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의인이 당하는 고난 뒤
본문
어제(7월29일)는 우리교회의 역사에서 한 장을 새롭게 기록한 날입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가 할 최고의 일은 주님의 뜻을 전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일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선교라고 말합니다. 어제는 우리 교회가 선교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펼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공표한 자리입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어린이 도서관을 통해 동네 어린이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게 되고, 또 우리 교회가 지역 교회로서 면모를 일신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 일은 우리 교회를 새롭게 세워가는 큰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해갈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해 온 몸으로 참여하신 모든 교우들께 특히 여신도회원 여러분들께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위로하시며 기쁨을 내려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 말씀은 마가복음 6:14절 이하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과 관련되어 이야기들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긴 장마와 폭우로 인해 곳곳에서 고통당하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왜 하필이면 이런 고난이 우리에게 닥치는 것일까 하는 원망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특별히 어린 아이들이 희생당하는 것을 겪을 때 그 쓰라린 심정과 하늘을 원망하는 마음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하여 벌이는 잔인한 전쟁을 보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토록 무자비할 수 있느냐 하는 원망과 아울러 이런 불의가 용납되는 현실의 부조리함에 분통이 터지기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이런 슬프고 분통터질 일들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해가 뜨고 지는 현실이 더욱 화가 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런 슬픈 현실에 대해서 알고나 계실까, 우리의 기도를 듣기나 하실까 하는 의문도 들기도 합니다.
하박국 예언자는 의인이 고난을 당하고, 악인이 득세하는 슬픈 현실에 맞서 여호와 하나님과 소위 맞짱을 뜬 예언자입니다. 하박국이라는 말이 씨름꾼이라는 말이라고 하니까, 그가 불의가 득세하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과 얼마만큼 강하게 씨름하였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바꾹 예언자는 1:3-5에서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께 항의하고 있습니다.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고, "폭력이다!" 하고 외쳐도 구해 주지 않으시니, 주님,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어찌하여 나로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악을 그대로 보기만 하십니까 약탈과 폭력이 제 앞에서 벌어지고, 다툼과 시비가 그칠 사이가 없습니다.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합니다. 악인이 의인을 협박하니, 공의가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합1:3-5)”
하박국의 예언자의 항변을 들을 때면 우리의 원망을 그가 대언하고 있어서 시원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또 한편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박국예언자를 통해서 주시는 그 말씀이 우리에게 더 큰 시원함을 줍니다. 오늘 읽은 3-4절의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되어야 이루어진다. 끝이 곧 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공연한 말이 아니니, 비록 더디더라도 그 때를 기다려라. 반드시 오고야 만다. 늦어지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합2:3-4)”
이렇게 위로의 말씀을 주셨지만 현실은 변화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후에도 끊임없이 의인들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마가복음 말씀에서 보듯이 세례자 요한이 무참하게 죽임당하는 장면을 통해서도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부모들의 간절한 기도와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로 잉태되고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주님의 앞길을 평탄케하는 역할을 감당하며 시대의 예언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참하게 죽임당하고 말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 나라인 이스라엘 왕에 의해서 처형당하였습니다. 그는 동생의 아내에게 장가든 헤롯 왕을 꾸짖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고 높이 평가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헤로디아의 원한과 탐욕스럽고 무책임한 권력자의 허세 때문에 잔치 자리의 제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헤로디아의 딸이 어떤 춤을 췄는지는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매우 선정적인 춤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시대의 영웅이었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세례자 요한은 이처럼 잔치에서 구경거리가 되는 죽음을 맞았습니다. 헤롯의 생일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누구였겠습니까 21절에 보면 그들의 면면이 나와있습니다. 고관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요인들 참석하고 있습니다. 소위 권력의 자리에 오르는데 성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의 법을 지키라고 외쳤던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 목숨조차도 부지하지 못한 채 세상의 아들들 앞에서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의인의 고난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오늘 읽은 마가복음의 6:14 이하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과 관련된 말씀에서 어느 일이 먼저 있었습니까 16절 말씀을 보면 헤롯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서 과거에 자기가 죽였던 세례자 요한을 떠올린 것입니다. 왜 마가는 1:14절에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혔다고 말하고 나서 그의 죽음을 말하지 않고 있다가 마침내 예수님이 전국적인 스타가 된 뒤에서야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해 기록하고 있을까 하는 점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왜 그랬을까요 악의 세력이 득세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정의를 외치는 사람은 죽임당하는 이런 악한 현실에 대해 당시 사람들도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들의 한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 당시 민중들의 분노가 있고 한이 있습니다. 그들의 한이 예수님을 통해 분출하고 있습니다. 14절 말씀을 보면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니 헤롯 왕도 그 소문을 들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세례자 요한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그 때문에 그가 이런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바로 앞에 나와있는 내용, 즉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여 회개를 선포하고 귀신들을 내쫓고, 병자를 치유하는 일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즉 제자들이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한 것을 보고서 사람들은 예수는 누구인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세례자 요한을 떠올렸고, 의인의 고난과 의인의 죽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또 결코 끝날 수 없다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의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그 믿음이 예수님의 사역 활동에 힘을 더하여 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 3:26-33을 읽어봅시다. 특히 32-33절에서 “주님께서 우리를 근심하게 하셔도,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우리를 괴롭히거나 근심하게 하는 것은, 그분의 본심이 아니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욥기서를 통해서 배울 수 있듯이 우리가 겪는 고난의 원인에 대해서는 우리가 모두 알 수가 없습니다.
고난당하는 현실 때문에 당장의 고난만이 보이기 쉽습니다. 고난 너머에 새롭게 시작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를 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의인의 고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다른 이들을 통해 계승되어진다는 믿음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악인의 대표로 나오는 헤롯이 두려워하는 현실입니다.
독일의 한 교회 낡은 벽에 다음과 같은 시(詩)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너희는 날 ‘주’라 부르면서도 따르지 않고
너희는 날 ‘빛’이라 부르면서도 우러르지 않고
너희는 날 ‘길’이라 부르면서도 걷지 않고
너희는 날 ‘삶’이라 부르면서도 의지하지 않고
너희는 날 ‘슬기’라 부르면서도 배우지 않고
너희는 날 ‘깨끗하다’ 하면서도 사랑하지 않고
너희는 날 ‘부(富)하다’ 부르면서도 구하지 않고
너희는 날 ‘영원’이라 부르면서도 찾지 않고
너희는 날 ‘어질다’ 부르면서도 오지 않고
너희는 날 ‘존귀하다’ 하면서도 섬기지 않고
너희는 날 ‘강하다’ 하면서도 존경하지 않고
너희는 날 ‘의롭다’ 부르면서도 두려워 않느니
그런즉
너희들을 꾸짖어도 나를 탓하지 말라.
이 시는 우리가 주님을 이런 분이라고 말하면서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승리하실 것이라는 믿음,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넘어 부활한다는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세상의 악이 주님의 의를 박해하고 죽임에 처한다할지라도 결코 죽지않는다는 부활의 믿음이 없는 오늘의 신앙인들의 모습을 보게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의인의 고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문제는 의인의 고난,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지 않는 우리들의 삶이 문제이지요. 이 시에 나오는 것 처럼 “그런즉, 너희들을 꾸짖어도 나를 탓하지 말라. ”
우리 모두는 세상에서 나와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겠다고 선언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따르기로 했으면서도 여전히 세상 일에 더 염려하며 사는 삶에서 돌아서서 하늘의 일에 더 마음을 기울이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반드시 승리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안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을 원망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원망하기 보다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믿어 진정한 주님의 제자로 모두 살아가시기를 빕니다. 지금 세상에서 불의가 득세하는 부조리한 현실이 계속된다고 할지라도 의인의 고난과 죽음은 그것을 끝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의를 실천하며 담대하게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레바논에서 전쟁의 포화 속에서 죽임당하는 사람들에 대해 왜 여호와 하나님은 눈감고 계시느냐고 항변부터 하지 마십시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먼저 고통당하는 그들과 뜨겁게 연대하고, 천재지변 수해 속에서 눈물짓는 형제 자매들을 위해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를 통해서 주님의 의는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의인의 고난 너머로 새로운 희망을 주시고 있음을 늘 믿고 담대하게 살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 말씀은 마가복음 6:14절 이하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과 관련되어 이야기들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긴 장마와 폭우로 인해 곳곳에서 고통당하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왜 하필이면 이런 고난이 우리에게 닥치는 것일까 하는 원망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특별히 어린 아이들이 희생당하는 것을 겪을 때 그 쓰라린 심정과 하늘을 원망하는 마음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하여 벌이는 잔인한 전쟁을 보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토록 무자비할 수 있느냐 하는 원망과 아울러 이런 불의가 용납되는 현실의 부조리함에 분통이 터지기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이런 슬프고 분통터질 일들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해가 뜨고 지는 현실이 더욱 화가 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런 슬픈 현실에 대해서 알고나 계실까, 우리의 기도를 듣기나 하실까 하는 의문도 들기도 합니다.
하박국 예언자는 의인이 고난을 당하고, 악인이 득세하는 슬픈 현실에 맞서 여호와 하나님과 소위 맞짱을 뜬 예언자입니다. 하박국이라는 말이 씨름꾼이라는 말이라고 하니까, 그가 불의가 득세하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과 얼마만큼 강하게 씨름하였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바꾹 예언자는 1:3-5에서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께 항의하고 있습니다.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고, "폭력이다!" 하고 외쳐도 구해 주지 않으시니, 주님,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어찌하여 나로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악을 그대로 보기만 하십니까 약탈과 폭력이 제 앞에서 벌어지고, 다툼과 시비가 그칠 사이가 없습니다.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합니다. 악인이 의인을 협박하니, 공의가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합1:3-5)”
하박국의 예언자의 항변을 들을 때면 우리의 원망을 그가 대언하고 있어서 시원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또 한편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박국예언자를 통해서 주시는 그 말씀이 우리에게 더 큰 시원함을 줍니다. 오늘 읽은 3-4절의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되어야 이루어진다. 끝이 곧 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공연한 말이 아니니, 비록 더디더라도 그 때를 기다려라. 반드시 오고야 만다. 늦어지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합2:3-4)”
이렇게 위로의 말씀을 주셨지만 현실은 변화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후에도 끊임없이 의인들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마가복음 말씀에서 보듯이 세례자 요한이 무참하게 죽임당하는 장면을 통해서도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부모들의 간절한 기도와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로 잉태되고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주님의 앞길을 평탄케하는 역할을 감당하며 시대의 예언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참하게 죽임당하고 말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 나라인 이스라엘 왕에 의해서 처형당하였습니다. 그는 동생의 아내에게 장가든 헤롯 왕을 꾸짖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고 높이 평가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헤로디아의 원한과 탐욕스럽고 무책임한 권력자의 허세 때문에 잔치 자리의 제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헤로디아의 딸이 어떤 춤을 췄는지는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매우 선정적인 춤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시대의 영웅이었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세례자 요한은 이처럼 잔치에서 구경거리가 되는 죽음을 맞았습니다. 헤롯의 생일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누구였겠습니까 21절에 보면 그들의 면면이 나와있습니다. 고관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요인들 참석하고 있습니다. 소위 권력의 자리에 오르는데 성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의 법을 지키라고 외쳤던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 목숨조차도 부지하지 못한 채 세상의 아들들 앞에서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의인의 고난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오늘 읽은 마가복음의 6:14 이하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과 관련된 말씀에서 어느 일이 먼저 있었습니까 16절 말씀을 보면 헤롯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서 과거에 자기가 죽였던 세례자 요한을 떠올린 것입니다. 왜 마가는 1:14절에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혔다고 말하고 나서 그의 죽음을 말하지 않고 있다가 마침내 예수님이 전국적인 스타가 된 뒤에서야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해 기록하고 있을까 하는 점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왜 그랬을까요 악의 세력이 득세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정의를 외치는 사람은 죽임당하는 이런 악한 현실에 대해 당시 사람들도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들의 한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 당시 민중들의 분노가 있고 한이 있습니다. 그들의 한이 예수님을 통해 분출하고 있습니다. 14절 말씀을 보면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니 헤롯 왕도 그 소문을 들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세례자 요한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그 때문에 그가 이런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바로 앞에 나와있는 내용, 즉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여 회개를 선포하고 귀신들을 내쫓고, 병자를 치유하는 일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즉 제자들이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한 것을 보고서 사람들은 예수는 누구인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세례자 요한을 떠올렸고, 의인의 고난과 의인의 죽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또 결코 끝날 수 없다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의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그 믿음이 예수님의 사역 활동에 힘을 더하여 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 3:26-33을 읽어봅시다. 특히 32-33절에서 “주님께서 우리를 근심하게 하셔도,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우리를 괴롭히거나 근심하게 하는 것은, 그분의 본심이 아니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욥기서를 통해서 배울 수 있듯이 우리가 겪는 고난의 원인에 대해서는 우리가 모두 알 수가 없습니다.
고난당하는 현실 때문에 당장의 고난만이 보이기 쉽습니다. 고난 너머에 새롭게 시작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를 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의인의 고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다른 이들을 통해 계승되어진다는 믿음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악인의 대표로 나오는 헤롯이 두려워하는 현실입니다.
독일의 한 교회 낡은 벽에 다음과 같은 시(詩)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너희는 날 ‘주’라 부르면서도 따르지 않고
너희는 날 ‘빛’이라 부르면서도 우러르지 않고
너희는 날 ‘길’이라 부르면서도 걷지 않고
너희는 날 ‘삶’이라 부르면서도 의지하지 않고
너희는 날 ‘슬기’라 부르면서도 배우지 않고
너희는 날 ‘깨끗하다’ 하면서도 사랑하지 않고
너희는 날 ‘부(富)하다’ 부르면서도 구하지 않고
너희는 날 ‘영원’이라 부르면서도 찾지 않고
너희는 날 ‘어질다’ 부르면서도 오지 않고
너희는 날 ‘존귀하다’ 하면서도 섬기지 않고
너희는 날 ‘강하다’ 하면서도 존경하지 않고
너희는 날 ‘의롭다’ 부르면서도 두려워 않느니
그런즉
너희들을 꾸짖어도 나를 탓하지 말라.
이 시는 우리가 주님을 이런 분이라고 말하면서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승리하실 것이라는 믿음,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넘어 부활한다는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세상의 악이 주님의 의를 박해하고 죽임에 처한다할지라도 결코 죽지않는다는 부활의 믿음이 없는 오늘의 신앙인들의 모습을 보게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의인의 고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문제는 의인의 고난,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지 않는 우리들의 삶이 문제이지요. 이 시에 나오는 것 처럼 “그런즉, 너희들을 꾸짖어도 나를 탓하지 말라. ”
우리 모두는 세상에서 나와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겠다고 선언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따르기로 했으면서도 여전히 세상 일에 더 염려하며 사는 삶에서 돌아서서 하늘의 일에 더 마음을 기울이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반드시 승리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안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을 원망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원망하기 보다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믿어 진정한 주님의 제자로 모두 살아가시기를 빕니다. 지금 세상에서 불의가 득세하는 부조리한 현실이 계속된다고 할지라도 의인의 고난과 죽음은 그것을 끝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의를 실천하며 담대하게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레바논에서 전쟁의 포화 속에서 죽임당하는 사람들에 대해 왜 여호와 하나님은 눈감고 계시느냐고 항변부터 하지 마십시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먼저 고통당하는 그들과 뜨겁게 연대하고, 천재지변 수해 속에서 눈물짓는 형제 자매들을 위해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를 통해서 주님의 의는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의인의 고난 너머로 새로운 희망을 주시고 있음을 늘 믿고 담대하게 살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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