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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본문

오늘도 주의 전에서 함께 예배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큰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막14:32-42의 말씀을 중심으로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사순절 특별 기도회를 통하여 주님의 뒤를 따르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제 한 주간 남아 있지만 그동안 힘을 다해 사순절 특별 기도회에 기도하신 여러분 참으로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런 기도의 시간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정리하고 주님을 따라가는 길은 어떤 일보다 중요하고 값진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십시다. 예수님께서는 8명의 제자들을 아래에 두시고 기도하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더 올라 가셔서 `내 마음이 甚히 苦悶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더 나아가셔서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 지나가기를 구하며 `아바, 아버지여 !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可能하오니 이 盞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願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願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7) 돌아오사 弟子들의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時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 試驗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祈禱하라 ! 마음에는 願이로되 肉身이 弱하도다' 하시고 (39) 다시 나아가 同1한 말씀으로 祈禱하시고 (40)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甚히 疲困함이라 저희가 예수께 무엇으로 對答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41)
 세번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人子가 罪人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者가 가까이 왔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사순절 특별 기도회를 통하여 열심히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처럼 졸기도하고 자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일어나라 함께 가자’ 하십니다.
그동안 힘서 기도하였던 사람도, 혹은 졸며, 잤던 사람도 다 함께 주의 말씀을 듣고 함께 가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하심은
1. 고난의 자리에 함께 가자는 말씀입니다.
세 번의 기도를 마치신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데리고 함께 가지고 하십니다. 이제는 각오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재가 된 대로 하시겠다는 의지에 참 모습으로 가자고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연출하신대로 따라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대로 나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길은 고난이 있는 길입니다.
지금 미국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The passion of the Christ)가 있습니다.
감독 멜 깁슨이 했고 짐 카비젤 · 모니카 벨루치가 출연한 이 영화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사로잡힌 뒤 십자가에 못 박혀 사망할 때까지 12시간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영화 입니다.
할리우드에선 선뜻 제작에 나서는 사람이 없어 결국 극 보수파 가톨릭 신자인 멜 깁슨이 사재 2천5백만 달러를 털어 만들었습니다.
예수님 생존 당시에 쓰던 언어인 아람어와 라틴어로 대사가 처리된 것도 이채롭습니다.
미국에서 유태인이 예수를 죽인 범인으로 그려졌다는 이유로 반유태주의 논란을 불러일으킨 가운데 3주 연속 흥행 1위를 차지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주말 영화 예매 중에 62. 7%로 1위를 기록했습니다.
스크린이 핏빛으로 물들 정도로 처참하게 채찍질 당하는 모습과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을 세밀함과 사실주의적인 방법으로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이 2000년이라는 시간이 경과한 뒤에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비밀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 처형이 지닌 대속적 성격 때문 입니다.
아무런 허물과 죄도 없는 분이 왜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육신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십자가의 처형을 당해야 했던가는 그 당시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두려움 때문에 십자가의 현장에서 도망갔으나 후에 믿음의 눈이 밝아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인류를 위한 구원과 사랑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분이 다름 아닌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었음을 깨닫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이 영화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라 함께 가자하심은 이 고난의 길을 예견 하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고통을 받을 수 있겠는가고 생각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가 만약 그 영화에서 보여준 그 고통을 당한다면 아마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매를 맞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고난을 알고 당하신 것입니다. 이정도의 고난이 있을 것을 다 알고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가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당하는 고통은 갑절의 아픔이 있습니다. 더 괴로운 것입니다.
육신 적으로 당하는 고난도 있었지만 그동안 함께 하였던 사랑하는 제자들이 다 떠나가고 그 가운데 가룟 유다가 배신하는 것을 아시며 당하는 것은 어떻게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한 번 더 살펴보면 일어나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다 떠나갔습니다. 주님은 할 수 있으면 함께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모두 떠나갔습니다. 그중에 베드로가 주님을 멀찍이 따라 갔지만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 조차도 우리 주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알고 당하시는 고난이 얼마나 더 하셨겠습니까
고난은 죄를 씻어준다.
고난은 인생을 씻어 깨끗하게 한다.
고난은 인생을 깊게 만든다.
이마 위에 깊은 주름살이 갈 때
마음속에 깊은 지혜가 생기고,
살을 뚫는 상처가 깊을 때
영혼에서 솟아오르는 향기가 높다.
평면적 세속적 인생관을 가진 사람은
고난의 잔을 마셔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난은 인생을 위대하게 만든다.
고난을 견디어 냄으로써 생명은 한 단계씩 진화한다.
핍박을 받음으로써 오히려 상대방을 포용하는 관대함이 생기고
궁지와 형벌을 참음으로써 자유와 고귀함을 얻을 수 있다.
개인에게나 민족에게나 위대한 성격은 고난의 선물이다.
-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 중에서 -
고난을 당했을 때가 사람의 진가를 증명하는 기회이다. - 에픽테토스 -
자기의 고난은 참아야 하고 남의 고난은 돌봐야 한다. - 채근담 -
(롬8:18)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이제 우리도 이 말씀을 귀담아 듣고 주님과 함께 가야 합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하심은
2. 죽음의 자리에 함께 가자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가자고 하신 것은 고통의 시간까지가 아닙니다. 죽음의 자리에 까지 가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벌써부터 제자들이 알아듣기를 원하셔서 많은 말씀으로 함께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요12:24) 내가 眞實로 眞實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알아듣기 쉽게 말씀 하신 것은 이러한 때가 올 것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기억해야 합니다. 죽어야 삽니다. 죽어야 살아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죽어야 자녀가 삽니다.
지도자들이 죽어야 그 사회가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마16:24) 이에 예수께서 弟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自己를 否認하고 自己 十字架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죽음의 자리에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고난의 자리에도 나가지 못했습니다.
후에 있었던 일인데
베드로는 박해가 시작되자 박해를 피해 로마 성을 벗어나 도망가기 시작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세 번 부인한 것이 항상 그를 괴롭게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 생각을 하며 도망가는데 난데없이 한 사람이 앞길을 가로막고 나타났습니다. 쳐다보니 예수님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쿼바디스 도미네) 하며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나는 네가 도망 나온 로마로 십자가를 다시 지기 위해 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대답을 듣고 베드로는 발걸음을 돌려 로마로 다시 들어갔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특이한 것은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달리어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이 일 후에 기독교는 계속된 핍박 가운데도 부흥되어 결국 313년 로마는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을 모두 드림으로 복음이 전해지기 만을 위해 일했습니다.
한국 초대 교회사에 보면 능력 있고 유명한 부흥사였던 김익두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는 황해도 안악 산골에서 유명한 불량배요 깡패였습니다. 어느 하루도 술 안 마시는 날이 없었고, 사람들과 안 싸우는 날이 없고, 또 그에게 괴로움을 안 당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는 그 일대의 저주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속의 진리도 깨달았습니다. 그는 과거의 죄를 참회하고 세례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김익두는 O월 O일 O시에 죽어서 장사를 지냅니다”하고 부고장을 돌렸습니다. 그 때에 그 부고장을 받아 든 사람은 모두 기뻐하고 시원해 하면서 좋아했습니다. 이 청년 김익두는 과거의 김익두가 아니라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기 위해서 한 일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믿는 그 순간부터 완전히 과거 옛 사람은 벗어지고 새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세례 받는 날이 되어 그는 교회에 갔다 오는데, 동네 사람들은 김익두라는 사람이 정말 죽은 줄만 알고 있었는데 그가 죽기는커녕 성경책을 끼고 교회에 다녀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물어 보았습니다. “김익두씨 당신이 세상을 떠났다고 부고가 왔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묻게 될 때에 그는 “예, 옛날 불량배요 깡패였던 김익두는 오늘 장사 지내고 지금의 김익두는 옛날 김익두가 아닙니다”고 대답을 하고, 사실만이 아니라 실제로 변화 받아 중생의 체험을 하고 능력 있는 부흥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세계적인 성자 어거스틴은 원래 방탕아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를 믿고 회개하여 변화 받은 다음부터는 그 전에 짓던 죄를 생각하면서 오랜 세월을 두고 참회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길을 걷다가 옛날에 같이 지내던 창녀를 만났습니다. 이 여인은 어거스틴을 보자 따라오면서 “여보세요! 당신이 어거스틴이 아닙니까 왜 요사이는 눌러 오지 않습니까” 하며 물을 때, 그는 뒤돌아보지도 아니하고 “네가 전에 부르던 그 어거스틴은 이미 죽었다”고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죽어야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자리에 우리가 함께 가기를 원하십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하심은
3. 부활의 자리에 함께 가자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삼일 만에 다시 살아 부활의 처음 열매가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죄(罪)를 사(赦)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나, 3일 후 그의 육체는 되살아나 무덤을 빠져 나왔으며, 그 후 40일 동안 때때로 영광스러운 모습을 나타내어 제자들의 신앙심을 깊게 하였습니다. 복음서나 바울의 서간(書簡)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임을 증명하고 있으며, 성령강림일(聖靈降臨日)에 베드로가 유대인(人)들에게 한 최초의 설교도 그리스도가 죽은 뒤 부활하였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한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를 뜻하며 그리스도가 보여 준 구원(救援)의 확실성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강조한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게 되어 이 세상이 끝나는 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다고 했습니다.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고 그리고 부활 하셔서 우리에게 이 특권을 누리게 하십니다.
다시 사는 일은 죽음 후에 오는 영광입니다. 누가 이 부활의 주인공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자들입니다.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유명한 선생님 밑에 여러 명의 제자가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정말 형편없는 제자가 한명 있었는데, 학문을 위해서라기보다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불쌍해서 있게 해 주었습니다. 이 제자는 분위기를 자주 깨뜨리곤 했습니다. 말썽을 일으키고 공공연하게 선생님을 욕하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결정적으로 떠나야 할 만큼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선생님보다 오히려 다른 제자들이 그 제자를 좇아내지 않으면 자신들이 나가겠다고 합니다. 그 때 선생님이 제자들에게 밑이 깨어진 항아리에 물을 가득 담으라고 했습니다. 어떤 제자들은 자기 배 위에 항아리를 놓고 물을 담아보기도 했지만 무게에 눌려 채울 수 없었습니다. 다른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마찬가지로 밑이 깨진 항아리를 물로 가득 채울 수는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포기할 때 선생님은 마침내 항아리를 연못에 던지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연못에 던지자마자 깨어진 틈 사이로 물이 스며들어가 항아리는 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선생님의 뜻을 알고 자신들의 생각을 돌이켰습니다. 그 날 밤 말썽 많던 제자가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왜 저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거예요” 선생님이 되묻습니다. “낮에 깨어진 항아리가 어떻게 물이 채워졌느냐” “예, 연못에 던질 때 깨어진 항아리가 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 “나는 깨어진 항아리 같은 너를 내 마음에 던졌단다. ”
깨어진 항아리 같은 우리를 우리 주님께서 주님의 널은 가슴에 던져 넣으셨습니다. 그래서 깨졌지만 물이 채워지게 하셨습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지만 주님의 가슴에 우리를 던져 넣으시고 은혜를 받게 하셔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오늘 ‘일어나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우리 다함께 일어나서 주님과 함께 고난의 길로, 죽음의 길로, 부활의 길로 나가서 승리하는 주의 종들이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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