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골로새서 3장 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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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골로새서 3장 1-4절)
무려 7주 만에 대면예배로 여러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난 6주간 예배를 온라인 영상으로 만들다 보니, 예배 인도를 항상 라이브(생방송)로 할 때 보다녹화 방송이 이렇게 어렵고 긴장 될 줄은 몰랐습니다. 촬영하다 NG(no good의 약자로, 연출 내지 진행 착오로 인해 녹음이나 녹화가 잘못된 것을 의미)도 많이 냈습니다. 편집한 폴더 용량을 보니 30GB 정도였습니다. 이게 얼만 큼 되는 양인지 감이 안 오실 텐데, 고화질 영화 10편정도 되는 분량입니다. 좀 더 좋은 품질의 영상을 제공해 드리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모든 세계 교회들이 건물 안에서 정해진 시간에 예배드리는 것이 주일 예배라고 당연시 해 왔는데, 외부의 영향, 그것도 질병으로 인해 대면 예배가 일시 중단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온라인 예배를 드리다 보니, 목회자들은 목회자대로, 신도들은 신도들대로 많은 고충과 혼란이 있었습니다. 이번의 계기로, 예배에 대한 깊은 성찰과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건전한 토론을 바탕으로, 더욱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예배가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여 대안을 찾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동안 가정에서, 직장에서, 삶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잘 이겨 내시고, 부활 주일에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 뵙게 되어 더욱 반갑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으니 이제 우리 믿는 자들도 이 땅에서의 질병과 모든 염려와 걱정은 다 거뜬히 이겨내시고, 부활 영광, 영생 소망, 천국 잔치에 기쁘게 참여하는 부활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독교가 세계의 모든 종교 중에 가장 으뜸이 되는 고등종교라고 일컬어지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과 부활”입니다. 단순한 죽음이 아닌 신이 직접 인간의 몸으로 와서 희생당하여 죄 값을 치른 숭고한 죽음이었습니다. 그 어떤 종교도 절대자인 신이 인간을 위해 죽기까지 희생하여 자신(절대자)의 사랑을 표현한 종교는 없습니다. 오직 기독교의 신만이 인간을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기독교의 신만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다른 종교는 왜 죽음과 희생이 없는 줄 아십니까?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신들은 희생의 죽음을 선택하는 무모한 결정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죽음과 희생을 흉내 낼 그 어떤 신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다 만들어진 가짜 신이기 때문에 죽을 수도 없고, 아예 죽을 기회조차 없기 때문에 부활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인류 역사상 인간의 몸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신적 존재나 육체적 존재는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직 기독교만이 죽음을 이겨내고 승리한 부활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5장은 “부활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에 대한 내용이 가득 차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장에서 기독교에서 왜 부활이 중요한가를 너무나도 선명하고 명확하게 들려줍니다. 고린도 전서 15장의 일부를 읽어 드립니다.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아멘.
이 말씀을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① 예수님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은, 곧 다른 죽은 자들(나도, 너도, 우리도)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②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거짓말이라면, 이미 예수님 믿고 죽은 자들은 다 망(멸망, 쓸모없게 된)한 자들이다. ③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헛된(거짓종교)것이고, 죄를 용서 받는 일도 없으며, 예수님이 신이요, 구원자라는 것도 완전한 거짓 속임수이다. ④ 부활이 없는데도 기독교 신자로(교회 다니며, 예배 찬송 기도하며, 전도하며, 헌금하며) 살아가는 것은 시간 낭비이고 헛된 열심에 빠진 참으로 딱한 자들이다.” 이런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도, 교회도, 성경도, 다 사라지고 없어질 것입니다.
수학 기호 중에 숫자 8을 옆으로 뉘여 놓은 것 같은 무한대(∞, 無限大, infinity) 라는 기호가 있죠. 기독교에 부활이 있다는 것은, 어떤 비참하고 열악한 한 인간의 일생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심지어 처참한 죽음이라는 벼랑 끝에 서 있다고 할지라도, 소망과 영생이라는 무한대가 곱하여지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생활 하는 모든 신자들은 부활의 무한대를 곱하여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의 구원자, 나의 주님, 나의 영원한 소망이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지금 나의 모습이 돈도 없고, 빽도 없고, 몸도 허약하고, 삶의 큰 기대감도 없고, 그럭저럭 하루하루 힘없이 살아가는 나약한 지경이라 할지라도, 절대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천국문으로 이끌어 가시는 부활영광 첫 열매의 주인공, 무한대의 은혜와 사랑을 부어 주시는 예수님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무한대의 예수님을 의지하여,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믿음의 경주를 힘차게 달려가십시오. 우리는 결국 승리의 면류관을 쓰는 그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소망이고 능력입니다.
무한대의 수학 기호가 있지만, 수학 숫자 중에 ‘0(zero)’이라는 숫자가 있습니다. 숫자 0은 아무리 큰 숫자를 만나더라도 곱하여 지면 모든 계산을 0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신앙에서 무한대가 부활신앙의 충전과 회복의 개념이라면, 0의 개념은 부활을 무효화 시키는 방해 공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이 신자들을 거짓말로 속이고 유혹하는 핵심 공격 포인트가 있습니다. 하나는, “너는 여전히 죄인이야, 너는 구원받지 못했어” 라는 거짓말로, 우리들(내가)이 십자가의 은혜로 의인이 되었다는 것을 의심하게 만들고, 나아가서 부정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신앙에 자꾸 0을 곱해서 성령으로 거듭난 새 사람이 아닌 옛 사람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마음을 흔들어서 주저앉게 만듭니다.
또 사탄이 공경하는 포인트는 “나중에 해 아직 시간 많아, 그렇게 열심히 한다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 남들 다하고 사는데 안하면 너만 바보야”자꾸 세상의 좋은 것을 들이밀면서, 우리와 예수님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듭니다. 신앙의 열매를 맺고 믿음이 자라나는 것을 막으려고, 나의 관심사를 세상에 좋은 것에 두도록 유도 합니다. 사탄은 계속 나의 믿음에 0을 곱하게 만들어 맨날 제자리걸음에 머물러 있게 합니다. 문득 잘못된 행동을 알고 양심의 죄책감을 느끼며 후회는 하지만, 더 좋은 것을 내미는 사탄의 유혹에 금세 넘어가서 회개하고 돌이키는 일을 못하게 됩니다. 결국 너덜너덜 해진 처참한 패배를 맛보고서야 속았다는 것을 알지만, 이미 때는 늦고 비참한 종말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 신앙의 여정에는 이렇게 두 가지 갈래 길이 있습니다. 무한대의 예수님을 만나 부활 영광 영생의 소망으로 천국문을 향하여 직진 하는 길로 나아가느냐, 아니면 맨날 0만 곱하고 곱하여서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 지경에 이르러, 천국으로 가는 길은 고사하고 어둡고 더러운 죄악 길에서 헤매 이고 방황하는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부활주일은 0점인 나의 믿음을 무한대의 영생소망으로 바꾸는 시간입니다. 그 동안 세상에서 즐기고 다른 길에서 지냈던 것을 이 시간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이키시고, 무한대의 부활영광을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셔서, 육적으로, 영적으로 온전한 회복이 일어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절 예배에 여러분에게 믿음의 “아멘”이 있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① 여러분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것을 믿으십니까?
② 여러분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진리의 말씀을 남기신 것을 믿으십니까?
③ 여러분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으십니까?
④ 여러분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을 믿으십니까?
⑤ 여러분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중보자로 일하고 계심을 믿으십니까?
⑥ 여러분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보혜사 성령을 보내신 것을 믿으십니까?
⑦ 여러분은,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부활영생 할 것을 굳게 믿으십니까?
네, 아멘, 아멘입니다.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이 우리의 아멘을 받으시고, 새 믿음과, 새 능력으로 우리를 천국 문으로 인도해 가실 줄 믿습니다. 대답은 잘 하셨는데, “아멘”이라는 거룩한 대답에 걸맞게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후회만 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니라고 했죠. 돌이키고 다시는 반복된 죄를 짓지 말아야 진정한 회개인 것처럼, 아멘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입니다.
오늘 말씀 1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전부 “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 그렇다면,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무엇이라고 되어 있습니까? “위의 것을 찾으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라고 되어 있죠. 두 번씩이나 “위의 것”을 강조 했습니다. 우리가 “아멘”이라고 합창하기 전에는 “땅의 것”에 관심을 두었다면, 이제는 “위의 것”에 관심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위의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정답은, 나는 죽어도 다시 살나날 수 있다는 부활의 믿음이고, 그 부활로 인해 천국에서 영생을 할 수 있다는 소망으로 살아가는 것이죠. 우리는 위의 것을 생각하며 살라는 것에 대한 정답을 이미 수 없이 듣고,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자신들의 신앙생활을 보면, 변화되어가고 언행에 품격이 있는 성숙한 믿음, 겸손과 섬김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아름다운 삶, 영혼 구원을 위해 복음 사명을 감당하는 열정, 이런 것들이 너무나도 빈약하고 초라합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너무나도 부끄럽고 죄송하기만 합니다.
알고 있는데 왜 안 될까요? 왜 맨날 우리의 신앙의 제 자리 걸음일까요? 3절 초반을 보시면 “이는 너희가 죽었고”라고 되어 있죠. 이것을 2절과 연결시키면,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왜냐하면 이는 너희가 죽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이 됩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우리의 육신(육체)은 땅을 밝고 살아가지만,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예수님도 육체의 몸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으셨기 때문에 부활 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육신의 몸이 반드시 죽어야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죽어야 변화 되고, 죽어야 언행에 품격이 나타나고, 죽어야 겸손과 섬김의 자세가 나오고, 죽어야 복음의 열정이 살아납니다. 맨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신앙정체, 혹은 신앙 퇴보의 이유는 내가 안 죽고 기가 펄펄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3절과 4절을 계속 해서 보시면,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완전하게 죽은 사람(육체)만이,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감추어져 있다가,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에 영광중에 부활한 몸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위의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성령으로 변화되어가지 못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여전히 내 머리, 내 마음이 땅을 발판으로 편한 것만, 쉬운 것만, 유리한 것만, 좋은 것만, 하고 싶은 것만 찾아서, 골라서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감추어져 있는 사람, 즉 완전히 자기 자신을 죽인 사람은 이런 특징이 나타납니다. ① 죄에 대하여 완전하게 죽고, 의에 대하여 완전하게 살아났기 때문에, 자신이 의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항상 자부심으로 살아갑니다.-구원의 확신 ② 세상에 대하여 완전하게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에, 어린아이와 같이 생명의 말씀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납니다.-말씀으로 양육 ③ 육신은 완전히 죽고, 영으로 인도함 받기 때문에, 예배자로, 기도자로, 전도자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요 과제로 여기며 살아갑니다.-사명자로 헌신
이러한 모든 특징들은 우리의 자아가(육신이) 죽지 않으면 절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라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많이 암송하고 있습니다. 이 귀한 말씀이 단순한 선언으로 반복되지 말아야 합니다. 진짜로 십자가에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못 박아 죽여야 합니다. 죽지 않으면 부활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죽지 않으면 위의 것을 생각해야지, 해야지 생각만 하다가, 결국 땅에 있는 것을 취하고, 만족을 느끼다가 사망과 멸망으로 끌려가는 불쌍한 인생이 됩니다.
부활영광을 누리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단순 명료합니다. 다시 살아나려면, 먼저 죽어야 한다는 것, 이것은 예수님에게만 적용되지 않고, 여전히 고집불통으로 살아가는 완악한 내 자아, 내 육체가 가장 최우선 적용 대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남 탓만 하기 전에 자기 자신이 죽지 못하는 것을 비통해 하고 부끄럽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 00교회 모든 성도들은 이미 십자가에서 완전하게 죽었고, 우리의 목숨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음을 믿습니다. 오늘 부활절 이후로 여러분의 모든 생명은 십자가에서 죽음과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영원히 감추어져 있음을 다시 한 번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이 영광중에 오실 때에, 맡겨진 내 생명이 부활영생으로 나타나서 우리 주님과 영원무궁토록 동행복락을 누리는 그날이 속히 올 것을 열망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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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죽기 까지 순종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저희 죄와 육신과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고, 오직 부활 영생 소망으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도록 동행하시고 보호하여 주옵소서. 믿는 자에게 부활영생을 허락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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