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하나님과 화해하는 날
본문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되어 왔는지에 관해서는 성경이 이렇게 말한다.
1.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만족스런 동반자였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만물을 지으신 후에 덤으로 인간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가장 공극적인 창조 계획의 목표가 인간의 창조에 있었다. 유독 인간만은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고(창1:26), 인간에게만은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주셨다(창 2:7).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야 창조의 일이 완결되었던 것으로 창세기 1장은 전하고 있다. 말하자면, 인간을 창조하지 않고서는 창조의 일이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을 별로도 특별하게 창조하신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관리할 존재로 인간을 구상하셨기 때문이다. 그러한 뜻에 맞추어 인간은 지으심을 받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동산 안에서 피조물들의 관리자로서 복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복된 나날’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창세기 1장에 여러 차례 나타나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시기 좋았더라" 또는 “심히 좋았더라”(1:31)라는 표현에 근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어떻게 좋았는지 소상히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종합적인 소감이 ‘좋았다’는 것이다. 에덴동산에 무엇이 부족하겠으며, 무슨 일그러짐이 있었겠는가 모든 것이 만족하였고, 모든 것이 충실하였을 것이다. 그 속에서 아담과 하와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살고 있었다.
2.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께 반역함으로써 저주 아래 살게 되었다.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께 반역한 슬픈 악연에 관하여는 성경(창 3장)이 소상하게 그 전말을 이야기하고 있다. 첫 인간 아담이 여호와 하나님과의 계약을 무시했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그 계약을 위반했다. 이것이 선악과 이야기로 우리들에게 전하여지는 악연의 시작에 관한 설명이다.
인간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극악하게 반역을 하면서도 무엇을 믿고 장담을 하는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지겠다”(마 27:25)고 했다. 결국 아담의 반역으로부터 빌라도 법정의 반역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오늘날 우리 인간들의 심령 속에서 한없이 자행되는 주님께 대한 모반에 이르기까지 인류와 여호와 하나님 사이에는 악연이 쌓일 대로 쌓이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예루살렘 성문을 빠져나가실 때, 여자들이 예수를 보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 여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너의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눅 23:28)고 하셨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그들을 위로하기 위함도 아니요, 또는 당신의 마음의 여유를 나타내시려고 하신 말씀도 아니었다. 물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시는 주님도 가련하게 되셨지만, 그러나 정말 가련한 자들은 ‘너와 너의 자녀들’ 곧 ‘인류’라는 말씀이다. 의로운 이를 잡아 죽이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들을 외면하고, 그들을 못살게 굴다가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될 운명에 있는 인류를 위하여 울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주님의 진정한 권고이셨다.
3. 십자가 처형의 반역적인 사건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인간과 화해하실 길을 열으셨다.
우리 인간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십자가로 보냈다. 빌라도 총독도 그랬고, 제사장 가야바도 그랬다. 헤롯왕도 그랬고, 빌라도 법정에 모였던 많은 유대인들 또한 그랬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 대해서 더 이상 미련을 두고 보실 필요가 없을 만큼 극한 진도에 도달 하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셨다(롬 5:8). 우리 죄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때가 이르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다.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써 여호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었으니,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될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롬5:6,9). 그러니까 인간들이 철없이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하고 있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를 제물 삼으시어 인류의 구원의 다리를 장만하고 계셨다. 이토록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놀라우시다.
오늘 우리 모두 십자가 위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자. 어떤 잔혹한 처형도 그렇게 잔혹할 수 없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무자비하게 죽음을 당해야 했을 자는 누가인가 바로 나다. 내 죄로 말미암아서 나는 죽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나는 죽지 않고 내 대신 주님께서 십자가에 오르신 것이다. 세상을 미움과 분열과 싸움의 도가니로 만들어 온 자도 나요, 무책임과 불성실로 소망 없는 세상을 만들어 온 자도 나다. 그러나 나는 멀쩡하게 살아 있고, 도리어 아무 죄 없고, 해맑으시며, 가장 의로우신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오늘 우리 모두 십자가 위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자. 펴신 팔은 화해를 위하여 나에게 내미시는 사랑의 팔이다. 나는 철없이 뿌리치고 있었을 때에도 먼저 내미신 주님의 화해의 손은 거기 있었고, 지금까지 한 번도 거두신 일이 없는 그 화해의 손이 여전히 나를 향하여 종종하시며 화해를 청하신다.
1.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만족스런 동반자였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만물을 지으신 후에 덤으로 인간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가장 공극적인 창조 계획의 목표가 인간의 창조에 있었다. 유독 인간만은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고(창1:26), 인간에게만은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주셨다(창 2:7).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야 창조의 일이 완결되었던 것으로 창세기 1장은 전하고 있다. 말하자면, 인간을 창조하지 않고서는 창조의 일이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을 별로도 특별하게 창조하신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관리할 존재로 인간을 구상하셨기 때문이다. 그러한 뜻에 맞추어 인간은 지으심을 받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동산 안에서 피조물들의 관리자로서 복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복된 나날’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창세기 1장에 여러 차례 나타나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시기 좋았더라" 또는 “심히 좋았더라”(1:31)라는 표현에 근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어떻게 좋았는지 소상히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종합적인 소감이 ‘좋았다’는 것이다. 에덴동산에 무엇이 부족하겠으며, 무슨 일그러짐이 있었겠는가 모든 것이 만족하였고, 모든 것이 충실하였을 것이다. 그 속에서 아담과 하와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살고 있었다.
2.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께 반역함으로써 저주 아래 살게 되었다.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께 반역한 슬픈 악연에 관하여는 성경(창 3장)이 소상하게 그 전말을 이야기하고 있다. 첫 인간 아담이 여호와 하나님과의 계약을 무시했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그 계약을 위반했다. 이것이 선악과 이야기로 우리들에게 전하여지는 악연의 시작에 관한 설명이다.
인간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극악하게 반역을 하면서도 무엇을 믿고 장담을 하는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지겠다”(마 27:25)고 했다. 결국 아담의 반역으로부터 빌라도 법정의 반역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오늘날 우리 인간들의 심령 속에서 한없이 자행되는 주님께 대한 모반에 이르기까지 인류와 여호와 하나님 사이에는 악연이 쌓일 대로 쌓이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예루살렘 성문을 빠져나가실 때, 여자들이 예수를 보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 여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너의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눅 23:28)고 하셨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그들을 위로하기 위함도 아니요, 또는 당신의 마음의 여유를 나타내시려고 하신 말씀도 아니었다. 물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시는 주님도 가련하게 되셨지만, 그러나 정말 가련한 자들은 ‘너와 너의 자녀들’ 곧 ‘인류’라는 말씀이다. 의로운 이를 잡아 죽이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들을 외면하고, 그들을 못살게 굴다가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될 운명에 있는 인류를 위하여 울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주님의 진정한 권고이셨다.
3. 십자가 처형의 반역적인 사건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인간과 화해하실 길을 열으셨다.
우리 인간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십자가로 보냈다. 빌라도 총독도 그랬고, 제사장 가야바도 그랬다. 헤롯왕도 그랬고, 빌라도 법정에 모였던 많은 유대인들 또한 그랬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 대해서 더 이상 미련을 두고 보실 필요가 없을 만큼 극한 진도에 도달 하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셨다(롬 5:8). 우리 죄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때가 이르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다.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써 여호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었으니,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될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롬5:6,9). 그러니까 인간들이 철없이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하고 있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를 제물 삼으시어 인류의 구원의 다리를 장만하고 계셨다. 이토록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놀라우시다.
오늘 우리 모두 십자가 위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자. 어떤 잔혹한 처형도 그렇게 잔혹할 수 없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무자비하게 죽음을 당해야 했을 자는 누가인가 바로 나다. 내 죄로 말미암아서 나는 죽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나는 죽지 않고 내 대신 주님께서 십자가에 오르신 것이다. 세상을 미움과 분열과 싸움의 도가니로 만들어 온 자도 나요, 무책임과 불성실로 소망 없는 세상을 만들어 온 자도 나다. 그러나 나는 멀쩡하게 살아 있고, 도리어 아무 죄 없고, 해맑으시며, 가장 의로우신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오늘 우리 모두 십자가 위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자. 펴신 팔은 화해를 위하여 나에게 내미시는 사랑의 팔이다. 나는 철없이 뿌리치고 있었을 때에도 먼저 내미신 주님의 화해의 손은 거기 있었고, 지금까지 한 번도 거두신 일이 없는 그 화해의 손이 여전히 나를 향하여 종종하시며 화해를 청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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