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TOP
DOWN

[종려주일] 구레네 시몬의 십자가를 아십니까?

본문

어느날 주님께서 두 제자를 데리고 한 길로 들어서시고는 꼭 같은 십자가 하나씩을 주시면서 나는 이 길 끝나는 곳에 가 있을 테니 그곳까지 십자가를 각 자가 지고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첫 번째 제자는 가볍게 십자가를 메고 가는데 두 번째 제자는 지독히 힘들어하면서 뒤 처져 따라 왔습니다.
십자가를 걸머진 지 하루 만에 첫 번째 제자는 길 끝에 당도하여 십자가를 주님께 넘겨 드리자 주님은 첫 번째 제자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아들아, 아주 잘 했다.
두 번째 제자는 이튿날 저녁에 되어서야 길 끝에 도착했는데 십자가를 주님의 발밑에 내동댕이치며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주님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저한테는 다른 제자보다 훨씬 더 무거운 십자가를 내주셨습니다.
제가 이제야 온 것도 그 때문이라고요. 주님은 마음이 상한 채 슬픈 얼굴로 두 번째 제자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둘 다 똑같은 무게였느니라.
그러자 두 번째 제자가 묻습니다. 그러면 앞사람은 아주 쉽게 십자가를 옮겼는데 유독 저만 십자가를 옮기느라 쩔쩔맸다는 말입니까
주님께서 이렇게 타이르셨습니다. 십자가를 탓하지 마라. 그 까닭은 십자가를 지고 오는 동안 줄곧 불평을 늘어놓은 너한테 있느니라.
네가 불평할 때마다 십자가의 무게가 늘어났던 것이야. 앞서온 제자는 십자가를 지고 오는 동안 기쁨으로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에 그 사랑이 십자가의 무게를 덜어준 거지. 그래서 힘들이지 않고 십자가를 옮길 수 있었던 것이야.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짐 같은 일들을 짐에 있어서도 주님이 지신 십자가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계속 감사를 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반면 이 짐은 너무 무겁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감사보다는 아무래도 불평과 원망 속에서 살아갈 것이 아닐까요
오늘 말씀에 보면 구레네 시몬이라는 나오는데 주님이 지고 가신 십자가를 대신 억지로 지고 간 모습을 볼 수 있거든요. 이 시간 시몬이 억지로 진 십자가의 의미를 살펴보려 합니다.
1. 구레네 시몬의 인적 사항을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지금의 나라로 보면 구레네는 아프리카 북부 지방에 있는 리비아의 트리폴리라는 도시로서 시몬은 바로 이곳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트리폴리에서 예루살렘까지는 굉장히 먼 거리인데 교통편이 불편했던 그 시절에 시몬이 예루살렘까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왔었다면 이 또한 종교적 열심이 대단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은 세계 곳곳에서 모인 사람들로 말미암아 굉장한 축제가 벌어지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기쁨과 감사와 즐거움이 넘치는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하나의 엄청난 배신과 음모와 모략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사렛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꾸미는 모략이었는데 그를 따르던 제자가 배신을 했고 그를 죽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동원이 되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밤사이 예수님은 체포되어 서둘러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성급하게 판결이 내려졌는데 그 결과는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이는 형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은 로마 제국에 반역을 저지른 정치범들이나 또는 그와 유사한 죄인들을 처형할 때 적용하는 형임은 여러분들도 아실 것입니다.
이 형벌이 너무나도 지독하고 잔인한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처형하는 것이라 하여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에게는 어떠한 경우에도 십자가 형벌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형을 받은 사람은 자기가 매어 달릴 십자가를 직접 짊어지고 그 형장에까지 가는 것이 관행으로 되어 있기도 했고요.
예수님도 밤을 밝히면서 재판을 받는 가운데 십자가형을 언도 받고 친히 매어 달릴 그 십자가 형틀을 지고는 골고다 언덕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르렀는데 결국은 가다가 쓰러지고 몇 걸음을 가다 또 쓰러지는 그런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던 로마 병사 한 사람이 그 연도에 나와 서 있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을 지목해서 앞으로 나오게 하고 그에게 예수님이 지고 가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워 골고다 언덕을 오르게 한 것입니다.
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어떤 사람들은 이 사람이 흑인이었다고도 하고 예수님의 생애를 다룬 영화를 보면 머리가 곱슬머리이며 체격이 건장한 흑인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혈통을 따질 때 부계 중심의 혈통이 아니고 모계 중심의 혈통을 따집니다. 따라서 아버지가 유대인이지만 어머니가 이방인이면 유대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유대인이고 아버지가 이방인이면 그 사람은 정통 유대인으로 인정을 받는 그러니까 혈통을 따질 때 아주 묘한 그런 원칙이 있습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아마 어머니가 유대인이었고 아버지가 아프리카 흑인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이름이 시몬인데 이 시몬이라는 이름은 일반적으로 아프리카 사람들이 쓰는 이름이 아니라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흔히 쓰이는 이름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구레네에서 온 시몬은 유대인의 피를 이어 받은 유대교를 신봉하는 사람 중에 하나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2. 사람의 관점에서 구레네 시몬은 원치 않는 십자가를 지었습니다.
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21절의 마침이라는 말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쓰러지고 일어나고 또 가다가 쓰러져서 구레네 시몬이란 사람 앞에서 쓰러진 후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해 기진맥진해 버린 때라는 말입니다.
드디어 로마 병사가 그 앞에 있던 한 사람을 지목해서 당신이 이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 하면서 그의 어깨에 십자가를 지운 거지요.
그러고 보면 이 구레네 시몬은 자기가 저야 될 십자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이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안지면 되지 않느냐 고요. 거부하라고요.
천만에요. 로마의 병사가 한 번 지정을 한 이상 그 사람은 십자가를 아니 질 수가 없는 것은 당시의 식민지 국가의 백성들이 당하는 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당시의 법을 인용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마 05:41).
여기 구레네 시몬은 본의 아니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까지 나아가는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 구레네 시몬이 지게 된 이 십자가는 자원이 아니라 억지로 진 십자가인 것만은 틀림이 없지요.
또한 우연히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주님과 마주쳤고 그만 본의 아니게 로마 병사에게 징발을 당해 지게 되었다면 세상 말로 억세게 재수 없는 놈 아닙니까
그러나 믿음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 십자가는 우연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필연적으로 구레네 시몬을 거기에 등장을 시킨 겁니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순간 그 자리에서 예수님과 시몬의 만남을 계획하셨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 성도 여러분!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스로 도망하기 위하여 욥바로 갔을 때를 아실 것입니다.
욘 01:0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 지라.......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딱 만나게 된 아주 극적인 장면을 우리의 인생살이에 적용해 본다면 어떠할 것 같습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무엇이 딱 맞아떨어질 때 죄를 지을 때도 무엇이 딱 맞아떨어지고 우리가 타락을 하고 유혹을 받을 때도 무엇이 딱 맞아떨어지는 그런 경험들하고도 같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우연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보면 다 필연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져 가는 것임을 알아야 됩니다.
롬 08:28 우리가 알거니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성도 여러분! 인생을 살아갈 때 우리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만족할 수도 있고 늘 불평하고 원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좀 더 넓은 그런 자세를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많은 예루살렘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뽑히지 않고 아프리카에서 온 이 구레네 시몬이 거기에 발탁 되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진 십자가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3. 나도 구레네 시몬과 같은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억지로 라는 말을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억지로 무슨 일을 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든 것을 기쁨으로 자원하는 심정으로 자발적으로 솔선수범해서 무엇을 한 것보다 어쩌면 억지로 공부도 했고 억지로 직장생활도 했고 억지로 부모님 말씀도 들었고 억지로 순종하였던 때도 많았습니다.
자원하여 기쁨으로 하는 것보다 억지로 하면 꼭 같은 짐을 짊어져도 더 무겁게 여겨지고 더 힘들게 여겨지고 더 짜증스럽고 더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고난의 주간이 되기만 하면 특별히 가톨릭 국가에서는 세계 곳곳에서 이 십자가를 지고 고행을 하는 행사를 합니다.
손에 못을 직접 박기도 하고 필리핀 칠레 브라질 같은 나라들을 보면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 모형을 지고 가는 흉내를 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역을 서로 하려고 기쁨으로 자원하는 사람도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이 구레네 시몬은 십자가의 의미도 모르고 내가 왜 이 짊을 짊어져야 한다는 말이냐 저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이면 내가 지고 가야 된다는 말이냐 나는 못 간다. 나는 질 수 없다고 아마 거부를 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로마 병사가 로마의 강력한 통치력 물리적 힘을 앞세워 너 아무소리 말고 이 나무를 지도록 해 안 지면 알지하면서 억지로 지고 가게 했을 것 같습니다.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럽고 짜증스러운 일이었기에 어쩌면 원망과 불평이 입에서 터져 나왔을 것이라 되어집니다.
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억지로 했던 일들 참 지겹고 고통스러웠던 그런 경험들을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는 것도 기쁨으로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억지로 하는 사람도 있으며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그 직장에 대한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 직업의식이 빈약한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서 직장생활을 억지로 한다고 생각하는 만큼 그 직장 생활이 정말 고달플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억지로 기도하고 억지로 교회 와서 예배드리고 억지로 봉사하고 억지로 성경공부 나오고 억지로 끌려가다 보면 무척이나 피곤해 집니다.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 나를 더 많이 기도하게 하기 위해서 나를 여호와 하나님 앞에 더 무릎을 꿇게 하기 위해 여러 모양의 십자가를 주셨다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진다면 이는 축복으로 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애물단지로 여겨지는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자식을 오히려 더 사랑할 수 있을 것이고요.
십자가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다양한 모습을 지닐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십자가를 모든 사람이 다 기쁨으로 짊어지고 순종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십자가를 짊어지기를 싫어하고 이 십자가를 또 피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서양 교훈 가운데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는 내려놓고 면류관만을 바라보면서 주님을 따르고 있는 모습들을 볼 때 어쩌면 그것이 우리들의 자화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구레네 시몬처럼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각오를 오늘 다짐해 봅시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많은 시간들이 지나고 난 뒤 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하면서 16장 13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롬 16: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이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갈 때는 그 십자가의 의미를 모른 채 억지로 짊어지고 갔음을 성경은 한결같이 명시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몬이 지고 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본서가 즉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적어도 상당한 세월 그러니까 한 20여 년의 기간이 흐른 뒤에 마가에 의해서 기록이 되어졌습니다.
그 동안에 이 구레네 시몬은 아마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고 그리고 그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도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마가 요한은 마가복음을 기록하면서 당시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간 사람이 바로 구레네 사람 시몬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냥 시몬 이렇게 하면 그 시몬에 대해서 빨리 머리에 와 닿는 것이 없을 것이므로 당시 로마교회에서는 상당히 알려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는 인명의 수식어를 붙인 것입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이 구레네 사람 시몬이 짊어진 이 십자가는 당시에 자기에게는 고통의 십자가였고 억지로 진 고난의 십자가였지만 지내놓고 보니 그 자녀들에게는 엄청난 축복의 열매가 맺혔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갔던 이 시몬의 아내는 사도 바울이 바로 그 어머니는 나의 어머니다 할 만큼 자기의 친어머니처럼 존경받는 여인으로 여기에 등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