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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오늘 가야할 부활의 길 (갈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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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가야할 부활의 길 (갈 2:20)


 





   아나스타시스!(άνάστασις) 주님 부활하셨습니다. ‘아나스타시스’라는 말은 부활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1: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ἐγώ εἰμί ὁ άνάστασις καὶ ἡ ζωή) 예수님은 당신이 부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처럼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20세기 최고의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 1889-1975)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여러 시대를 연구하고 여러 저서에 대한 증거도 조사하여 보고 헤아려 보았으나, 인생의 역사 중에서 그리스도가 죽으신 후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보다 더 이상 분명하고 명백한 증거도 없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한 것처럼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17) 그리고 부활이 없어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뿐이라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15:19)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증거는 빈 무덤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무덤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위인일수록 더 크고 화려한 무덤을 갖고 있습니다.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여겨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싶어 했던 고대 이집트의 왕들은 피라미드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메디나에 가면 ‘예언자의 사원’(Al Masjid Al Nabawi)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원 안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마호메트의 무덤이 있습니다. 불로장생을 소망했던 중국의 진시황제는 자신이 살아 있을 때 38년 동안 70만 명을 동원하여 사후에 묻힐 지하 궁전을 조성했다고 하는데, 그 면적이 무려 56㎦나 된다고 합니다. 56㎦라면 가로 8km×세로 8km나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입니다. 자신의 무덤을 38년 동안이나 만들었다니 그 크기나 화려함이 어떠했을지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간은 아무리 위대하다 하더라도, 또 아무리 장수하고 싶다 하더라도 다 죽어 무덤에 묻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무덤의 크기를 자랑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습니다. 지금 그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도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이에게는 무덤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의 무덤이 그렇게 큰 관심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지금도 예루살렘에 성지순례를 가면 예수님의 무덤이 있었다고 알려진 곳에 성묘교회가 세워져 있어 많은 이들이 찾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곳일 뿐이지, 예수님의 시신이 그곳에 지금까지 묻혀 있기 때문에 그곳을 기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에 감동을 받습니다.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한 교회학교에 나오는 여덟 살짜리 소년 톰이 있었습니다. 그는 병이 많아 몸이 늘 아프고 힘이 들어서 휠체어에 실려 교회에 나오는 소년이었습니다. 부활주일을 앞두고 교회학교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속이 비어 있는 플라스틱 계란을 주며 ‘그 속에 무엇이든 생명이 있는 것을 넣어 오라’고 했습니다. 부활절 아침, 아이들이 차례로 계란을 열어 보았습니다. 꽃이나 나뭇잎, 곤충 등 아이들은 생명이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플라스틱 계란에 넣어가지고 왔습니다. 톰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톰의 계란은 비어 있었습니다. 그걸 본 몇몇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웃었지만, 앓고 있는 톰을 동정해서 교사는 부드럽게 ‘준비하지 못했어도 괜찮아. 톰! 많이 아팠나 보구나.’라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톰은 선생님께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생명을 준비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무덤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그 무덤이 비어 있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생명이 있는 살아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잖아요.’ 그리고 이 소년은 10개월 뒤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장례식 날 그의 작은 관에는 꽃 대신 빈 플라스틱 계란이 놓여져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중에 세 번에 걸쳐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종교지도자들에게 붙잡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16:21, 17:22-23, 20:17-19) 그리고 그 말씀의 마지막은 항상 이렇게 이어졌습니다. “제삼 일에 살아나리라.” 마태복음 20:18-19절에 기록된 마지막 세 번째 수난예고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 일에 살아나리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고난당하실 것을 예견하시면서도 반드시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확신하셨고, 제자들에게 아주 분명하게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그대로 우리 주님은 무덤에 묻히신 지 사흘째 되던 날에 부활하셨습니다.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죽음에서 다시 사는 부활의 사건은 예수님 한 분의 부활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 이후 우리 신앙인들이 갖는 분명한 확신은 주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한다는 소망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첫 열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린도전서 15:20)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는 말씀은 예수님의 뒤를 이어 우리 믿음의 사람들도 부활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사신 것은 그분 안에 하늘의 생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생명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끝났지만 하늘의 생명을 가지신 분이시기에 부활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하늘의 생명이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은 생명이십니다. 그 생명이신 주님을 우리가 믿고 영접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늘의 생명, 부활의 생명이신 주님을 영접한 우리 안에도 그 생명이 있기 때문에 주님처럼 우리도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거 아세요? 부활은 먼 장래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가 이 세상의 생명이 끝나는 날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6-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죽은 자가 부활하고, 살아남아 있는 사람들도 공중으로 끌어올려져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의 생명이 다 하든지, 아니면 주님이 재림하시든지 어느 순간이 우리에게 먼저 닥칠지 모르지만 그 때가 되면 우리 죽은 몸, 우리 죽을 몸이 부활의 주님 안에서 다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그 때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죽은 몸이 부활하는 일도 있거니와 지금 살아 있는 우리도 부활을 경험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우리는 지난주에 이 말씀을 통해서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사건이 오늘 내 삶 속에 다시금 체험되는 사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2천 년 전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그 십자가가 오늘 내 마음에 스파크가 일어나지 않으면 2천 년 전의 십자가는 지금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예수님의 사건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가 지금 내가 경험한 나의 십자가 사건이 될 때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내게는 영생을 주는 하나님의 은총의 사건이 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은 부활의 사건도 동시에 경험하게 됩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십자가에서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나가는 신비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남’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살아날 때에는 옛날의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시는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옛 자아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자아, 주님께서 주인이 되시는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살아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부활의 사건입니다.


 


   어느 교회 주일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이 성경시험을 치렀습니다. 그 시험 문제 가운데 하나가 ‘우리가 부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는 문제였습니다. 그 문제를 출제하는 선생님이 의도하는 정답은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이렇게 답을 써냈습니다. ‘먼저 죽어야 합니다.’ 넌센스와 같은 답을 써냈지만, 여러분, 그것이 맞는 답입니다. 우리가 다시 살려면 먼저 죽어야 합니다. 죽어야 다시 살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죽음 없이는 부활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주간을 주님의 고난주간으로 기도회를 하였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우리도 날마다 십자가에서 죽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욕심덩어리인 우리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만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집과 자존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죄를 따라 살려하는 우리의 죄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마땅히 죽어야 하지만 죽지 않고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우리의 옛성품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못 박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난주간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고난의 여정이 끝나면 부활의 기쁨과 영광이 주어집니다. 고난주간의 기간 동안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뼈아픈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은 부활절 아침에 부활의 기쁨이 얼마나 크고 영광스러운지를 느끼지 못합니다. 부활의 기쁨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고난의 깊이와 비례하게 찾아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비로소 우리는 부활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옛 성품과 못난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믿음의 연단을 통해서 우리는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서 세례예식을 거행합니다. 세례라는 것이 바로 그 부활을 경험하는 자리입니다. 세례는 우리의 죄악된 옛 자아가 물에 빠뜨려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새로운 자아가 물 위로 올라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일생이 단 한 번 받는 것이지만, 세례의 의미는 매일의 삶 속에서 새롭게 경험되어야 합니다. 매일 우리는 우리의 옛 성품을 품고 있는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새롭게 거듭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31)고 고백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이라고 부르는, 부활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을 이야기하다가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선언합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그런 부활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그리고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날마다 죽노라.’하는 선언과 고백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매일 십자가에서 죽는 십자가의 경험을 통해 부활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한 고백을 우리도 동일하게 고백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옛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매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사는 부활을 경험하며 사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믿음 안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세상 그 무엇도 두렵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에게 풀고 싶지만 영원히 풀지 못한 숙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건 죽음의 문제입니다. 죽음의 문제는 ‘죽음이란 무엇이냐?’는 형이상학적인 질문이 아니라,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느냐?’ 하는 가장 현실적인 두려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죽음은 극복하고 싶으나 극복하지 못한 괴물과 같은 존재입니다.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그 죽음을 생각하면 두렵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우리 인간을 늘 두려움 가운데 몰아넣습니다. 그런데요, 우리 신앙인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극복하지 못한 괴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하늘나라로 향하여 가는 새로운 관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곧 부활의 전제조건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가장 두렵게 만드는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1971부터 1979년까지 8년 동안 우간다를 통치했던 이디 아민(Idi Amin)이라고 하는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아주 잔혹한 독재자였는데, 당시 우간다의 인구 천만 명 가운데 30-50만 명을 살해하여 ‘검은 히틀러’ ‘아프리카의 히틀러’라고 불리던 독재자입니다. 쿠데타로 집권한 그는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자는 아주 처참하게 죽였습니다. 쇠망치로 서로 때려죽이거나 살해한 시신을 악어 먹이로 주는 것을 즐겼다고 합니다. 특히 자신의 아내를 토막 살인해 시신을 냉장고에 보관했고, 자신의 아들을 죽여 심장을 꺼내 먹었다는 일화는 전 세계적으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의 삶을 ‘이디 아민’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그 영화의 포스터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아민! 그를 악마에 비유한다면 악마도 치를 떨 것이다!’


   그 이디 아민이 통치하고 있던 시절 우간다에서 가장 큰 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목사는 ‘키파샘판디’였습니다. 키파샘판디 목사님도 폭력적인 이디 아민 정권에 반대했기 때문에, 아민 대통령을 반대한 무조건 죽여버리던 때인지라 그 목사님도 살해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73년 부활절 아침에 총으로 무장한 암살단이 교회당으로 몰아닥쳤습니다. 그리고는 대통령을 반대한 목사님을 죽이기 위해서 목사님께 총부리를 겨누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오히려 싱글벙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제 내가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죽이세요.” 마지막으로 기도한다고 하니 그들은 그렇게 하라고 허락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조용히 그리고 간절하게 예수님께서 하시던 기도처럼 기도했습니다. “여기 이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이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간절히 기도한 후 ‘아멘’하고 기도를 마쳤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을 죽이려고 왔던 그 암살단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해 기도해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더니, 목사님을 죽이지 않고 그냥 가버렸습니다. 키파샘판디 목사님은 죽음의 목전에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이 가졌던 분명한 부활의 신앙이 죽음의 순간에도 두려움을 이기고 담대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그 목사님을 죽음에서 건져주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신앙은 우리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이기게 만듭니다. 그래서 네덜란드 신학자이자 수상까지 역임했던 정치가인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5)는 이렇게 말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의 특징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모두 믿는다는 점이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줍니다. 그리고 그 소망은 먼 미래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 나의 삶 속에서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며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날마다 죽노라.’는 고백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고백으로 산다면 말입니다. 부활신앙으로 사는 사람은 그래서 세상을 이기는 능력으로 살 뿐만 아니라, 어떤 두려움이 내 삶에 몰아친다 하더라도 담대함으로 그 두려움을 이기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바로 그 부활의 능력으로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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