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고난에 대한 이해
본문
우리는 길지 않는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수많은 일들에 직면해 산다.
기쁨의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기도 하고 슬프고 견딜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 많은 일들의 대다수는 우리 자신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처럼 보인다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점은 일반 사람들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이 모든 일들이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임을 밝힌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으로 구성된 역사에 지극한 관심을 지니고 계신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역사 가운데서는 그냥 내버려 두시는가
나중에 보자 하시는가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이 일하시는 장이다.
혹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그러하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 공의를 끝날에 보자고 하시며 막연히 마지막에만 남겨두시는 것이 아니라, 역사 가운데 이미 실현시키심으로 사람들에게 의를 추구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에 비추어 보아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여호와 하나님의 무관심 속에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이 말은 ‘모든 일에 인과응보적 태도를 취하라’는 말이 아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어떤 나빠 보이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에, 이것은 내가 지난 번에 이러이러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벌 주시는 것이야라든지,
지난 번에 내가 이렇게 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이렇게 반대 급부로 이런 좋은 일을 주신 것이야 라고 판단하는 것은 성경이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자식이 다치는 것, 병이 드는 것, 회사가 어려움을 겪는 것,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것과 같은 재난 등에 대하여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온당한 태도가 아니다.
그러한 판단이 여호와 하나님의 크심에 대하여 얼마나 크게 오해하는 것이냐에 대하여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욥기의 내용이다.
행복이라 여겨지는 일 뒤에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늘 자리 잡고 있는 것만은 아닌 것처럼,
인간의 불행 뒤에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특히 오늘 요엘 본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때로 자기 백성의 회개를 위해 재난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밝힌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였지만, 메뚜기 떼로 언급되어지는 외부로부터의 극심한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이스라엘은 장로들과 시민들(1:2-4), 술취한 자들(1:5-7), 제사장들과 농부들 모두가 재난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다.
2:2 구름과 어두움이 임하는데 마치 전투시의 말과 같을 것이다
6: 그것들 앞에 창백해 질 것이다
8: 그것에 피하여 숨을 자가 없을 것임을 가르친다
그것들은 서로 밀치락달치락 하지 않는다. 각기 제 길로 가서 방어망을 뚫을 것이며 흐트려지지 아니할 것이다/고통이라는 것은 그러한 것이다
9: 도시와 벽 그리고 집들 창문으로 들어올 것이다
11: 그것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군사들이다(His army). 매우 두려운 것이 되어서 아무도 그것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재난에 직면한 요엘은 아모스 선지자와 같이 그것을 죄로부터 돌이키게 하고자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의 일환으로 해석하였다.
“내가 풍재와 깜부기 재앙으로 너희를 쳤으며 팟종이로 너희의 많은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를 다 먹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아모스 4:9)”
성경은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선택하신 백성들 가운데의 죄를 간과하실 수 없으신 분이심을 밝히신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그들의 죄악에 개의치 아니하시고 일방적인 사랑을 보내시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여호와 하나님은 죄로부터의 구별됨을 위해 민족을 선택하시고, 개인을 선택하신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토록 완전하였지만 범죄하였을 때에 즉시 나단 선지자를 들어 다윗의 죄를 물으시는 분이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메뚜기 재앙을 보내신 이유도, 만일 이 메뚜기 재앙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회개에 이르지 않는다면, 더 황폐케 하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의 절대적 심판이 있을 것을 경고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고난을 사용하시는 이유는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 죄를 묻지 않으면 그가 죄악에 빠져 영원히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난은 은총이다
만일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과의 약속에 있어 그 온당한 역할을 행사하기를 거절한다면, 여호와 하나님은 그 사랑을 폐기할 권리를 지니고 계시다,
그 권리를 행사할 것인가가 그분에게 달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은 그 약속을 폐기시키지 않으시려 하신다.
자기 백성에게 최종적 심판의 저주라는 본질에 미치지는 않지만 시약을 맛보게 하심으로 돌이키게 하신다.
이런 의미에서도 고난은 여호와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의 은총의 결과이다.
12: 죄된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 말씀의 핵심은 이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심지어 지금이라도” “모든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금식과 욺과 애곡함으로 돌아오라”
요엘은 만일 여호와 하나님을 높이는 애곡의 예배와 진실한 회개와 기도가 이루어진다면 그 포로기 이후의 유다를 위한 유예를 기대하였다(1:14, 2:16-17).
요엘은 그렇게 하였고, 과연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자애로운 반응이 전달되었다
그것은 메뚜기 재앙의 끝과, 약속되어진 농업적 축복들이었다(2:18-27).
더구나 여호와 하나님의 반응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요엘은 만일 돌아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회복을 주실 터인데 그 회복은 단지 역사상 어떤 특정한 나라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만으로 보지 않았다.
18: 만일 그렇게 하면 그의 땅에 대하여 열심하실 것이며, 그의 백성들에 대한 긍휼을 베푸실 것이다.
28: 이것 후에 내가 나의 영을 모든 백성에게 부어줄 것이다, 그리고 너희 아들들과 딸 들이 예언할 것이며, 너의 나이들 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너희 젊은 이들은 비젼을 보게 될 것이다
29:심지어 남녀 종들에게도 나는 나의 영을 그들에게 부어줄 것이다
32: 그리고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 사건이 있은 후, 전 우주적이고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결정적인 악에 대한 우주적 싸움이 있을 여호와의 날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교회를 대적하였던 악한 자가 받게될 심판으로 인해 두려운 날일 수 밖에 없는 그 주의 날이 회개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에게는 자비와 애정을 보이시는 날이 될 것임을 전망하였다.
여호와 하나님의 신원하심에 대한 약속
3:2: 그날에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운명을 회복시키신 후에
나는 모든 나라들을 모을 것이며, 그들을 여호사밧의 골짜기에 데리고 가서 그들을 심판할 것이다. 나의 백성들과 나의 유업인 이스라엘에 행한 것에 의해
14: 판결 골짜기에 사람이 수많이 수많이 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날이 판결의 골짜기에 가깝기 때문이다
16: 여호와께서 부르짖으시니 하늘과 땅이 떤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들의 피난처시오 요새이시다
17: 그 때에 너희는 내가 너희의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인줄 알리라
19: 무죄한 피를 흘리는 애굽과 애돔은 황무한 곳이 될 것이다
20: 그러나 유다는 영원히 거할 것이며 예루살렘은 모든 시대를 위해 영원할 것이다
21: 그리고 나는 내가 갚아 주지 않은 그들의 피를 갚아 줄 것이다.
과연 요엘 선지자의 예언대로 노인들과 젊은이들, 남자와 여자, 그리고 자유자와 종들 모두를 위해 기대되어졌던 사건이 오순절날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사도행전의 기록에서 보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그 다음의 예언의 시대인 ‘주의 날’을 대망하는 마지막 시점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우리는 인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혹 재난이라고 판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될 때에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해야 한다.
그 고난이 믿음 안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희생과 헌신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주신 가정을 사랑하며 내 곁에 두신 이들에게 대한 분명한 사랑의 태도를 취하고 있음에도 주신 것이라면, 여호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가 뒤따르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하겠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행하심이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것이다.
가령 요셉, 욥, 다니엘, 그의 세 친구, 느혜미야, 선지자들, 예수님 당신께서도 죄없으나 고난과 희생을 치루셨다.
고난에 직면한 이후 우리가 취해야 하는 또 다른 태도는 과연 이것이 나의 돌이킴을 위해서 온 것이냐를 묻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죄에 대하여 내게 깨닫게 하는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 그 목적을 위해 온 것이라 여길 수 있다.
친구의 담석 수술
고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때,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의 매를 더 많이 맞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두려운 일은 섭리적 재난의 성격이 아닌 심판의 성격으로의 재난에 직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진짜 심판은 그 돌이키게 하시고자 하시는 섭리적 재난과는 그 성격이 다른 돌이킬 수 없는 저주가 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고난이 회개를 위한 것이라 인식될 때에 여호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살풀이식의 충성이나 헌신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모든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13: 우리의 옷이 아닌 마음을 찢으리만큼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살았음을 애통해 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다”
기쁨의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기도 하고 슬프고 견딜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 많은 일들의 대다수는 우리 자신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처럼 보인다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점은 일반 사람들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이 모든 일들이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임을 밝힌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으로 구성된 역사에 지극한 관심을 지니고 계신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역사 가운데서는 그냥 내버려 두시는가
나중에 보자 하시는가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이 일하시는 장이다.
혹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그러하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 공의를 끝날에 보자고 하시며 막연히 마지막에만 남겨두시는 것이 아니라, 역사 가운데 이미 실현시키심으로 사람들에게 의를 추구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에 비추어 보아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여호와 하나님의 무관심 속에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이 말은 ‘모든 일에 인과응보적 태도를 취하라’는 말이 아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어떤 나빠 보이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에, 이것은 내가 지난 번에 이러이러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벌 주시는 것이야라든지,
지난 번에 내가 이렇게 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이렇게 반대 급부로 이런 좋은 일을 주신 것이야 라고 판단하는 것은 성경이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자식이 다치는 것, 병이 드는 것, 회사가 어려움을 겪는 것,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것과 같은 재난 등에 대하여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온당한 태도가 아니다.
그러한 판단이 여호와 하나님의 크심에 대하여 얼마나 크게 오해하는 것이냐에 대하여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욥기의 내용이다.
행복이라 여겨지는 일 뒤에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늘 자리 잡고 있는 것만은 아닌 것처럼,
인간의 불행 뒤에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특히 오늘 요엘 본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때로 자기 백성의 회개를 위해 재난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밝힌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였지만, 메뚜기 떼로 언급되어지는 외부로부터의 극심한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이스라엘은 장로들과 시민들(1:2-4), 술취한 자들(1:5-7), 제사장들과 농부들 모두가 재난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다.
2:2 구름과 어두움이 임하는데 마치 전투시의 말과 같을 것이다
6: 그것들 앞에 창백해 질 것이다
8: 그것에 피하여 숨을 자가 없을 것임을 가르친다
그것들은 서로 밀치락달치락 하지 않는다. 각기 제 길로 가서 방어망을 뚫을 것이며 흐트려지지 아니할 것이다/고통이라는 것은 그러한 것이다
9: 도시와 벽 그리고 집들 창문으로 들어올 것이다
11: 그것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군사들이다(His army). 매우 두려운 것이 되어서 아무도 그것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재난에 직면한 요엘은 아모스 선지자와 같이 그것을 죄로부터 돌이키게 하고자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의 일환으로 해석하였다.
“내가 풍재와 깜부기 재앙으로 너희를 쳤으며 팟종이로 너희의 많은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를 다 먹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아모스 4:9)”
성경은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선택하신 백성들 가운데의 죄를 간과하실 수 없으신 분이심을 밝히신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그들의 죄악에 개의치 아니하시고 일방적인 사랑을 보내시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여호와 하나님은 죄로부터의 구별됨을 위해 민족을 선택하시고, 개인을 선택하신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토록 완전하였지만 범죄하였을 때에 즉시 나단 선지자를 들어 다윗의 죄를 물으시는 분이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메뚜기 재앙을 보내신 이유도, 만일 이 메뚜기 재앙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회개에 이르지 않는다면, 더 황폐케 하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의 절대적 심판이 있을 것을 경고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고난을 사용하시는 이유는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 죄를 묻지 않으면 그가 죄악에 빠져 영원히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난은 은총이다
만일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과의 약속에 있어 그 온당한 역할을 행사하기를 거절한다면, 여호와 하나님은 그 사랑을 폐기할 권리를 지니고 계시다,
그 권리를 행사할 것인가가 그분에게 달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은 그 약속을 폐기시키지 않으시려 하신다.
자기 백성에게 최종적 심판의 저주라는 본질에 미치지는 않지만 시약을 맛보게 하심으로 돌이키게 하신다.
이런 의미에서도 고난은 여호와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의 은총의 결과이다.
12: 죄된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 말씀의 핵심은 이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심지어 지금이라도” “모든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금식과 욺과 애곡함으로 돌아오라”
요엘은 만일 여호와 하나님을 높이는 애곡의 예배와 진실한 회개와 기도가 이루어진다면 그 포로기 이후의 유다를 위한 유예를 기대하였다(1:14, 2:16-17).
요엘은 그렇게 하였고, 과연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자애로운 반응이 전달되었다
그것은 메뚜기 재앙의 끝과, 약속되어진 농업적 축복들이었다(2:18-27).
더구나 여호와 하나님의 반응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요엘은 만일 돌아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회복을 주실 터인데 그 회복은 단지 역사상 어떤 특정한 나라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만으로 보지 않았다.
18: 만일 그렇게 하면 그의 땅에 대하여 열심하실 것이며, 그의 백성들에 대한 긍휼을 베푸실 것이다.
28: 이것 후에 내가 나의 영을 모든 백성에게 부어줄 것이다, 그리고 너희 아들들과 딸 들이 예언할 것이며, 너의 나이들 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너희 젊은 이들은 비젼을 보게 될 것이다
29:심지어 남녀 종들에게도 나는 나의 영을 그들에게 부어줄 것이다
32: 그리고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 사건이 있은 후, 전 우주적이고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결정적인 악에 대한 우주적 싸움이 있을 여호와의 날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교회를 대적하였던 악한 자가 받게될 심판으로 인해 두려운 날일 수 밖에 없는 그 주의 날이 회개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에게는 자비와 애정을 보이시는 날이 될 것임을 전망하였다.
여호와 하나님의 신원하심에 대한 약속
3:2: 그날에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운명을 회복시키신 후에
나는 모든 나라들을 모을 것이며, 그들을 여호사밧의 골짜기에 데리고 가서 그들을 심판할 것이다. 나의 백성들과 나의 유업인 이스라엘에 행한 것에 의해
14: 판결 골짜기에 사람이 수많이 수많이 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날이 판결의 골짜기에 가깝기 때문이다
16: 여호와께서 부르짖으시니 하늘과 땅이 떤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들의 피난처시오 요새이시다
17: 그 때에 너희는 내가 너희의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인줄 알리라
19: 무죄한 피를 흘리는 애굽과 애돔은 황무한 곳이 될 것이다
20: 그러나 유다는 영원히 거할 것이며 예루살렘은 모든 시대를 위해 영원할 것이다
21: 그리고 나는 내가 갚아 주지 않은 그들의 피를 갚아 줄 것이다.
과연 요엘 선지자의 예언대로 노인들과 젊은이들, 남자와 여자, 그리고 자유자와 종들 모두를 위해 기대되어졌던 사건이 오순절날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사도행전의 기록에서 보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그 다음의 예언의 시대인 ‘주의 날’을 대망하는 마지막 시점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우리는 인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혹 재난이라고 판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될 때에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해야 한다.
그 고난이 믿음 안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희생과 헌신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주신 가정을 사랑하며 내 곁에 두신 이들에게 대한 분명한 사랑의 태도를 취하고 있음에도 주신 것이라면, 여호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가 뒤따르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하겠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행하심이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것이다.
가령 요셉, 욥, 다니엘, 그의 세 친구, 느혜미야, 선지자들, 예수님 당신께서도 죄없으나 고난과 희생을 치루셨다.
고난에 직면한 이후 우리가 취해야 하는 또 다른 태도는 과연 이것이 나의 돌이킴을 위해서 온 것이냐를 묻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죄에 대하여 내게 깨닫게 하는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 그 목적을 위해 온 것이라 여길 수 있다.
친구의 담석 수술
고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때,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의 매를 더 많이 맞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두려운 일은 섭리적 재난의 성격이 아닌 심판의 성격으로의 재난에 직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진짜 심판은 그 돌이키게 하시고자 하시는 섭리적 재난과는 그 성격이 다른 돌이킬 수 없는 저주가 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고난이 회개를 위한 것이라 인식될 때에 여호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살풀이식의 충성이나 헌신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모든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13: 우리의 옷이 아닌 마음을 찢으리만큼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살았음을 애통해 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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