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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종려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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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교회력으로는 종려주일(Palm Sunday)입니다. 종려주일이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셨을 때 군중들이 종려나무 잎사귀를 사용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키는 주일로, 부활절 전 주일이며, 수난(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펴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고 환호성을 하던 사실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그래서 4세기 이날 경부터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행진하는 특별한 의식을 해왔습니다. 종려나무는 그리스도의 승리와 악마를 대적하는 상징물로써 축복의 나무가 되고 있으며, 중세에 와서는 이 행진이 한 교회에까지 가는 풍습이 되었는데, 종려나무를 축복하고 분배해 주면서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 21 : 1-9를 읽은 후에 목사와 신도들이 십자가를 맨 앞에 세우고 영광의 찬송을 부르며 행진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위해 감람산 벳바게에 도착했을 때 두 제자를 보내면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만약에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러면 즉시 보낼 것이다”고 일러주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했더니 어린 나귀를 주었고 그것을 가져왔을 때 예수님은 타시고 예루살렘성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올라가는 중에 군중들이 나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어떤 사람들은 종려나무가지를 꺾어 길에 펴고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하면서 열렬히 환호하며 예루살렘에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야단이 났습니다. 성안이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기에 이렇게 백성들이 환호하며 올라오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21장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27장 아리마대 요셉에 묻히기까지 숨 가쁘게 진행되는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목적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유월절에 명절을 지키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떡과 잔을 제자들과 나누면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줌을 예표함과 동시에 그것을 기념하라고 일러주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은 성찬을 위함이었습니다. 거룩한 성찬, 즉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의 마지막 종려주일의 예루살렘 입성은 성찬을 위한 길이었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성찬을 위해 올라가는 길에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가 어린 나귀를 타고 가신 일입니다.
왜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셨는가
우선은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해 놓은 말씀을 응하기 위함입니다. 스가랴9장9절 말씀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오늘본문 5절에 보면 이 내용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귀를 탄 이유를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겸손하여 나귀를 타시니”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새끼 나귀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에서 보면 예수님은 무자비한 사람 취급받을 수 있습니다. 어른 나귀가 아닌 어린 나귀, 아직 짐을 등에 져보지 않는 나귀를 타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륜적입니다. 승리자는 말을 타든지, 낙타를 타든지 큰 짐승을 이용했어야 합니다. 아니면 나귀라도 어미 나귀를 탔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린 나귀를 타도 입성하는데 승리자로서의 입성과는 격식에 맞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겸손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실 여기서 겸손함이란 당시 사회에서는 존경받는 모습이 아닌 종, 노예,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의 용어였습니다. 그렇게 자랑스럽지도, 영광스럽지도 않는 수식어입니다.
나귀는 평화와 고난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그렇다면 평화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러 올라가시는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 어린 나귀를 타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찬의 삶의 길”이란 승리의 삶을 위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겸손한 자세로, 섬기는 자세로, 평화를 심으면서도 고통을 감수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이 타고 가신 어린 나귀가 이미 예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내어 준 사람은 누군지 모르지만,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주실 것이라고 한 것을 보면 주님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주가 쓰시겠다’고 하는데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인해 예수님의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도 성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나의 것을 내어놓음이 필요합니다. 참된 성찬의 참여는 주가 쓰시겠다고 할 때 기꺼이 내어놓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도 사실 성찬을 통해서 당신의 살과 피를 다 내어놓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주가 쓰시겠다고 하는데 그것을 순순히 풀어주었는가 갖고 가도록 허락하였는가 하는 점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우주 만물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나귀 주인은 자신이 진정한 주인이 아니라 주님이 진정한 주인임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항상 이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시편95:4-5절 말씀 “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학개2:8절 말씀에도 보면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주인이 쓰시겠다고 하는데 누가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의 모든 것도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할 때는 내어놓아야 합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당신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이 내어놓으라고 하니까 기꺼이 내어놓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것이 아닙니까
라우풀 공은 예수님이 성 만찬에 사용하셨던 은잔을 찾기 위해 자기가 살고 있던 성을 떠났습니다. 말에 채찍을 가하며 막 성문을 지나려는데 아주 남루한 옷을 입은 거지가 구걸하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라울 공은 재수 없다고 생각하며 돈 한 푼을 던져 주고는 예수님이 쓰신 은잔을 찾기 위해 멀리 이곳저곳을 찾아다녔습니다. 하지만 그 은잔은 찾지 못한 채 세월은 흘러 가지고 있던 돈은 다 떨어지고 건강마저 잃어버린 그는 몹시 지쳐 있었습니다. 백발이 성성해지자 그는 겸허하고 가난한 마음을 안고 옛 성으로 쓸쓸히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성문에 이르렀을 때에 그가 오래전 성문을 출발할 때 손을 벌렸던 그 거지가 같은 장소에 있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라우풀 공을 향해 손을 벌리며 구걸을 했습니다. 라우풀 공은 그에게 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지만 자신이 먹을 빵이라도 나눠 먹자며 빵을 두 조각으로 나누어 그 거지에게 주었습니다. 또 거기가 목말라 하는 것 같아 손수 표주박을 가지고 우물에 가서 물을 한잔 떠다가 거지에게 주었습니다.
그 순간 거지가 예수님으로 변하면서 “네가 찾은 은잔은 바로 이 표주박이고 이 물은 나의 피며, 네가 나눠준 빵 조각이 나의 살이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성찬을 위하여 가셨던 주님의 길을 생각하면 오늘 우리들의 삶에서 주님의 성찬의 삶을 사는 삶이란 바로 이런 내어놓음의 길을 걸을 때 참된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 번째로는 두 제자입니다.
1절 하반절에 보면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여기 두 제자가 구체적으로 구군지를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서 두 제자는 분명히 무리들과는 구분됩니다. 무리들은 분위기에 편승하여 감정에 사로잡혀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분위기에 영합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뜻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나귀를 가져오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사실 두 제자에게 시킨 일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잘못하면 누군가와 한 바탕 싸움질을 해야 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모르는 사람에게 가서 나귀를 무조건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시비를 걸면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실 것이라고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마가복음11장에 보면 두 제자가 나귀를 풀 때에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또 감수해야 할 것은 나귀를 가져오되 만약에 누군가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처럼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가지고 와야 하는 임무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두 제자들에게 나귀를 갖고 오라고 할 때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고 했습니다. 원어적으로 번역하면 ‘너희는 억지로라도 반드시 끌고 와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제자는 자기의 뜻은 없습니다.
스승의 뜻을 나의 뜻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제자는 때로는 내가 원하지 않는 어려운 일이나, 더러운 일이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어렵고 힘든 곳을 가야 하거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황당한 곳, 엉뚱한 곳으로 가야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성찬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주님도 원하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또한 성찬의 삶을 사는 것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야 합니다.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제자의 삶입니다. 제자는 내 의지로 사는 자가 아닙니다. 그분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보세요. 두 제자들이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이것이 제자의 참된 모습입니다. 제자는 곁길로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마지막으로 한 행동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7절에 보면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자기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내어 놓을만한 것, 겉옷을 예수님이 앉을 자리에 방석으로 내어놓았습니다. 이것이 제자의 참된 모습입니다. 내어놓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어놓으면서 그분의 뜻을 수행하는 삶을 사는 자가 제자입니다. 이것이 제자도입니다. 성찬을 위하여 가는 길은 오직 한 길밖에 없습니다. 골고다 십자가의 길입니다. 다 내어놓는 길입니다. 우리도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성찬의 길을 가는데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 ‘무리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무리들이란 성경에서 많이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것을 무리들로 간주했습니다. 지정된 사람들이 아닌 일반 백성들 다수를 말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에 의해 어린 나귀를 갖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에 깔아드렸을 때 예수님은 타셨습니다. 이때 무리들은 자기들이 겉옷을 벗어서 나귀가 가는 길에 깔아드렸습니다. 굉장한 헌신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9절 말씀에 보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고 했습니다. 무리들은 찬송과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무리들은 위대한 고백을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안에 소동이 일어나고 무리들과 함께 나귀타고 입성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이들은 정직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정확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무리들은 정말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의 신앙은 믿기 어렵습니다. 군중들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분위기에 잘 편승하기 때문에 확인이 필요합니다.
이런 무리들은 지도자들도 두려워할 정도였습니다. 46절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잡고자 했으나 무리들을 무서워해서 잡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런 군중들이라면 예수님을 어떤 위기에서도 보호할 수 있고, 지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실제로 성경을 보면 이런 군중들의 모습이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립니다.
이 무리들이 22장 33절에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다고 되어 있습니다. 23장1절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군중들이 사라지고 26장에 가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파송한 큰 무리들이 등장해서 예수님을 잡으려고 나타났습니다. 27장에 보면 유대에는 전례를 따라 유월절에 죄수 한 사람을 사면시켜주는 제도가 있는데 이것은 무리들이 원하는 사람을 석방시킵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예수를 놓아주려고 하면서도 무리들이 두려워서 무리들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냐 바라바냐” 27장20절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들을 충동질해서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하고 예수를 죽이도록 하자고 했을 때 무리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여러분, 분위기에 편승하여 이쪽저쪽을 왔다갔다 하는 모습은 무리들의 모습입니다. 군중들의 모습입니다. 군중심리가 작동합니다. 쉽게 편승합니다. 그래서 선동정치가 먹히는 이유가 됩니다. 화려한 입성을 가지게 했던 그 무리들이 결국 예수님을 성찬에 참여하게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결국 무리들이 예수님을 못 박았습니다. 그 무리들 가운데 저와 여러분이 속해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환호하여 자신들의 옷을 벗어 길에 깔아드리는 헌신과 종려나무가지를 꺾어 들고 ‘호산나’라고 외치던 그 함성이 변하여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고, 침을 뱉고 모멸감을 주며 돌을 던지는 무리들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이 아닙니까 너무나도 이중적인 모습이 아닙니까
군중들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우리들은 군중들의 신앙의 틀을 벗어나서 제자의 삶으로 이어지는 성장과 성숙함을 가져와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성찬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 올라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찬의 삶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가셨습니다. 그로 인해 오늘 우리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도 성찬의 삶으로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104주년이 되는 대구칠곡교회를 위하여 주가 쓰시고자 할 때 내어놓음의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자신의 뜻보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의 몸이 되신 예수님은 성찬의 삶을 위해서는 기꺼이 가셨던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의 제자로서 그분의 뒤를 따라 그 길을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하시고자 할 때는 거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순종만이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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