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예루살렘 입성
본문
오늘은 종려주일이다. 종려주일은 갈릴리에서 활동을 마치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한 것을 기념하는 주일이다. 종려주일은 안식일 다음날로 고난주간의 첫날이 된다. 당시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을 로마의 통치에서 해방시켜 ‘다윗의 영광’을 되찾게 하실 메시야로서 환영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죽음을 향한 길이요, 섬김을 위한 길이요, 용서와 화해를 이루시기 위한 평화의 왕으로서의 행진이었다.
위의 세 본문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주는 의미를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사무엘하의 본문은 다윗 왕이 법궤를 수도 예루살렘에 안치하려는 두 번째 시도가 성공한 이야기다.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 말씀, 약속, 계약을 상징하는 법궤를 예루살렘에 모셨다는 것은 다윗왕국이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며,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두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 각 지파의 지지를 받게 된다는 상징성이 있다. 법궤가 옮겨짐으로 해서 다윗의 왕위가 백성들로부터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의 본문은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과 예수님을 중보자로 하는 새언약, 아벨의 피와 예수님의 피를 대비시키고 있다. 본문은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두렵게 여기던 신앙의 두려움을 제거하고 여호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하시는 예수님을 증거한다. 예수님의 피와 희생으로 용서와 화해의 새로운 길이 열린 것이다.
마가복음은 스가랴의 예언(막 9:9)처럼 아직 사람이 타 본 일이 없는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메사야를 이야기한다. 곧 나귀새끼를 타신 예수님의 입성은 평화의 왕이심을 예언한 것이 성취된 사건으로 이해한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용서와 회해와 섬김과 평화로의 새로운 길을 여는 사건이다.
칼과 창으로 세운 나라
다윗은 헤브론에서 왕이 된 후 여부스족으로부터 시온 산성, 예루살렘 성을 빼앗는다. 숙적 불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다윗은 이스라엘의 신앙을 회복하고 통일된 나라로 백성들을 결집시키기 위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고자 한다. 첫 번째 시도는 여호와 하나님의 진조하심으로 실패하고, 두 번째 시도에서 다윗은 오밷에돔의 집으로부터 예루살렘의 장막으로 법궤를 옮겨오게 된다. 법궤가 안치되자, 다윗은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고 기쁨으로 찬양을 드린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들을 축복한 다윗은 떡과 고기를 나누며 즐거워한다. 법궤가 무엇이기에 다윗이 이토록 즐거워했을까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옮겨졌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계약을 세우셨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이 새겨진 두 개의 돌판을 주셨다. 법궤는 이 돌판을 넣어둔 언약궤이다. 법궤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과 계명과 임재와 말씀을 상징하는 것이다.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옮겨졌다는 것은 왕국을 다스리는 진정한 통치자의 보좌에 여호와 하나님이 앉으셨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이 칼과 창으로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나라가 되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두었다는 것이다. 법궤가 옮겨짐으로써 이스라엘의 삶의 자리가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옮겨짐으로써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새로운 길이 열렸듯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도 신앙인에게 새로운 길이 열려지는 사건이 된다.
용서와 화해의 길
히브리서 12:18-24은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을 대비시키고 있다.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과 예수님을 중보자로 하는 새언약을 비교한다. 18-21절은 시내산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한다. 화염과 구름과 흑암으로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적인 위엄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가득한 옛계약과는 달리, 22-24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온산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나실 때, 그리스도인들이 맞이할 기뻐함과 영광을 이야기하고 있다.
시내산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시온산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타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하고 있다. 히브리서는 이러한 새로운 관계를 가능케 하신 것이 예수님임을 증거한다. 시내산에서의 두려움을 제거하고 여호와 하나님과의 새언약을 맺으며, 새로운 관계를 맺는 영광을 사람들에게 주신 분이 예수님임을 증거한다. 예수님의 피와 희생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에게 사람들이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히브리서는 아벨의 피와 예수님의 피를 비교함으로써 본문을 마친다. 땅으로 스며든 아벨의 피는 사람을 저주하는 것이다(창 4:10). 아벨의 죽음은 복수를 요구하는 것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흘리신 피는 인간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화해하는 새로운 길을 연다. 예수님의 생명과 죽음, 그리고 희생의 제물로 드리심은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길이 열어주신 것이다. 율법의 두려움 속에 있었던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에서 두려움으로 살았지만, 예수님의 피와 희생과 부활로 말미암아 멀리 떨어져 있던 여호와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전에는 막혀있던 여호와 하나님께로의 길이 열린 것이다.
용서와 화해, 여호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는 예루살렘성에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려주신 예수님의 희생으로 가능케 되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이러한 새언약의 첫걸음이다. 예수님의 피와 희생이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로 변화시킨 것이다.
평화의 왕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를 시켜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를 끌로 오게 하셨다. 그리고 그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다. 유월절기를 지키기 위해 모여 있던 많은 사람들이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펴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하고 소리를 지르며 맞이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제자들과 베다니로 나와 쉬셨다.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신 것은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는 스가랴 9:9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를 타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한 태도로 평화를 위하여 오신 것이다.
사람들이 기대하던 메시야는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왕, 분쇄하며 박살하고 파괴하는 왕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화의 상징인 나귀를 타고 오셨다. 나귀새끼를 타신 예수님의 입성은 평화의 왕이심을 선포하는 사건인 것이다.
나귀를 타고 겸손하게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맞이하신다. 예수님의 피와 희생은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용서와 화해와 여호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여는 것이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섬김과 평화로의 새로운 길을 여는 사건이다. 다윗왕이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옮김으로써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새로운 나라가 되었듯이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으로 우리에게 여호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고난주간의 첫 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의미는 예수님의 평화의 왕으로 오신 분이시오,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와 섬김과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길을 열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와 희생으로 구원받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다. 평화의 왕, 새로운 계약을 이루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다. 종려주일을 맞아 우리들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겸손한 섬김의 삶을 배워야 한다. 우리에게 여호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용서와 화해의 길을 열어주신 것을 감사드려야 한다. 우님께서 평화의 왕, 구원의 주님이 오신 것을 증거해야 한다. 종려주일 아침, 구원받은 새생명으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 용서와 화해를 열어주신 예수님, 구원의 소식을 증거하고 섬김의 삶을 결단할 수 있기를 바란다.
위의 세 본문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주는 의미를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사무엘하의 본문은 다윗 왕이 법궤를 수도 예루살렘에 안치하려는 두 번째 시도가 성공한 이야기다.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 말씀, 약속, 계약을 상징하는 법궤를 예루살렘에 모셨다는 것은 다윗왕국이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며,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두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 각 지파의 지지를 받게 된다는 상징성이 있다. 법궤가 옮겨짐으로 해서 다윗의 왕위가 백성들로부터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의 본문은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과 예수님을 중보자로 하는 새언약, 아벨의 피와 예수님의 피를 대비시키고 있다. 본문은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두렵게 여기던 신앙의 두려움을 제거하고 여호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하시는 예수님을 증거한다. 예수님의 피와 희생으로 용서와 화해의 새로운 길이 열린 것이다.
마가복음은 스가랴의 예언(막 9:9)처럼 아직 사람이 타 본 일이 없는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메사야를 이야기한다. 곧 나귀새끼를 타신 예수님의 입성은 평화의 왕이심을 예언한 것이 성취된 사건으로 이해한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용서와 회해와 섬김과 평화로의 새로운 길을 여는 사건이다.
칼과 창으로 세운 나라
다윗은 헤브론에서 왕이 된 후 여부스족으로부터 시온 산성, 예루살렘 성을 빼앗는다. 숙적 불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다윗은 이스라엘의 신앙을 회복하고 통일된 나라로 백성들을 결집시키기 위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고자 한다. 첫 번째 시도는 여호와 하나님의 진조하심으로 실패하고, 두 번째 시도에서 다윗은 오밷에돔의 집으로부터 예루살렘의 장막으로 법궤를 옮겨오게 된다. 법궤가 안치되자, 다윗은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고 기쁨으로 찬양을 드린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들을 축복한 다윗은 떡과 고기를 나누며 즐거워한다. 법궤가 무엇이기에 다윗이 이토록 즐거워했을까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옮겨졌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계약을 세우셨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이 새겨진 두 개의 돌판을 주셨다. 법궤는 이 돌판을 넣어둔 언약궤이다. 법궤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과 계명과 임재와 말씀을 상징하는 것이다.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옮겨졌다는 것은 왕국을 다스리는 진정한 통치자의 보좌에 여호와 하나님이 앉으셨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이 칼과 창으로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나라가 되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두었다는 것이다. 법궤가 옮겨짐으로써 이스라엘의 삶의 자리가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옮겨짐으로써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새로운 길이 열렸듯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도 신앙인에게 새로운 길이 열려지는 사건이 된다.
용서와 화해의 길
히브리서 12:18-24은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을 대비시키고 있다.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과 예수님을 중보자로 하는 새언약을 비교한다. 18-21절은 시내산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한다. 화염과 구름과 흑암으로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적인 위엄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가득한 옛계약과는 달리, 22-24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온산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나실 때, 그리스도인들이 맞이할 기뻐함과 영광을 이야기하고 있다.
시내산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시온산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타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하고 있다. 히브리서는 이러한 새로운 관계를 가능케 하신 것이 예수님임을 증거한다. 시내산에서의 두려움을 제거하고 여호와 하나님과의 새언약을 맺으며, 새로운 관계를 맺는 영광을 사람들에게 주신 분이 예수님임을 증거한다. 예수님의 피와 희생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에게 사람들이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히브리서는 아벨의 피와 예수님의 피를 비교함으로써 본문을 마친다. 땅으로 스며든 아벨의 피는 사람을 저주하는 것이다(창 4:10). 아벨의 죽음은 복수를 요구하는 것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흘리신 피는 인간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화해하는 새로운 길을 연다. 예수님의 생명과 죽음, 그리고 희생의 제물로 드리심은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길이 열어주신 것이다. 율법의 두려움 속에 있었던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에서 두려움으로 살았지만, 예수님의 피와 희생과 부활로 말미암아 멀리 떨어져 있던 여호와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전에는 막혀있던 여호와 하나님께로의 길이 열린 것이다.
용서와 화해, 여호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는 예루살렘성에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려주신 예수님의 희생으로 가능케 되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이러한 새언약의 첫걸음이다. 예수님의 피와 희생이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로 변화시킨 것이다.
평화의 왕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를 시켜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를 끌로 오게 하셨다. 그리고 그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다. 유월절기를 지키기 위해 모여 있던 많은 사람들이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펴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하고 소리를 지르며 맞이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제자들과 베다니로 나와 쉬셨다.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신 것은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는 스가랴 9:9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를 타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한 태도로 평화를 위하여 오신 것이다.
사람들이 기대하던 메시야는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왕, 분쇄하며 박살하고 파괴하는 왕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화의 상징인 나귀를 타고 오셨다. 나귀새끼를 타신 예수님의 입성은 평화의 왕이심을 선포하는 사건인 것이다.
나귀를 타고 겸손하게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맞이하신다. 예수님의 피와 희생은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용서와 화해와 여호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여는 것이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섬김과 평화로의 새로운 길을 여는 사건이다. 다윗왕이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옮김으로써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새로운 나라가 되었듯이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으로 우리에게 여호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고난주간의 첫 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의미는 예수님의 평화의 왕으로 오신 분이시오,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와 섬김과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길을 열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와 희생으로 구원받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다. 평화의 왕, 새로운 계약을 이루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다. 종려주일을 맞아 우리들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겸손한 섬김의 삶을 배워야 한다. 우리에게 여호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용서와 화해의 길을 열어주신 것을 감사드려야 한다. 우님께서 평화의 왕, 구원의 주님이 오신 것을 증거해야 한다. 종려주일 아침, 구원받은 새생명으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 용서와 화해를 열어주신 예수님, 구원의 소식을 증거하고 섬김의 삶을 결단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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