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고난 가운데를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
본문
성경을 읽다 보면 고난 받는 사람들의 얘기를 많이 만납니다. 우리가 가장 잘 기억하는 사람이 욥이지요. 나오미도 있고. 사실, 성경은 즐거운 이야기 보다는 대부분 고난 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박국처럼 고난에 대해 왜라고 여호와 하나님께 묻고 그것에 대하여 응답 받은 경우는 없는 것 같습니다. 하박국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유대의 후반기 폭군이었던 므낫세왕 때나 아니면 요시아왕 때 정도에 살았던 분으로 짐작이 됩니다. 그의 글은 특징이 한가지 있습니다. 아주 어둡게 시작해서 아주 밝게 끝납니다. 그리고 그렇게 반전시킨 이유가 글의 정 중간에 위치합니다.
과연 어떤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이 어둡고 고통스러웠던 그를 기쁨으로 바뀌게 했을까요. 우리는 오늘 이 하박국서를 통해서 고난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간단하게 하박국서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잠깐 보고 지나가겠습니다. 1장 2절에서 4절까지 하박국이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호소의 기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왜 불의가 용납되고 그로 인하여 의인이 고난을 받습니까 그의 질문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답을 주시는데 그것이 1장 5절에서 11절까지 나옵니다. 내가 바빌로니아를 일으켜 너희 나라를 벌하겠다는 내용입니다. 그러자 하박국이 다시 기도 합니다. 1장 12절부터 17절이지요. 어 여호와 하나님 바빌로니아는 더 나쁜 사람들인데 어떻게 조금 나쁜 사람들을 벌하기 위해 더 나쁜 사람들을 사용하십니까 그러자, 그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이 다시 2장 2절부터 20절까지 나옵니다. 마지막 3장은 응답하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하박국이 드리는 찬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 먼저 우리는 하박국이 기도하는 자세를 좀 주목해서 보기 원합니다. 즉, 고난 속에서 어떻게 기도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기도를 배울 수 있겠습니다.
첫번째 하박국의 기도에서 볼 수 있는 그의 기도의 자세는 의에 대한 목마름이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I. 고난 중에 있는 성도의 기도
- 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어야 한다
2절부터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도 …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 자, 이 기도문에서 무엇이 느껴 지시나요 혹시 그의 불만과 Complaint 이 느껴 지십니까 왜 의인인 내가 이렇게 고생하고 살아야 하는가요 하는 그런 불만과 불평이 느껴지십니까 사실 많은 주석 성경들이 이 부분에 소제목을 달기를 '하박국의 불평'이라고 달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조금만 주의 깊게 읽어보면 그의 마음은 불평으로 차 있는 것이 아니고 아픔으로 차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악한 세상을 바라보고 망가져 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아픔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의 의에 대한 목마름으로 기도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보통 내가 답답해서 기도합니다. 관심이 나한테만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제 문제 좀 해결해 주세요. 여호와 하나님 저를 괴롭히는 저 아이 좀 어떻게 해 주세요. 하박국의 기도와 큰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하박국이 살던 사회의 분위기는, 짐작하기에 뭔가 질서와 정의가 없고 혼란했던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하박국은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박국은 악인들 앞에서 내가 당하는 고난을 호소하는 것 보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와 영광이 땅에 떨어짐을 가슴아파 합니다. 큰 시각 차이가 있지요
우리의 기도도 이렇게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눈앞에 있는 사실보다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Focus를 맞추는 그런 기도를 얘기하는 거지요. 예를 들면, 나를 늘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때 만약 내가 당하는 고난을 호소한다면 "여호와 하나님 제 좀 저하고 안 만나게 해주세요. " 아니면 "제 좀 바뀌게 해주세요. " 하겠지요.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한다면 좀 다르게 기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사람 안에 계신 성령께서 가슴 아파 하심이 느껴진다든지. 아니면 그 사람에게 보이는 불의가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그럴 때 그 사람에 대한 사랑도 생기겠지요. "이 사람을 바뀌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해서는 미움만 더해갈 뿐입니다. 늘 이렇게 나보다는, 내 문제보다는 여호와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그의 기도의 자세는 의문 이전에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의문 이전에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
2장 1절에 나와 있는 하박국의 기도입니다. "내가 초소위에 … 대답하실지 기다려 보겠다. " 이 기도도 그 뉘앙스를 깊이 느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위의 1장 12절에서 17절까지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 그가 이해가 안 되는 점을 아룁니다. 어째서 의인이 고난을 받으며, 어째서 악인으로 의인을 벌하십니까 그런 의문을 가지지만, 이어지는 그의 기도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의심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여기서 초소 위에 올라간다는 것은 예언자로서의 소명에 따라 그 자리를 지키고 서서 주님의 응답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믿음의 표현으로 이해가 됩니다.
우리는 늘 살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세상이 이렇게 악해" 하는 조소의 말들을 가끔 듣습니다. 그런데 하박국도 똑같은 의문을 가집니다. 그렇지만 그의 기도는 그런 의심의 기도가 아니라 확신의 기도입니다. 어떤 말씀을 하실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주님은 답을 가지고 계시고 그것이 내 인생의 해답일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하는 마음과 의에 대한 목마름으로 기도할 때 응답하신다는 확신의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에 대하여 야고보는 야고보서 1장 5-8절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 안정이 없습니다. "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지내고 나서 생각하면 기가 막히게 기도의 응답을 받고 살면서도 급한 순간이 오면 여지 없이 나의 머리를 동원합니다. 참 이상하지요. 그런데 그게 이상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오랫동안 그렇게 길들여져 와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오랫동안 집중적으로 받은 교육 중에 하나가 "스스로도 잘해요" 하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으로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성령님께 순종하고 사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내가 그런 성향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작은 문제든, 큰 문제든 여호와 하나님께 아뢰고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그런 기도 생활을 하시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하박국은 고난의 이유에 대해서 두 차례 여호와 하나님께 질문을 했는데, 그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서 고난을 바라 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시각을 살펴 보겠습니다.
첫번째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고난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2. 고난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
- 고난은 나 혼자 겪는 것은 아니다
다시 1장으로 돌아 가서 1장 5절을 보겠습니다. 왜 불의가 판을 치느냐는 하박국의 호소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너희는 민족들을 눈 여겨 보아라. … 차지할 것이다. " 아까 하박국이 의에 대한 목마름과 고통 속에서 기도하고 있다고 했지요. 그런데 그의 기도 속에서 또 한가지를 볼 수가 있는데 그것은 외로움입니다. 내가 혼자서만 이 고통의 길을 걷고 있다는 외로움을 볼 수 가 있습니다. 3절입니다. 어찌하여 나로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나를 얘기하지요 왜 나만 이런 고통을 겪습니까 다른 사람은 아무도 이런 상황을 가슴아파 하지 않고 있습니다. 모두 다 삐뚤어져 가고 있습니다. 저만 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답은 "너는…" 이 아니고 "너희는 …" 하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즉, 복수로 답하고 있습니다. 너는 너 혼자 그 질문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너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많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예를 엘리야의 이야기에서도 발견합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의 예언자들과 대결을 하여 이기는 이야기는 다들 아시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때는 가뭄이 3년 이상 지속된 때였는데 그가 또 기도하니까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야 이제는 정말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 나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는 곧 왕비 이세벨에게 쫓기어 광야로 도망칩니다. 광야에서 몇 일을 굶고 난 후에 그는 그냥 죽기를 희망합니다. 주님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때 주님이 찾아 오십니다. 열왕기상 19:14절입니다.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나는 이제까지 … 찾고 있습니다. " 이때 주님은 두 가지를 말씀 하십니다. 한가지는 그래도 여호와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해 가신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한가지는 19:18절 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에 칠천 명을 남겨 놓을 터인데, 그들은 모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아니하고, 입을 맞추지도 아니한 사람이다. " 엘리야는 나만 남았다고 했는데 여호와 하나님은 아니다 너 말고도 칠천 명이 더 남아 있다라고 하시지요.
우리는 때로 힘든 일을 당할 때 나 혼자다라고 생각하기 쉽고 그래서 외로워 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 주변을 돌아 보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같은 고통을 겪고 있고, 때론 더 큰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나보다 더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나의 고통은 고통도 아니다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람은 언제나 그것이 무엇이던 간에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이 가장 힘든 것이죠. 그것은 우리가 다들 경험해 본 일입니다.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사실은 나 만이 아니라 세월이 가고 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늘 같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왔다는 사실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돌아 볼 때 아무도 그 고난 때문에 망한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들은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들은 결국에는 다 이겨내고 아름답게 승화시켰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위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 안에서 그런 고통을 묵묵히 참아낸 사람들이 만들어 온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1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기드온, … 구태여 놓여 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 여기에 이름이 올라 있는 사람들 말고도 수 많은 사람들이 바다의 모래만큼 수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고통을 묵묵히 참아냈으며 그들은 다 지금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서 별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내가 겪는 크고 작은 어려움이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고통 속에서도 묵묵히 인내할 수 있는 그런 저와 여러분 되기를 소원합니다.
고난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 두 번째는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하는 것입니다.
-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1장 하반부의 하박국의 기도. 즉, 왜 악인을 사용하여 우리를 벌하십니까 하는 의문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은 2장의 대부분을 할애하여 답을 하시는데, 다섯번에 걸쳐서 망한다라고 하면서 결국은 그 악인도 망한다는 것을 얘기하십니다. 6절 "그들이 너를 보고 … 할 것이다. " 9절 "그들이 너를 보고 … 할 것이다. " 망한다, 망한다. 지금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악인도 여호와 하나님께 다른 악인을 심판하기 위해서 사용될 수 있지만 자기의 악함으로 결국은 자기도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얘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즉 죄는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죠. 그러면서 20절에 이렇게 말을 끝내시지요. "나 주가 거룩한 성전에 있다. 온 땅은 내 앞에서 잠잠하여라. " 무슨 말입니까 내가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왜 이렇습니까 왜 의인이 고통을 당합니까 하고 떠들지 않아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어려움과 고난을 알고 계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악인을 알고 계시고, 여호와 하나님은 의인을 알고 계시며 그 가운데서 심판하시고 구원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때로 왜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면 세상에 악이 판을 치는가 하는 질문을 합니다. 물론 여러 가지의 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구원과 심판의 개인성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무슨 소린가 하면 지금 이순간 생각하면 세상은 악하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왜 악을 벌하지 않으시는가 하고 생각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지금껏 수없이 많은 악인들을 벌하여 오셨고 그 와중에 의인을 구해 오셨습니다. 금방 생각해도 알 수 있지요 우리나라가 일본에서 해방된 것처럼 나라도 그랬구요. 악한 정권은 오래 가지 못하고 망했고, 거짓은 들어 나기 마련이었고, 악한 기업은 무너졌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선한 사람은 구원을 받았고 무엇보다도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을 받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역사 속에서 Active 하게 Involve 하고 계시면서 구원하시고 심판하는 여호와 하나님인데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이 아무것도 안하고 계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단에게 속고 있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오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들의 사정을 여호와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아파할 때 같이 아파하시고, 안타까워 하시겠지만 우리가 이겨낼 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돕기 위해서 뒤에서 기도로 후원하고 계십니다. 그 주님을 생각하며 고난 중에서도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고난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 세 번째는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고난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것은 고난이 아니다
2장 1절의 하박국의 대담한 호소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2절에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주께서 나에게 대답 … 읽을 수 있게 하여라. " 여호와 하나님은 여기서 이 말씀을 판에 새기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판에 새기라 한 것은 아마도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 외에는 없었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판에 새기란 말은 그 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도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세 손손 변하지 않는 진리라는 의미도 됩니다. 사람들은 가고 오고 가고 오고 수없이 많은 세월이 흐를 것이지만 그들은 늘 너와 같은 의문을 가질 것이고 이것이 그 의문점에 대한 해답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은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에 살았던 하박국에게만 주어 진 것이 아니고,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판에 새기라고 하신 말씀은 4절 말씀입니다. "마음이 한껏 부푼 … 믿음으로 산다. " 아마도 이 구절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 중에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 구절은 하박국서의 핵심 구절인 동시에 구약과 신약을 이어 주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이 나중에 바울 사도에게 영감을 주어서 로마서의결론 부분인 로마서 1:16-17절을 이렇게 쓰게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 한 것과 같습니다. " 이 글은 로마서의결론인 동시에 신약전체에결론이기도 합니다.
다시 한번 읽어 보지요. "마음이 한껏 부푼 … 믿음으로 산다. " 조금 이해가 안 되지요 왜 그런가 하면 정직이라는 해석 때문입니다. 이것을 쉽게 해석하면 이렇게 됩니다.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바로 서지 못한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 조금 이해가 쉽죠. 조금 더 쉽게 해석하면,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살지 못한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 즉,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사람을 망하게 하는 것은 죄이지 고난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사람은 죄 때문에 죽지, 고난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하박국은 포악한 바빌로니아의 침략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누가 포로로 잡혀 갈지 누가 죽음을 당할지 알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3장 16절에 재난을 앞둔 그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나의 창자가 뒤틀린다. … 다리가 후들 거린다. " 이런 말할 수 없는 근심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은 전쟁도, 병도, 가난도 너를 죽이지 못한다. 그러므로 믿음 위에 선 의인은 영원히 살 것이다라는 응답이었습니다.
믿음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아들이 있으리라 하신 말씀을 믿었던 것처럼,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언젠가 구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그 믿음을 지켜 나갈 때 그것이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베드로 전서 1장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 존귀를 얻게 해 주십니다. " 그는 지금 우리가 겪는 시련은 잠시 겪는 시련이라고 얘기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안에 영원한 안식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겠지요. 결국 여호와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 우리를 단련시키고 우리를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데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고난 중에 계시는 분 많이 계시지요 하지만 내가 혼자 겪고 있는 고난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또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알고 계시며 우리와 같이 아파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셔서, 이제껏 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그랬던 것처럼 믿음 안에서 굳건히 이기어 나가시는 그런 여러분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결론
이제까지 고난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을 응답을 듣고 하박국은 3장 전체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는 17-19절에서 영원히 남을 만한 찬양을 합니다. "무화과나무에 … 하신다. " 참 아름다운 구절입니다. 이 구절들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자유로움입니다. 사슴처럼 산등성이를 치닫는 자유로움.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결론은 여호와 하나님 안에 우리의 참된 자유가 있다 하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닥쳐올 시련을 생각하면 창자가 뒤틀리고, 입술이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리고, 뼈가 속으로부터 썩어 들어가는 고통을 맛봅니다. 상황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적들은 여전히 쳐들어 올 것이고 환란은 닥쳐 오지만, 결국에는 환란 후에 올 구원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야! 아무리 그렇지만, 어떻게 그 고통을 이겨내고 기쁨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을까 우리는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우선은 하박국 전체에 흐르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능력 있으시고, 그 모든 행사가 선하시다는 확신입니다. 즉 결과가 어떻든지 간에 나를 통하여 그분의 선함이 들어 날 것이다 하는 확신입니다. 두 번째는 1장 12절에서 엿볼 수 있는 부활에 대한 확신입니다. 결국은 나를 살리실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3장 18절에 있는 구원에 대한 감격입니다. 죄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그 감격이 위기 앞에서도 사슴처럼 산등성이를 치닫는 자유를 맛보게 하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결국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열조들과 함께 땅에 묻혔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하박국이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그의 믿음은 살아서 초대 교회의 많은 사도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그 핍박의 시대를 이기게 하였고, 지금도 살아서 우리의 믿음에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이 느껴 지시지 않습니까 얼마 전 우리 교회의 한 집사님이 돌아 가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믿음은 나눔터에 간간히 오르는 글 속에 살아있고, 그 분을 얘기하는 사람들의 대화 속에 살아 있고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 계십니다. 믿음을 지킨 그리스도인들은 죽지만 죽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떤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이 어둡고 고통스러웠던 그를 기쁨으로 바뀌게 했을까요. 우리는 오늘 이 하박국서를 통해서 고난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간단하게 하박국서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잠깐 보고 지나가겠습니다. 1장 2절에서 4절까지 하박국이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호소의 기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왜 불의가 용납되고 그로 인하여 의인이 고난을 받습니까 그의 질문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답을 주시는데 그것이 1장 5절에서 11절까지 나옵니다. 내가 바빌로니아를 일으켜 너희 나라를 벌하겠다는 내용입니다. 그러자 하박국이 다시 기도 합니다. 1장 12절부터 17절이지요. 어 여호와 하나님 바빌로니아는 더 나쁜 사람들인데 어떻게 조금 나쁜 사람들을 벌하기 위해 더 나쁜 사람들을 사용하십니까 그러자, 그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이 다시 2장 2절부터 20절까지 나옵니다. 마지막 3장은 응답하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하박국이 드리는 찬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 먼저 우리는 하박국이 기도하는 자세를 좀 주목해서 보기 원합니다. 즉, 고난 속에서 어떻게 기도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기도를 배울 수 있겠습니다.
첫번째 하박국의 기도에서 볼 수 있는 그의 기도의 자세는 의에 대한 목마름이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I. 고난 중에 있는 성도의 기도
- 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어야 한다
2절부터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도 …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 자, 이 기도문에서 무엇이 느껴 지시나요 혹시 그의 불만과 Complaint 이 느껴 지십니까 왜 의인인 내가 이렇게 고생하고 살아야 하는가요 하는 그런 불만과 불평이 느껴지십니까 사실 많은 주석 성경들이 이 부분에 소제목을 달기를 '하박국의 불평'이라고 달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조금만 주의 깊게 읽어보면 그의 마음은 불평으로 차 있는 것이 아니고 아픔으로 차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악한 세상을 바라보고 망가져 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아픔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의 의에 대한 목마름으로 기도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보통 내가 답답해서 기도합니다. 관심이 나한테만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제 문제 좀 해결해 주세요. 여호와 하나님 저를 괴롭히는 저 아이 좀 어떻게 해 주세요. 하박국의 기도와 큰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하박국이 살던 사회의 분위기는, 짐작하기에 뭔가 질서와 정의가 없고 혼란했던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하박국은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박국은 악인들 앞에서 내가 당하는 고난을 호소하는 것 보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와 영광이 땅에 떨어짐을 가슴아파 합니다. 큰 시각 차이가 있지요
우리의 기도도 이렇게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눈앞에 있는 사실보다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Focus를 맞추는 그런 기도를 얘기하는 거지요. 예를 들면, 나를 늘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때 만약 내가 당하는 고난을 호소한다면 "여호와 하나님 제 좀 저하고 안 만나게 해주세요. " 아니면 "제 좀 바뀌게 해주세요. " 하겠지요.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한다면 좀 다르게 기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사람 안에 계신 성령께서 가슴 아파 하심이 느껴진다든지. 아니면 그 사람에게 보이는 불의가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그럴 때 그 사람에 대한 사랑도 생기겠지요. "이 사람을 바뀌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해서는 미움만 더해갈 뿐입니다. 늘 이렇게 나보다는, 내 문제보다는 여호와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그의 기도의 자세는 의문 이전에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의문 이전에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
2장 1절에 나와 있는 하박국의 기도입니다. "내가 초소위에 … 대답하실지 기다려 보겠다. " 이 기도도 그 뉘앙스를 깊이 느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위의 1장 12절에서 17절까지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 그가 이해가 안 되는 점을 아룁니다. 어째서 의인이 고난을 받으며, 어째서 악인으로 의인을 벌하십니까 그런 의문을 가지지만, 이어지는 그의 기도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의심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여기서 초소 위에 올라간다는 것은 예언자로서의 소명에 따라 그 자리를 지키고 서서 주님의 응답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믿음의 표현으로 이해가 됩니다.
우리는 늘 살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세상이 이렇게 악해" 하는 조소의 말들을 가끔 듣습니다. 그런데 하박국도 똑같은 의문을 가집니다. 그렇지만 그의 기도는 그런 의심의 기도가 아니라 확신의 기도입니다. 어떤 말씀을 하실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주님은 답을 가지고 계시고 그것이 내 인생의 해답일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하는 마음과 의에 대한 목마름으로 기도할 때 응답하신다는 확신의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에 대하여 야고보는 야고보서 1장 5-8절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 안정이 없습니다. "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지내고 나서 생각하면 기가 막히게 기도의 응답을 받고 살면서도 급한 순간이 오면 여지 없이 나의 머리를 동원합니다. 참 이상하지요. 그런데 그게 이상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오랫동안 그렇게 길들여져 와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오랫동안 집중적으로 받은 교육 중에 하나가 "스스로도 잘해요" 하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으로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성령님께 순종하고 사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내가 그런 성향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작은 문제든, 큰 문제든 여호와 하나님께 아뢰고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그런 기도 생활을 하시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하박국은 고난의 이유에 대해서 두 차례 여호와 하나님께 질문을 했는데, 그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서 고난을 바라 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시각을 살펴 보겠습니다.
첫번째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고난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2. 고난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
- 고난은 나 혼자 겪는 것은 아니다
다시 1장으로 돌아 가서 1장 5절을 보겠습니다. 왜 불의가 판을 치느냐는 하박국의 호소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너희는 민족들을 눈 여겨 보아라. … 차지할 것이다. " 아까 하박국이 의에 대한 목마름과 고통 속에서 기도하고 있다고 했지요. 그런데 그의 기도 속에서 또 한가지를 볼 수가 있는데 그것은 외로움입니다. 내가 혼자서만 이 고통의 길을 걷고 있다는 외로움을 볼 수 가 있습니다. 3절입니다. 어찌하여 나로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나를 얘기하지요 왜 나만 이런 고통을 겪습니까 다른 사람은 아무도 이런 상황을 가슴아파 하지 않고 있습니다. 모두 다 삐뚤어져 가고 있습니다. 저만 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답은 "너는…" 이 아니고 "너희는 …" 하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즉, 복수로 답하고 있습니다. 너는 너 혼자 그 질문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너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많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예를 엘리야의 이야기에서도 발견합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의 예언자들과 대결을 하여 이기는 이야기는 다들 아시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때는 가뭄이 3년 이상 지속된 때였는데 그가 또 기도하니까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야 이제는 정말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 나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는 곧 왕비 이세벨에게 쫓기어 광야로 도망칩니다. 광야에서 몇 일을 굶고 난 후에 그는 그냥 죽기를 희망합니다. 주님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때 주님이 찾아 오십니다. 열왕기상 19:14절입니다.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나는 이제까지 … 찾고 있습니다. " 이때 주님은 두 가지를 말씀 하십니다. 한가지는 그래도 여호와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해 가신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한가지는 19:18절 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에 칠천 명을 남겨 놓을 터인데, 그들은 모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아니하고, 입을 맞추지도 아니한 사람이다. " 엘리야는 나만 남았다고 했는데 여호와 하나님은 아니다 너 말고도 칠천 명이 더 남아 있다라고 하시지요.
우리는 때로 힘든 일을 당할 때 나 혼자다라고 생각하기 쉽고 그래서 외로워 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 주변을 돌아 보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같은 고통을 겪고 있고, 때론 더 큰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나보다 더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나의 고통은 고통도 아니다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람은 언제나 그것이 무엇이던 간에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이 가장 힘든 것이죠. 그것은 우리가 다들 경험해 본 일입니다.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사실은 나 만이 아니라 세월이 가고 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늘 같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왔다는 사실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돌아 볼 때 아무도 그 고난 때문에 망한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들은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들은 결국에는 다 이겨내고 아름답게 승화시켰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위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 안에서 그런 고통을 묵묵히 참아낸 사람들이 만들어 온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1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기드온, … 구태여 놓여 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 여기에 이름이 올라 있는 사람들 말고도 수 많은 사람들이 바다의 모래만큼 수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고통을 묵묵히 참아냈으며 그들은 다 지금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서 별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내가 겪는 크고 작은 어려움이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고통 속에서도 묵묵히 인내할 수 있는 그런 저와 여러분 되기를 소원합니다.
고난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 두 번째는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하는 것입니다.
-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1장 하반부의 하박국의 기도. 즉, 왜 악인을 사용하여 우리를 벌하십니까 하는 의문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은 2장의 대부분을 할애하여 답을 하시는데, 다섯번에 걸쳐서 망한다라고 하면서 결국은 그 악인도 망한다는 것을 얘기하십니다. 6절 "그들이 너를 보고 … 할 것이다. " 9절 "그들이 너를 보고 … 할 것이다. " 망한다, 망한다. 지금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악인도 여호와 하나님께 다른 악인을 심판하기 위해서 사용될 수 있지만 자기의 악함으로 결국은 자기도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얘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즉 죄는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죠. 그러면서 20절에 이렇게 말을 끝내시지요. "나 주가 거룩한 성전에 있다. 온 땅은 내 앞에서 잠잠하여라. " 무슨 말입니까 내가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왜 이렇습니까 왜 의인이 고통을 당합니까 하고 떠들지 않아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어려움과 고난을 알고 계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악인을 알고 계시고, 여호와 하나님은 의인을 알고 계시며 그 가운데서 심판하시고 구원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때로 왜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면 세상에 악이 판을 치는가 하는 질문을 합니다. 물론 여러 가지의 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구원과 심판의 개인성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무슨 소린가 하면 지금 이순간 생각하면 세상은 악하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왜 악을 벌하지 않으시는가 하고 생각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지금껏 수없이 많은 악인들을 벌하여 오셨고 그 와중에 의인을 구해 오셨습니다. 금방 생각해도 알 수 있지요 우리나라가 일본에서 해방된 것처럼 나라도 그랬구요. 악한 정권은 오래 가지 못하고 망했고, 거짓은 들어 나기 마련이었고, 악한 기업은 무너졌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선한 사람은 구원을 받았고 무엇보다도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을 받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역사 속에서 Active 하게 Involve 하고 계시면서 구원하시고 심판하는 여호와 하나님인데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이 아무것도 안하고 계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단에게 속고 있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오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들의 사정을 여호와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아파할 때 같이 아파하시고, 안타까워 하시겠지만 우리가 이겨낼 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돕기 위해서 뒤에서 기도로 후원하고 계십니다. 그 주님을 생각하며 고난 중에서도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고난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 세 번째는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고난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것은 고난이 아니다
2장 1절의 하박국의 대담한 호소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2절에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주께서 나에게 대답 … 읽을 수 있게 하여라. " 여호와 하나님은 여기서 이 말씀을 판에 새기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판에 새기라 한 것은 아마도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 외에는 없었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판에 새기란 말은 그 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도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세 손손 변하지 않는 진리라는 의미도 됩니다. 사람들은 가고 오고 가고 오고 수없이 많은 세월이 흐를 것이지만 그들은 늘 너와 같은 의문을 가질 것이고 이것이 그 의문점에 대한 해답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은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에 살았던 하박국에게만 주어 진 것이 아니고,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판에 새기라고 하신 말씀은 4절 말씀입니다. "마음이 한껏 부푼 … 믿음으로 산다. " 아마도 이 구절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 중에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 구절은 하박국서의 핵심 구절인 동시에 구약과 신약을 이어 주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이 나중에 바울 사도에게 영감을 주어서 로마서의결론 부분인 로마서 1:16-17절을 이렇게 쓰게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 한 것과 같습니다. " 이 글은 로마서의결론인 동시에 신약전체에결론이기도 합니다.
다시 한번 읽어 보지요. "마음이 한껏 부푼 … 믿음으로 산다. " 조금 이해가 안 되지요 왜 그런가 하면 정직이라는 해석 때문입니다. 이것을 쉽게 해석하면 이렇게 됩니다.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바로 서지 못한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 조금 이해가 쉽죠. 조금 더 쉽게 해석하면,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살지 못한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 즉,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사람을 망하게 하는 것은 죄이지 고난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사람은 죄 때문에 죽지, 고난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하박국은 포악한 바빌로니아의 침략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누가 포로로 잡혀 갈지 누가 죽음을 당할지 알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3장 16절에 재난을 앞둔 그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나의 창자가 뒤틀린다. … 다리가 후들 거린다. " 이런 말할 수 없는 근심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은 전쟁도, 병도, 가난도 너를 죽이지 못한다. 그러므로 믿음 위에 선 의인은 영원히 살 것이다라는 응답이었습니다.
믿음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아들이 있으리라 하신 말씀을 믿었던 것처럼,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언젠가 구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그 믿음을 지켜 나갈 때 그것이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베드로 전서 1장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 존귀를 얻게 해 주십니다. " 그는 지금 우리가 겪는 시련은 잠시 겪는 시련이라고 얘기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안에 영원한 안식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겠지요. 결국 여호와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 우리를 단련시키고 우리를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데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고난 중에 계시는 분 많이 계시지요 하지만 내가 혼자 겪고 있는 고난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또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알고 계시며 우리와 같이 아파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셔서, 이제껏 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그랬던 것처럼 믿음 안에서 굳건히 이기어 나가시는 그런 여러분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결론
이제까지 고난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을 응답을 듣고 하박국은 3장 전체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는 17-19절에서 영원히 남을 만한 찬양을 합니다. "무화과나무에 … 하신다. " 참 아름다운 구절입니다. 이 구절들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자유로움입니다. 사슴처럼 산등성이를 치닫는 자유로움.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결론은 여호와 하나님 안에 우리의 참된 자유가 있다 하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닥쳐올 시련을 생각하면 창자가 뒤틀리고, 입술이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리고, 뼈가 속으로부터 썩어 들어가는 고통을 맛봅니다. 상황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적들은 여전히 쳐들어 올 것이고 환란은 닥쳐 오지만, 결국에는 환란 후에 올 구원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야! 아무리 그렇지만, 어떻게 그 고통을 이겨내고 기쁨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을까 우리는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우선은 하박국 전체에 흐르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능력 있으시고, 그 모든 행사가 선하시다는 확신입니다. 즉 결과가 어떻든지 간에 나를 통하여 그분의 선함이 들어 날 것이다 하는 확신입니다. 두 번째는 1장 12절에서 엿볼 수 있는 부활에 대한 확신입니다. 결국은 나를 살리실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3장 18절에 있는 구원에 대한 감격입니다. 죄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그 감격이 위기 앞에서도 사슴처럼 산등성이를 치닫는 자유를 맛보게 하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결국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열조들과 함께 땅에 묻혔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하박국이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그의 믿음은 살아서 초대 교회의 많은 사도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그 핍박의 시대를 이기게 하였고, 지금도 살아서 우리의 믿음에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이 느껴 지시지 않습니까 얼마 전 우리 교회의 한 집사님이 돌아 가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믿음은 나눔터에 간간히 오르는 글 속에 살아있고, 그 분을 얘기하는 사람들의 대화 속에 살아 있고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 계십니다. 믿음을 지킨 그리스도인들은 죽지만 죽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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