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쓰임받는 영광
본문
예루살렘을 가리켜 우리는 거룩한 도시라고 부릅니다. 오늘날에도 세계 여러 나라 기독교인들이 꼭 찾아보고 싶은 성지 가운데 으뜸되는 곳입니다. 이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은 도시 (이르) 라는 말과 평화 (살렘) 라는 말이 합쳐져 생긴 이름입니다. 곧 평화로운 도시라는 뜻이지요. 그러나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이 스쳐 지나온 역사는 결코 평화롭지 못하였습니다. 이곳은 지금까지 50차례 이상 포위공격을 당했으며, 36차례나 정복당하였고, 심하게 파괴된 경우만 해도 10차례나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곳에는 미움과 증오가 행동으로 나타낼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루살렘 하면 평화로운 모습보다는, 보복과 적개심이 악순환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와같은 현상은 지금부터 2000여년 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예루살렘에는 무수한 왕들, 수많은 장군들이 드나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모습 가운데 하나로 예루살렘에 행차하셨습니다.
역사가 눈으로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던 수많은 왕들이나 장군들 곧 특이한 사람들 가운데 한 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의 예루사렘 행차는 아주 독특한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은 이 점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 오시는 때는 유월절 기간입니다. 이스라엘 출신 역사가였던 요세푸스에 따르면,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순례자로서 모여드는 숫자가 연인원 200만에 이른다고 합니다.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닙니다. 이들 가운데 얼마나 되는 사람이 예루살렘에 들어 오시는 예수님을 영접하였는 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오시는 예수님을 마중 나온 사람들은 외쳤습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 (12,13)
그런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입성하시는 지를 간단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보시고, 그 위에 올라타셨다. 그것은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과 같았다: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보아라, 네 임금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 제자들은 처음에는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뒤에야, 이것이 예수를 두고 기록한 것이며, 또 사람들도 그에게 그렇게 대하였다는 것을 회상하였다 (1416).
우리말 성서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원문에는 14절 앞에 "그러나“ 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이 "그러나“ 라는 말은 앞에 기록된 내용과 반대되거나, 다른 방향을 지적할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을 다시 한번 읽어 봅니다:
많은 무리가 ...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 (12,13)
그러나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보시고, 그 위에 올라 타셨다.
이 "그러나“ 라는 말이 앞에 나온 것과 다른 내용을 가리킨다면, "이스라엘의 왕“ 과 다른 모습이 예수님에게 있음을 본문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드나들었던 수많은 왕들, 수많은 정복자들과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하려고, 이 그러나“ 라는 용어가 쓰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는 과연 무엇이 이스라엘의 왕과 달랐을까요 우선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내용들, 곧 예수님의 예루살렘행차를 묘사하는 데 쓰인 요소들을 살펴 봅니다:
나귀 새끼; 종려나무 가지들; 제자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구경하는 사람들
호산나를 외치는 사람들 (위와같은 사람들을 가리켜 많은 무리 (ochlos polyus) 라고 표현하였음)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
그리고 왕이 행차한다고 가정하고 상상해 보면 몇가지 차이점이 금방 떠오릅니다:
나귀 대신에 백마나 아주 좋은 말 (俊馬) 이나 금마차를 탄 임금
기마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호위함
고개를 숙이고 절하거나 경배하는 사람들; 왕의 만수무강을 외치는 소리들
왕의 행차는 금으로 만든 왕좌가 있는 궁전으로 이어지는 데 비해, 예수님 행차는 베다니아라는 작은 고을로 이어짐.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볼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동안 교회는 예수님께 "호산나 ... "를 외쳤던 무리들을,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님 십자가에 못박으라“ 외쳤던 백성의 무리와 똑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랬다가 또 내일은 저렇게 되는 백성의 변덕스러움을 나타낸다고 본문을 해석해 왔습니다.
그러나 재판정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은 오해임에 분명합니다. 이 재판은 총독관저, 우리나라 옛날식으로 표현하면 일본 총독관저에서 열렸습니다. 그 당시 총독이 사는 관저 ( 왕궁) 에 그것도 이른 새벽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어떤 신분을 지닌 사람이겠습니까 예수님 재판이 아주 특별한 일이라는 점에서, 이것이 특별한 경비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이 재판에는 아무나 참관할 수 없는 것이 상식입니다. 이 재판이 특별한 재판이었던 만큼이나, 더욱 더 특별한 사람들만이 이 재판에 참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복음서 가운데 일부는 오클로스 (무리) 라는 단어를 양쪽에 똑같이 썼지만 (마태 27,20; 마가 15,8. 11 등) , 그 구성원은 달랐다고 보는 것이 상식일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이나 바나바 중 한 사람을 놓아 주겠다고 했을 때,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고 바나바를 놓아 달라고 외쳤던 사람들은 보통 백성의 무리가 아니라, 바로 이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다시말해 백성의 무리는 예수께서 활동하실 때에나 재판을 받으실 때에나 항상 변함없이 예수님편에 섰습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요한복음은 에수님을 환영한 무리들을 가리켜 오클로스라는 단어를 쓰는 반면에, 빌라도 법정에 있던 사람들을 가리켜 유대인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18,21; 19,7. 12).
우리가 앞서 보았듯이, 왕의 행차에는 이렇게 특별한 것들이 등장하기 마련인데 비해,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 행차에는 평범한 요소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평범한 것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을 받았습니다. 보통 임금의 행차 때에는 특별한 것들이 쓰임받지만, 그 특별한 것들은 그 시간만 지나고 나면 잊혀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행차 때 쓰였던 것들은 아주 진한 기억을 오래 남기고 있습니다. 하나같이 평범한 것들이었지만, 아주 요긴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이래서 평범한 것들과 특별한 것이 하나로 통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봐도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볼 때, 세상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봅니다. 뭐 좀 특이한 사람으로 봐 주는 때도 없지 않으나, 이 특별하다는 것도 긍정적으로 보다는 부정적인 면에서, "좀 별난 사람이다“ 라고 볼 때가 더 많습니다.
사실 우리는 세계 40억 인구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내가 아무리 특별나다고 스스로 외쳐봐야, 정말 그렇다고 알아줄 사람이 세상에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40억이나 되는 세계 인구 가운데, 한 사람으로만 그냥 남아 있기에 서운한 그 무엇이 있습니다. 모래 알 40억개 중에 하나로만 그치기에는 아까운 그 무엇인가가 우리에게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40억 인구가 살기에 충분할 만큼 넒은 땅이 있습니다. 이 땅의 종류도 여러 가지입니다. 찰진 땅도 있고, 푸석푸석한 땅도 있고, 고운 땅도 있고 돌이 많이 섞인 땅도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땅은 그 생긴 모양마다 다 쓸모가 있습니다. 기름지고 비옥한 땅은 농사짓기에 알맞습니다. 오목조목하고 잘 생긴 땅, 곧 경치가 좋은 곳은 관광지로 됩니다. 그런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황무지 같은 땅도 있습니다. 아라비아 사막 같은 땅이지요. 그런데 그 속에는 지하자원, 곧 석유가 풍부하게 들어 있습니다. 겉모양이 아름다운 땅은 사람들이 밟고 다니면서 관광하지만 외모가 보잘 것 없는 땅들은 속에 금 은 보화를, 지하자원를 가득 품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나와 흔들며 환영하였기에 (요 12,13) 이 날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종려주일은 성탄절, 부활절, 성령감림절 다음으로 개신교 천주교 동방정교회, 그리고 콥틱교회을 막론하고 모든 기독교 종파가 함께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모습을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등 네 복음서가 모두 보도합니다. 그만큼 예수님 생애에서 이 사건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활동하신 장소는 크게 두 곳입니다. 하나는 갈릴리입니다. 예수님은 3년 공생애 대부분을 여기서 보냈습니다. 다른 한 곳은 예루살렘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일주일 정도 시간을 보냈습니다. 비록 예루살렘에 머무는 기간이 일주일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구원사적 비중이나 의미로 볼 때에, 이 둘은 경중을 따질 수 없이 중요합니다.
갈릴리에서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등 구원의 능력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관점에 따라서는 갈릴리에서 예수님은 전성기를 보내셨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느 날 제자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출발하셨습니다. 왜 이곳으로 가셨나요 간단히 말하자면, 죽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세상 죄를 품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마가복음 10:3334,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출발하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봅니다:
"보아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어갈 것이다. 그들은 인자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방 사람들에게 넘겨줄 것이다. 그리고 이방 사람들은 인자를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흘 후에 살아날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갈릴리에서 예수님은 구원의 능력, 여호와 하나님 나라 복음을 내보이셨다고 한다면,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품어내는 놀라운 포용력, 여호와 하나님 사랑이 지닌 깊이와 넓이를 한 눈에 보이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나약함을, 죄악됨을, 부족함을, 허물을 품으시는 예수님을 위해, 쓰임받은 나약한 사람들, 쓰임받은 작디 작은 사물들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나귀; 종려나무 가지들; 예수님 제자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팔짱끼고 구경하는 사람들
호산나를 외치는 사람들
예수님을 대적하며, 이 광경을 염려스럽게 바라보는 바리새인들
이 하나 하나가 모두 다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이 가운데 어떤 모습으로 서 있습니까 오늘부터 예수님의 이 고난을 기리는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평범한 우리 속에 평범하지 않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 생명력을 선물로 주시려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오십니다. 세상 죄와 세상 사망의 세력을 너무나 평범하게 받아들여 살고 있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여호와 하나님 나라 새생명을 주시려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십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그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나누어주심으로, 우리 속에는 예수님의 살이 들어오고, 예수님 피가 흐르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 마음밭, 우리 영혼의 땅속에는, 엄청난 지하자원이 매장되었습니다. 곧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 묻혀 있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을 가리켜 베드로 전서 2,910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택함을 받은 민족이요, 왕의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국민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그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전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그분의 백성이요, 전에는 자비를 입지 못한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자비를 입은 사람입니다 (2,910; 참조 사 43,20; 출 19,56; 사 43,21).
오늘날에도 이곳에는 미움과 증오가 행동으로 나타낼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루살렘 하면 평화로운 모습보다는, 보복과 적개심이 악순환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와같은 현상은 지금부터 2000여년 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예루살렘에는 무수한 왕들, 수많은 장군들이 드나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모습 가운데 하나로 예루살렘에 행차하셨습니다.
역사가 눈으로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던 수많은 왕들이나 장군들 곧 특이한 사람들 가운데 한 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의 예루사렘 행차는 아주 독특한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은 이 점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 오시는 때는 유월절 기간입니다. 이스라엘 출신 역사가였던 요세푸스에 따르면,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순례자로서 모여드는 숫자가 연인원 200만에 이른다고 합니다.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닙니다. 이들 가운데 얼마나 되는 사람이 예루살렘에 들어 오시는 예수님을 영접하였는 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오시는 예수님을 마중 나온 사람들은 외쳤습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 (12,13)
그런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입성하시는 지를 간단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보시고, 그 위에 올라타셨다. 그것은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과 같았다: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보아라, 네 임금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 제자들은 처음에는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뒤에야, 이것이 예수를 두고 기록한 것이며, 또 사람들도 그에게 그렇게 대하였다는 것을 회상하였다 (1416).
우리말 성서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원문에는 14절 앞에 "그러나“ 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이 "그러나“ 라는 말은 앞에 기록된 내용과 반대되거나, 다른 방향을 지적할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을 다시 한번 읽어 봅니다:
많은 무리가 ...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 (12,13)
그러나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보시고, 그 위에 올라 타셨다.
이 "그러나“ 라는 말이 앞에 나온 것과 다른 내용을 가리킨다면, "이스라엘의 왕“ 과 다른 모습이 예수님에게 있음을 본문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드나들었던 수많은 왕들, 수많은 정복자들과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하려고, 이 그러나“ 라는 용어가 쓰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는 과연 무엇이 이스라엘의 왕과 달랐을까요 우선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내용들, 곧 예수님의 예루살렘행차를 묘사하는 데 쓰인 요소들을 살펴 봅니다:
나귀 새끼; 종려나무 가지들; 제자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구경하는 사람들
호산나를 외치는 사람들 (위와같은 사람들을 가리켜 많은 무리 (ochlos polyus) 라고 표현하였음)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
그리고 왕이 행차한다고 가정하고 상상해 보면 몇가지 차이점이 금방 떠오릅니다:
나귀 대신에 백마나 아주 좋은 말 (俊馬) 이나 금마차를 탄 임금
기마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호위함
고개를 숙이고 절하거나 경배하는 사람들; 왕의 만수무강을 외치는 소리들
왕의 행차는 금으로 만든 왕좌가 있는 궁전으로 이어지는 데 비해, 예수님 행차는 베다니아라는 작은 고을로 이어짐.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볼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동안 교회는 예수님께 "호산나 ... "를 외쳤던 무리들을,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님 십자가에 못박으라“ 외쳤던 백성의 무리와 똑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랬다가 또 내일은 저렇게 되는 백성의 변덕스러움을 나타낸다고 본문을 해석해 왔습니다.
그러나 재판정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은 오해임에 분명합니다. 이 재판은 총독관저, 우리나라 옛날식으로 표현하면 일본 총독관저에서 열렸습니다. 그 당시 총독이 사는 관저 ( 왕궁) 에 그것도 이른 새벽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어떤 신분을 지닌 사람이겠습니까 예수님 재판이 아주 특별한 일이라는 점에서, 이것이 특별한 경비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이 재판에는 아무나 참관할 수 없는 것이 상식입니다. 이 재판이 특별한 재판이었던 만큼이나, 더욱 더 특별한 사람들만이 이 재판에 참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복음서 가운데 일부는 오클로스 (무리) 라는 단어를 양쪽에 똑같이 썼지만 (마태 27,20; 마가 15,8. 11 등) , 그 구성원은 달랐다고 보는 것이 상식일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이나 바나바 중 한 사람을 놓아 주겠다고 했을 때,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고 바나바를 놓아 달라고 외쳤던 사람들은 보통 백성의 무리가 아니라, 바로 이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다시말해 백성의 무리는 예수께서 활동하실 때에나 재판을 받으실 때에나 항상 변함없이 예수님편에 섰습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요한복음은 에수님을 환영한 무리들을 가리켜 오클로스라는 단어를 쓰는 반면에, 빌라도 법정에 있던 사람들을 가리켜 유대인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18,21; 19,7. 12).
우리가 앞서 보았듯이, 왕의 행차에는 이렇게 특별한 것들이 등장하기 마련인데 비해,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 행차에는 평범한 요소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평범한 것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을 받았습니다. 보통 임금의 행차 때에는 특별한 것들이 쓰임받지만, 그 특별한 것들은 그 시간만 지나고 나면 잊혀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행차 때 쓰였던 것들은 아주 진한 기억을 오래 남기고 있습니다. 하나같이 평범한 것들이었지만, 아주 요긴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이래서 평범한 것들과 특별한 것이 하나로 통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봐도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볼 때, 세상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봅니다. 뭐 좀 특이한 사람으로 봐 주는 때도 없지 않으나, 이 특별하다는 것도 긍정적으로 보다는 부정적인 면에서, "좀 별난 사람이다“ 라고 볼 때가 더 많습니다.
사실 우리는 세계 40억 인구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내가 아무리 특별나다고 스스로 외쳐봐야, 정말 그렇다고 알아줄 사람이 세상에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40억이나 되는 세계 인구 가운데, 한 사람으로만 그냥 남아 있기에 서운한 그 무엇이 있습니다. 모래 알 40억개 중에 하나로만 그치기에는 아까운 그 무엇인가가 우리에게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40억 인구가 살기에 충분할 만큼 넒은 땅이 있습니다. 이 땅의 종류도 여러 가지입니다. 찰진 땅도 있고, 푸석푸석한 땅도 있고, 고운 땅도 있고 돌이 많이 섞인 땅도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땅은 그 생긴 모양마다 다 쓸모가 있습니다. 기름지고 비옥한 땅은 농사짓기에 알맞습니다. 오목조목하고 잘 생긴 땅, 곧 경치가 좋은 곳은 관광지로 됩니다. 그런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황무지 같은 땅도 있습니다. 아라비아 사막 같은 땅이지요. 그런데 그 속에는 지하자원, 곧 석유가 풍부하게 들어 있습니다. 겉모양이 아름다운 땅은 사람들이 밟고 다니면서 관광하지만 외모가 보잘 것 없는 땅들은 속에 금 은 보화를, 지하자원를 가득 품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나와 흔들며 환영하였기에 (요 12,13) 이 날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종려주일은 성탄절, 부활절, 성령감림절 다음으로 개신교 천주교 동방정교회, 그리고 콥틱교회을 막론하고 모든 기독교 종파가 함께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모습을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등 네 복음서가 모두 보도합니다. 그만큼 예수님 생애에서 이 사건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활동하신 장소는 크게 두 곳입니다. 하나는 갈릴리입니다. 예수님은 3년 공생애 대부분을 여기서 보냈습니다. 다른 한 곳은 예루살렘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일주일 정도 시간을 보냈습니다. 비록 예루살렘에 머무는 기간이 일주일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구원사적 비중이나 의미로 볼 때에, 이 둘은 경중을 따질 수 없이 중요합니다.
갈릴리에서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등 구원의 능력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관점에 따라서는 갈릴리에서 예수님은 전성기를 보내셨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느 날 제자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출발하셨습니다. 왜 이곳으로 가셨나요 간단히 말하자면, 죽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세상 죄를 품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마가복음 10:3334,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출발하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봅니다:
"보아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어갈 것이다. 그들은 인자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방 사람들에게 넘겨줄 것이다. 그리고 이방 사람들은 인자를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흘 후에 살아날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갈릴리에서 예수님은 구원의 능력, 여호와 하나님 나라 복음을 내보이셨다고 한다면,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품어내는 놀라운 포용력, 여호와 하나님 사랑이 지닌 깊이와 넓이를 한 눈에 보이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나약함을, 죄악됨을, 부족함을, 허물을 품으시는 예수님을 위해, 쓰임받은 나약한 사람들, 쓰임받은 작디 작은 사물들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나귀; 종려나무 가지들; 예수님 제자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팔짱끼고 구경하는 사람들
호산나를 외치는 사람들
예수님을 대적하며, 이 광경을 염려스럽게 바라보는 바리새인들
이 하나 하나가 모두 다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이 가운데 어떤 모습으로 서 있습니까 오늘부터 예수님의 이 고난을 기리는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평범한 우리 속에 평범하지 않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 생명력을 선물로 주시려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오십니다. 세상 죄와 세상 사망의 세력을 너무나 평범하게 받아들여 살고 있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여호와 하나님 나라 새생명을 주시려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십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그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나누어주심으로, 우리 속에는 예수님의 살이 들어오고, 예수님 피가 흐르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 마음밭, 우리 영혼의 땅속에는, 엄청난 지하자원이 매장되었습니다. 곧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 묻혀 있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을 가리켜 베드로 전서 2,910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택함을 받은 민족이요, 왕의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국민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그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전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그분의 백성이요, 전에는 자비를 입지 못한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자비를 입은 사람입니다 (2,910; 참조 사 43,20; 출 19,56; 사 4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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