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호산나, 호산나
본문
1969년 7월 21일 11시 56분 20초 미국의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습니다. 이 순간 미국의 당시 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방송 연설로 이렇게 축하했습니다. “지금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입니다. 참으로 온 인류와 모든 나라가 함께 감탄하는 역사적 순간입니다. ”
물론 인류가 달에 첫 발을 내딛은 순간은 역사적으로 뜻 깊은 순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인류가 달에 첫 발을 내딛은 그 순간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이었을까요 인류가 달에 첫 발을 내딛은 후 인류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인류의 삶이 획기적으로 행복해 졌습니까 인류의 궁극적인 문제들이 해결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빌리 그레함 목사님은 그 축하 메시지를 기억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은 인간이 달에 착륙한 그 순간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으로 이 지구상에 오신 그 순간입니다. ”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이 지구에 첫 발을 내딛은 그 순간이야 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이라는 말입니다. 이 때부터 인류 구원의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문제가 해결될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 장면이야 말로 또 하나의 인류 역사상 위대한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으로 실제로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통한 위대한 승리의 길이 이 때 비로소 열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비롯하여 복음서 네 곳에서 모두 이 예루살렘 입성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이렇습니다.
유월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모여든 수많은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벳바게 근처 마을에서 준비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고 계셨습니다.
이 때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맞으러 밀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 옛날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기억했습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슥 9:9) 예수님이 자기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라는 사실을 깨닫고 열렬히 환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예수님의 가시는 길 앞에 폈습니다. 왕하 9:13을 보면 당시 백성들이 예후를 왕으로 영접하면서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예후의 앞길에 폈습니다. 마찬가지로 모여든 무리들이 겉옷을 벗어서 예수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영접했던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서 길에 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원어로 살펴보면 계속해서 반복한 행동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 저 사람이 계속해서 예수님의 앞길에 종려나무 가지를 깔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까지 종려나무 가지가 계속 깔려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연도에 늘어서서 환영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 앞에 서서 가고 또 뒤에 따랐습니다. 그러면서 저들이 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우리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이 사건을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이라고 불러왔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승리를 예고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승리의 입성”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날을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주님을 맞이했다고 하여 “종려주일”이라고 부르고 교회력에 기념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이 이 종려주일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이 위대한 순간에 저 예루살렘 연도에 울려 퍼졌던 뜨거운 함성을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기드론 계곡에 메아리쳐 울려 퍼졌던 저 뜨거운 합창을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호산나 호산나!”
1. 주체할 수 없는 감격의 외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세월 메시야를 기다려왔습니다. 특히 나라를 잃어버리고 로마의 지배를 받던 당시에는 그 기다림이 더욱 간절했습니다. 어서 메시야가 와서 자기들을 구원해 주기를 간절히 기다려왔던 것입니다.
예전 중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심훈의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가 생각이 납니다.
그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드리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이 깨어져 산산조각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리까.
지금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들 저들의 심정이 이랬을 것입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구원의 날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토록 힘겹게 자기들을 짓누르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목이 터져라 호산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눅 19장을 보면 재미있는 장면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이런 열렬한 환영을 지켜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
저들은 두려웠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저렇게 하늘을 찌를 듯한 인기를 한 몸이 독점하게 되면 그동안 자기들이 누리던 기득권을 하루아침에 잃을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리고 행여라도 로마 당국이 이 사실을 알게 될 때 받게 될 보복에 두려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한 마디로 이 외침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체할 수 없는 외침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주님 앞에 나오는 성도들에게 이런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놀라운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고 이렇게 주 앞에 나와 예배할 수 있게 해 주신 그 놀라운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내 인생의 무거운 짐을 벗겨주신 그 놀라운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4월이 되었습니다. 온 세상이 꽃 대궐을 이루고 있습니다.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가 온 산을 뒤 덮고 있습니다. 길가에 벗 꽃이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질세라 목련도 화사한 기지개를 펴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봄에 피는 꽃들은 한결같이 잎사귀가 나기 전에 꽃부터 핀다는 것입니다.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 매화, 벚꽃, 그리고 목련까지... 왜 그럴까요 그동안 긴 겨울 동안 억눌려 있다가 봄이 오니까 기뻐서 감격의 아우성을 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오면 이런 감격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소리쳐야 합니다. “호산나 호산나”
2. 구원에 대한 간절한 호소입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신약 성경 헬라어 원어를 우리말로 그대로 음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헬라어 원어는 또 히브리어 표현인 “호쉬아 나”를 그대로 음역한 것입니다. “호쉬아”는 “구원하소서”라는 뜻이고, “나”는 “제발”, 또는 “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호산나의 문자적인 뜻은 “오! 구원하소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 오랜 세월 나라를 잃어버리고 살아왔습니다. 끊임없는 주변 강대국의 침략을 받아왔습니다. 이집트, 바벨론, 앗수르, 페르시아, 그리스 그리고 지금에 와서 로마의 속국이 되어 나라를 잃어버린 백성으로 참담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속국이 되었으니 국가적인 어려움이 어떠했겠습니까 나라 잃어버린 백성이니 그 차별과 홀대는 또 어떠했겠습니까 게다가 정말 참기 힘든 것은 종교적으로도 감시와 통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성전 담장 옆에 로마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높은 망대 위에서 하루 종일 성전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도저히 참기 힘든 수치였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임하시니 이 모든 무거운 짐을 벗겨달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을 이 고난의 수렁에서 건져달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차게 외쳤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오늘 우리 성도들이 주님 앞에 나올 때 이런 간절한 부르짖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 한 복판에서 감당키 힘든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가다가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려서 쩔쩔 매다가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상처 받고 아파하다가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갈 길 몰라 헤매고 방황하다가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주 앞에서 간절한 부르짖음이 터져 나옵니다. “호산나 호산나”
눅 18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소경을 고치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가고 계실 때 길가에 소경이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이 사람의 이름을 바디매오라고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그 때 이 바디매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갑자기 저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조용히 하라고 가로막았습니다. 그 때 이 사람이 더욱 큰 소리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때 예수님께서 저를 데려오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저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 말씀과 동시에 저가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소경 바디매오처럼 주 앞에 나올 때 소리를 질러야 합니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주님! 이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시옵소서. ” 바로 이 부르짖음이 “호산나”입니다.
3.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입니다.
본문 19절을 보면 당시 예수님을 환영했던 무리들이 불렀던 내용을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그런데 이 외침은 시 118:25-6을 인용한 것입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이 말씀은 소위 할렐 찬양이라고 부르던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기 때 예루살렘에 모여 부르던 축제 찬양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갑자기 노래를 지어 부른 것이 아니고 메시야 오심을 기다리며 불렀던 예배 찬양 곧 순례의 노래 가운데 하나를 불렀던 것입니다.
그 노래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지 그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부른 찬양입니다. 이 세상에 오신 구원의 주님이시라는 찬양입니다.
둘째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는 부분입니다. 이 말을 다시 직역해 보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찬양을 받으소서”라는 뜻이다. 여기서 주라는 말은 당시에 “왕” 또는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하던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왕으로 높이며 찬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가장 높은 곳에서”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신 곳을 나타냅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 12:2에서 이곳을 셋째 하늘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계 7:11-12을 보면 이곳에서 하늘의 천군 천사들이 어린 양과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바로 그곳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저 하늘에서 천군과 천사에게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라고 찬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이와 같은 찬양을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구원의 주님이심을 찬양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왕이심을 찬양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저 하늘의 천군 천사로부터 찬양받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또한 찬양해야 하겠습니다.
찬송가 20장을 보면 1절 가사가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다 감사 드리세 온 맘을 주께 바쳐
그 섭리 놀라워 온 세상 기뻐하네
예부터 주신 복 한 없는 그 사랑
선물로 주시네 이제와 영원히
그런데 이 가사의 작사 배경을 알게 되면 이 찬양을 다시 한번 부르게 됩니다.
이 가사는 마틴 린카르트(Martin Rinkart) 목사님이 작사했습니다. 이분이 이 곡을 작사했을 때는 한참 어려울 때였습니다. 이분은 독일 아이렌버그 시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30년 전쟁으로 전쟁의 공포가 자신과 교인들을 사로잡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흑사병이 만연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 목사님은 어떤 날은 하루에 장례를 50건을 치루기도 했답니다. 가족들 가운데 세상 떠난 사람들도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죽음과 절망이 숨막히도록 밀려오는 상황 속에서 이분은 무려 66개의 찬송을 작사했습니다. 그 중에 한 곡이 “다 감사 드리세”입니다. 슬픔과 두려움이 밀려오는 상황 속에서 모든 것을 다 감사하겠다고 노래합니다. 큰 슬픔 속에서 통곡하는 이 세상이 기뻐한다고 노래합니다. 지금도 그 크신 복을 주시며 또 영원히 그 복을 주실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지금 주님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참 좋으신 주님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뒤로 하고 세상 바라보던 눈을 들어 저 하늘의 주님께 고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염려, 세상 고통, 세상의 무거운 짐 다 잊어버리고 오직 주님과의 만남에만 열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찬양은 조건과 상황을 뛰어넘습니다. 찬양할 이유가 이 세상에서 찾아지지 않습니다. 오직 찬양할 이유는 한 가지 주님입니다. 주님께서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찬양을 부르려면 오직 찬양할 이유가 주님께만 있어야 합니다.
종려주일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의 승리를 이루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분 앞에 우리의 감격을 드립시다. 우리의 간절한 호소를 드립시다. 그리고 진정한 찬양을 드립시다. 소리 높여 호산나 호산나를 외칩시다.
물론 인류가 달에 첫 발을 내딛은 순간은 역사적으로 뜻 깊은 순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인류가 달에 첫 발을 내딛은 그 순간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이었을까요 인류가 달에 첫 발을 내딛은 후 인류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인류의 삶이 획기적으로 행복해 졌습니까 인류의 궁극적인 문제들이 해결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빌리 그레함 목사님은 그 축하 메시지를 기억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은 인간이 달에 착륙한 그 순간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으로 이 지구상에 오신 그 순간입니다. ”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이 지구에 첫 발을 내딛은 그 순간이야 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이라는 말입니다. 이 때부터 인류 구원의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문제가 해결될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 장면이야 말로 또 하나의 인류 역사상 위대한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으로 실제로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통한 위대한 승리의 길이 이 때 비로소 열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비롯하여 복음서 네 곳에서 모두 이 예루살렘 입성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이렇습니다.
유월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모여든 수많은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벳바게 근처 마을에서 준비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고 계셨습니다.
이 때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맞으러 밀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 옛날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기억했습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슥 9:9) 예수님이 자기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라는 사실을 깨닫고 열렬히 환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예수님의 가시는 길 앞에 폈습니다. 왕하 9:13을 보면 당시 백성들이 예후를 왕으로 영접하면서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예후의 앞길에 폈습니다. 마찬가지로 모여든 무리들이 겉옷을 벗어서 예수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영접했던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서 길에 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원어로 살펴보면 계속해서 반복한 행동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 저 사람이 계속해서 예수님의 앞길에 종려나무 가지를 깔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까지 종려나무 가지가 계속 깔려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연도에 늘어서서 환영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 앞에 서서 가고 또 뒤에 따랐습니다. 그러면서 저들이 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우리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이 사건을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이라고 불러왔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승리를 예고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승리의 입성”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날을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주님을 맞이했다고 하여 “종려주일”이라고 부르고 교회력에 기념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이 이 종려주일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이 위대한 순간에 저 예루살렘 연도에 울려 퍼졌던 뜨거운 함성을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기드론 계곡에 메아리쳐 울려 퍼졌던 저 뜨거운 합창을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호산나 호산나!”
1. 주체할 수 없는 감격의 외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세월 메시야를 기다려왔습니다. 특히 나라를 잃어버리고 로마의 지배를 받던 당시에는 그 기다림이 더욱 간절했습니다. 어서 메시야가 와서 자기들을 구원해 주기를 간절히 기다려왔던 것입니다.
예전 중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심훈의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가 생각이 납니다.
그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드리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이 깨어져 산산조각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리까.
지금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들 저들의 심정이 이랬을 것입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구원의 날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토록 힘겹게 자기들을 짓누르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목이 터져라 호산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눅 19장을 보면 재미있는 장면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이런 열렬한 환영을 지켜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
저들은 두려웠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저렇게 하늘을 찌를 듯한 인기를 한 몸이 독점하게 되면 그동안 자기들이 누리던 기득권을 하루아침에 잃을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리고 행여라도 로마 당국이 이 사실을 알게 될 때 받게 될 보복에 두려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한 마디로 이 외침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체할 수 없는 외침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주님 앞에 나오는 성도들에게 이런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놀라운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고 이렇게 주 앞에 나와 예배할 수 있게 해 주신 그 놀라운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내 인생의 무거운 짐을 벗겨주신 그 놀라운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4월이 되었습니다. 온 세상이 꽃 대궐을 이루고 있습니다.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가 온 산을 뒤 덮고 있습니다. 길가에 벗 꽃이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질세라 목련도 화사한 기지개를 펴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봄에 피는 꽃들은 한결같이 잎사귀가 나기 전에 꽃부터 핀다는 것입니다.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 매화, 벚꽃, 그리고 목련까지... 왜 그럴까요 그동안 긴 겨울 동안 억눌려 있다가 봄이 오니까 기뻐서 감격의 아우성을 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오면 이런 감격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소리쳐야 합니다. “호산나 호산나”
2. 구원에 대한 간절한 호소입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신약 성경 헬라어 원어를 우리말로 그대로 음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헬라어 원어는 또 히브리어 표현인 “호쉬아 나”를 그대로 음역한 것입니다. “호쉬아”는 “구원하소서”라는 뜻이고, “나”는 “제발”, 또는 “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호산나의 문자적인 뜻은 “오! 구원하소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 오랜 세월 나라를 잃어버리고 살아왔습니다. 끊임없는 주변 강대국의 침략을 받아왔습니다. 이집트, 바벨론, 앗수르, 페르시아, 그리스 그리고 지금에 와서 로마의 속국이 되어 나라를 잃어버린 백성으로 참담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속국이 되었으니 국가적인 어려움이 어떠했겠습니까 나라 잃어버린 백성이니 그 차별과 홀대는 또 어떠했겠습니까 게다가 정말 참기 힘든 것은 종교적으로도 감시와 통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성전 담장 옆에 로마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높은 망대 위에서 하루 종일 성전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도저히 참기 힘든 수치였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임하시니 이 모든 무거운 짐을 벗겨달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을 이 고난의 수렁에서 건져달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차게 외쳤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오늘 우리 성도들이 주님 앞에 나올 때 이런 간절한 부르짖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 한 복판에서 감당키 힘든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가다가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려서 쩔쩔 매다가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상처 받고 아파하다가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갈 길 몰라 헤매고 방황하다가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주 앞에서 간절한 부르짖음이 터져 나옵니다. “호산나 호산나”
눅 18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소경을 고치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가고 계실 때 길가에 소경이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이 사람의 이름을 바디매오라고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그 때 이 바디매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갑자기 저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조용히 하라고 가로막았습니다. 그 때 이 사람이 더욱 큰 소리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때 예수님께서 저를 데려오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저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 말씀과 동시에 저가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소경 바디매오처럼 주 앞에 나올 때 소리를 질러야 합니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주님! 이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시옵소서. ” 바로 이 부르짖음이 “호산나”입니다.
3.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입니다.
본문 19절을 보면 당시 예수님을 환영했던 무리들이 불렀던 내용을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그런데 이 외침은 시 118:25-6을 인용한 것입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이 말씀은 소위 할렐 찬양이라고 부르던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기 때 예루살렘에 모여 부르던 축제 찬양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갑자기 노래를 지어 부른 것이 아니고 메시야 오심을 기다리며 불렀던 예배 찬양 곧 순례의 노래 가운데 하나를 불렀던 것입니다.
그 노래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지 그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부른 찬양입니다. 이 세상에 오신 구원의 주님이시라는 찬양입니다.
둘째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는 부분입니다. 이 말을 다시 직역해 보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찬양을 받으소서”라는 뜻이다. 여기서 주라는 말은 당시에 “왕” 또는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하던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왕으로 높이며 찬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가장 높은 곳에서”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신 곳을 나타냅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 12:2에서 이곳을 셋째 하늘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계 7:11-12을 보면 이곳에서 하늘의 천군 천사들이 어린 양과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바로 그곳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저 하늘에서 천군과 천사에게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라고 찬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이와 같은 찬양을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구원의 주님이심을 찬양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왕이심을 찬양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저 하늘의 천군 천사로부터 찬양받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또한 찬양해야 하겠습니다.
찬송가 20장을 보면 1절 가사가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다 감사 드리세 온 맘을 주께 바쳐
그 섭리 놀라워 온 세상 기뻐하네
예부터 주신 복 한 없는 그 사랑
선물로 주시네 이제와 영원히
그런데 이 가사의 작사 배경을 알게 되면 이 찬양을 다시 한번 부르게 됩니다.
이 가사는 마틴 린카르트(Martin Rinkart) 목사님이 작사했습니다. 이분이 이 곡을 작사했을 때는 한참 어려울 때였습니다. 이분은 독일 아이렌버그 시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30년 전쟁으로 전쟁의 공포가 자신과 교인들을 사로잡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흑사병이 만연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 목사님은 어떤 날은 하루에 장례를 50건을 치루기도 했답니다. 가족들 가운데 세상 떠난 사람들도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죽음과 절망이 숨막히도록 밀려오는 상황 속에서 이분은 무려 66개의 찬송을 작사했습니다. 그 중에 한 곡이 “다 감사 드리세”입니다. 슬픔과 두려움이 밀려오는 상황 속에서 모든 것을 다 감사하겠다고 노래합니다. 큰 슬픔 속에서 통곡하는 이 세상이 기뻐한다고 노래합니다. 지금도 그 크신 복을 주시며 또 영원히 그 복을 주실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지금 주님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참 좋으신 주님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뒤로 하고 세상 바라보던 눈을 들어 저 하늘의 주님께 고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염려, 세상 고통, 세상의 무거운 짐 다 잊어버리고 오직 주님과의 만남에만 열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찬양은 조건과 상황을 뛰어넘습니다. 찬양할 이유가 이 세상에서 찾아지지 않습니다. 오직 찬양할 이유는 한 가지 주님입니다. 주님께서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찬양을 부르려면 오직 찬양할 이유가 주님께만 있어야 합니다.
종려주일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의 승리를 이루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분 앞에 우리의 감격을 드립시다. 우리의 간절한 호소를 드립시다. 그리고 진정한 찬양을 드립시다. 소리 높여 호산나 호산나를 외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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