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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이분이 누구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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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교회력에서 종려주일(Palm Sunday)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한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여리고로 오셨고, 여리고에서 다시 험한 산골짜기 길을 거슬러 올라가 베다니라는 작은 마을에 이르시게 되셨습니다. 그 다음 벳바게라는 마을에 가시기 전에 두 제자를 특별히 보내서 맞은편 마을에서 나귀 새끼를 구하여 오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벳바게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는 그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입성하신 것입니다.
그때는 바로 유월절이 가까운 때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도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왔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감람산을 다 넘으셔서 겟세마네 동산 기슭으로 내려가며 기드론 시내쯤 가시게 된 때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행진에 가담한 무리의 수가 더욱 많아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시온산 언덕으로 올라가시고, 예루살렘성 가까이로 나아가시게 되셨습니다. 그때 함께 가던 여러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혹은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며 계속 "호산나"를 외치며, 노래하며, 환영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시게 되니까 성경에 기록한 대로 온 도시가 들끊었습니다. "이분이 누구신데" "이분이 누구신데"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하며 물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외국의 국빈이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 다녀 갔지만 사람들의 이번 행렬은 그런 때와는 분위기가 너무 달랐습니다. 물론 외국 국빈들의 행렬이 지나갈 때는 지금보다 화려하고 굉장했지만, 지극히 의례적이기 때문에 어떤 감동이나 기쁨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행렬처럼 아무런 형식도 의식도 없이 중심으로부터 기뻐하며 감격해 하면서 환영받는 모습을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예루살렘 시민들은 호기심에 찬 눈으로 이 행렬을 지켜보면서 "이분이 누구신데" "이분이 누구신데"하며 서로 물은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은 흥분된 어조로 "이분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신 예언자 예수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지금도 매년 종려주일에는 벳바게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 곳에서부터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호산나" 찬송을 부르면서 감람산을 넘고 기드론 시내를 걸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골고다가 있는 곳, 예수님의 시체를 두었던 곳에 기념 예배당이 있는데 거기까지 가서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풍습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때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예수님의 행하시는 이적을 볼 때마다 "이분이 누구신데"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나실 때도, 고난을 당하실 때도,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도, 장사지낸 지 사흘만에 부활하셨을 때도 사람들은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이분이 누구신데"
이 땅위에서뿐만이 아닙니다. 하늘에 올라가셔서 영광의 옷을 입고 황금문에 들어가실 때도 모든 천군과 천사들이 노래했을 것입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
이때 하늘에 있는 모든 관중들이 서로 말했습니다. "영광의 왕이 누구신데" 또 말했습니다. "만군의 주가 누구신데" "영광의 주가 누구신데"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대답했습니다.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라는 두 가지 대답을 받았습니다.
"이분이 누구신데" 예루살렘 시민들이 한 이 질문 가운데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아는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공개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숨어서 가르치시거나 비밀히 일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시민들은 예수님을 거리에서도 가까이 뵐 수가 있었습니다.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실제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육신적인 면으로만 보고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흔히 하는 말은 "그분의 형제들이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아버지 요셉을 우리가 잘 알지 않느냐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 특수한 사람 몇 명을 제외하고는 예수님을 아는 것이 지극히 일반적이었습니다. 육신적인 관계 이상의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 예수님 자신도 이 때까지는 자기 자신을 별로 나타내시려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적을 행한 후에도 아예 이 소문을 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서 돌려보내신 적이 많았습니다.
어떤 때는 많은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을 뵙기 원하고, 예수님의 귀한 말씀을 듣기 원하기 때문에 조용히 쉬실 만한 시간의 여유도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것을 별로 원치 않으셨습니다. 교훈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기도할 때도 길거리에서 손들고 큰 소리로 기도하기보다 골방에서 은밀한 중에 들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은밀히 구하라고 했습니다. 구제도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히 하라고 했습니다. 금식도 은밀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종려주일에 대한 기록을 사복음서에서 자세히 읽어보면 이 날 예수님의 태도는 그 동안의 태도와는 아주 다른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는 왕으로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시민들은 너무나 큰 변화를 가지신 예수님의 태도에 놀라서 "이분이 누구신데" 라고 의아한 눈초리로 서로 말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동안은 조용히 지내셨지만 오늘은 만주의 주, 만왕의 왕이심을 알리시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앞, 뒤, 좌우에 서서 호산나 찬송을 부르며 예수님을 따를 때 예수님은 조금도 사양하지 아니하시고 그 모든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면서 나귀를 타시고 당당한 태도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아마 그때 이 광경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도에 넘치는 찬송을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하여 말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여 좀 조용하게 하시오. 이거 너무 소란스럽지 않소"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환영을 받으시며 영광을 누리시는 모습을 볼 때 시기하는 마음이 든 것도 당연하다고봅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말씀이 이상합니다.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태도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까지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계시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언자로서의 메시야를 나타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왕으로서의 메시야를 친히 나타내신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나귀
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2,000년전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만왕의 왕 예수님의 행차는 그런 굉장한 행차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사람들이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했을 뿐입니다. 한 가지 다른 것은, 이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열심이 대단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때도 예수님께 대하여 열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굶주린 대중을 먹였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열심은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경우가 다릅니다. 떡이나 생선을 배부르게 먹어서가 아니라 중심으로부터 왕으로 오신 메시야를 환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앉으실 나귀등에 그들이 입었던 옷을 깔았습니다. 땅바닥에도 그들의 옷을 깔아 주님 가시는 길에서 양탄자를 대신했습니다. 그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면서 승리의 메시야를 환영했습니다. 예수님과 군중은 정말 혼연일체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참된 교회의 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참된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에게 감동되어서 하나로 뭉친 무리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주님을 위하는 것이라면 아낌없이 드리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바로 그랬습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감격해서 유무상통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교회가 되었고, 구원받은 심령이 날마다 더해 가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이분이 누구신데 그렇게 사람들이 따르고 그분을 위해서라면 아까운 것 없이 바칩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참 모습입니다.
저는 우리 새봄교회에서 이런 모습을 보며 감사합니다. 새봄교회는 우리 한국 교회의 문화처럼 되어 버리고, 교회 안의 계급처럼 되어 버린 직분에 연연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나와서 은혜받고, 성령충만해지고,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고,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좋은 소문이 나고 있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이렇게 중심으로 주님을 따를 때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는 이 사람들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는 데 무슨 특별한 장식을 한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순서를 마련한 것도 아닙니다. 복잡한 절차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아주 평범하고, 단순하고, 소박했습니다. 그저 순수한 마음, 참된 마음, 중심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환영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도 성실하고, 참되고, 정성어린 우리의 환영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사실 예루살렘성에서 일찍이 이런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환영의 모습을 본 적이없었습니다. 훌륭한 제왕들이 국빈으로 다녀갔어도, 개선 장군이 입성했어도 이런 환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그때는 환영의 준비를 상당히 하고, 의전(儀典)절차를 갖추었었지만 이처럼 진정한 환영은 못되었습니다. 구경거리는 되었지만 감동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미리 동원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까지 쫓아오며 "호산나,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어라"고 하면서 환호하는 모습을 예루살렘 시민들은 일찍이 본 적이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시민들은 어느 나라 왕이 국빈으로 와도 이렇게 환영하지 않았는데 이처럼 중심에서 우러나는 환영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이분이 누구신데 이런 굉장한 환영을 받는 거지요"라고 물은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 보면 주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고 어디서나 같은 말이 들렸습니다. "이분이 누구신데"
여러분,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르는 곳에는 두 가지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함에 이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복음을 거절하여 멸망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구원 얻은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었지만, 멸망하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장 어리석게 보였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베들레헴 어느 여관 말구유 위에 나실 때의 일을 기억하시지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동방의 이상한 별은 동방박사들에게는 소망을 주며, 그들을 아기 예수께 인도했습니다. 그러나 헤롯 왕에게는 근심과 두려움을 안겨 주었으며, 그를 사망으로 인도했습니다. 이 별은 꼭 반대의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말할 수 없는 축복의 소식이었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무서운 화를자초하는 기회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루소는 그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의 가장 큰 화는 자기 자신에게서 온다. "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라. " 십자가의 도는 하나인데 이 십자가의 도를 받는 사람들은 두 가지 종류의 사람입니다. 멸망하는 자들과 구원을 얻는 자들입니다. 문법적으로 말하면 현재진행형을 썼습니다. 세상에 사람이 많지만 이 모든 사람들을 간단히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멸망 중에 있는 자들과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말씀이 다르게 들립니다. 십자가가 다르게 보입니다. 같은 십자가이지만 멸망하는 중에 있는 사람과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사람이 각각 다르게 보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중에 있는 사람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누구든지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이고, 십자가의 말씀이 미련하게 들리면 그것은 그 사람의 영혼이 멸망의 상태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것이 아닙니다. 미련하게 보일 뿐입니다. 옛날부터 오늘까지 많은 철학을 연구한 사람들, 많은 학문을 연구한 사람들은 십자가의 도를 미련하게 보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인다고 하면 그만큼 그 사람의 심령이 부패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하게 하는 능력이 십자가의 도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변화하게 하는 능력도, 죄악 가운데 얽매여서 죄의 종이 되었던 사람으로 하여금 죄의 사슬을 끊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게 하는 것도, 죄를 이기게 하는 능력과 기쁨과 화평을 주는 능력도 십자가의 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복음이 어떤 사람에게 임할 때 복이 됩니까 단순한 마음에 임할 때입니다. 길바닥같이 굳은 마음이 아니고, 돌작밭같이 얕은 마음이 아니고, 가시덤불같이 복잡하고 의심과 걱정에 사로잡혀 있는 마음이 아니라 옥토같이 부드럽고 단순하여 복음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단순한 마음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나 자신을 내세우고 내 결백한 양심을 자랑하는 동안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자신을 온전히 십자가 앞에 내던지고 주님의 흘리신 피를 의지할때 내 죄사함을 받고 복음이 내게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될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속에 영접하기 전에는 위로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 나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의 팔에 나 자신을 온전히 맡기기 전에는 능력으로 충만히 채워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나 자신이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속에 영접하면 그가 나를 모든 악에서 건져주시고 죄에서 자유케 하십니다. 나를 모든 악에서 건져 주시고, 죄에서 자유케 하시며, 절망과 사망에서 건져주시는 이분이 누구십니까 내 삶을 이처럼 변화시켜 주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나에게 고통 속에서도 기쁨을 안겨주시고, 환난 속에서도 평안을 누리게 하시며, 실패한 가운데서도 새 용기를 주시는 이분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분이 누구십니까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고, 사람들과 같이 사셨고, 인간을 이해하시고, 인간을 위하여 일하시다가, 인간을 구속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 우리 구주십니다.
이분이 누구십니까 나귀 타시고 입성하시는 이분은 평강의 왕이시고, 만왕의 왕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종려주일은 만왕의 왕 되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날입니다. 나 개인이 이 왕을 영접함으로 마음의 평화를 누립시다. 우리 가정이 이 왕을 영접하여 주님이 우리 가정을 온전히 다스리게 합시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왜 평화가 없이 삽니까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지 못해서 그럽니다. 왕으로 모시면 왕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주님의 통치 아래 있으면 그 어디나 하늘 나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우리 서울 시민이 다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그리스도께서 이 서울시를 다스리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안과 공포, 부정과 부패, 온갖 추악한 것으로 가득 찬 서울이 놀랍게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의로운 도시, 깨끗한 도시, 아름다운 도시, 평화의 도시가 될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각 방면으로 개혁을 시도하고 있지만 왜 생각대로 잘 되지 않고 잡음만 무성합니까 세상말로 의식이 바뀌어야 하는데 어떻게 의식이 바뀝니까 길은 오직 하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
초대교회 때 성령이 임해서 성령의 지배를 받으니까 사람이 새로워지고, 도시가 뒤집어졌습니다. 먼저 믿는 우리가 새로워지면 온 서울시가 들끊으며 "이분이 누구인데"라고 사람들이 물을 것입니다.
지금 정부도 국민도 갈피를 못잡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환영하러 다 함께 일어나야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온전히 변화하면 사람들은 눈을 크게 뜨고 "이분이 누구신데 이렇게 사람들이 달라지게 하는가"라고 할 것입니다. 이때야말로 우리 모두가 일어나 예수님을 모실 때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살고 나라가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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