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호산나의 하나님
본문
호산나는 2000년 전에 있었던 얘기가 아니라 오늘 얘기입니다. 호산나, 주님 오시옵소서. 오셔서 구원하여 주옵소서. 오늘 예수께서 오시는 장면을 성경 말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환호하고, 마태복음, 마가복음에 보면 나뭇가지라고도 되어 있고, 산에서 꺾은 나뭇가지라고 되어 있는데 요한복음에만 종려나무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다 똑같은 나무였을 것입니다.
종려나무였을 것 같은데 종려나무를 특별히 강조한 요한복음의 의도는, 종려나무와 관련해서 이스라엘 역사에 중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이루어졌을 때, 배고픔과 기근이 끝나고 먹을 것이 풍부해졌을 때,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 개선하고 평화를 이루는 꿈이 이루어졌을 때,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환호했다는 역사의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오늘 예수께서 등극하시는데 사람들이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분, 풍요의 왕으로 오시는 분을 향해, 만세, 우리를 구하소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가랴서에 보면 나귀는 작은 말에 속하지만 특별히 평화의 왕이 임재할 때 쓰는 말, 그것이 나귀입니다. 온통 예수의 예루살렘 등극을 평화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호산나, 구해주소서. ”인데, 평화라는 말과 구원하여 주소서는 똑같은 말입니다. 평화는 구원입니다. 평화로운 구원이고 구원받은 자의 평화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오늘 호산나 속에 담아서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록에 보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승리, 평화의 승리, 나귀를 타고 평화의 임금이 오시고, 이스라엘의 큰 수도를 향해서 들어오십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이렇게 외칩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시는 분”,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분, 우리를 구해주소서. ”
예수께서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무엇을 느끼셨을까, 제가 한 번 상상해 보았습니다. 오늘 예루살렘에 들어와서는 호산나, 종려가지, 나귀, 평화의 기대가 있지만, 내일부터는 바리새파 사람, 서기관, 제사장, 로마법정과 사투를 벌이기 시작합니다. 내일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등극을 하는데 결단, 대결, 그리고 원치 않는 죄를 뒤집어쓰고 사형 언도를 받습니다.
그리고 목요일이 지나 금요일이 되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십니다. 새벽에 끌려 나가서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매달려서 여섯 시간 동안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찢기고 조롱당하고 침 뱉음 당하십니다. 오늘 구약에 있는 말씀을 보면, 침 뱉음 당하고, 뺨 맞고, 수염도 뽑히고, 이사야서에 관한 예언 그대로 등도 맞고 이 모든 일을 당합니다.
그렇게 당하고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십자가에서 고개를 떨어뜨리고 죽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인 사람이 하는 말, “여호와 하나님, 왜 이렇게 나를 버리십니까 왜 버리십니까 어쩌자고 버리십니까” 금요일은 심각한 날입니다. 죽습니다. 그리고 토요일에 쉬었다가 일요일 새벽에 무덤을 열고 부활해서 나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수난과 곤란을 다 몸에 지고 죽기까지 복종한 다음에 무덤에 모셨다가 부활한 아침까지 일주일 동안의 삶의 과정이 정말 지긋지긋할 겁니다. 도대체 맛볼 수 없는 상황을 일주일 동안 맛보면서 오늘 나귀를 타고 가는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이스라엘의 임금이 오신다. 평화의 임금이 오신다. ” 외칩니다.
이 땅의 축복과 아름다움이 그 속 외침 속에, 호산나 속에 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우리가 기다리던 이 땅에 독립을 주옵소서.
3. 1운동을 부르던 심정으로 독립을 주옵소서. 로마제국주의에서 벗어나서 이스라엘만이 독립된 나라를 주옵소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시는 분이시여. ’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마 기가 막혔을 겁니다. ‘내가 지금 독립투사로 오는 것도 아닌데 이 호산나 물결에 어떻게 대답할까 내가 십자가에 죽을 때, 당신도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얼마나 좌절할까’ 이런 이야기를 다 가슴에 품고 등극을 합니다.
또 다른 등극 이야기는, ‘다윗의 도시에 오시는 주님이시여’,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다윗의 도시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는 다윗이 만든 도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12지파로 나누어서 각자 군웅할거하고 있을 때, 다윗은 이스라엘을 처음으로 통일한 통일왕국의 초대 임금입니다.
통일왕국을 세우고 나서 첫 번 성읍으로 정한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당시 누구도 이스라엘 백성이 점령해 보지 않은 땅, 북왕국, 남왕국의 딱 중간에 있는 땅, 어쩌면 우리 한양, 서울과 비슷합니다. 그곳을 다윗 임금이 수도로 정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택한 나라, 유대나라를 만들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뇌리 속에 다윗 임금, 첫 임금, 다윗이 만든 첫 도시 예루살렘, 이 예루살렘 속으로 오늘 새 임금이 들어옵니다. 역사를 아는 사람, 이 사람들한테는 오늘 입성하시는 예수가 귀하고 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말씀에 보면 호산나를 불렀던 사람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입었던 옷을 벗어서 나귀가 가는 길, 예수께서 걸어가던 길에 깔았던 사람들은 배부른 사람, 사회적 지위가 어느 정도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아니고 서민, 평민, 배고픈 사람들이었습니다. “독립을 주소서. 일용할 양식 좀 주소서. 마실 물 좀 주소서, 죽겠나이다.
나를 구하소서. 우리를 구하소서. ” 하는 말은 단순히 정치적인 의미만이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이 없습니다. 당장 굶어 죽겠습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몸이 지쳐서 말라비틀어지고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한테 건강을 주옵소서. 생각이 말라버렸습니다. 생각이 소생하게 좀 해주시옵소서. ” 인간이 바라는 모든 것을 호산나에 담았을 겁니다.
오늘 예수께서 묻습니다. “사랑하는 경동교회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 ‘호산나’ 하셨지요 왜 하셨습니까 어디서 구원해 달라고 하셨습니까 무엇을 구원해 달라는 겁니까 누구를 구해달라는 겁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불렀습니다. ‘호산나’는 백성들만 한 게 아니라 예수님 자신도 ‘호산나’ 하였습니다.
그 예수님의 호산나는 하늘 아버지를 향해서 “여호와 하나님, 날 좀 구해주옵소서. 내가 왜 죽음의 길을 가야 합니까 내가 왜 당신한테 버림받아야 합니까 내가 왜 찢겨야 합니까 내 수염이 왜 깎여야 합니까 콧수염이 깎이고 등에 얻어맞아야 합니까 이 치욕을 어떻게 견디란 말입니까 호산나. ” 예수님도 호산나, 하셨습니다.
그 호산나의 아주 대표적인 표현이 “나의 여호와 하나님, 나의 여호와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잔을 나한테서 피해갈 수는 없습니까”인데, 호산나를 아무리 불러도 하늘 아버지는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비극입니다. 그러나 부활 아침에서야 예수께서 깨달았습니다. 호산나, 죽고 부활하여 새 세상, 새 도시, 새 나라, 새 사람이 탄생합니다. 이 모든 역경 속에서 호산나는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나라, 도시마다 이름이 있는데 그 이름은 문화적 배경이나 언어를 쓰는 사람들에 따라서 약간씩 다르게 발음되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의 ‘살렘’이 ‘평화’라는 뜻입니다. ‘예루’라고 하면, 평화의 동산, 평화의 도시, 평화의 도읍이라는 뜻입니다. ‘예루’는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살렘’입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만들어 놓고 이곳은 평화의 수도이다. 이스라엘의 수도는 여호와 하나님의 평화가, 하늘의 평화가 임하는 곳이다. 그래서 예루살렘입니다. 너무 유대 백성이 자기들의 평화라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가 만든 평화라고, 자꾸 우월적이고 자기만 옳다고 하니까 유대 백성들 말고 이방인들, 로마 사람들, 바빌론 사람들, 앗시리아 사람들, 이스라엘 말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부를 때 빈정대는 어투로 불렀습니다.
‘살렘’이라 부르지 않고 ‘솔루마’라고 불렀습니다. 재밌는 표현입니다. ‘솔루마’라는 말은 평화를 빈정댄 의미입니다. “평화라고”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부를 때 유대백성들은 이곳은 거룩한 곳, 여호와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는 곳, 성서가 있는 곳, 지성소가 있고,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곳, ‘예루살렘’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 사람들은 ‘예로 솔루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에 오십니까 예로 솔루마에 오십니까 언어의 차이인 줄 아십니까 중요한 단서가 하나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봤더니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등극하신다는 말을 예루살렘으로 적지 않고 헬라말로, ‘예로 솔루마’, 라고 적었습니다. 폭탄선언 같은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은 여호와 하나님의 도시인데 겉모습은 일반 도시입니다. 가봤더니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종교가 썩었습니다. 성전은 장사꾼들로 꽉 차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이 장사꾼의 도둑의 소굴로 변하고, 예루살렘이라는 거룩한 도시가 거짓과 상술과 온갖 타락으로 얼룩진 곳이 되었습니다.
그곳을 어떻게 평화의 도시라고 이름합니까 그곳은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예로 솔루마, 타락의 도시입니다. 예수님이 어디로 오셨습니까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은, 예수님은 가식된 도시, 예루살렘에 오지 않고, 썩어빠진 도시, 예로 솔루마에 들어오셨습니다. 신약성경에 보십시오. 그러기에 예수께서 구원을 베풀 수 있습니다. 왜 가증된 곳에 오셔서 구원을 베푸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말을 타고 나귀 타고 오시는 예수를 맞이하고 싶습니까 예수는 아직 여호와 하나님의 눈에 예수의 눈에 구원받지 못한 예루살렘에는 오시지 않습니다. 예로 솔루마라고 스스로 죄악을 고백하고 ‘우리 부족합니다. 회개할 게 많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죄가 많습니다. 타락했습니다. 부패했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 이렇게 결심하고 사는 예로 솔루마 시민들에게 오겠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아주 솔직했고 그리고 진실했고 이것을 기록한 제자들도 아주 솔직 담백했습니다. 예루살렘은 미래형입니다. 현재형은 예로 솔루마, 타락한 도시, 구원이 필요한 곳입니다. 우리는 미래 찬송을 부르지만 찬송을 부르는 입술이 사는 현재는 타락과 고통과 아픔이 있는 곳입니다.
오늘 메시지는 이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숨기지 마십시오. 더러운 걸 적당히 칠해서 ‘살렘’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진실이 아닙니다. ‘솔루마’, 그대로 가져오십시오. ‘나 들어가겠습니다. 고난 받겠습니다. 구원의 역사를 이루겠습니다. ’ 이 사실이 오늘 최대의 메시지입니다. 우리 서울은, 이 땅은 살렘입니까 예루살렘입니까 내일은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루살렘 시민입니까 아닙니다.
예로 솔루마의 시민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끌어안고 구원을 베풀어 준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어디 갔는지 아십니까 성전에 가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호산나 속에 “제발 가셔서 유대 총독이, 로마가 파송한 총독이 묵고 있는 안토니아 궁으로 가십시오. 그곳에 가셔서 유대 땅은 독립했노라고 선포 좀 해주시고 총독 몰아내고 독립선언을 하십시다. ” 외칩니다.
예수님은 그리로 가시지 않고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갔더니 썩어빠진 예루살렘, 예로 솔루마의 성전도 타락했습니다. 들어가셔서 잠깐 쉬셨다가 내일부터 가셔서 성전에서 하신 일이 “여호와 하나님이 기도하는 집, 더럽히지 말라. 깨끗하게 해 달라. 안 되면 내가 성전을 새로 지으마. ”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에게 두 가지를 기대했습니다. 하나는, 독립과 배부름과 세상적인 일입니다. 예수님이 그걸 마다한 게 아니십니다. 만일 예수께서 그걸 위해 오셨다고 하면, 혹시 유대 독립이 가능했다면 예수님은 유대 민족주의자로 오셨습니까 우리 구원은 어떡하라고요 이방인 구원은 어떡하고 전 세계의 구원은 어떡하라고요
예수님의 말씀은 나는 온 생명을 구하러 왔고 예루살렘뿐 아니라 온 도시 인간들을 다 구원하러 왔다. 그 구원의 한 구석에, 아니면 중심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도 있다고 하십니다. ‘유대 사람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이스라엘의 왕이여, 오시옵소서. 다윗의 아들이여, 오시옵소서. ’ 하지만 잘못된 민족주의적 편견을 가지고 이야기해봤자 예수님은 고달팠습니다. 유대민족 속에 온 세계가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 속에 유대민족이 우뚝 서라. 모범으로’, 그 뜻이었습니다.
어떻게 유대민족 속에 온 세계가 들어갑니까 예수님의 비전은 컸습니다. 그러나 호산나, 하는 백성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 예수의 고민이 있습니다. ‘온 백성을 구원하려는 사람, 그 구원 속에 이스라엘아 들어와라. ’ 그러려면 예수를 메시아로 모셨어야 하는데 아직도 못 모시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두 이름의 도시입니다.
제가 이런 예화를 하나 읽었습니다. 정치 지도자 중에 유머도 많고 지혜도 많은 사람 중에 뽑히는 사람이 링컨입니다. 낡은 이야기 같긴 하나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링컨이 얼굴이 못생겼습니다. 못생겼지만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이 분이 의회에 불려나왔는데 야당에서 “당신은 속과 겉이 다르다. 두 얼굴이다. 이중인격자다. ”라면서 공격을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링컨이 하는 말이 “제가 얼굴이 둘이었으면 오늘 왜 이렇게 추한 얼굴로 여러분 앞에 왔겠습니까” 해서 국회의원들이 웃었다고 합니다. 자기는 하난데 왜 두 개라고 하십니까. 예수님의 얼굴은 몇 개입니까 예수님의 얼굴은 ‘세계 구원자’,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얼굴이 유대인들이 보기에 자기 독립 먼저 안 시킨다고 일그러져 보였겠지만, 예수님은 하나의 얼굴, 그 속에 유대백성의 구원도 포함하는, 한국 백성의 구원도 포함하는, 경동의 구원도 포함하는, 만민을 위한 구원이 오늘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예수님을 민족주의화하지 마십시다. 예수님을 내가 생각하는 이데올로기 속에 집어넣지 맙시다. 예수님을 내가 생각하는 이해관계 속에 집어넣고 꼼짝 못하게 하지 맙시다. 그렇다고 들어가실 예수님도 아닙니다.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이 땅과 나 자신을 내 사고방식대로 아직은 예루살렘이라고 하지 맙시다. 아직은 예루살렘이 아니고 예로 솔루마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오늘 우리한테 예수가 주신 말씀입니다. “제발 나는 이런 곳에 가고 여호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싶다. ” 성전도 타락했다고 그랬습니다. 예루살렘도 그런 형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교회입니까 예루살렘은 어떤 도시입니까
예로 솔루마는 세상에 없습니까 저는 예로 솔루마 시민입니다. 예루살렘이 따로 있고 성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사도바울의 말씀에 보면 살아 움직이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걸어 다니는 성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보시기에 모든 인간은 걸어 다니고 숨 쉬는 예루살렘입니다. 고로 “예루살렘아, 똑바로 서라. 구원을 받아라. 그리고 예루살렘이 되어라. ”
진실된 예수의 호소를 우리 한 번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힘들어도 들어봅시다. 사순절, 고난절의 시작을 우리는 이렇게 회개하고 열어놓습니다. 우리의 진실을 내놓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진실을 묶어서 십자가에 달리시겠답니다. 그리고 다 구원하시고 부활의 아침 새로운 도시를 주겠답니다. 새로운 비전을 주겠답니다.
이 비전과 약속이 없이 우리가 왜 고난주간을 맞이해야 합니까 오늘 시작입니다. 오늘을 진실합시다. 오늘을 열어 놓읍시다. 있는 그대로 고백합시다. 그리고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데, “호산나! 진실로 구해주옵소서. 구할 게 많습니다. ” 우리한테 기다린 답이 이것입니다. 열어 놓읍시다. 호산나는 개방형 호소입니다. 호산나는 진실을 삼은 언어입니다. 호산나는 자기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는 언어입니다. 그리고 진실로 구원을 기대하는 희구하는 그런 기도의 호소입니다. 호산나, 주님이 오십니다. 아멘.
종려나무였을 것 같은데 종려나무를 특별히 강조한 요한복음의 의도는, 종려나무와 관련해서 이스라엘 역사에 중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이루어졌을 때, 배고픔과 기근이 끝나고 먹을 것이 풍부해졌을 때,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 개선하고 평화를 이루는 꿈이 이루어졌을 때,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환호했다는 역사의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오늘 예수께서 등극하시는데 사람들이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분, 풍요의 왕으로 오시는 분을 향해, 만세, 우리를 구하소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가랴서에 보면 나귀는 작은 말에 속하지만 특별히 평화의 왕이 임재할 때 쓰는 말, 그것이 나귀입니다. 온통 예수의 예루살렘 등극을 평화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호산나, 구해주소서. ”인데, 평화라는 말과 구원하여 주소서는 똑같은 말입니다. 평화는 구원입니다. 평화로운 구원이고 구원받은 자의 평화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오늘 호산나 속에 담아서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록에 보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승리, 평화의 승리, 나귀를 타고 평화의 임금이 오시고, 이스라엘의 큰 수도를 향해서 들어오십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이렇게 외칩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시는 분”,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분, 우리를 구해주소서. ”
예수께서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무엇을 느끼셨을까, 제가 한 번 상상해 보았습니다. 오늘 예루살렘에 들어와서는 호산나, 종려가지, 나귀, 평화의 기대가 있지만, 내일부터는 바리새파 사람, 서기관, 제사장, 로마법정과 사투를 벌이기 시작합니다. 내일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등극을 하는데 결단, 대결, 그리고 원치 않는 죄를 뒤집어쓰고 사형 언도를 받습니다.
그리고 목요일이 지나 금요일이 되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십니다. 새벽에 끌려 나가서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매달려서 여섯 시간 동안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찢기고 조롱당하고 침 뱉음 당하십니다. 오늘 구약에 있는 말씀을 보면, 침 뱉음 당하고, 뺨 맞고, 수염도 뽑히고, 이사야서에 관한 예언 그대로 등도 맞고 이 모든 일을 당합니다.
그렇게 당하고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십자가에서 고개를 떨어뜨리고 죽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인 사람이 하는 말, “여호와 하나님, 왜 이렇게 나를 버리십니까 왜 버리십니까 어쩌자고 버리십니까” 금요일은 심각한 날입니다. 죽습니다. 그리고 토요일에 쉬었다가 일요일 새벽에 무덤을 열고 부활해서 나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수난과 곤란을 다 몸에 지고 죽기까지 복종한 다음에 무덤에 모셨다가 부활한 아침까지 일주일 동안의 삶의 과정이 정말 지긋지긋할 겁니다. 도대체 맛볼 수 없는 상황을 일주일 동안 맛보면서 오늘 나귀를 타고 가는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이스라엘의 임금이 오신다. 평화의 임금이 오신다. ” 외칩니다.
이 땅의 축복과 아름다움이 그 속 외침 속에, 호산나 속에 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우리가 기다리던 이 땅에 독립을 주옵소서.
3. 1운동을 부르던 심정으로 독립을 주옵소서. 로마제국주의에서 벗어나서 이스라엘만이 독립된 나라를 주옵소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시는 분이시여. ’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마 기가 막혔을 겁니다. ‘내가 지금 독립투사로 오는 것도 아닌데 이 호산나 물결에 어떻게 대답할까 내가 십자가에 죽을 때, 당신도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얼마나 좌절할까’ 이런 이야기를 다 가슴에 품고 등극을 합니다.
또 다른 등극 이야기는, ‘다윗의 도시에 오시는 주님이시여’,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다윗의 도시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는 다윗이 만든 도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12지파로 나누어서 각자 군웅할거하고 있을 때, 다윗은 이스라엘을 처음으로 통일한 통일왕국의 초대 임금입니다.
통일왕국을 세우고 나서 첫 번 성읍으로 정한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당시 누구도 이스라엘 백성이 점령해 보지 않은 땅, 북왕국, 남왕국의 딱 중간에 있는 땅, 어쩌면 우리 한양, 서울과 비슷합니다. 그곳을 다윗 임금이 수도로 정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택한 나라, 유대나라를 만들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뇌리 속에 다윗 임금, 첫 임금, 다윗이 만든 첫 도시 예루살렘, 이 예루살렘 속으로 오늘 새 임금이 들어옵니다. 역사를 아는 사람, 이 사람들한테는 오늘 입성하시는 예수가 귀하고 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말씀에 보면 호산나를 불렀던 사람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입었던 옷을 벗어서 나귀가 가는 길, 예수께서 걸어가던 길에 깔았던 사람들은 배부른 사람, 사회적 지위가 어느 정도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아니고 서민, 평민, 배고픈 사람들이었습니다. “독립을 주소서. 일용할 양식 좀 주소서. 마실 물 좀 주소서, 죽겠나이다.
나를 구하소서. 우리를 구하소서. ” 하는 말은 단순히 정치적인 의미만이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이 없습니다. 당장 굶어 죽겠습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몸이 지쳐서 말라비틀어지고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한테 건강을 주옵소서. 생각이 말라버렸습니다. 생각이 소생하게 좀 해주시옵소서. ” 인간이 바라는 모든 것을 호산나에 담았을 겁니다.
오늘 예수께서 묻습니다. “사랑하는 경동교회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 ‘호산나’ 하셨지요 왜 하셨습니까 어디서 구원해 달라고 하셨습니까 무엇을 구원해 달라는 겁니까 누구를 구해달라는 겁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불렀습니다. ‘호산나’는 백성들만 한 게 아니라 예수님 자신도 ‘호산나’ 하였습니다.
그 예수님의 호산나는 하늘 아버지를 향해서 “여호와 하나님, 날 좀 구해주옵소서. 내가 왜 죽음의 길을 가야 합니까 내가 왜 당신한테 버림받아야 합니까 내가 왜 찢겨야 합니까 내 수염이 왜 깎여야 합니까 콧수염이 깎이고 등에 얻어맞아야 합니까 이 치욕을 어떻게 견디란 말입니까 호산나. ” 예수님도 호산나, 하셨습니다.
그 호산나의 아주 대표적인 표현이 “나의 여호와 하나님, 나의 여호와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잔을 나한테서 피해갈 수는 없습니까”인데, 호산나를 아무리 불러도 하늘 아버지는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비극입니다. 그러나 부활 아침에서야 예수께서 깨달았습니다. 호산나, 죽고 부활하여 새 세상, 새 도시, 새 나라, 새 사람이 탄생합니다. 이 모든 역경 속에서 호산나는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나라, 도시마다 이름이 있는데 그 이름은 문화적 배경이나 언어를 쓰는 사람들에 따라서 약간씩 다르게 발음되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의 ‘살렘’이 ‘평화’라는 뜻입니다. ‘예루’라고 하면, 평화의 동산, 평화의 도시, 평화의 도읍이라는 뜻입니다. ‘예루’는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살렘’입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만들어 놓고 이곳은 평화의 수도이다. 이스라엘의 수도는 여호와 하나님의 평화가, 하늘의 평화가 임하는 곳이다. 그래서 예루살렘입니다. 너무 유대 백성이 자기들의 평화라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가 만든 평화라고, 자꾸 우월적이고 자기만 옳다고 하니까 유대 백성들 말고 이방인들, 로마 사람들, 바빌론 사람들, 앗시리아 사람들, 이스라엘 말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부를 때 빈정대는 어투로 불렀습니다.
‘살렘’이라 부르지 않고 ‘솔루마’라고 불렀습니다. 재밌는 표현입니다. ‘솔루마’라는 말은 평화를 빈정댄 의미입니다. “평화라고”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부를 때 유대백성들은 이곳은 거룩한 곳, 여호와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는 곳, 성서가 있는 곳, 지성소가 있고,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곳, ‘예루살렘’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 사람들은 ‘예로 솔루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에 오십니까 예로 솔루마에 오십니까 언어의 차이인 줄 아십니까 중요한 단서가 하나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봤더니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등극하신다는 말을 예루살렘으로 적지 않고 헬라말로, ‘예로 솔루마’, 라고 적었습니다. 폭탄선언 같은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은 여호와 하나님의 도시인데 겉모습은 일반 도시입니다. 가봤더니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종교가 썩었습니다. 성전은 장사꾼들로 꽉 차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이 장사꾼의 도둑의 소굴로 변하고, 예루살렘이라는 거룩한 도시가 거짓과 상술과 온갖 타락으로 얼룩진 곳이 되었습니다.
그곳을 어떻게 평화의 도시라고 이름합니까 그곳은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예로 솔루마, 타락의 도시입니다. 예수님이 어디로 오셨습니까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은, 예수님은 가식된 도시, 예루살렘에 오지 않고, 썩어빠진 도시, 예로 솔루마에 들어오셨습니다. 신약성경에 보십시오. 그러기에 예수께서 구원을 베풀 수 있습니다. 왜 가증된 곳에 오셔서 구원을 베푸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말을 타고 나귀 타고 오시는 예수를 맞이하고 싶습니까 예수는 아직 여호와 하나님의 눈에 예수의 눈에 구원받지 못한 예루살렘에는 오시지 않습니다. 예로 솔루마라고 스스로 죄악을 고백하고 ‘우리 부족합니다. 회개할 게 많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죄가 많습니다. 타락했습니다. 부패했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 이렇게 결심하고 사는 예로 솔루마 시민들에게 오겠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아주 솔직했고 그리고 진실했고 이것을 기록한 제자들도 아주 솔직 담백했습니다. 예루살렘은 미래형입니다. 현재형은 예로 솔루마, 타락한 도시, 구원이 필요한 곳입니다. 우리는 미래 찬송을 부르지만 찬송을 부르는 입술이 사는 현재는 타락과 고통과 아픔이 있는 곳입니다.
오늘 메시지는 이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숨기지 마십시오. 더러운 걸 적당히 칠해서 ‘살렘’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진실이 아닙니다. ‘솔루마’, 그대로 가져오십시오. ‘나 들어가겠습니다. 고난 받겠습니다. 구원의 역사를 이루겠습니다. ’ 이 사실이 오늘 최대의 메시지입니다. 우리 서울은, 이 땅은 살렘입니까 예루살렘입니까 내일은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루살렘 시민입니까 아닙니다.
예로 솔루마의 시민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끌어안고 구원을 베풀어 준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어디 갔는지 아십니까 성전에 가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호산나 속에 “제발 가셔서 유대 총독이, 로마가 파송한 총독이 묵고 있는 안토니아 궁으로 가십시오. 그곳에 가셔서 유대 땅은 독립했노라고 선포 좀 해주시고 총독 몰아내고 독립선언을 하십시다. ” 외칩니다.
예수님은 그리로 가시지 않고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갔더니 썩어빠진 예루살렘, 예로 솔루마의 성전도 타락했습니다. 들어가셔서 잠깐 쉬셨다가 내일부터 가셔서 성전에서 하신 일이 “여호와 하나님이 기도하는 집, 더럽히지 말라. 깨끗하게 해 달라. 안 되면 내가 성전을 새로 지으마. ”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에게 두 가지를 기대했습니다. 하나는, 독립과 배부름과 세상적인 일입니다. 예수님이 그걸 마다한 게 아니십니다. 만일 예수께서 그걸 위해 오셨다고 하면, 혹시 유대 독립이 가능했다면 예수님은 유대 민족주의자로 오셨습니까 우리 구원은 어떡하라고요 이방인 구원은 어떡하고 전 세계의 구원은 어떡하라고요
예수님의 말씀은 나는 온 생명을 구하러 왔고 예루살렘뿐 아니라 온 도시 인간들을 다 구원하러 왔다. 그 구원의 한 구석에, 아니면 중심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도 있다고 하십니다. ‘유대 사람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이스라엘의 왕이여, 오시옵소서. 다윗의 아들이여, 오시옵소서. ’ 하지만 잘못된 민족주의적 편견을 가지고 이야기해봤자 예수님은 고달팠습니다. 유대민족 속에 온 세계가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 속에 유대민족이 우뚝 서라. 모범으로’, 그 뜻이었습니다.
어떻게 유대민족 속에 온 세계가 들어갑니까 예수님의 비전은 컸습니다. 그러나 호산나, 하는 백성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 예수의 고민이 있습니다. ‘온 백성을 구원하려는 사람, 그 구원 속에 이스라엘아 들어와라. ’ 그러려면 예수를 메시아로 모셨어야 하는데 아직도 못 모시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두 이름의 도시입니다.
제가 이런 예화를 하나 읽었습니다. 정치 지도자 중에 유머도 많고 지혜도 많은 사람 중에 뽑히는 사람이 링컨입니다. 낡은 이야기 같긴 하나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링컨이 얼굴이 못생겼습니다. 못생겼지만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이 분이 의회에 불려나왔는데 야당에서 “당신은 속과 겉이 다르다. 두 얼굴이다. 이중인격자다. ”라면서 공격을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링컨이 하는 말이 “제가 얼굴이 둘이었으면 오늘 왜 이렇게 추한 얼굴로 여러분 앞에 왔겠습니까” 해서 국회의원들이 웃었다고 합니다. 자기는 하난데 왜 두 개라고 하십니까. 예수님의 얼굴은 몇 개입니까 예수님의 얼굴은 ‘세계 구원자’,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얼굴이 유대인들이 보기에 자기 독립 먼저 안 시킨다고 일그러져 보였겠지만, 예수님은 하나의 얼굴, 그 속에 유대백성의 구원도 포함하는, 한국 백성의 구원도 포함하는, 경동의 구원도 포함하는, 만민을 위한 구원이 오늘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예수님을 민족주의화하지 마십시다. 예수님을 내가 생각하는 이데올로기 속에 집어넣지 맙시다. 예수님을 내가 생각하는 이해관계 속에 집어넣고 꼼짝 못하게 하지 맙시다. 그렇다고 들어가실 예수님도 아닙니다.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이 땅과 나 자신을 내 사고방식대로 아직은 예루살렘이라고 하지 맙시다. 아직은 예루살렘이 아니고 예로 솔루마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오늘 우리한테 예수가 주신 말씀입니다. “제발 나는 이런 곳에 가고 여호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싶다. ” 성전도 타락했다고 그랬습니다. 예루살렘도 그런 형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교회입니까 예루살렘은 어떤 도시입니까
예로 솔루마는 세상에 없습니까 저는 예로 솔루마 시민입니다. 예루살렘이 따로 있고 성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사도바울의 말씀에 보면 살아 움직이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걸어 다니는 성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보시기에 모든 인간은 걸어 다니고 숨 쉬는 예루살렘입니다. 고로 “예루살렘아, 똑바로 서라. 구원을 받아라. 그리고 예루살렘이 되어라. ”
진실된 예수의 호소를 우리 한 번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힘들어도 들어봅시다. 사순절, 고난절의 시작을 우리는 이렇게 회개하고 열어놓습니다. 우리의 진실을 내놓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진실을 묶어서 십자가에 달리시겠답니다. 그리고 다 구원하시고 부활의 아침 새로운 도시를 주겠답니다. 새로운 비전을 주겠답니다.
이 비전과 약속이 없이 우리가 왜 고난주간을 맞이해야 합니까 오늘 시작입니다. 오늘을 진실합시다. 오늘을 열어 놓읍시다. 있는 그대로 고백합시다. 그리고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데, “호산나! 진실로 구해주옵소서. 구할 게 많습니다. ” 우리한테 기다린 답이 이것입니다. 열어 놓읍시다. 호산나는 개방형 호소입니다. 호산나는 진실을 삼은 언어입니다. 호산나는 자기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는 언어입니다. 그리고 진실로 구원을 기대하는 희구하는 그런 기도의 호소입니다. 호산나, 주님이 오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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