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승리의 입성
본문
예수님이 사신 33년은 역사의 중심이며 전환점이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더 중요한 기간은 공생애 3년 3개월이었을 것이고 다시 이 기간 중에 더욱 중요한 기간을 말한다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1주일간의 기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간에 해당하는 종려주일로부터 부활주일의 한 주간을 특별히 거룩한 주간 혹은 고난주간으로 지키면서 그리스도의 수난의 의미를 회개하는 자세로 되새겨 보는 것입니다.
오늘은 세계적으로 모든 교회가 뜻 있게 지키는 종려 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생애 중에 제일 즐겁고 화려한 날의 한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명절이 가까이 온 때에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심으로부터 고난 주간이 시작됩니다.
이때 예루살렘에는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30Km이내에 있는 유대인으로 20세 이상된 남자는 다 올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약 250만명이 모이게 된답니다.
예수님은 역사적인 구속사역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질 수 있는 이 좋은 시기를 택하여, 십자가를 지고 구속사업을 완성하시려고 여리고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오라 오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 가까이 감람산 벳바게란 마음에 도착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맞은 편 마을에 가서 나귀 새끼를 한 마리가 있으니 주인한테 이야기하고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다니에 제자를 보내어 나귀를 몰고 오게하여 그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고 있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기분이 좋아서 어쩔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옷을 벗어 안장을 만들고 남은 것을 길가에 깔아 카페트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기뻐하였습니다.
나면서부터 환란과 핍박이 겹쳤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많은 무리들이 "찬송하리로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라고 영접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셔야 할 십자가를 바라보며 올라가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내용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행하신 능력과 기적을 보고 사람들은 따라 다녔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행해진 기적으로 주어질 행복만을 위하여 이렇게 왕으로 모시려고 옹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이 보니까 죽었던 사람을 살리고 보리떡 다섯 개로 많은 사람을 먹고 남게 하고 바다도 잔잔케 하는 등 여러 가지 이적을 볼 때, 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잘못된 사상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슥 9:9에 예언한대로 나귀새끼를 타고 지금 입성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과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겉옷을 길가에 펴고 나무 가지를 꺾어서 손을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왕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김소월의 시 '진달래 꽃'에서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의 한 장면을 연상시켜 줍니다.
우리는 이 날을 종려 주일로 기념하여 지킵니다.
이 날은 승리적인 입성의 날임에 틀림없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네 왕이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리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그리스도는 왕입니다.
그러나 그의 왕국은 지상에서의 그의 선교기간동안 사람들에게 잘못 이해되어 왔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세상의 왕으로 군림할 자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그러한 왕이 되기를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왕으로서의 상징의 의미는 인간 영혼의 깊은 요구에 응답하는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나귀와 예수님과 나무 가지의 관계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탔습니다.
여기 나귀새끼의 의미를 스가랴 9:9에서 찾아보면 나귀새끼는 '겸손의 상징'이며 그리스도인의 승리적인 삶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사는 삶의 기본적인 자세는 마치 주님이 쓰시는 이 새끼나귀와 같이 되는데 있습니다.
비록 힘이 모자라 끙끙 앓으면서도 힘을 다해 주님을 등에 모시고 사는 생활입니다.
이 새끼나귀의 삶은 때로는 예수 믿는 것이 괴롭고 부담스러울찌라도 오히려 예수님(십자가)을 등에 진 기쁨으로 사는 삶입니다.
만일 등에 진 이 십자가가 싫다고 내려놓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미는 없어집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자기 자신이 겸손히 엎드려져야 주님이 내 위(속)에 왕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이것을 못 참고 엎드려 있지 못하겠다고 벌떡 일어서면 그만 내 등에 탄 주님은 떨어질 것입니다.
즉 나의 삶은 예수가 없는 모습이 되고 만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 없는 신자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는 십자가를 등에 지고 사는 자세가 아니라 혹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정도이거나 장식품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혹 십자가를 짓밟고 다니는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종려 주일,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의 모습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그리고 십자가에 대해서 이 찬송가의 가사와 같은 결심과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 가도다. "(367장)
예수님은 왕중의 왕이셨지만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였습니다.
보통 왕의 행차 같은 팡파르도 없었습니다.
많은 군대의 호위도 없었습니다. 갈릴리 어부들과 군중들이었습니다.
엄청난 위엄과 장엄한 의식도 없었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겸손한 모습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서 사실 떼에도 겸손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나귀 새기를 타심으로 겸손한 모습으로 입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겸손을 최종적으로 보이셨습니다.
왕 중의 왕이시요, 온 세계와 우주 만물을 지배하시는 분이지만 겸손의 도를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오늘 주님의 이러한 겸손이 우리의 겸손이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 들어 사용하신다고 하셨습니다(베던5:5-6).
누가 겸손한 자입니까
자신의 무능함 중심에서부터 솔직하게 인정하는 자입니다.
그리고서 주님은 온전히 의지하는 자입니다.
겸손한 자는 자신에게는 의지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진정으로 압니다.
그러니 주님밖에는 의지할 이가 없는 것입니다.
모세도 강할 때보다는 약해 졌을 때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쓰셨습니다.
스스로 강한 자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는 쓸모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겸손의 도를 바로 배워야 합니다.
가난할 때에는 겸손하다가 재물이 좀 생기면 교만해지는 자가 많습니다.
그래서 방탕합니다.
낮을 때에는 겸손하다가 조금 지위가 높아지면 방자해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영적으로 어릴 때에는 겸손하다가 신앙이 조금 자라면 교만해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모두 여호와 하나님께 제대로 쓰임 받지 못합니다.
영적인 감격과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종려 주일을 맞이해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을 통해 겸손을 더 배우는 기회가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예수님께서 하신 입성의 결단을 통해서 충성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겉옷을 벗어 길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면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인간이란 참으로 간사하여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하던 이들이 몇 일 사이에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아우성치는 행동으로 바꿔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요1:11에 보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했다'고 하신 말씀과 같은 행동입니다.
이렇게 영접지 아니한 백성이었지만 이러한 백성들에게 주님은 오히려 자신을 드리기로 한 것입니다.
로마의 투기사들이 야수들과 싸우기 위해 투기장에 섰을 때, 그들은 원형 극장에 모인 많은 군중들에게 '죽을 사람이 문안합니다'라고 인사했듯이 예수님은 죽음을 기대하시며 사셨으나 그 죽어야 한다는 사실에 놀라움이 없습니다. 그는 그 죽음을 결코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요10:17-18에 있는 대로 '내가 목숨을 버림이나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는 자의적 죽음의 선언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한가지 중요한 교훈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충성이 어디까지 미쳐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그 답은, '죽기까지의 충성'입니다.
♪519장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주가 물어 보실 때
죽기까지 따르오리 저들 대답하였다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당신의 형상 만드소서
주인 인도 따라 살아 갈 동안 사랑과 충성 늘 바치오리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충성한다고들 하면서 그들의 충성이 그들의 안락과 인기와 안이와 쾌락을 침해하지 않는 한도 안에 국한되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주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이 사건을 묵상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충성을 재확인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딤전1:12절에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충성되어 여겨서 오늘 귀한 직분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누구나 교회 일을 하고 싶은 사람별로 없습니다.
다 편하게 믿고 싶고 편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간 것처럼 우리도 자신을 주님께로 끌고 가야 합니다.
억지로라도 십자가 지고는 일꾼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교회를 섬길 때는 우리의 고집은 좀 꺾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필요하다 하면 좀 고집을 꺾고 양보 할 줄도 알고 자신을 죽일 줄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일하는 동기가 주님을 위해서요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한 것이 라면 우리는 자신의 주장대로 하려는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나를 쓰시는 분의 뜻대로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
복음송가대로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끝으로 이들이 사용한 나무는 두 가지 대조적 의미를 가진 나무였음이 주목됩니다.
종려나무는 기쁨의 상징(레 23:40), 승리의 상징, 정복의 상징으로 표시합니다.
이 상징적 의미는 초막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올 때에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살았든 것을 기념하는 날이 초막절입니다.
또 이때는 1년 동안 수고한 모든 곡식을 다 거두기를 마치면서 지키는 절기이므로 수장절이라고 합니다.
이 절기의 첫날에 사람들은 어떤 나무들의 크고 작은 가지들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 반드시 가져와서 즐거워했습니다.
레23:40절에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과 실과와 종려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일동안 즐거워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무의 두 종류 즉 종려나무와 시냇가의 버들류를 특히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정반대 되는 두 종류의 경험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종려나무가 기쁨과 승리를 상징하면서 결혼식 때 사용된다면 버드나무는 슬픔과 굴욕과 사로잡힘과 죽음을 상징하는 나무로 장례식 때 사용됩니다.
그런데 왜 이 두 가지 나무를 함께 사용했겠습니까
그 이유는 이것이 바로 '고난의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를 연결시켜 보면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이 깊은 슬픔의 심연 속에서 인내함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나타냅니다(욥 2:10, 13:15).
꽃가게에 가보면 화환과 꽃다발 있습니다.
이것은 어울리지 않는 극단적인 대조입니다.
우리는 성공하기도 하였고 승리하기도 했으면 축복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시에 찔리기도 하며, 아프기도 하고, 슬픔을 당하기도 하고 이별하기도 하고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우리들의 미소와 한숨, 쾌락과 고통, 그리고 승리와 눈물이 뒤섞여 있습니다.
우리들이 기뻐할 때에는 언제나 고통이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초막절의 첫째 날에 유대인들은 반드시 종려나무와 버드나무를 함께 가져와서 칠일동안 주님 앞에서 즐거워하였습니다.
두 나무를 감사찬미를 부르면서 바쳐야 합니다.
종려나무를 감사합시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쉬운 일이라고 사람들이 말하기 쉽습니다만 이 수간에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우리는 버드나무를 감사합시다.
실패와 낭패를 당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기란 무척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종려나무와 마찬가지로 버드나무에 대해서도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 때에 우리는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 앞에 우리들의 종려나무들 즉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삶에 유익한 것들을 가져와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에 대하여 주님께 찬양을 드린다면 주님께서는 더 많은 선물들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들의 버드나무들 - 삶 속에서 경험하는 어둡고 불가해한 일들을 -주님 앞에 가지고 나와서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변함 없는 사랑과 지혜를 인하여 주님을 찬미한다면 마리아가 동산지기로 오해한 주님께서 버드나무들을 평화의 종려나무들로 변형시킬실 것입니다.
오늘날 만약 우리들이 우리들의 종려나무를 가지고 있다면 지나치게 우쭐대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걸어갑시다.
우리는 다음 순간에 버드나무들이 굽어 있는 길을 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버드나무 길을 가게 될 때에 시들지 않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모든 축복을 베풀어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들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버드나무를 가지고 있다면 마치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나쁘게 만드신 것처럼 불평하지 맙시다.
옛날 유대인들은 종려나무를 보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한 것처럼 버드나무를 보고도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사도바울과 같이 범사에 감사할 수 있을 때에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승리적인 삶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승리적인 입성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나귀새끼를 통해서 겸손을 보여주며, 예수님께서 하신 입성의 결단을 통해서 충성을 보여 줍니다.
또한 나무 가지의 의미에서 인내를 보여 줍니다.
이 종려 주일 후 한 주간 즉 고난 주일 동안 예수님의 고난의 승리적 의미를 이 3가지면으로 다시 한번 우리 모두가 깊이 생각해 보고 우리 자신의 생활 원리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폈다고 하는 것은 최고의 존경과 최고의 존귀를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가 기뻐하시는 일, 그를 존귀케 하는 일이라면 어떠한 희생도 각오하고 드릴 줄 알아야 될 것입니다.
갈 1:10에 보면 바울도 '나는 사람에게 좋게 하기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산다'고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오늘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 이것은 곧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라고 어떤 신학자는 말했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만왕의 왕, 심판주로 나의 구주가 되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맞을 준비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예수님의 지배만 받으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평강의 왕이시며 의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
우리의 삶의 승리는 겸손으로 말미암아 오는 것을 믿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이 좀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주님께 능력과 지혜를 구하며 십자가를 등에 진 기쁨으로 살게 하옵소서.
행여나 저들이 미련하거나 교만 방자하여 십자가를 짓밟고 다닐까 두렵사오니 주님! 때마다 일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말씀의 거울 앞에 비춰보게 하옵소서.
주님 ! 주께서 죽기까지 저들을 사랑해 주셨사오니 이제 저들도 주께 죽기까지 충성하는 사람들로 삼아주시옵소서.
우리의 삶이 형통할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한결 같게 해 주시옵소서.
고난의 주님 ! 주께서 당하신 고난의 신비를 깨닫게 하시사 저희도 주님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난도 달게 받을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언제 주님 다시 오실는지 저들은 알 수 없사오나 주님 오실 그 날을 잘 준비하였다가 반가이 나가 맞게 해 주시옵소서.
특히 그 중에서도 더 중요한 기간은 공생애 3년 3개월이었을 것이고 다시 이 기간 중에 더욱 중요한 기간을 말한다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1주일간의 기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간에 해당하는 종려주일로부터 부활주일의 한 주간을 특별히 거룩한 주간 혹은 고난주간으로 지키면서 그리스도의 수난의 의미를 회개하는 자세로 되새겨 보는 것입니다.
오늘은 세계적으로 모든 교회가 뜻 있게 지키는 종려 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생애 중에 제일 즐겁고 화려한 날의 한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명절이 가까이 온 때에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심으로부터 고난 주간이 시작됩니다.
이때 예루살렘에는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30Km이내에 있는 유대인으로 20세 이상된 남자는 다 올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약 250만명이 모이게 된답니다.
예수님은 역사적인 구속사역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질 수 있는 이 좋은 시기를 택하여, 십자가를 지고 구속사업을 완성하시려고 여리고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오라 오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 가까이 감람산 벳바게란 마음에 도착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맞은 편 마을에 가서 나귀 새끼를 한 마리가 있으니 주인한테 이야기하고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다니에 제자를 보내어 나귀를 몰고 오게하여 그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고 있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기분이 좋아서 어쩔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옷을 벗어 안장을 만들고 남은 것을 길가에 깔아 카페트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기뻐하였습니다.
나면서부터 환란과 핍박이 겹쳤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많은 무리들이 "찬송하리로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라고 영접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셔야 할 십자가를 바라보며 올라가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내용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행하신 능력과 기적을 보고 사람들은 따라 다녔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행해진 기적으로 주어질 행복만을 위하여 이렇게 왕으로 모시려고 옹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이 보니까 죽었던 사람을 살리고 보리떡 다섯 개로 많은 사람을 먹고 남게 하고 바다도 잔잔케 하는 등 여러 가지 이적을 볼 때, 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잘못된 사상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슥 9:9에 예언한대로 나귀새끼를 타고 지금 입성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과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겉옷을 길가에 펴고 나무 가지를 꺾어서 손을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왕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김소월의 시 '진달래 꽃'에서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의 한 장면을 연상시켜 줍니다.
우리는 이 날을 종려 주일로 기념하여 지킵니다.
이 날은 승리적인 입성의 날임에 틀림없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네 왕이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리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그리스도는 왕입니다.
그러나 그의 왕국은 지상에서의 그의 선교기간동안 사람들에게 잘못 이해되어 왔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세상의 왕으로 군림할 자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그러한 왕이 되기를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왕으로서의 상징의 의미는 인간 영혼의 깊은 요구에 응답하는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나귀와 예수님과 나무 가지의 관계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탔습니다.
여기 나귀새끼의 의미를 스가랴 9:9에서 찾아보면 나귀새끼는 '겸손의 상징'이며 그리스도인의 승리적인 삶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사는 삶의 기본적인 자세는 마치 주님이 쓰시는 이 새끼나귀와 같이 되는데 있습니다.
비록 힘이 모자라 끙끙 앓으면서도 힘을 다해 주님을 등에 모시고 사는 생활입니다.
이 새끼나귀의 삶은 때로는 예수 믿는 것이 괴롭고 부담스러울찌라도 오히려 예수님(십자가)을 등에 진 기쁨으로 사는 삶입니다.
만일 등에 진 이 십자가가 싫다고 내려놓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미는 없어집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자기 자신이 겸손히 엎드려져야 주님이 내 위(속)에 왕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이것을 못 참고 엎드려 있지 못하겠다고 벌떡 일어서면 그만 내 등에 탄 주님은 떨어질 것입니다.
즉 나의 삶은 예수가 없는 모습이 되고 만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 없는 신자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는 십자가를 등에 지고 사는 자세가 아니라 혹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정도이거나 장식품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혹 십자가를 짓밟고 다니는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종려 주일,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의 모습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그리고 십자가에 대해서 이 찬송가의 가사와 같은 결심과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 가도다. "(367장)
예수님은 왕중의 왕이셨지만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였습니다.
보통 왕의 행차 같은 팡파르도 없었습니다.
많은 군대의 호위도 없었습니다. 갈릴리 어부들과 군중들이었습니다.
엄청난 위엄과 장엄한 의식도 없었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겸손한 모습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서 사실 떼에도 겸손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나귀 새기를 타심으로 겸손한 모습으로 입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겸손을 최종적으로 보이셨습니다.
왕 중의 왕이시요, 온 세계와 우주 만물을 지배하시는 분이지만 겸손의 도를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오늘 주님의 이러한 겸손이 우리의 겸손이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 들어 사용하신다고 하셨습니다(베던5:5-6).
누가 겸손한 자입니까
자신의 무능함 중심에서부터 솔직하게 인정하는 자입니다.
그리고서 주님은 온전히 의지하는 자입니다.
겸손한 자는 자신에게는 의지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진정으로 압니다.
그러니 주님밖에는 의지할 이가 없는 것입니다.
모세도 강할 때보다는 약해 졌을 때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쓰셨습니다.
스스로 강한 자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는 쓸모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겸손의 도를 바로 배워야 합니다.
가난할 때에는 겸손하다가 재물이 좀 생기면 교만해지는 자가 많습니다.
그래서 방탕합니다.
낮을 때에는 겸손하다가 조금 지위가 높아지면 방자해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영적으로 어릴 때에는 겸손하다가 신앙이 조금 자라면 교만해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모두 여호와 하나님께 제대로 쓰임 받지 못합니다.
영적인 감격과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종려 주일을 맞이해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을 통해 겸손을 더 배우는 기회가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예수님께서 하신 입성의 결단을 통해서 충성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겉옷을 벗어 길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면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인간이란 참으로 간사하여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하던 이들이 몇 일 사이에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아우성치는 행동으로 바꿔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요1:11에 보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했다'고 하신 말씀과 같은 행동입니다.
이렇게 영접지 아니한 백성이었지만 이러한 백성들에게 주님은 오히려 자신을 드리기로 한 것입니다.
로마의 투기사들이 야수들과 싸우기 위해 투기장에 섰을 때, 그들은 원형 극장에 모인 많은 군중들에게 '죽을 사람이 문안합니다'라고 인사했듯이 예수님은 죽음을 기대하시며 사셨으나 그 죽어야 한다는 사실에 놀라움이 없습니다. 그는 그 죽음을 결코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요10:17-18에 있는 대로 '내가 목숨을 버림이나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는 자의적 죽음의 선언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한가지 중요한 교훈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충성이 어디까지 미쳐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그 답은, '죽기까지의 충성'입니다.
♪519장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주가 물어 보실 때
죽기까지 따르오리 저들 대답하였다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당신의 형상 만드소서
주인 인도 따라 살아 갈 동안 사랑과 충성 늘 바치오리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충성한다고들 하면서 그들의 충성이 그들의 안락과 인기와 안이와 쾌락을 침해하지 않는 한도 안에 국한되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주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이 사건을 묵상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충성을 재확인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딤전1:12절에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충성되어 여겨서 오늘 귀한 직분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누구나 교회 일을 하고 싶은 사람별로 없습니다.
다 편하게 믿고 싶고 편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간 것처럼 우리도 자신을 주님께로 끌고 가야 합니다.
억지로라도 십자가 지고는 일꾼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교회를 섬길 때는 우리의 고집은 좀 꺾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필요하다 하면 좀 고집을 꺾고 양보 할 줄도 알고 자신을 죽일 줄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일하는 동기가 주님을 위해서요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한 것이 라면 우리는 자신의 주장대로 하려는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나를 쓰시는 분의 뜻대로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
복음송가대로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끝으로 이들이 사용한 나무는 두 가지 대조적 의미를 가진 나무였음이 주목됩니다.
종려나무는 기쁨의 상징(레 23:40), 승리의 상징, 정복의 상징으로 표시합니다.
이 상징적 의미는 초막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올 때에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살았든 것을 기념하는 날이 초막절입니다.
또 이때는 1년 동안 수고한 모든 곡식을 다 거두기를 마치면서 지키는 절기이므로 수장절이라고 합니다.
이 절기의 첫날에 사람들은 어떤 나무들의 크고 작은 가지들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 반드시 가져와서 즐거워했습니다.
레23:40절에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과 실과와 종려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일동안 즐거워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무의 두 종류 즉 종려나무와 시냇가의 버들류를 특히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정반대 되는 두 종류의 경험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종려나무가 기쁨과 승리를 상징하면서 결혼식 때 사용된다면 버드나무는 슬픔과 굴욕과 사로잡힘과 죽음을 상징하는 나무로 장례식 때 사용됩니다.
그런데 왜 이 두 가지 나무를 함께 사용했겠습니까
그 이유는 이것이 바로 '고난의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를 연결시켜 보면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이 깊은 슬픔의 심연 속에서 인내함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나타냅니다(욥 2:10, 13:15).
꽃가게에 가보면 화환과 꽃다발 있습니다.
이것은 어울리지 않는 극단적인 대조입니다.
우리는 성공하기도 하였고 승리하기도 했으면 축복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시에 찔리기도 하며, 아프기도 하고, 슬픔을 당하기도 하고 이별하기도 하고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우리들의 미소와 한숨, 쾌락과 고통, 그리고 승리와 눈물이 뒤섞여 있습니다.
우리들이 기뻐할 때에는 언제나 고통이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초막절의 첫째 날에 유대인들은 반드시 종려나무와 버드나무를 함께 가져와서 칠일동안 주님 앞에서 즐거워하였습니다.
두 나무를 감사찬미를 부르면서 바쳐야 합니다.
종려나무를 감사합시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쉬운 일이라고 사람들이 말하기 쉽습니다만 이 수간에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우리는 버드나무를 감사합시다.
실패와 낭패를 당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기란 무척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종려나무와 마찬가지로 버드나무에 대해서도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 때에 우리는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 앞에 우리들의 종려나무들 즉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삶에 유익한 것들을 가져와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에 대하여 주님께 찬양을 드린다면 주님께서는 더 많은 선물들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들의 버드나무들 - 삶 속에서 경험하는 어둡고 불가해한 일들을 -주님 앞에 가지고 나와서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변함 없는 사랑과 지혜를 인하여 주님을 찬미한다면 마리아가 동산지기로 오해한 주님께서 버드나무들을 평화의 종려나무들로 변형시킬실 것입니다.
오늘날 만약 우리들이 우리들의 종려나무를 가지고 있다면 지나치게 우쭐대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걸어갑시다.
우리는 다음 순간에 버드나무들이 굽어 있는 길을 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버드나무 길을 가게 될 때에 시들지 않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모든 축복을 베풀어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들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버드나무를 가지고 있다면 마치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나쁘게 만드신 것처럼 불평하지 맙시다.
옛날 유대인들은 종려나무를 보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한 것처럼 버드나무를 보고도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사도바울과 같이 범사에 감사할 수 있을 때에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승리적인 삶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승리적인 입성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나귀새끼를 통해서 겸손을 보여주며, 예수님께서 하신 입성의 결단을 통해서 충성을 보여 줍니다.
또한 나무 가지의 의미에서 인내를 보여 줍니다.
이 종려 주일 후 한 주간 즉 고난 주일 동안 예수님의 고난의 승리적 의미를 이 3가지면으로 다시 한번 우리 모두가 깊이 생각해 보고 우리 자신의 생활 원리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폈다고 하는 것은 최고의 존경과 최고의 존귀를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가 기뻐하시는 일, 그를 존귀케 하는 일이라면 어떠한 희생도 각오하고 드릴 줄 알아야 될 것입니다.
갈 1:10에 보면 바울도 '나는 사람에게 좋게 하기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산다'고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오늘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 이것은 곧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라고 어떤 신학자는 말했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만왕의 왕, 심판주로 나의 구주가 되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맞을 준비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예수님의 지배만 받으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평강의 왕이시며 의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
우리의 삶의 승리는 겸손으로 말미암아 오는 것을 믿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이 좀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주님께 능력과 지혜를 구하며 십자가를 등에 진 기쁨으로 살게 하옵소서.
행여나 저들이 미련하거나 교만 방자하여 십자가를 짓밟고 다닐까 두렵사오니 주님! 때마다 일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말씀의 거울 앞에 비춰보게 하옵소서.
주님 ! 주께서 죽기까지 저들을 사랑해 주셨사오니 이제 저들도 주께 죽기까지 충성하는 사람들로 삼아주시옵소서.
우리의 삶이 형통할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한결 같게 해 주시옵소서.
고난의 주님 ! 주께서 당하신 고난의 신비를 깨닫게 하시사 저희도 주님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난도 달게 받을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언제 주님 다시 오실는지 저들은 알 수 없사오나 주님 오실 그 날을 잘 준비하였다가 반가이 나가 맞게 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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