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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그리스도의 수난

본문

요한복음 19장은 총독 빌라도의 재판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로마총독의 재판을 받으셔야만 했던 이유는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사형을 시킬 수 있는 법적인 권한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놀랍게도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을 살리려고 애를 쓰는데 유대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모순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매국노도 아니고 민족주의자도 아닌데 유대인들의 요구에 의하여 로마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형을 결정하고 집행한 것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온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 당국도 결국 사탄의 한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다양한 정치 세력이 있는 것 같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나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 왕이 아니기 때문에 쉽게 처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자기 아들을 죽인 나라라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장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시작해야 옳은데 그것을 의의 제사로 받으셔서 인간들을 용서하신다는 사실입니다.
1. 그는 우리를 위해 채찍을 맞으셨습니다(1-3절).
빌라도가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것은 무슨 의미가 있어서 한 것이 아닙니다(1절). 예수의 죄는 십자가에 처형할 정도가 아닌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빌라도는 적당하게 채찍질한 다음에 놓아줄 생각이었습니다. 로마법에는 채찍질도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좀 가볍게 때리는 채찍질도 있었고 살이 완전히 찢어지고 뼈가 보일 정도로 초주검이 되게 하는 채찍질도 있었습니다. 아마 처음에 빌라도가 때린 채찍질은 비교적 가벼운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채찍질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모든 수욕과 고통의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2-3절). 특히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 왕관을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힘으로 유대인들에 대한 불만을 예수님 한 사람에게 퍼부었습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을 지키면서 고향에도 가지 못하고 박봉에 시달리면서 받던 모든 불만을 예수님에게 왕의 옷을 입힘으로 다 퍼부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신 것이 우리에게 이런 의미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벧전 2:24, 사 53:5). 즉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조롱당하신 것은 우리가 맞아야 할 것을 대신 맞은 것이며 우리가 조롱당해야 할 것을 대신 당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채찍질 당하신 것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의 위선저인 죄들, 죄를 짓고 또 짓는 연약함, 마음속에 양심을 누르는 고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 이 모든 것을 위하여 주님이 고통당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한 가지 특징을 가지는데 그것은 곧 자신의 아팠던 과거를 아무런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이라면 감추고 또 감추고 싶은 부분들을 믿는 자들은 너무나도 쉽게 남에게 고백합니다. 그 이유는 이미 그 상처가 아물었고 치료받았기 때문입니다.
2. 빌라도의 법정(4-16절)
(1) 빌라도의 무죄 주장(4-6절)
빌라도의 재판에서 놀라운 것은 모라 총독인 발라도 자신은 예수님에 대하여 무죄를 주장한 반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유죄를 주장하며 처형을 요구했다는 것입니다(4절). 빌라도는 정치적인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로마에 해를 끼칠 위인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내부 문제에 개입할 입장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정당하게 채찍질을 하고 무죄 방면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그가 크게 잘못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 당국은 예수가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면서 스스로를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로마 당국보다 예수님을 더 싫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나름대로 유대인들을 조롱하기 위하여 그들이 선동자라고 고발한 예수님을 우스꽝스러운 왕복을 입혀서 보였지만 이것은 유대인들의 자존심을 더 건드려 놓았습니다(5-6절).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은 그런 조롱이 아니고 이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일단 예수님을 정치적으로 선동자로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그런 반역의 기미를 전혀 찾아볼 수 없음을, 그래서 무죄임을 밝힙니다. 그랬더니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선동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처음엔 이것을 유대인들의 내부 문제로 생각하고 발을 빼려고 했던 빌라도가 점점 이 올무에 걸려들게 됩니다.
(2) 유대인들과 빌라도의 타협(7-9절).
빌라도가 예수님을 채찍질 정도로 끝내고 그냥 내어놓으려고 하니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며 죽일 것을 요구합니다(7-8절). 그의 죄명은 자기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이며 그것은 자기들의 종교법으로는 사형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로 빌라도와 협상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이번 유월절에 우리가 소동을 일으키지 않고 얌전하게 넘어가 줄 것이니 당신도 우리의 요구를 하나 들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빌라도에게는 더 큰 문제를 야기시켰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자기가 신의 아들을 처형하는 것이 되며 또 다른 문제는 설사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 사람을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추종자들도 많이 있을 텐데 그 사람들이 가만히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빌라도는 원치 않게 자기의 생애에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을 만났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을 재판한 재판장의 불명예를 뒤집어쓰게 되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입에서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인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예수님은 확인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8-9절). 그런데 빌라도는 아직까지 상황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예수님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생각한 것은 이 사람을 살려주는 것이 자기 통치에 유리하냐 아니면 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자기 통치에 유리하냐 하는 것을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는 원래 유대인들의 내부 문제에 끼어들 생각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워낙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니까 이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를 죽이는 것이 나올까를 생각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질문에 침묵하신 것은 ‘이것은 네가 결정할 일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결정하기 어려울 때 은근히 다른 사람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려고 합니다. 자기가 결정을 할 수 없으니까 괜히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 현명한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당사작 결정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3) 유대인들의 소동(10-12절).
빌라도는 지금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그것은 무슨 고민입니까 유대인들이 빌라도를 극단적인 선택의 자리까지 몰고 간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자기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해서 자기들이 고발을 했는데 이 사람을 풀어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 종교적으로 협상을 시도하던 유대인들은 빌라도가 계속 망설이자 다시 정치적인 문제로 돌아서기 시작했습니다(12절). 즉 이 예수와 자기 왕 가이사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빌라도는 가이사를 반역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놓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예수님은 아무 힘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 중에서 추종자들이 그렇게 많은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 한 사람 처형하는 것은 자기에게 큰 손해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유대인들의 이렇게 강한 소원을 한 들어주면 그들이 자기 말을 잘 들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께 다시 물어보았습니다(10-11절).
빌라도는 자기에게 예수님을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하면서 위협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분명히 대답하셨습니다. 모든 권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준다’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빌려준 것입니다. 그 권세를 빌라도는 남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빌려 주신 것입니다.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람들의 권세나 지위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빌려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내릴결론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이런 권세를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로마의 힘이 크게 보였고 힘없는 예수님보다는 유대인들의 말을 한번 들어주는 것이 자기에게 더 유리하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4) 빌라도의 재판(13-16절).
드디어 빌라도는 재판석에 앉았습니다(13절). 빌라도는 곧니 그 자리에 앉지 않아도 총독이며, 그가 내린 결정은 유효합니다. 그러나 굳이 그가 그 자리를 택한 이유는 자기의 권위를 지키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라는 자는 자기의 모든 권세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하면서 전혀 굽히려고 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수만 믿고 마치 예수를 놓으면 그를 가이사의 반역자로 고소할 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그렇게 하고도 남을 자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한번 한다고 하면 하는 자들입니다.
빌라도는 왜 자기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무력으로 다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일만큼은 무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진리냐, 현실이냐’라는 문제였습니다.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느냐, 아니면 진리를 새로 받아들이고 현실을 모두 부정하고 버리느냐’라는 문제였습니다. 거기서 그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무엇보다도 총독으로서의 자기 지위를 확보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박석이라는 재판석에 앉았습니다. 거기에 앉으면 무엇인가 달라질 것 같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앉아도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더 큰 소리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면서 빌라도보다 한 술 더 떴습니다. 빌라도가 “보라, 너희 왕이라”고 하면서 유대인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려고 했을 때 그들은 더욱더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우리들의 왕은 가이사 한 분밖에 없습니다”고 했습니다(14-16절). 결국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소리에 져서 예수님에게 사형을 판결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군인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3. 십자가에 못 박히심(17-21절)
본문은 우리 주 예수께서 로마 군인들에 의하여 처형당하신 장면을 비교적 감정의 개입 없이 냉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17-18절). 우선, 예수님이 처형된 장소는 ‘골고다’라는 언덕이었습니다. 이 이름의 뜻은 해골인데, 아마 산 자체가 해골처럼 생겼기 때문에 생긴 이름인 것 같습니다. 라틴어로는 ‘갈보리’라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해골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처형된 장소로 이동하셨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그가 끝까지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없어서 시골 구레네라는 곳에서 온 시몬이라는 자가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처형하기 전에 그에게 모진 채찍질을 한 것 같습니다. 이 채찍질은 거의 초주검이 되도록 때리는데 뼈가 나올 정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가지 못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되었는데, 그 두 사람은 강도였습니다. 이 강도들은 남의 물건을 강탈하는 강도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민족주의 편에서 부자들을 공격하는 테러범들이었습니다. 로마는 죄 없는 예수님을 두 테러범과 함께 처형함으로써 그가 완벽한 반역자의 한 명으로 보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연출은 대제사장이지만 빌라도는 완벽한 연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과 로마 총독 사이에 죄패를 놓고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19절). 총독은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죄명을 써 붙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유대인들이 로마에 대한 반역자들인데, 그 대표가 예수라는 뜻입니다. 거기에 대하여 대제사장들은 자기들이 끌려 들어가는 것이 싫어서 ‘자칭…’이라는 말로 바꾸어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총독이 정식으로 죄명을 쓴다면 ‘반역자 예수’라고 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에게서 그런 반역의 혐의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모든 유대인들 안에 반역의 혐의가 뚜렷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처형하면서 대신 모든 유대인들을 처형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만약 대제사장이 죄패를 썼다면 ‘자칭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 무죄한 죽음에 대한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지를 살펴봅시다. 이 십자가의 처형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재판장에게 있습니까 유대인들에 있습니까 아니면 인류 전체에게 있습니까 우선 재판장은 이 사형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겠지만 그는 압력에 의하여 유죄판결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그로 하여금 유죄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도록 압력을 넣은 자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신분입니다. 이분은 그저 평범한 유대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임무를 가지고 보냄을 받은 대표였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로 하늘나라 전체의 대표의 신분으로 보냄을 받은 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유대인들과 로마인이 함을 합해서 처형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책임은 인간 모두에게 있습니다.
4. 운명하심(28-37절).
(1) 예언의 성취(28-29절)
요한이 가장 강조해서 증거하고 있는 한 가지는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상황 가운데서 이루어진 하나하나의 일들을 알고 보니까 우연이 아니라 구약 예언의 성취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시편 22:18의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목이 말랐다는 것이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28절). 사실 예수님은 목이 말랐습니다. 그 뜨거운 중동 지방의 더위를 생각해 보십시오. 눈을 제대로 뜰 수조차 없는 그 뜨거운 햇볕 아래 그대로 십자가 위에 매달려 있으면 얼마나 목이 타겠습니까 그때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라고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사람들은 정말 예수님이 목이 말라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들어 있는 그릇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로마 군인들이나 작업하는 자들이 일하는 중에 너무 목이 마를까봐 준비해 놓은 음료수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니까 신포도주를 해면에 적셔서 갈대 같은 것 위에 끼워서 예수님의 입술을 적시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신포도주를 입술에 약간 적신 후에 머리를 숙이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요한에게 있어서 머리에 떠나지 않은 사실은 바로 예수님이 느끼셨던 갈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도 뜨거운 태양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장시간 동안 물을 마시지 못했습니다. 목이 마르지만 물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약간의 물이라도 마실 수 있다면 그에게 얼마나 위안이 되었을까 그러나 물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목말라하실 때 나는 왜 보고만 있었을까”하는 후회가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신앙적으로 좀더 자랐을 때 예수님께서 “목마르다”고 말씀하신 것이 단순한 육체적인 목마름이 아닌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이미 말씀된 것이고 그것에 대한 성취였습니다(시 69:21).
여기서 요한이 우리에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단순한 감정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한이 깨달은 것은 예언을 성취하시는 주체로서의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구약의 예언을 보면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그런 행동을 통하여 예언을 성취시키는지 모르고 사용되고 있습니다. 군병들도 자기들이 예수님의 옷을 탐내어서 제비를 뽑는 것이 구약의 예언을 성취시키는 것인지도 모르고 그처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요한을 불필요한 죄의식에서 해방시켰을 뿐 아니라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했습니다. 요한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토록 목말라하실 때 물을 드리지 못한 것이 아니라 주님은 아주 작은 말씀이라도 반드시 성취시키는 분이며, 지금이라도 빨리 말씀으로 돌아와서 아직도 내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며, 지금이라도 우리 가운데서 성취되어야 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2) 다 이루었다(30절).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하시면서 숨을 거두셨습니다(30절). 여기서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참된 인간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쳐 복종시키면서 끝까지 사신 것입니다. 마귀가 지금까지 주자한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드셨기 때문이며 애당초부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ㅔ 너무나 지나친 것을 요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 한 번도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적어도 그의 마음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끝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죄인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으로 인간들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저주를 끝나게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과 만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의 대표인 아담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죄 없는 몸으로 그 죽음을 죽으심으로 인류의 새로운 대표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이러한 죽음을 맛보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주의 죽음, 지옥의 고통을 맛보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5. 장사되심(38-42절)
이 본문에서는 우리 주 예수님의 장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장사를 보면서 몇 가지 특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의 숨은 제자들(38-42절)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제자였습니다. 본문에도 그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그런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38절). 그러나 예수님을 장사한 이는 바로 이 숨은 제자였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적이 있는 니고데모라는 율법사입니다(39). 니고데모에게는 꼭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시는 것을 보고 여호와 하나님이 이분을 보내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의 눈을 피하여 밤에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따르지 못했었습니다.
오늘은 모든 것이 완전히 바뀌어 있습니다. 그토록 주님을 내어놓고 따라다니던 제자들은 모두 다 숨어 있습니다. 한 명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전혀 드러나지 않았던 숨은 제자들은 당당하게 빌라도 앞에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했고, 다른 유대인들이 보능 앞에서 예수님의 시체를 정성껏 장사하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의 장사의 의미
예수님의 죽음은 마지막이 아닙니다. 아직 성취되지 않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너무나도 의심이 많기 때문에 이런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요셉이나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장사하면서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의 시신이 방치되어서는 안 되고 그의 의로우심에 대한 고백으로 정성껏 장사를 치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그의 부활하심, 하늘로 올리우심 그리고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은 따로 떨어질 수 없는 완전한 연속된 하나의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하나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그는 다시 살아나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올리우셔야만 하며 거기서 성령을 부어주셔야만 합니다.
(3) 예수님의 고귀한 죽음(39-42절)
예수님을 장사한 무덤은 아리마대 요셉의 것으로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었습니다(41절). 이사야는 예수께서 부자의 무덤에 장사되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사 53:9). 이것은 예수님에게 일어나는 일이 모두 철저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며, 사람들이 모르는 가운데에서라도 그의 죽음을 업신여기지 못하도록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시신을 지키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아리마대 요셉은 나이가 든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하여 하나의 무덤을 준비해놓았습니다. 그 무덤은 바위를 옆에서 쪼아 들어간 것으로 시신을 누일 수 있고 돌로 입구를 막을 수 있는 아주 좋은 무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무덤이 자기가 아닌 주님이 누우실 자리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생각 없이 하나의 무덤을 준비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의 준비는 엄청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는 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생각 없이 어떤 것을 준비하지만 그것이 믿음으로 사용될 때에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엄청난 구원 사건으로 사용됩니다. 만약에 요셉이 그 무덤을 아까워했다면 그 무덤은 그저 한 부자의 무덤에 불과할 뿐이며, 아마도 도굴꾼이나 그 무덤을 기억할지 모르지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죽은 예수님의 시신에 대하여 최대의 예우를 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모든 인간들에게 가장 소중한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어느 누구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무시하고 바로 축복으로 달려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의 무덤 앞에 오랫동안 서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삶이 단지 내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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