라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점점 학대가 심해 지고 고난이 찾아오니까 이스라엘 민족마저 이 고난이 우리에게 화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결론적으로 한 번 얘기해 봅시다. 이스라엘 민족이 당한 고난이 그들에게 재앙이었습니까, 아니면 축복이었습니까결론은 축복이었습니다. 400년 동안 노예 생활하고, 400년 동안 종 노릇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고 가나안 땅의 자유민이 되고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그 출발점이 어디였습니까 처음에 고난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난은 감추어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얘기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예수 믿으면 고난이 없고 만사 형통할 것이라는 신앙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시험이 없는 평탄한 삶을 성도의 가장 이상적인 삶으로 이해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왜곡해도 가장 심각하게 왜곡한 것입니다. 성경은 평탄한 삶이 아니라 시험과 환난을 이기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이 축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징계를 받는 것이 심판이 아니라 최고의 심판은 여호와 하나님이 죄인을 그냥 내버려 두는 유기라고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주의 택한 성도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시험과 훈련을 통해서 정금같이 만드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광야 학교는 영적 용사를 길러 내는 훈련장이요, 성도를 정금으로 변화시키는 축복의 장소인 것입니다.
만사형통만을 부르짖는 저속한 신앙인이 아니라 어떠한 장애와 난관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뚫고 나아가 쟁취하는 강한 그리스도인으로 키우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목표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깊은 감사를 느낄 때가 언제입니까 바로 역경을 극복할 때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우리가 어려움을 당해 보고 그 깊은 어려움에서 벗어난 경험이있어야만 생겨나는 것입니다. 즉, 어려움의 위기를 극복한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감사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에돔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하는 것을 너무나 좋아하고 기뻐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라'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하는 것이 너무나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철천지 원수가 망하는 것처럼 입을 벌리고 기뻐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보면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했던 이 고난이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는 은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당한 모든 고난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는 은혜가 되는지 그리고 그 고난을 축복으로 바꾸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여호와 하나님은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을 더욱 생각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말고 기억해야 됩니다.
고난 중에 감추어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는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을 더욱 사랑한다는 이 사실, 여기에는 처음으로 발견될 수 있는 요소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자를 사랑하신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고난과 고통 가운데 있는 자를 더더욱 사랑하십니다. 출애굽기 4장 31절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보시고 그 고난을 감찰하셨도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고난 당하는 자를 감찰하셨다는 것이지요. 여호와 하나님은 고난 당하는 자를 보시고 고난 당하는 자를 주목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청취자 가운데 고난과 고통 가운데 계신 분이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지금 그 고난을 보고 계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알고 계십니다. 특별히 많은 자녀들이 있지만 그 부모님들은 그 자식 중에 병이 있고 나약한 자녀와 어려운 자녀에게 더 관심이 있고 애정이 큰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 건강한 아이와 장애아를 가진 부모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어머니는 장애아를 더 열심히 품고 다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많은 자녀 중에서도 아픔을 가진 아이에게 더 정이 가기 때문입니다. 그 어머니는 장애 아들이 드리는 아름다운 예배를 위해 교사를 하시기도 합니다. 부모의 마음이 이렇듯이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도 다르지 않습니다. 연약한 가운데 있고 어려움 가운데 있는 주님의 자녀들에게 몇 배의 관심과 애정을 쏟는다는 것입니다. 그대로 품는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철없는 어린 시절에 그랬지 않았습니까 나도 아팠으면 좋겠다. 내가 병상에 누워 있으면 누가 꽃다발 사 주고 통조림 따 주고 먹여 줄텐데 하며 그것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까 여자아이들이 보통 하고 노는 것이 그것 아닙니까 병상에 누워 있으면 꽃다발 가져다가 주면 고마워하며 캔디 같이 노는 것 이런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짜 그렇습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약함이 있을 때 사랑이 집중되고 관심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여러분이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여호와 하나님의 관심이 깊어 집니다. 여러분이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깊어집니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모든 문제는 문제로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이것을 나중에 깨달았기에 에돔의 그런 괴롭힘이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별명이 무엇입니까 “나는 과부의 남편이요, 고아의 아버지이시다”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깊은 체험이 있는 축복의 기회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를 며칠 전에 읽게 된 기사가 있었습니다. 강아지를 무척 좋아하는 한 아이가 있었는데 이 아이는 나름대로 강아지를 사기 위해 열심히 돈을 모았습니다. 강아지를 파는 애견 센터에 자주 들르면서 그 기대를 가지고 그는 매일매일 살아갑니다. 어느 정도 돈을 모아 애견 센터에 가서 강아지를 사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건강한 강아지가 많이 있는데 유독 이 아이는 구석에 있는 절름발이 강아지를 택한 것입니다. 그 주인 아저씨는 이상하다는 생각에 그 아이가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도 소아마비를 가진 아이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아이는 절름발이 강아지를 보면서 ‘저 강아지는 내가 사랑해야 할 강아지이다. 내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다. ’ 라는 생각을 하면서 강아지를 품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내가 아픔을 체험했기 때문에 고독하고 외로운 강아지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이 능력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랑이 깊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 하나를 배우기 위해서 아니, 아주 보잘것없는 것 하나를 배우려고 해도 얼마나 수많은 시간이 걸립니까 찬송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오래 걸립니다. 예배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도 오래 걸립니다. 하다못해 어떤 그리스도인은 십일조 하나를 배우는 데에만 십 년이 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녁 예배 한 번 나오는 데에도 20년 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별것 아닌 주변적인 것을 배우는 데에는 이렇게 오래 걸리는데 핵심중의 핵심인 사랑을 배우는데 얼마나 오래 걸리겠습니까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이 중요한 사랑을 깨우치기 위해서 쓰시는 최고의 원자탄 같은 폭로가 무엇입니까 아픔이라는 것입니다. 고난받고 아픔이 있는 사람이 사랑할 수 있는 그릇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사람의 특권을 보십시오. 성경이나 역사를 보십시오. 하나같이 아픔이 있고 고난 당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통과하고 그 사람이 어떻게 변화되었느냐 그릇이 커 진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다 품을 수 있는 넓은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가 됩니다. 이것이 고난이 주는 최고의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고난과 아픔을 통해서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연약하고 고난 중에 있던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 당하는 사람을 보면 동질감을 느낍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아픔을 당하셨던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배신당하셨습니다. 고초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가슴에 상처가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가슴을 보면 시퍼런 멍이 있었을 것입니다. 온갖 상처들, 인간 관계의 어려움, 제자들마저 다 떠날 때가 있었습니다. 가난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고통을 당하시고 주의 백성들에게, 특히 고난 당하는 자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명이 무엇입니까 아픔과 고난을 당한 백성을 품어 주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4절에 보니까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픔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명 감당하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말씀이 오랫동안 뿌리를 내린 나라를 가 보면 자기의 아픔이 사명이라는 것을 다 압니다.
저는 이번 주에 구제 사업을 하는 몇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면 어렸을 때 굉장히 가난해서 그 일을 감당한다 라고 말하는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장학 사업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분은 내 돈 가지고 공부를 못 해 보았습니다.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했기 때문에 그 아픔 당하는 사람을 돕기 위해서 장학사업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픔을 사명으로 여겼습니다.
제너럴 일렉트릭 회장 같은 분은 고아 출신입니다. 그 사람은 고아를 가장 많이 품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고아출신이기 때문에 고아들을 돌보는 것을 사명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배경을 가진 나라의 사람들은 내 이 아픔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품어 줘야지 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반면에 우리 나라는 어떻습니까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깨달아야 할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6. 25 이후에 전부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특별히 가난한 사람 중에 법관이 나오고 의사, 교수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미국에서 어렵게 정말로 어렵게 어렵게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다음에 지위가 생기고 돈이 생기면 자기가 어렸을 때처럼 아픈 사람을 품어 주고 사명을 감당해야 할 텐데 오히려 그런 사람을 더 멸시합니다. 과거의 자기의 모습을 본다고 해서 쳐다보는 것도 싫어합니다. 근처도 안 갑니다. 관계를 끊어 버립니다. 군림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천박한 인생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연약한 것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에돔이 그랬습니다. 여러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픔을 겪어 본 사람이 아픈 자를 품어 주지 않으면 에돔과 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 전체는 문제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품고 있었던 아픔을 가지고 사명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아픔을 가지고 배운 지식이 최고로 큰 것입니다.
고물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은 자동차 전문가가 됩니다. 왜 고물 자동차를 몰고 다니게 하십니까 고장 나면 고쳐 주라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얘기입니다. 그런 아픔을 가지고 남을 도울 수 있는 것, 제 자신은 나름대로 어려운 환경 가운데 살았기에 그런 아픔이 있는 사람을 상담할 때 눈물을 흘릴 정도로 상담을 해 줍니다. 그들의 아픔을 들을 때 위로자가 됩니다. 우리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이런 아픔을 통해 위로자가 되는 능력들을 체험하게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아픔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아픔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아픔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사명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둘째로 고난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을 강성하게 만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을 강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으면 평탄한 길이 생긴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옛날에 신경쓰지 않고 싸우지 않았던 문제들이 엄습해 오기 시작합니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현실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역설적인 진리는 우리에게 닥쳐오는 모든 고난들을 감수하고 극복할 때 더 강건해 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이기면 세상이 우리를 두려워합니다. 출애굽기 1장 12절에 보니까,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고 창성하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여'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 믿었더니 부자가 되고 출세했더라 이것이 아닙니다. 학대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 번식하는 것, 고난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강해지고 창성해 지는 것, 바로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무서워한다는 것입니다. 누르면 누를수록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서 있는 것, 그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두렵게 만드는 능력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핍박 중에서 믿음 지키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 찬송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니까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 갇혔을 때 가장 큰소리로 소리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교도관들이었습니까 그렇게 떵떵거리던 교도관들이 바울과 실라가 찬양함으로 옥문이 열리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제일 먼저 부들부들 떨고 바울과 실라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찬송할 때 떨게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48장 10절에 보니까,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여호와 하나님 백성들을 택하신 장소가 어디입니까 고난의 풀무 속에서 우리를 택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난 가운데 있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이 택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편안함이 축복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편안함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편안함을 포기해야 합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바로의 공주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 것을 거절하고 그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강건해 지는 것입니다. 문제가 하나도 없으면 행복할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가 하나도 없으면 오히려 죽습니다. 문제와 싸우는 중에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강건해지고 거물이 됩니다.
우리 생애 최고의 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2차 대전 중 헤롤드 러셀이라는 공수부대원이 전투에 나갔다가 포탄에 맞아 두 팔을 잃어버려 불구자가 됩니다. 그가 참혹한 좌절에 빠집니다. '나는 이제 쓸모없는 하나의 고깃덩어리가 되었구나' 그런 가운데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그에게 차츰 진리의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잃은 것보다 가진 것이 더 많다고 자각하게 됩니다. 의사가 그에게 의수를 만들어 주고 그것으로 글을 쓰고 타이프도 치기 시작합니다. 그의 이야기는 영화화되어 직접 불구자의 모습으로 출연하게 됩니다. 그는 정성을 다해 연기를 합니다. 그 해 그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주연상을 타게 되고 그 상금은 상이 용사를 위해서 전부 기부하게 됩니다. 어떤 기자가 찾아가 물었습니다. "당신의 신체적인 조건이 당신을 절망케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그는 결연히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나의 육체적인 장애는 나에게 도리어 가장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
여러분은 언제나 잃어버린 것을 계산할 것이 아니라 남아있는 것을 생각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며 남은 것을 사용할 때 잃은 것의 10배를 보상받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만 눈을 돌릴 때 그곳에는 오직 절망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불가능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잃은 것을 넘어 가진 것을 세어 보면 더 많은 가능성이 언제나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주의 백성들을 강건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고난이 오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기면 되지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고난보다 더 큰 힘을 주십니다. 이 힘을 가지고 극복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백성들에게 반드시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신나는 고난입니다. 이기는 고난입니다. 통쾌한 고난입니다. 감격스러운 고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를 이런 강한 자로 만드시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고난 속에서 더 강건해 지고 고난 속에서 더 눌리는 것이 아니라 밟고 일어서는 승리자의 모습이 되는 여호와 하나님의 종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고난은 여호와 하나님을 찾게 만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난 속에 감추어진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 처해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장 14절에 보니까,
'고난의 날에 그 남은 자를 대적에게 붙이지 않을 것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결국 고난 당하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가운데 모든 것이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이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재앙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기도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고, 기도를 잃어버린 사람에게 다시 되새기게 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고난은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을 만나면 위를 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위를 쳐다보라, 쳐다보라 해도 땅만 쳐다보는 인생들이 고난 당하면 그때부터 고개를 듭니다. 시편 121편 1절,2절에 보니까,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에서 올꼬'
누가 이 고백을 합니까 고난 당하는 사람이 이 고백을 합니다. 답이 무엇입니까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소이다'
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초월적인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니 내 문제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위를 쳐다보면 사는 길이 생깁니다.
인생이 때로는 사면초가 아닙니까 그러나 위를 쳐다보면 살아남습니다. 우리가 왜 기도합니까 우리가 기도하면 위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여호와 하나님과 같은 안목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취자 여러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 중에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기도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하는 것을. 고난 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기도하면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비행기를 타고 위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참으로 시시하지 않습니까 큰 건물이 하나의 점으로 보이고 넓은 땅이 몇 미리 되지 않게 보이지 않습니까 재물이 그렇습니다. 위에서 보면 그것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게 여겨집니다. '우리가 저런 것 가지고 아옹다옹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인생이 달라집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눈으로 변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최고의 유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의 영적 시력을 높여 준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보기는 본다고 하면서다 소경이었는데 고난 당하면 영적인 깊이를 보게 됩니다. 이제까지 안 보이던 것이 보입니다. 가치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가치있는 인생으로, 더 빨리 가는 인생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 고난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놀라운 가치를 발견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눈과 같이 고공 비행할 수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눈을 갖는 귀중한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말씀의결론을 맺겠습니다.
고난은 재앙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의 기회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원래 애굽에 내려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뭄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가뭄이 끝나면 되돌아와야 되지 않았습니까 애굽에 안주했습니다. 안주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신앙이 정체 가운데 있고 안주 가운데 있는 분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왜 고난을 주시는지 아시게 될 것입니다.
다시 옛날 땅으로, 축복의 땅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언제 성장했습니까 고난이 있을 때 성장했고 고난이 있을 때 전진했습니다. 성경과 역사를 보건대 예수 믿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해서 손해를 본 경우는 한 번도 없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고난을 통해서 손해를 본 경우가 없지요. 다 승리했지요. 고난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유익을 누릴 수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난이 올 때 위를 봅시다. 고난이 올 때 십자가를 붙드십시다. 고난이 올 때 물러서지 아니하고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고난 속에서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과 승리를 누리는 주의 종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 한 주간 어떤 고난이 있어도 그 고난의 유익을 생각하며 이기는 청취자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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