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TOP
DOWN

[종려주일] 십자가 안에 있으면

본문

오늘은 교회 달력으로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문을 향하여 올라오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로 환영한 것이 유래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길 위에 폈습니다. 왕이 행차할 때 카페트를 길에 깔았던 것처럼 예수님을 왕으로 대접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길 위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흔들면서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온 무리가 외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우리 교회도 종려주일을 의미하는 뜻으로 팜 추리를 갔다가 여기저기 세워두었는데, 아니 예배당에 웬 나뭇가지야. 놀라신 분들도 있으실 겁니다. 종려주일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전세계의 교회가 이번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지냅니다. 이 기간에는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말씀 묵상이나 금식기도를 하기도 하고, 화려한 옷이나 모임은 절제하면서 거룩하게 지냅니다. 한국 교회는 전통적으로 특별새벽기도회를 합니다. 우리교회도 사순절 특별새벽기도회를 하고 있는데, 남은 한 주간도 여러분이 열심히 참여하셔서 의미있는 고난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고난주간 하면 무엇이 생각나시나요 고난주간의 대표적인 상징은 십자가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십자가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지요. 목걸이나 귀걸이로 사용되기도 하고, 차에 장식용으로 걸어 놓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는 믿지도 않으면서 십자가를 멋으로 지니고 다니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적으로 생각해서 십자가를 몸에 지니고 다니면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준다고 까지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로마 시대의 십자가는 사형 틀이었습니다. 중한 죄를 지은 사람을 십자가에서 죽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좌우에 두 명의 강도에게 십자가 처형을 시킨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잔인한 사형 방법이었습니다. 너무 잔인했기 때문에 로마사람들이 십자가 사형제도를 만들 때에 아예 법적으로 로마 시민권자는 어떤 경우에든지 십자가 사형은 행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붙였습니다. 이렇듯이 십자가는 저주와 수치와 죽음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그 순간부터 십자가의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씻어주신 용서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활짝 열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을 얻게 되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에게는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영광이 있는 겁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사도들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굴복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핍박 아래서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만이 알아 볼 수 있는 암호를 만들었어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X나 P와 같은 문자를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놀라운 역사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십자가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 개역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하지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라. " 여러분 이상하지 않아요 똑같은 십자가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이니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십자가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어떠한 관점,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십자가 안에 있느냐 십자가 밖에 있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말씀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시각은 십자가는 교회 지붕에 붙어 있는 하나의 표시이고 종교적인 상징으로 생각합니다. 십자가가 붙어 있으면 '교회 다니는 사람이구나'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십자가를 바라보면 그냥 마음이 편해지는 정도에 불과한 사람도 있습니다. 십자가 밖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성경 22절에 보면 십자가의 능력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는 유대인이고 다른 하나는 헬라인입니다. 유대인은 기적, 표적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표적이란 초자연적인 기적을 말합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반석에서 물이 나고,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보호해주고 만나를 먹고.. 이런 것들이 기적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표적(기적)을 참 좋아했어요.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도 표적을 많이 구했어요. 마태복음 12장 38절에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표적을 보여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유대 사람들이 너무 표적을 요구하니까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 48절에서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한다고 의미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헬라 사람들은 지혜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지혜는 철학적인 지혜를 말합니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리를 앞세웁니다. 인간의 지혜로 만물의 근원을 캐려고 하며, 인생의 근본 문제를 지혜로 해결해 보려고 했습니다. 심지어 구원의 문제도 인간의 지혜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십자가가 구원을 얻는 사람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왜 십자가가 구원을 얻는 사람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될까요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죄인인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내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십자가가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에게만 나타납니다. 기적을 아무리 많이 보았어도 소용없습니다. 철학적인 사고 방식을 가져도 소용없습니다. 똑똑해도 소용없습니다. 말을 잘해도 소용없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아도 소용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을 때에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말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지요. 아무리 귀한 구슬이라도 꿰지 않으면 보화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중요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를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라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늘 종려주일에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으셔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게 되면 영적인 눈이 트여져서 십자가 안에 있게 됩니다. 이전에는 십자가를 믿지 못해서 십자가 주위에만 맴맴 돌고 십자가 밖에서 보기만 했는데 이제는 십자가를 믿기 때문에 십자가 안에 들어와서 생각하고, 십자가 안에 들어와서 기도하고, 십자가 안에 들어와서 말씀 묵상하고, 십자가 안에 들어와서 예배드리게 됩니다. 모든 일을 십자가 안에서 행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행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십자가 안에 있으면 달라지는 것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십자가 안에 있으면 나의 죄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이 착각하며 사는 것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자신이 근사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탁월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보다 못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제일 똑똑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혜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죄송한 말씀이지만 우리 중에 누구도 근사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좋은교회에 괜찮은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같이 죄인입니다. 죄인이라고 하면 도덕적인 죄나 법률적인 죄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근본적인 죄는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한 것을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자기 멋대로 살았습니다. 그 결과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원죄, Original Sin 이라고 그러지요.
우리에게는 하담과 하와가 지은 원죄가 흐르고 있습니다. 원죄를 테스트하는 방법이 하나 있어요. 죄짓도록 가리키는 학교에 들어가서 부단히 연습하고 연습해서 죄를 지었다면 그 사람은 원죄가 없는 겁니다. 우리 중에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죄는 연습하지 않아도 저절로 짓게 되고, 선한 것은 배우고 연습하고 익혀도 잘 되지가 않습니다. 이것이 원죄가 흐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십자가 안에 있으면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 안에서 십자가를 통하여 나를 보면 자신의 모습이 올바로 보입니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이 보입니다. 예수님이 내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 인간은 언제나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용서해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 안에 있을 때에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 말하지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로다. 사도 바울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이 훌륭한 삶을 살았는데,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는데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위하여 생명을 내어놓았는데 자신을 죄인의 우두머리라고 말합니다.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볼 수가 있고 깨닫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십자가 안에 있으면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을 쓰시는 것을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능력있는 사람은 쓰시지를 않았다는 겁니다. 예수님도 보면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능력있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쓰시지를 않았어요.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 잡는 어부나 사람들에게 인식이 좋지 않는 세리... , 저런 사람을 데리고 뭐하시려고 하나 할 정도로 평범한 사람을 쓰셨다는 겁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저나 여러분이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큰 이유가 없어요. 다 죄인이잖아요. 인정하세요 죄인이라고 말하면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더라구요. 어느 신학자가 이런 말을 했어요.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고,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다. 목사도 죄인이고 권사도 죄인이고 집사도 죄인이라는 거예요. 모두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하여간 저나 여러분이나 여호와 하나님 앞에 이렇다할 만한 것을 내 놓을 것이 없어요. 뭐를 잘한다고 해봐야 얼마나 잘하겠어요. 여호와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여호와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하다고 말씀하잖아요. 그런데도 이렇게 써주신다는 겁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겁니다. 예배를 받으신다는 겁니다. 무엇으로 설명이 될까요 은혜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설명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모두 죄인인데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귀한 그릇으로 쓰임 받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의와 능력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이 되어 십자가 안에 들어와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안에 있으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저절로 깨달아 집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이런 은혜가 없고 이런 복이 없습니다. 복중의 복이 무엇인가요 죄 씻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인데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받고 말끔히 씻음 받고 여호와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복인가요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이런 복을 다 받은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처럼 훌륭하고 아름다운 사람은 없습니다. 은혜를 깨닫고 겸손한 사람처럼 근사한 사람은 없습니다. 십자가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자기의 죄를 바라보기 때문에 겸손해 집니다. 십자가 안에 있으면 자동적으로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십자가 안에 있으면 시각이 바뀌어집니다.
몇 해전에 안경을 하러 갔는데 안경사가 나이를 묻더니만 바이포칼을 해야 한다고 그래요. 아직은 괜찮다고 하니까 40이 넘으면 해야한다고 그래요. 아마 다음 번에 그 안경 하러 또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몇 년 동안 괜찮았는데, 최근에는 노안이 오기 시작해서 안경을 쓰고서 글을 읽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눈에 맞지 않는 안경을 쓰고 활동하려고 하니까 얼마나 불편한지 몰라요. 운전할 때에는 지금의 안경을 반드시 써야하고,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할 때에는 안경을 벗어야 합니다. 다음 번에는 바이포칼 된 안경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각, 인생관입니다.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인간은 죄로 인하여 사람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질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곡된 시각을 바로 잡기 위해서 새로운 안경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안경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의 영적인 안경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어서 십자가 안에 있으면 시각이 바뀌어집니다. 안경이 시각을 바뀌어주듯이, 안 보이는 것을 바로 보게 하듯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시각을 바뀌어줍니다. 그 이상하지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지 못해서 십자가 밖에 있을 때에는 언제나 자신의 의가 보였어요. 십자가 밖에 있을 때에는 자신의 허물과 죄는 보이지 않고 남의 허물과 죄가 크게 보였어요. 십자가 밖에 있을 때에는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눈의 티만 보였어요.
그런데 십자가 안에 있으니까 나의 죄와 허물이 보이게 됩니다. 십자가 안에 있으니까 내 눈의 들보가 보이게 되고 다른 사람의 눈의 티는 보이지 않게 됩니다. 십자가 안에 있으니까 교만과 시기와 다툼과 분쟁이 보이지 않고, 겸손과 사랑이 보이게 됩니다.
십자가 안에 있으니까 이웃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들도 나와 똑같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귀한 사람이라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을 함부로 미워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을 내 마음대로 판단하고 정죄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그들을 인정하고, 그들을 긍정적으로 보고, 그들을 귀히 여기고,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높여 주어야 할 귀중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신앙 생활하다가 보면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있습니다. 싫고 미운 사람이 있어요. 못 마땅한 사람이 있어요. 나에게 고통을 주고 어려움을 주는 사람이 있어요. 가시 같은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내가 십자가 안에 있어서 그들을 보면 전혀 다른 눈으로 보이게 된다는 겁니다. 십자가 안에서 그들을 보면 나와 똑같이 여호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과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민 생활하면서 보면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는 것과 같은 자리에 처할 때가 있어요. 때로는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세상이 불안하여 금방이라도 망할 것 같아서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십자가 안에 있으면 그 절망적인 상황과 불안한 상황을 다시 새롭게 보이게 됩니다. 절망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평안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을 이끄시는 분은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내가 십자가 안에 있으면 느끼게 되는 겁니다. 십자가 밖에 있으면 절망이 보이지만 십자가 안에 있으면 희망이 보이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에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은혜가 있습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인 구원의 능력이 저와 여러분과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하였습니다. 고난주간을 맞는 여러분, 이번 한 주간에 우리도 우리의 몸과 마음과 삶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없이는 그 어떤 것도 보지 마시고, 십자가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밖에 서지 않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안에서 세상을 보세요. 십자가 안에서 자신을 보세요. 십자가 안에서 다른 사람을 보세요. 십자가 안에서 교회를 보시고, 십자가 안에서 문제를 풀어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안에서 행할 때에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놀라운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 이어질 줄로 믿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사순절 마지막 주간을 지내셔서 십자가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 안에 있으면 승리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승리하는 모든 교우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