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호산나를 부를 수 있는 사람
본문
오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마지막으로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
유대인들은 남자나이 12세가 되면 누구든지 일년에 한번씩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서 유월절을 지키도록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12세 때부터 매년 한차례씩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절기를 지켰을 것이며 공생애 기간에는 적어도 3번 이상은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하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모습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그 전에는 예수님께서는 걸어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는데 오늘은 특별히 나귀 새끼를 타시고 들어 가셨습니다.
기원전 500년전에 스가랴 선지자는 9:9절에서 이렇게 예언을 하셨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하셨습니다.
군마를 타고 승리의 팡파례를 울리며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신 것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동물인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신 것이며 겸손한 짐승인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 둘을 맞은편 마을로 보내시어 매인 나귀를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나귀 주인이 무엇에 쓰려고 하느냐 라고 물으면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라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대로 순종하여 나귀를 끌고 온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나귀를 타셨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입고 있던 걷옷을 벗어서 나귀의 등에 깔았고 많은 사람들이 길에 옷을 벗어서 양탄자를 깔듯이 깔았고 승리와 영광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기도 하고 손에 들고 흔들면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앞뒤에서 따라오는 많은 어린이들과 어른들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호산나” 소리를 치며 환영하고 영접하였습니다.
어떤 소년이 학교에 지각을 했습니다.
평소에 한 번도 지각이나 결석을 하지 않던 학생이었기 때문에 선생님은 소년에게 지각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소년은 학교에 오는 도중 어떤 분이 동전을 떨어뜨려 그걸 찾는 것을 기다리다가 늦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물론 동전을 같이 찾아드리는 일도 좋지만, 학교에 오는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미안하다고 말하고 지각하지 않게 와야 한다고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럴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의아해진 선생님이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소년은 자기가 그 동전을 밟고 서 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찾기를 포기할 때까지는 올 수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누구를 믿어야 할지, 우리들의 현실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 같아서 답답합니다.
지금 세계 인구가 61억이랍니다.
그 중에 기독교 인구가 약 19억을 상회한답니다.
가히 30%에 육박합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에 나가도 3명이 지나가면 1명이 기독교 신자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들 주변에서도 보면 전보다 근래에 와서 교인의 수가 많이 넌 것만은 사실입니다.
‘툭’하면 어느 교회 출석하고, 만나보면 집사장로라고 합니다.
거기다가 우리의 현실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목사 또한 많습니다.
세계와 함께 우리나라에 신자가 많고, 직분자가 많고, 목사가 많은 것은 은혜스럽고도 고무적인 일이지 뭐가 잘못입니까
아니요. 잘못 된 것은 없습니다.
신자가 많다는 것이 뭐가 나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을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홍수가 나면 온 사방이 물입니다.
앞에도 물이고 뒤에도 물입니다.
그야말로 물난리가 납니다.
그런데도 홍수가 나서 동서사방이 물 천지가 되면 마실 수 있는 물은 없어집니다.
요즈음은 신자라고 믿고 기대하면 큰 코 다치는 수가 있습니다.
집사장로라고, 목사라고 믿었다가는 낭패 보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넘쳐는 나는데 마실 물은 없기 때문입니다.
실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신자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다운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상대를 도우려고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남이 애써 찾을 때, 그가 지칠 때까지 밟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나 신자나 모두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여기저기에서 ‘호산나’ 라고 떠드는 소리가 넘쳐납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뜻의 히브리어 ‘호시아 나’를 음역한 것으로 본래 구원에 대한 ‘간구’, ‘기원’을 포함하여 찬양이나 기쁨의 환호를 말합니다.
여기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성에 마치 시골 초등학교의 가장 행렬 비슷한 초라한 모습으로 입성하시는 주님을 향하여 ‘호산나’ 라고 부르는 구호의 홍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종려가지와 자신의 겉옷까지도 길에 펴며 ‘호산나’를 외쳤던 저들의 다수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찬성하는 소리로 바뀐 이유는 무엇입니까
부패한 유대교적 전통과 세대를 거듭한 사회적인 병리현상에 깊이 젖은 모든 사람들의 심리 속에 자리 잡은 고질적인 사고는 예수 그리스도조차 그 틀에 집어넣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적인 구세주로서 ‘호산나’를 부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저들은 건강한 신앙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저들은 건강한 예배자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병적인 사회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저들 또한 병적인 사고의 신앙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환호 속에는 진정한 인생의 주인을 만난 기쁨과, 진리와 의로 자신들을 다스려 주실 왕에 대한 예의의 희열이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를 통하여 자신들이 지금까지 민족적으로 바래왔던 그 어떤 것들을 얻고 싶은 욕망으로 충전되어 있었습니다.
그 목적을 이룰 수만 있다면 예수가 나서서 지금까지 보여주셨던 그 엄청난 능력으로 어떤 일을 해도 상관이 없는 저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하게 선택되었다고 믿는 자신들이 편하게 살기 위해서는 그 어떤 부적절한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상대를 무너뜨릴 수 있는 메시아가 오셔야 한다는 편견과 신념을 만족시켜주기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를 바라보며 ‘호산나’를 부르고 있으나 사실은 저들에게 필요한, 자신들이 요구하는 그 편견과 신념을 만족시킬 우상을 만들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기억하십니까
그 첫 계명이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라’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
여기 이사야서를 비롯한 성경 여러 곳에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신 사상을 천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우상을 다른 이방 종교의 신상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이들은 남의 불상을 훼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우상이 이방 종교의 신상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율배반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유일신 되심을 천명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른 신상을 운운하시는 것은 그들의 신 자체를 인정하시는 자기모순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두 번째 계명을 통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진의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해답은 출애굽기가 직접 제시합니다.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출 20:23)”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신상은 절대로 다른 종교의 신상이 아니라, 하늘이나 땅에 있는 모습들로 여호와 하나님의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이 만드는 그 어떤 틀 속에 갇히시는 분이 아니라 는 뜻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세상의 유한한 것으로 무한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표시할 수 있겠습니까
신약의 그 유명한 바울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그 누구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열심이었지만, 그리고 자기 손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신상을 만든 적은 없었지만, 그가 믿었던 유대교의 여호와 하나님은 성경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그의 편견과 신념이 만들어 낸 여호와 하나님의 신상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좌충우돌하고 다녔지만 오늘 ‘호산나’를 부르는 사람들처럼 우상 숭배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도대체 예수를 향해 참으로 ‘호산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입니까
한 마디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왕으로 모시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아니, 신자 치고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그분을 항상 주로, 왕으로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의미를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자신의 편견과 신념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신상을 만들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합니다.
불교의 특징 중 하나는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고 내적마음을 강조합니다.
창조주가 있다면 그대의 내적 마음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위대한 종교인일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가 세상에 창조주가 계시지 않는다고 해서 주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가 비록 장삼 하나만 걸치고 한 평생을 살며 인생을 연구해왔지만 결국 그는 진정한 주인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왜입니까 언제나 자신이 자신의 주인으로 행세하는 자에겐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을 계시하시지 않기 때문에 발견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헛소리하지요.
방자해지지요.
인생 그 자신이 창조주라고... 그 자신이 우상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로마 카톨릭 교황이 교황으로 등극할 때 쓰는 모자에 박혀 있는 모든 보석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요한 바오로 2세가 취임하던 그 때의 가격으로 우리 돈 65억 원이랍니다.
교황이 타는 승용차는 독일 벤츠사가 특별 제작한 자동차입니다.
보통 자동차는 타려고 하면 낮기 때문에, 미국 대통령도 일단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 벤츠는 교황이 앞에 서면 자동차의 천장이 열리고 그대로 서서 자동차를 타면 곧 저절로 닫힙니다.
그 자동차에는 교황의 문양이 새겨져 있답니다.
그 왕관을 쓰고 그 왕의 옷을 입고서, 그가 진정 예수를 주로 섬기며, 왕으로 모시며, 그분을 향해 ‘호산나’ 라고 부르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혹시 여러분들 중에 그건 교황의 문제인데 왜 우리에게 따지냐고 물으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러면 예수를 주로 부르는 우리를 보십시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의 참 주인은 누구이십니까
누가 여러분을 오늘 이리로 부르셨습니까
당연히 그분을 주로 고백하니까 그분이 주인이시라구요
혹시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어 있지는 않으십니까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자신의 편견과 신념의 틀에 예수님을 가두어 두고 그분을 향해 ‘호산나’ 라고 외치는 것은 아니십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건 절대로 잘못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3절). ”
무엇이든 그분이 주인이십니다.
그분이 쓰시겠다면 무엇이든 내 놓습니다.
그것도 즉시 말입니다.
그건 왕의 명령입니다.
내 인생의 절대 가치가 그분입니다.
거기엔 이유를 물을 필요도, 사람의 편견도, 자신의 그 어떤 신념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내 인생의 주인이신 그분의 말씀만 있을 뿐입니다. 나는 거기에 따를 뿐입니다.
비록 그분이 겸손히 나귀새끼를 타고 이해 안 되는 입성을 하셔도, 그리고 나에게 따르라 하셔도 나는 이유를 달지 아니하고 거기에 승리가 있는 줄 믿을 것입니다.
한때 왁자지껄하는 형식으로 겉옷을 펴며, 요란스레 나뭇가지를 꺾어 길에 펴며, 그렇게 그 분을 왕으로 모신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서는 그 많은 재물과 시간을 낭비하면서도 그분을 위해 아주 작은 것을 드리고는 마치 할 일을 다 한 것 같은 모습의 외식하는 신앙으로는 그분을 향해 ‘호산나’ 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우리 자신이 주인이 되어서 우리들 속에서 끓어오르는 온갖 욕망의 소리들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다 쏟아놓으며 떠들썩하는 정도에 머문다면, 그 순간에는 우리가 아무리 ‘호산나’를 외치며 겉옷을 내고 나뭇가지를 길에 까는 척 봉사를 해도 그것은 진정한 섬김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자아만족에 불과할 것입니다.
아마 그 순간엔 진리이신 주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주인 맞습니까
그분이 여러분의 왕이십니까
지금까지 여러분은 신앙적인 편견과 신념의 틀에 그분을 가두지 않았습니까
이제라도 우리가 묵묵히 욕망의 소리를 내려놓고, 조용히 내 인생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절대가치를 두십니다.
무엇을 하던 그분을 왕으로 섬기는 우선순위에 두십시다.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는 승리의 입성을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진정으로 ‘호산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남자나이 12세가 되면 누구든지 일년에 한번씩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서 유월절을 지키도록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12세 때부터 매년 한차례씩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절기를 지켰을 것이며 공생애 기간에는 적어도 3번 이상은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하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모습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그 전에는 예수님께서는 걸어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는데 오늘은 특별히 나귀 새끼를 타시고 들어 가셨습니다.
기원전 500년전에 스가랴 선지자는 9:9절에서 이렇게 예언을 하셨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하셨습니다.
군마를 타고 승리의 팡파례를 울리며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신 것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동물인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신 것이며 겸손한 짐승인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 둘을 맞은편 마을로 보내시어 매인 나귀를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나귀 주인이 무엇에 쓰려고 하느냐 라고 물으면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라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대로 순종하여 나귀를 끌고 온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나귀를 타셨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입고 있던 걷옷을 벗어서 나귀의 등에 깔았고 많은 사람들이 길에 옷을 벗어서 양탄자를 깔듯이 깔았고 승리와 영광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기도 하고 손에 들고 흔들면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앞뒤에서 따라오는 많은 어린이들과 어른들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호산나” 소리를 치며 환영하고 영접하였습니다.
어떤 소년이 학교에 지각을 했습니다.
평소에 한 번도 지각이나 결석을 하지 않던 학생이었기 때문에 선생님은 소년에게 지각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소년은 학교에 오는 도중 어떤 분이 동전을 떨어뜨려 그걸 찾는 것을 기다리다가 늦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물론 동전을 같이 찾아드리는 일도 좋지만, 학교에 오는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미안하다고 말하고 지각하지 않게 와야 한다고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럴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의아해진 선생님이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소년은 자기가 그 동전을 밟고 서 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찾기를 포기할 때까지는 올 수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누구를 믿어야 할지, 우리들의 현실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 같아서 답답합니다.
지금 세계 인구가 61억이랍니다.
그 중에 기독교 인구가 약 19억을 상회한답니다.
가히 30%에 육박합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에 나가도 3명이 지나가면 1명이 기독교 신자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들 주변에서도 보면 전보다 근래에 와서 교인의 수가 많이 넌 것만은 사실입니다.
‘툭’하면 어느 교회 출석하고, 만나보면 집사장로라고 합니다.
거기다가 우리의 현실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목사 또한 많습니다.
세계와 함께 우리나라에 신자가 많고, 직분자가 많고, 목사가 많은 것은 은혜스럽고도 고무적인 일이지 뭐가 잘못입니까
아니요. 잘못 된 것은 없습니다.
신자가 많다는 것이 뭐가 나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을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홍수가 나면 온 사방이 물입니다.
앞에도 물이고 뒤에도 물입니다.
그야말로 물난리가 납니다.
그런데도 홍수가 나서 동서사방이 물 천지가 되면 마실 수 있는 물은 없어집니다.
요즈음은 신자라고 믿고 기대하면 큰 코 다치는 수가 있습니다.
집사장로라고, 목사라고 믿었다가는 낭패 보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넘쳐는 나는데 마실 물은 없기 때문입니다.
실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신자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다운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상대를 도우려고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남이 애써 찾을 때, 그가 지칠 때까지 밟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나 신자나 모두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여기저기에서 ‘호산나’ 라고 떠드는 소리가 넘쳐납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뜻의 히브리어 ‘호시아 나’를 음역한 것으로 본래 구원에 대한 ‘간구’, ‘기원’을 포함하여 찬양이나 기쁨의 환호를 말합니다.
여기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성에 마치 시골 초등학교의 가장 행렬 비슷한 초라한 모습으로 입성하시는 주님을 향하여 ‘호산나’ 라고 부르는 구호의 홍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종려가지와 자신의 겉옷까지도 길에 펴며 ‘호산나’를 외쳤던 저들의 다수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찬성하는 소리로 바뀐 이유는 무엇입니까
부패한 유대교적 전통과 세대를 거듭한 사회적인 병리현상에 깊이 젖은 모든 사람들의 심리 속에 자리 잡은 고질적인 사고는 예수 그리스도조차 그 틀에 집어넣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적인 구세주로서 ‘호산나’를 부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저들은 건강한 신앙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저들은 건강한 예배자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병적인 사회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저들 또한 병적인 사고의 신앙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환호 속에는 진정한 인생의 주인을 만난 기쁨과, 진리와 의로 자신들을 다스려 주실 왕에 대한 예의의 희열이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를 통하여 자신들이 지금까지 민족적으로 바래왔던 그 어떤 것들을 얻고 싶은 욕망으로 충전되어 있었습니다.
그 목적을 이룰 수만 있다면 예수가 나서서 지금까지 보여주셨던 그 엄청난 능력으로 어떤 일을 해도 상관이 없는 저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하게 선택되었다고 믿는 자신들이 편하게 살기 위해서는 그 어떤 부적절한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상대를 무너뜨릴 수 있는 메시아가 오셔야 한다는 편견과 신념을 만족시켜주기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를 바라보며 ‘호산나’를 부르고 있으나 사실은 저들에게 필요한, 자신들이 요구하는 그 편견과 신념을 만족시킬 우상을 만들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기억하십니까
그 첫 계명이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라’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
여기 이사야서를 비롯한 성경 여러 곳에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신 사상을 천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우상을 다른 이방 종교의 신상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이들은 남의 불상을 훼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우상이 이방 종교의 신상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율배반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유일신 되심을 천명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른 신상을 운운하시는 것은 그들의 신 자체를 인정하시는 자기모순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두 번째 계명을 통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진의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해답은 출애굽기가 직접 제시합니다.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출 20:23)”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신상은 절대로 다른 종교의 신상이 아니라, 하늘이나 땅에 있는 모습들로 여호와 하나님의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이 만드는 그 어떤 틀 속에 갇히시는 분이 아니라 는 뜻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세상의 유한한 것으로 무한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표시할 수 있겠습니까
신약의 그 유명한 바울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그 누구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열심이었지만, 그리고 자기 손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신상을 만든 적은 없었지만, 그가 믿었던 유대교의 여호와 하나님은 성경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그의 편견과 신념이 만들어 낸 여호와 하나님의 신상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좌충우돌하고 다녔지만 오늘 ‘호산나’를 부르는 사람들처럼 우상 숭배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도대체 예수를 향해 참으로 ‘호산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입니까
한 마디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왕으로 모시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아니, 신자 치고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그분을 항상 주로, 왕으로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의미를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자신의 편견과 신념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신상을 만들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합니다.
불교의 특징 중 하나는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고 내적마음을 강조합니다.
창조주가 있다면 그대의 내적 마음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위대한 종교인일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가 세상에 창조주가 계시지 않는다고 해서 주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가 비록 장삼 하나만 걸치고 한 평생을 살며 인생을 연구해왔지만 결국 그는 진정한 주인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왜입니까 언제나 자신이 자신의 주인으로 행세하는 자에겐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을 계시하시지 않기 때문에 발견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헛소리하지요.
방자해지지요.
인생 그 자신이 창조주라고... 그 자신이 우상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로마 카톨릭 교황이 교황으로 등극할 때 쓰는 모자에 박혀 있는 모든 보석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요한 바오로 2세가 취임하던 그 때의 가격으로 우리 돈 65억 원이랍니다.
교황이 타는 승용차는 독일 벤츠사가 특별 제작한 자동차입니다.
보통 자동차는 타려고 하면 낮기 때문에, 미국 대통령도 일단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 벤츠는 교황이 앞에 서면 자동차의 천장이 열리고 그대로 서서 자동차를 타면 곧 저절로 닫힙니다.
그 자동차에는 교황의 문양이 새겨져 있답니다.
그 왕관을 쓰고 그 왕의 옷을 입고서, 그가 진정 예수를 주로 섬기며, 왕으로 모시며, 그분을 향해 ‘호산나’ 라고 부르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혹시 여러분들 중에 그건 교황의 문제인데 왜 우리에게 따지냐고 물으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러면 예수를 주로 부르는 우리를 보십시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의 참 주인은 누구이십니까
누가 여러분을 오늘 이리로 부르셨습니까
당연히 그분을 주로 고백하니까 그분이 주인이시라구요
혹시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어 있지는 않으십니까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자신의 편견과 신념의 틀에 예수님을 가두어 두고 그분을 향해 ‘호산나’ 라고 외치는 것은 아니십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건 절대로 잘못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3절). ”
무엇이든 그분이 주인이십니다.
그분이 쓰시겠다면 무엇이든 내 놓습니다.
그것도 즉시 말입니다.
그건 왕의 명령입니다.
내 인생의 절대 가치가 그분입니다.
거기엔 이유를 물을 필요도, 사람의 편견도, 자신의 그 어떤 신념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내 인생의 주인이신 그분의 말씀만 있을 뿐입니다. 나는 거기에 따를 뿐입니다.
비록 그분이 겸손히 나귀새끼를 타고 이해 안 되는 입성을 하셔도, 그리고 나에게 따르라 하셔도 나는 이유를 달지 아니하고 거기에 승리가 있는 줄 믿을 것입니다.
한때 왁자지껄하는 형식으로 겉옷을 펴며, 요란스레 나뭇가지를 꺾어 길에 펴며, 그렇게 그 분을 왕으로 모신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서는 그 많은 재물과 시간을 낭비하면서도 그분을 위해 아주 작은 것을 드리고는 마치 할 일을 다 한 것 같은 모습의 외식하는 신앙으로는 그분을 향해 ‘호산나’ 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우리 자신이 주인이 되어서 우리들 속에서 끓어오르는 온갖 욕망의 소리들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다 쏟아놓으며 떠들썩하는 정도에 머문다면, 그 순간에는 우리가 아무리 ‘호산나’를 외치며 겉옷을 내고 나뭇가지를 길에 까는 척 봉사를 해도 그것은 진정한 섬김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자아만족에 불과할 것입니다.
아마 그 순간엔 진리이신 주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주인 맞습니까
그분이 여러분의 왕이십니까
지금까지 여러분은 신앙적인 편견과 신념의 틀에 그분을 가두지 않았습니까
이제라도 우리가 묵묵히 욕망의 소리를 내려놓고, 조용히 내 인생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절대가치를 두십니다.
무엇을 하던 그분을 왕으로 섬기는 우선순위에 두십시다.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는 승리의 입성을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진정으로 ‘호산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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