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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고난속에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

본문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너희는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 말라기 1장 1~5절 말씀
인간관계(부부, 부모자식, 이웃)에서 사랑의 진실이 외면당하고 부정당하면 그 때 마음이 어떻겠는가 오늘 본문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그런 상황에 처해있다. 말라기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보면 예루살렘 성전을 다 건축하고 난 다음에 이제는 나태함 가운데 빠졌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2) 그러자 백성들은 “주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고요 무슨 소리입니까”하고 되물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 사랑을 부정하고 있다. 사랑받은 일이 없다고 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하셨다고 하시고, 백성들은 사랑 받은 일이 없다고 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에 70년간 바벨론의 포로로 있을 때 화려하고 영광스런 일들을 보고 경험했다. 이방나라 바벨론이 누리는 화려한 문명과 부유한 삶, 다른 나라를 지배하는 힘 등을 보았다. 그런데 포로에서 풀려나서 이스라엘에 돌아와 보니까 모든 상황이 바벨론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예루살렘 성은 황폐하였고, 기름진 문전옥답은 잡초에 묻혀있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했고, 너무나도 부족하고 불편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나라 바벨론은 저렇게 화려하고 풍요롭게 떵떵거리면서 사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하는 우리는 왜 이렇게 어렵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사랑하고 복 주셨다고 할 수 있습니까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해 주시지 않을 바에야 종살이를 하더라도 풍요한 바벨론에 그냥 두시지 왜 다시 황폐한 고국으로 끌어다가 이렇게 고생만 시키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시면서 70년 동안 이방인의 포로 생활은 왜 하게 하셨습니까 거기다가 해방되었다고 좋아하면서 막상 이렇게 돌아와 보니 모든 것은 다 무너지고, 땅은 못쓰게 되었고, 너무 가난하고 힘들어서 못살겠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사랑하셨다고요” 여호와 하나님!!! 이렇게 그들은 원망과 불평을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부정하고 있다. 현실의 어려움 때문에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 보니 고난 속에서도 역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과 손길을 보지 못한 것이다.
성도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무너졌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무엇인지 아는가 내 속에서 감사가 사라진 것이다. 믿음이 무너지면 감사의 자리에 원망과 불평이 자리 잡게 된다. 내 속에 감사의 마음이 사라지고, 내 입술에서 감사의 말이 사라졌을 때 “내 믿음이 무너졌구나. ”하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감사가 사라진 자는 벼랑 끝에 선 위기의 신앙인이다. 이스라엘의 위기는 가난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감사가 사라진 것에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다. ”고 하셨더니 “언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하고 불평과 불만을 토해낸다. 그들의 마음이 강퍅해지고 영적인 감각이 무디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이스라엘의 모습에 말라기 선지자는 마음에 큰 부담을 느낀다. 그것은 불신앙으로 죽어가는 영혼에 대한 부담이었다.
1절에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 여기 “경고”의 원뜻은 “짐” “부담”이라는 뜻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짐이요, 부담이라는 것이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불신앙 때문에 마음에 큰 부담을 느꼈다. 이는 선지자만이 느낄 수 있는 아픔이요, 부담이다. 민족을 사랑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깨달은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거룩한 부담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하시면서 우셨다. 왜 그랬는가 사랑하는 백성들의 절망적인 미래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현실을 보니 애가 타고, 간장이 녹을 만큼 속이 아팠던 것이다. 우리들에게도 이런 마음, 이런 거룩한 부담감이 있어야 한다. 민족의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말라기 선지자의 이 애타는 마음을/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도 가지기를 축원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당신의 뜻을 선포하는데 말라기를 사용하셨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 이렇다. 여호와 하나님은 오순절 성령강림 때와 같이 집단적으로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먼저 한 사람을 선택하셔서 그 마음에 성령으로 불을 질러 놓는다. 그러면 그 불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번져가고 그로인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사를 일으키신다. 불은 주로 한 사람의 가슴에서부터 시작된다. 불붙은 그 한 사람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본문의 이스라엘의 변화도 그와 같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의 가슴에 불을 붙이셨다. 민족을 향한 불붙은 마음을 가지고 나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고했을 때 이스라엘 전체가 다 회개하고 변화 받게 되었다. 저와 여러분의 가슴에 여호와 하나님의 불이 붙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한다. 불붙은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우리민족이 변화 받고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축원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다. ”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라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부정하는 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서 변증하셨다. 2,3절에 “나 여호와가........ ” 여호와 하나님은 에서와 야곱의 예를 들어서 여호와 하나님 사랑을 설명하셨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신 결과를 보라는 것이다. “야곱의 후손인 너희들에게는 여러 가지 시험도 있었고, 이방나라의 포로가 되는 극심한 아픔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살아남지 않았느냐 그러나 에서는 어떻게 되었느냐 혼자 열심히 산으로 들로 뛰어 다니며 잘 되는 것 같았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까 완전히 황폐하였다. ”는 것이다. 이는 순간의 모습을 볼 때는/ 여호와 하나님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산 에서가 더 번창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 같아 보였지만 인생(역사) 전체를 놓고 볼 때는 에서와 후손은 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꺼져가는 불꽃같았지만 여전히 나의 보호 가운데서 지금까지 살아있지 않느냐 내가 너희를 이렇게 사랑하지 않았느냐 에서의 후손은 다 망했지만 너희는 포로가 된 가운데서도 건재했고, 지금도 나의 보호를 받고 있지 않느냐 내가 너희를 사랑했는지 안했는지 이런 너희의 역사를 통해서 보라. ”는 것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어려운 형편만 보고 판단하지 말고 지금까지의 인생여정과 민족의 역사를 통해서 판단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핵심내용이다. 여호와 하나님 없는 백성은 순간적으로 볼 때는 우리 보다 앞서가는 것 같다. 번성하고 풍요롭게 사는 것 같다.
주일도 없이 쉬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고 일한다. 그 시간에 예배드리는 우리는 손해 보는 것 같고 뒤처지는 것 같고 어리석고 바보 같다. 지금 이 순간만을 놓고 볼 때는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인생전체와 역사를 두고 보면 여호와 하나님 없는 그들은 다 망하지만 성도들은 여전히 남아서 번성한다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느린 것 같고, 뒤처지는 것 같고, 바보 같지만 묵묵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고 가다보면 어느 샌가 앞서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신다. 이 사실을 믿고 순종하시기를 축원한다.
그렇다.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은 결국은 다 잘되게 되어 있다. 복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시기 때문이다.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는 분명하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와 불순종하는 자의 차이는 명백하다. 불신자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결국은 제자리만 돌다가 망하고 만다. 세상에서 떵떵거려도 결국 지옥가고 만다. 그게 실패한 인생이다. 그러나 신자는 뒤지는 것 같고 답답하고 바보스럽지만 결국은 전진하고 승리하고 끝까지 건재하다.
거기다가 천국까지 보장 받았다. 마찬가지로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전진하지만 불순종하고 제 뜻대로 살면 전진하는 것 같으나 제자리만 돌다가 망한다. 성도들에겐 현재의 어려움, 현재의 고난이 저주나 퇴보가 아니다. 우리를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의 한 방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복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의 과정임을 믿으시기 바란다. 그러므로 현재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거기에 연연하지 말라. 오히려 그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보고,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기적을 체험하는 복된 기회가 되시기를 축원한다.
우리 삶이 번창하고 승리하고 복 받는 비결이 무엇인가 여호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나의 인생을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에 맡기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여러분의 인생길을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에 맡기심으로 번창하고 승리하고 복 받는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께 언제 우리를 사랑하셨느냐고 반문하는 이유는 과거 바벨론에서 고통스럽게 포로 생활을 했던 것과 지금의 어려운 형편 때문이다. 사랑하셨다면 왜 그렇게 어려움을 당하게 하고, 지금 형편도 이방인들보다 훨씬 더 가난하게 살게 되었냐는 것이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왜 그토록 어려움을 겪고 있는가 그것은 그들의 범죄의 결과다. 여호와 하나님을 멀리한 죄의 대가다. 그들의 죄에 대하여 징계하신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왜 징계하는가 잘못했기 때문이다. 잘못은 했지만 사랑하기 때문이다.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가만히 두면 앞날이 뻔하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징계하는 부모의 마음이 더 아프지만 때로는 가혹하리만큼 아프게 매도 드는 것이다. 경험해 보셔서 잘 알지 않는가 그런데 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는 인정하지 않는가 왜 믿지 않는가 왜 불평하고 낙심하는가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 징계해야 성장하고 바로 서기 때문이다. 히12:6-8절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 ”고 하셨다.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당한 어려움은 그들을 바른 길로, 복된 길로 돌아오게 하려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였다. 그 징계는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래서 징계가 크고 아프면 사랑도 크다는 증거다.
열매를 기대하는 나무는 쓸데없는 가지를 잘라낸다. 그러나 들에 있는 엉겅퀴나 쓸모없는 나무는 그냥 버려둔다. 열매를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잡초로 보시지 않는다. 좋은 열매 맺는 귀한 나무로 보신다. 그래서 좋고 탐스런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아픔이 있지만 쓸데없는 가지를 잘라내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복 있는 인생, 가치 있는 인생, 사랑받는 인생이 되게 하기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다.
성도여러분! 우리에게도 잘라내야 할 쓸데없는 가지들이 많다. 정말 가치 있는 인생과 복 있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 쓸데없는 인생의 가지와 좋지 않은 습관의 가지를 잘라내자. 그래서 좋은 열매를 많이 맺는 복 있는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에서를 벌하시고 야곱을 사랑한다고 했더니 에서의 후손 에돔이 뭐라고 했는가 4절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 무슨 말인가 내 힘으로 살아보겠다. 내 힘으로 일으키겠다는 것이다. “自力自生” 이런 에돔 민족과 똑 같은 사람이 누구인가 자신만을 믿고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다.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의 삶의 자세가 바로 이 에돔의 자세와 같다.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 이 속에 바벨탑의 신조가 숨어있다.
인간의 교만이 숨어있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망하고 만다. 여호와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멀리하는 인생,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난 인생은 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들의 힘으로 다시 쌓겠다고 하자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너희는 목도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리라. ” 무슨 뜻인가 우리가 에돔과 마찬가지로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서 “내가 쌓겠다. ”해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헐어버리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를 결국 다 망하게 한다는 말이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교회든 국가든 제대로 서고 복 받으려면 여호와 하나님이 복 주셔야 되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손을 떠난 개인이나 단체는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결국은 망하고야 만다. 시127:1-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고 했다. 그러므로 늘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구하시기를 바란다. 그것만이 복 받는 길이요, 번성의 길이요, 행복의 길이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심을 믿으시기 바란다. 일상의 평안하고 어려운 모든 삶 가운데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고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란다. 그래서 여러분의 모든 삶의 형편 속에서/ 그것이 때로는 숨 막히는 아픔과 고난의 형편일지라도/ 그 속에 뜨겁게 흐르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면서/ 감격의 찬송을 올리면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다함께 찬양 “주님 손잡고 일어서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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