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십자가(十字架)를 지는 자
본문
오늘은 교회력으로 종려주일(棕櫚主日)이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하면서 환영했다고 해서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환영을 받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그 주간 고난을 당하시다 결국은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종려주일이 지나고 한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지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이 한 주간은 오락을 삼가고 주님의 고난당함을 묵상하며 경건하게 지내는 것이 오랫동안 교회가 지켜온 관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교회에서는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가늠하고자 합니다.
십자가(十字架)는 고난(苦難)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경건한 성도는 고난주간에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고난을 만들어서 참예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한 끼의 금식을 하든지, 두 끼 하든지, 아니면 일주일 내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기도로 고난에 동참하는 일이 있기도 합니다. 일주일 내내, 아니면 밤마다 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교회적으로 개인적으로 고난에 동참하게 하기 위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동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난은 참으로 우리에게 유익을 줍니다.
빌헬름 뢴트겐에 대한 이야기
1901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빌헬름 뢴트겐(Wilhelm Conrad Rontgen ; 1845~1923)은 엑스레이를 발명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고등학교 시절 졸업을 앞두고 불미스러운 사고를 저질러 퇴학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독일의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스위스의 공과대학에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졸업 후에도 ‘고등학교 중퇴’라는 것 때문에 취직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할 수 없이 불미스러웠던 과거의 행동을 진심으로 뉘우치며 학문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고통스러운 과거를 분발의 계기로 삼아 무섭게 연구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열심히 부지런히 연구를 한 결과 그 연구한 업적이 알려져 48세 때에 대학교 총장에 임명되었습니다. 그 후 엑스레이를 발명하여 노벨물리학상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고등학교 시절의 ‘퇴학’이 그의 인생을 더욱 빛나고 성공적으로 만들어 준 것입니다. 퇴학함으로 당하는 수난과 고난은 말할 수 없이 괴로움을 당한 것입니다.
과거의 쓰라리고 잘못된 추억, 실패하고 망신당한 일들을 마음속에 담고 열심히 분발하면 더 성공하고 크게 될 수 있습니다. 가난 때문에 부유하게 된 사람이 있고, 질병 때문에 건강하게 된 사람이 있고, 어려움 때문에 더 성공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당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고난을 멀리하고 도망치듯이 고난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고난 주간에 십자가를 지십시다!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그것은 내가 십자가에 죽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죽으면 새사람이 살아 날 것이다. 교만이 죽으면 성령 안에서 겸손함이 살아날 것이요, 분노가 죽으면 온유함이 일어날 것이요, 탐심이 죽으면 청빈 사상이 움돋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으면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삶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출생함입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요 산 믿음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사람이요, 영적생명이 태동함입니다.
중생하고서도 우리 안에서 겉 사람과 속사람, 마음의 법과 지체의 법,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이 항상 같이 있어 서로 대적해 싸우고 있습니다. 영이 우세하면 영적인 삶을 살게 되고, 육이 우세하면 육체적 사람으로 살아간다. 그런고로 우리는 성령을 의지하여 영을 살리는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될 때 신앙의 성공자가 될 것입니다.
1 십자가를 지는 자세
⑴ 십자가의 길은 자기 부정입니다.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否認)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자신을 부인하지 않고는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편안한 것을 좋아하지 고난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 위해서 고난 받는 것을 즐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행여 고난당하는 것을 자원한 사람이 있다면 돈을 위하여 권력을 위하여 명예를 위하여 세상 부귀영화를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있는지 없는지 확연치 않는 예수 위해 고난 받는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공감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세상에 출세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기꺼이 뛰어드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젊어서 고생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고생한다고 출세하고 권력을 다 잡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축복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럼으로 나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고난당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의당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을 받은 여러분들은 그 분을 위하여 섬기기 위해서 고난당하는 것은 당위성을 가집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나 위하여 고난당함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한 말씀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2:6) 그는 근본 여호와 하나님의 본체시나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1) 여호와 하나님의 동등함을 버리셨다. 2) 세상에 탄생하여 사람이 되었다.
3) 종으로 삶을 살았다. 4) 십자가의 죽으심을 말합니다. 이 사실은 주님의 철저한 자기부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인정하다가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한다.
첫째, 신앙생활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현대인에게는 자기의식이 뚜렷하다. 자기 개성이 강하고 주장이 뚜렷합니다. 이 같은 세상 사람들은 이로 인하여 성공도하고 승리의 삶을 살아갑니다. 개성을 버리라거나 아니면 자기주장을 멀리하라고 한다면 이는 죽은 시체가 되라고 하는 이야기나 동일한 말씀이다. 그러나 신앙인은 자기주장과 개성을 버리지 않고는 천국에 입성(入城)이 불가능함을 믿어야 합니다.
군대 들어가면 백지로 돌아가라
천주교인들이 하는 말; 어린아이를 1년만 준다면 천주교인을 만든다고 한다.
농사하는 사람들은 땅을 갈아엎는다.
둘째, 자신의 의(義)를 부정하는 것이다.
인간은 신(神)의 실존을 올바로 인식한다면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마치 다메섹 도상에서 넘어간 바울이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한것과 같습니다. 인간은 의가 없습니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의식을 가질 때 자기를 부정하게 됩니다.
나는 참된 의미에서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겸손한 고백이 있을 때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의 빛은 인간 이성의 어두운 장막을 뚫고 개인의 영혼 위에 비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罪人)을 구원(救援)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셋째, 자신은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의 교만은 자신은 무엇인가를 아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암초가 되어 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인간이 안다면 얼마나 압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따르려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들은 먼저 철두철미한 자기부정에서부터 새로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으며,
고린도전서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 " 했습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 부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바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⑵ 십자가의 길은 자기 비하입니다.
빌립보서 2:7-8,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인생의 밑바닥까지 낮아지셨습니다. 고난에 동참하는 일은 자신을 낮출 때에만 가능하게 됩니다.
첫째, 예수님은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출생하신 것을 비롯하여, 나사렛 촌 목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시어 천대와 멸시로 일생을 보내시며,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와,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시며 병자를 고치시고 약자를 도우시며 죄인의 친구가 되어 주셨던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일생동안 풍찬노숙(風餐露宿)하시며, 집없는 생활을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노라’고 하신 것이 그의 생활이기도 합니다.
셋째,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 는 벅찬 말씀을 하시며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죄인을 용납하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시며,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제공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이처럼 인간 세상에 와서 겸손과 봉사로, 무저항주의로 일관하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사도(使徒)들이 그러했고,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그러했습니다. 다니엘이 그러했고, 리빙스톤이 그러했으며, 슈바이처가 그러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손양원 목사님이나, 이용도 목사님이나, 길선주 목사님이 그러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길손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타인을 섬기며, 자기를 비어 주어진 개척의 사명을 완수하여야 하겠습니다.
이라크의 후세인
자기를 부정하기 싫고 자기를 비하하기 싫어서 끝까지 콧대를 높이다가 패망 국이 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소요와 문제가 생기는 것도 자기의식을 너무 내세우는데서 오는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⑶ 십자가의 길은 자기희생(自己犧牲)입니다.
빌립보서 2:8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했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기까지 희생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희생하신 것입니다. 인류를 죄악 가운데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주의 피를 희생으로 지불하셨습니다.
대만의 생번들이 사람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는 악풍을 없애기 위하여 오풍선생의 희생이 필요하였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의 평화와 안전, 그리고 영생을 위하여 주님께서 대속하여 십자가의 죽으시므로 희생하신 것입니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이 십자가의 희생의 정신으로 살아야 할 것을 부탁하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자기희생의 길이었습니다. 사도가 그러하였고, 오늘까지의 수많은 순교자가 그러했습니다. 구속에 감격하여 살아온 많은 성도들이 그러하였습니다.
2 십자가를 지는 자의 증언
⑴ 저주받은 우리를 구속해 주신 것을 증언합니다.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했습니다. 땅 위 에 사는 모든 사람이 다 여호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을 때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고로 믿음을 가지고 십자가를 지는 고난에 동참하는 자는 주님이 나의 모든 죄악을 사했다는 것을 무언으로 증언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주님의 십자가는 온 인류의 구원과 영원한 삶을 약속받아 새로운 소망 속에 삶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는 진정으로 예수의 죽음이 우리 인간의 죄를 속해 주신 것을 증언하게 되는 것입니다.
⑵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증언합니다.
(로마서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라고 했습니다.
공의로운 왕
로구리양 왕이 풍기문란한 나라를 바로잡기 위하여 칙령을 내리기를, 누구든지 간음을 한 자는 용서없이 두 눈을 뽑는다는 것입니다. 이 법령 시행 즉시 왕의 사랑하는 외아들이 이 법령을 범했습니다.
이때 아버지 왕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나라의 법을 지키는 마음으로 아들의 눈 하나를 뽑고 왕인 아버지의 눈을 하나 뽑음으로 백성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십자가를 지게 함으로 인간의 죄악을 대신하셨고 삼일 만에 다시 부활하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신앙인이 십자가를 지는 생활은 여호와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씨시의 성자 프렌치스코
그는 이 십자가를 깊이 깨달은 뒤에 모든 가산을 다 팔아서 구제 사업을 하고 일생을 주님 위해 바친 유명한 수도사였습니다. 그는 어느 날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드리기를, "주 예수님, 제가 죽기 전에 꼭 두 가지의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저로 하여금 육체와 영혼이 괴로움을 겪어 십자가를 체험하게 하옵시고 둘째는 주님이 그토록 우리 죄인을 위하여 지불하셨던 그 뜨거운 사랑을 내 마음에 간직할 수 있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자청한 것입니다. 그럼으로 여호와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임을 증언케 해달라는 것입니다.
⑶ 우리는 천국 백성임을 증언
(골로새서 1:13-1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요한복음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옥체를 깨뜨리어 그 보혈이 한 방울 남김없이 값없이 흘려주셨던 주님의 대속의 역사는 온 인류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맺는 말
또한, 참 신앙은 영생을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11-12, "주와 함께 죽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앞에는 영생과, 영광과, 부활과, 승리가 있으니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주께서 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살아가는 자 만 주어집니다. 말씀을 들었습니다. 고난주간이 오늘로 시작됩니다. 이 한 주간만이라도 이 깊고 오묘한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십자가를 지는 일에 동참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십자가를 지는 자세
⑴ 십자가의 길은 자기 부정입니다.
⑵ 십자가의 길은 자기 비하입니다.
⑶ 십자가의 길은 자기 희생입니다.
2 십자가를 지는 자의 증언
⑴ 저주받은 우리를 구속해 주신 것을 증언합니다.
⑵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증언합니다.
⑶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살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사는 삶에 내가 사는 삶을 살아갑시다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하면서 환영했다고 해서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환영을 받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그 주간 고난을 당하시다 결국은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종려주일이 지나고 한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지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이 한 주간은 오락을 삼가고 주님의 고난당함을 묵상하며 경건하게 지내는 것이 오랫동안 교회가 지켜온 관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교회에서는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가늠하고자 합니다.
십자가(十字架)는 고난(苦難)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경건한 성도는 고난주간에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고난을 만들어서 참예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한 끼의 금식을 하든지, 두 끼 하든지, 아니면 일주일 내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기도로 고난에 동참하는 일이 있기도 합니다. 일주일 내내, 아니면 밤마다 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교회적으로 개인적으로 고난에 동참하게 하기 위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동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난은 참으로 우리에게 유익을 줍니다.
빌헬름 뢴트겐에 대한 이야기
1901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빌헬름 뢴트겐(Wilhelm Conrad Rontgen ; 1845~1923)은 엑스레이를 발명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고등학교 시절 졸업을 앞두고 불미스러운 사고를 저질러 퇴학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독일의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스위스의 공과대학에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졸업 후에도 ‘고등학교 중퇴’라는 것 때문에 취직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할 수 없이 불미스러웠던 과거의 행동을 진심으로 뉘우치며 학문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고통스러운 과거를 분발의 계기로 삼아 무섭게 연구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열심히 부지런히 연구를 한 결과 그 연구한 업적이 알려져 48세 때에 대학교 총장에 임명되었습니다. 그 후 엑스레이를 발명하여 노벨물리학상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고등학교 시절의 ‘퇴학’이 그의 인생을 더욱 빛나고 성공적으로 만들어 준 것입니다. 퇴학함으로 당하는 수난과 고난은 말할 수 없이 괴로움을 당한 것입니다.
과거의 쓰라리고 잘못된 추억, 실패하고 망신당한 일들을 마음속에 담고 열심히 분발하면 더 성공하고 크게 될 수 있습니다. 가난 때문에 부유하게 된 사람이 있고, 질병 때문에 건강하게 된 사람이 있고, 어려움 때문에 더 성공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당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고난을 멀리하고 도망치듯이 고난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고난 주간에 십자가를 지십시다!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그것은 내가 십자가에 죽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죽으면 새사람이 살아 날 것이다. 교만이 죽으면 성령 안에서 겸손함이 살아날 것이요, 분노가 죽으면 온유함이 일어날 것이요, 탐심이 죽으면 청빈 사상이 움돋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으면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삶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출생함입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요 산 믿음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사람이요, 영적생명이 태동함입니다.
중생하고서도 우리 안에서 겉 사람과 속사람, 마음의 법과 지체의 법,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이 항상 같이 있어 서로 대적해 싸우고 있습니다. 영이 우세하면 영적인 삶을 살게 되고, 육이 우세하면 육체적 사람으로 살아간다. 그런고로 우리는 성령을 의지하여 영을 살리는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될 때 신앙의 성공자가 될 것입니다.
1 십자가를 지는 자세
⑴ 십자가의 길은 자기 부정입니다.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否認)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자신을 부인하지 않고는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편안한 것을 좋아하지 고난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 위해서 고난 받는 것을 즐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행여 고난당하는 것을 자원한 사람이 있다면 돈을 위하여 권력을 위하여 명예를 위하여 세상 부귀영화를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있는지 없는지 확연치 않는 예수 위해 고난 받는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공감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세상에 출세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기꺼이 뛰어드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젊어서 고생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고생한다고 출세하고 권력을 다 잡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축복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럼으로 나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고난당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의당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을 받은 여러분들은 그 분을 위하여 섬기기 위해서 고난당하는 것은 당위성을 가집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나 위하여 고난당함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한 말씀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2:6) 그는 근본 여호와 하나님의 본체시나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1) 여호와 하나님의 동등함을 버리셨다. 2) 세상에 탄생하여 사람이 되었다.
3) 종으로 삶을 살았다. 4) 십자가의 죽으심을 말합니다. 이 사실은 주님의 철저한 자기부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인정하다가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한다.
첫째, 신앙생활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현대인에게는 자기의식이 뚜렷하다. 자기 개성이 강하고 주장이 뚜렷합니다. 이 같은 세상 사람들은 이로 인하여 성공도하고 승리의 삶을 살아갑니다. 개성을 버리라거나 아니면 자기주장을 멀리하라고 한다면 이는 죽은 시체가 되라고 하는 이야기나 동일한 말씀이다. 그러나 신앙인은 자기주장과 개성을 버리지 않고는 천국에 입성(入城)이 불가능함을 믿어야 합니다.
군대 들어가면 백지로 돌아가라
천주교인들이 하는 말; 어린아이를 1년만 준다면 천주교인을 만든다고 한다.
농사하는 사람들은 땅을 갈아엎는다.
둘째, 자신의 의(義)를 부정하는 것이다.
인간은 신(神)의 실존을 올바로 인식한다면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마치 다메섹 도상에서 넘어간 바울이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한것과 같습니다. 인간은 의가 없습니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의식을 가질 때 자기를 부정하게 됩니다.
나는 참된 의미에서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겸손한 고백이 있을 때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의 빛은 인간 이성의 어두운 장막을 뚫고 개인의 영혼 위에 비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罪人)을 구원(救援)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셋째, 자신은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의 교만은 자신은 무엇인가를 아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암초가 되어 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인간이 안다면 얼마나 압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따르려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들은 먼저 철두철미한 자기부정에서부터 새로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으며,
고린도전서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 " 했습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 부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바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⑵ 십자가의 길은 자기 비하입니다.
빌립보서 2:7-8,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인생의 밑바닥까지 낮아지셨습니다. 고난에 동참하는 일은 자신을 낮출 때에만 가능하게 됩니다.
첫째, 예수님은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출생하신 것을 비롯하여, 나사렛 촌 목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시어 천대와 멸시로 일생을 보내시며,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와,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시며 병자를 고치시고 약자를 도우시며 죄인의 친구가 되어 주셨던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일생동안 풍찬노숙(風餐露宿)하시며, 집없는 생활을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노라’고 하신 것이 그의 생활이기도 합니다.
셋째,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 는 벅찬 말씀을 하시며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죄인을 용납하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시며,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제공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이처럼 인간 세상에 와서 겸손과 봉사로, 무저항주의로 일관하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사도(使徒)들이 그러했고,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그러했습니다. 다니엘이 그러했고, 리빙스톤이 그러했으며, 슈바이처가 그러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손양원 목사님이나, 이용도 목사님이나, 길선주 목사님이 그러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길손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타인을 섬기며, 자기를 비어 주어진 개척의 사명을 완수하여야 하겠습니다.
이라크의 후세인
자기를 부정하기 싫고 자기를 비하하기 싫어서 끝까지 콧대를 높이다가 패망 국이 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소요와 문제가 생기는 것도 자기의식을 너무 내세우는데서 오는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⑶ 십자가의 길은 자기희생(自己犧牲)입니다.
빌립보서 2:8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했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기까지 희생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희생하신 것입니다. 인류를 죄악 가운데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주의 피를 희생으로 지불하셨습니다.
대만의 생번들이 사람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는 악풍을 없애기 위하여 오풍선생의 희생이 필요하였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의 평화와 안전, 그리고 영생을 위하여 주님께서 대속하여 십자가의 죽으시므로 희생하신 것입니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이 십자가의 희생의 정신으로 살아야 할 것을 부탁하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자기희생의 길이었습니다. 사도가 그러하였고, 오늘까지의 수많은 순교자가 그러했습니다. 구속에 감격하여 살아온 많은 성도들이 그러하였습니다.
2 십자가를 지는 자의 증언
⑴ 저주받은 우리를 구속해 주신 것을 증언합니다.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했습니다. 땅 위 에 사는 모든 사람이 다 여호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을 때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고로 믿음을 가지고 십자가를 지는 고난에 동참하는 자는 주님이 나의 모든 죄악을 사했다는 것을 무언으로 증언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주님의 십자가는 온 인류의 구원과 영원한 삶을 약속받아 새로운 소망 속에 삶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는 진정으로 예수의 죽음이 우리 인간의 죄를 속해 주신 것을 증언하게 되는 것입니다.
⑵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증언합니다.
(로마서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라고 했습니다.
공의로운 왕
로구리양 왕이 풍기문란한 나라를 바로잡기 위하여 칙령을 내리기를, 누구든지 간음을 한 자는 용서없이 두 눈을 뽑는다는 것입니다. 이 법령 시행 즉시 왕의 사랑하는 외아들이 이 법령을 범했습니다.
이때 아버지 왕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나라의 법을 지키는 마음으로 아들의 눈 하나를 뽑고 왕인 아버지의 눈을 하나 뽑음으로 백성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십자가를 지게 함으로 인간의 죄악을 대신하셨고 삼일 만에 다시 부활하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신앙인이 십자가를 지는 생활은 여호와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씨시의 성자 프렌치스코
그는 이 십자가를 깊이 깨달은 뒤에 모든 가산을 다 팔아서 구제 사업을 하고 일생을 주님 위해 바친 유명한 수도사였습니다. 그는 어느 날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드리기를, "주 예수님, 제가 죽기 전에 꼭 두 가지의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저로 하여금 육체와 영혼이 괴로움을 겪어 십자가를 체험하게 하옵시고 둘째는 주님이 그토록 우리 죄인을 위하여 지불하셨던 그 뜨거운 사랑을 내 마음에 간직할 수 있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자청한 것입니다. 그럼으로 여호와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임을 증언케 해달라는 것입니다.
⑶ 우리는 천국 백성임을 증언
(골로새서 1:13-1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요한복음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옥체를 깨뜨리어 그 보혈이 한 방울 남김없이 값없이 흘려주셨던 주님의 대속의 역사는 온 인류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맺는 말
또한, 참 신앙은 영생을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11-12, "주와 함께 죽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앞에는 영생과, 영광과, 부활과, 승리가 있으니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주께서 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살아가는 자 만 주어집니다. 말씀을 들었습니다. 고난주간이 오늘로 시작됩니다. 이 한 주간만이라도 이 깊고 오묘한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십자가를 지는 일에 동참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십자가를 지는 자세
⑴ 십자가의 길은 자기 부정입니다.
⑵ 십자가의 길은 자기 비하입니다.
⑶ 십자가의 길은 자기 희생입니다.
2 십자가를 지는 자의 증언
⑴ 저주받은 우리를 구속해 주신 것을 증언합니다.
⑵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증언합니다.
⑶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살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사는 삶에 내가 사는 삶을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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