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누가 우리의 왕인가?
본문
주님은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오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같은 목적으로 예루살렘에 몰려들었습니다. 물론 유월절을 지키되 남다른 계획과 뜻이 주님에게 있으셨던 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주님을 환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겉옷을 벗어서 펴는 사람도 있었고 호산나를 외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서 나귀 새끼를 끌고 오는 제자들이나 나귀 새끼를 제공하는 숨은 제자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치 왕을 대하여 하는 것과 같이 번영과 승리의 상징이 되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기고 하였습니다.
의사인 누가는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시는 주님의 심정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눅 9:51). 그 결심이 더 구체화된 내용을 누가는 다시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주근 법이 없느니라”(눅 13:33).
예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죽을 수는 없다는 결의를 단단히 하시고 이 도성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성전에서 일대 개혁을 단행하실 것이고, 유월절 식사를 나누실 것이며,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것이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것이며, 세상 심부름꾼인 제자의 입맞춤을 받게 될 것이고, 세상이 거리끼는 십자가를 지게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장차 자기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는 것을 경고하기 위해 자신의 목에다 멍에를 걸고 다녔습니다. 목전에 닥쳐온 일을 백성들은 모르고 있었고 가르쳐줘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실물 교훈을 하느라고 멍에를 메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죽은 도시 예루살렘과 거기 모여드는 사람들과 거기에 굳게 자리 잡고 있는 각종 사회악을 보시면서 이렇게 탄식하셨다고 마태는 적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마 23:37-38). 도성을 바라보시면서 차라리 우셨다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눅 19:41-44).
지금 도성 안에 계신 분은 사람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분에 대하여 바울은 ‘사람과 같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빌2:7). 그는 근본 여호와 하나님이신데 스스로 자기를 낮추어 종의 모습을 취하셔서 사람이 되셨다고 합니다. 사람이 되셨지만 그 본성은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런 사람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는 죽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성내에 있는 무서운 세력들은 아들이 출생할 때부터 추적을 했는데 당신 발로 들어오셨으니 그야말로 기회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온갖 정치력과 검찰력과 경찰력과 정보기관이 총력전을 펼칠 것이고 관계기관들이 모여서 대책회의를 열고 가장 기술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죽이는 방법이 마련될 것입니다. 이런 작업을 위해서 재력을 가진 이들은 돈주머니를 열게 될 것이고 나간 돈보다 더 많은 이들을 챙기게 될 것입니다. 이런 부조리 속에서 십자가가 세워지고 사람 되신 여호와 하나님은 패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토호들은 그들의 불의를 수단으로 의로우신 여호와 하나님을 패자로 만듭니다.
우리의 왕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누구에게 우리의 충성을 봉헌해야 합니까 불의로 의를 이기는 예루살렘의 토호들입니까 의로우신 채 십자가에 올라가 불의한 세력들에게 패하고 계신 의로우신 그리스도입니까 비참하게 죽으신 그리스도입니까, 아니면 경비병을 파송하여 무덤을 지키는 승자들입니까 우리의 가치관을 어떻게 세워나갈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대답은 명확합니다(빌2:9-11). 시내산 중턱에서 모세는 “여호와께 나아오라”고 말했습니다(출 32:26).
의사인 누가는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시는 주님의 심정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눅 9:51). 그 결심이 더 구체화된 내용을 누가는 다시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주근 법이 없느니라”(눅 13:33).
예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죽을 수는 없다는 결의를 단단히 하시고 이 도성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성전에서 일대 개혁을 단행하실 것이고, 유월절 식사를 나누실 것이며,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것이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것이며, 세상 심부름꾼인 제자의 입맞춤을 받게 될 것이고, 세상이 거리끼는 십자가를 지게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장차 자기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는 것을 경고하기 위해 자신의 목에다 멍에를 걸고 다녔습니다. 목전에 닥쳐온 일을 백성들은 모르고 있었고 가르쳐줘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실물 교훈을 하느라고 멍에를 메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죽은 도시 예루살렘과 거기 모여드는 사람들과 거기에 굳게 자리 잡고 있는 각종 사회악을 보시면서 이렇게 탄식하셨다고 마태는 적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마 23:37-38). 도성을 바라보시면서 차라리 우셨다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눅 19:41-44).
지금 도성 안에 계신 분은 사람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분에 대하여 바울은 ‘사람과 같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빌2:7). 그는 근본 여호와 하나님이신데 스스로 자기를 낮추어 종의 모습을 취하셔서 사람이 되셨다고 합니다. 사람이 되셨지만 그 본성은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런 사람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는 죽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성내에 있는 무서운 세력들은 아들이 출생할 때부터 추적을 했는데 당신 발로 들어오셨으니 그야말로 기회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온갖 정치력과 검찰력과 경찰력과 정보기관이 총력전을 펼칠 것이고 관계기관들이 모여서 대책회의를 열고 가장 기술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죽이는 방법이 마련될 것입니다. 이런 작업을 위해서 재력을 가진 이들은 돈주머니를 열게 될 것이고 나간 돈보다 더 많은 이들을 챙기게 될 것입니다. 이런 부조리 속에서 십자가가 세워지고 사람 되신 여호와 하나님은 패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토호들은 그들의 불의를 수단으로 의로우신 여호와 하나님을 패자로 만듭니다.
우리의 왕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누구에게 우리의 충성을 봉헌해야 합니까 불의로 의를 이기는 예루살렘의 토호들입니까 의로우신 채 십자가에 올라가 불의한 세력들에게 패하고 계신 의로우신 그리스도입니까 비참하게 죽으신 그리스도입니까, 아니면 경비병을 파송하여 무덤을 지키는 승자들입니까 우리의 가치관을 어떻게 세워나갈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대답은 명확합니다(빌2:9-11). 시내산 중턱에서 모세는 “여호와께 나아오라”고 말했습니다(출 3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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