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목적
본문
오늘 저와 여러분은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주님을 배척하는 자가 되지 않고, 이 예배를 통하여 중심으로 뜨겁게 영접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종려주일’로서 오늘부터 시작하여 1주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종려주일이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제자들은 너무 기뻐서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나귀에 안장을 지우기도 하고
길에 펴기도 하였으며, 수많은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어대면서 예수님을 앞뒤로 호위를 하며 예루살렘으로 성 안으로 들어가면서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시여! 하늘에서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 라고 예수님을 환영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호산나라는 말의 뜻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뜻입니다. 또한, 종려나무는 키가 약20여m나 되는데 관상수로서도 참으로 아름다운 나무입니다.
그래서 구약 아가서 7:7절에도 보면, 사랑하는 사람의 키와 유방을 가르쳐 종려나무 같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 당시 여리고 성은 종려나무가 많아서 종려 도시라고도 하고 카톨릭에서는 종려나무를 성별하여 성수(聖樹)라고도 합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 보면 겟세마네 동산 건너편에 황금의 문(Golden Gate)이 있는데, 아치형으로 된 두 개의 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나귀를 타고 이 문으로 들어오셨다고 합니다.
때문에 오늘은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오실 때에 수천 명의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부르면서 예수님을 환영하던
그 예루살렘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오늘의 우리들도 이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주님을 이 시간 우리들의 마음에 영접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10장 40절로 4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그 말씀을 찾아서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아멘!
이처럼 우리 인간들이 누구를 영접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이 달라집니다. 누구와 함께 어울리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품이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강도를 영접하여 그와 같이 어울려 논다면, 그 사람은 분명 강도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불량배와 같이 어울려 놀게 되면 십중팔구는 분명 불량배가 될 것입니다.
또한, 사기꾼을 영접하여 그와 같이 어울려 논다면, 분명히 그 사람도 사기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탄 마귀를 영접하여 그와 어울린다면, 그 사람 또한, 마귀의 종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이 죄인이라고 정죄해 버린 세리와 창기들과 억눌린 사람,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식사도 같이 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비방하고 배척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들이 온전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구원받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영생을 얻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1절로 12절에 보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최후의 한 주간을 예루살렘에서 지내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에는 벌써 그를 죽이려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어떠하던지 약점을 잡으려는 무리들이 뒤를 따르고 있었으나, 그래도 뜨겁게 환영하는 무리들이 있었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실 때부터 한 주간 동안 숨 가쁘게 전개되었던 사건들을 묵상해 보면서 ‘예루살렘 성의 입성’이란 제목으로 우리 모두가 은혜 받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고난주간에 이루어지는 사건들은 4복음서에 모두 기록이 되어 있는데, 마태복음에서는 21장부터, 마가복음에서는 11장부터, 누가복음에서는 19장부터, 요한복음은 12장에서부터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고난주간에 일어난 사건 중에 가장 먼저 시작된 사건이 바로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1.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위하여 나귀 새끼를 제공한 사람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 당시 사람을 죽이고 약탈하는 전쟁에서는 말을 타고 전쟁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만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말을 타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평화의 상징인 나귀를 타시고 들어오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나라의 농촌에서는 나귀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또한 그 당시에는 나귀가 중요한 교통수단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 BC 520년에 스가랴 예언자의 예언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그 말씀이 기록된 스가랴서 9장 9절을 한번 찾아서 읽어 보겠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아멘!
이처럼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시기 위하여 제자들을 벳바게 맞은편 마을 베다니로 보내시면서 마을 어귀에 매인 나귀가 있을 것이니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마을로 내려가 보니 정말 나귀가 매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매여 있는 나귀의 줄을 풀어 끌고 가려고 하자, 갑자기 주인이 나타나서 왜 남의 나귀를 가져가려하느냐 고 합니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님이 쓰실 것입니다. ”라고 하자 이 나귀 주인은 아무 말 없이 선뜻 허락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 나귀를 제공한 사람이 누군지 이름조차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쓰시겠다. ”는 이 말에 선뜻 자신의 전 재산일지도 모를 나귀를 내어준 것을 보면, 그는 아주 믿음이 좋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나귀의 주인은 그동안 자신이 정성을 다하여 고이 길러서 한 번도 타보지도 않고, 부려보지도 않고, 짐을 실어보지도 않은 귀한 나귀를 주님께 제공해 드렸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저와 여러분이 느낄 수 있는 큰 교훈은 주님께서 필요하다고 하자, 그 나귀의 주인은 두말없이 그 말에 순응했다는 사실입니다.
즉, 베다니 마을의 나귀 주인은 주님께서 쓰시겠다는 말 한마디에 자기의 전 재산이나 마찬가지일지도 모를 그 나귀를 아무런 조건도 없이 바로 주님을 위해 드렸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바치라고 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여 자신의 아들을 아낌없이 바침으로서 그는 위대한 신앙인이 되었으며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그를 인정하시게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 3절에 보면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고 한 말씀 중에 ‘주가 쓰시겠다. ’는 주님의 말씀이 심령에 강하게 부딪쳐 오지 않으십니까
벳바게 맞은편 마을의 한 무명의 사람은 예수님과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주가 쓰시겠다고 하니” 서슴지 않고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예수님께 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에 무리들이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다 펴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 하면서 지상 최고인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을 장식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주님을 위하여 그동안 무엇을 드렸습니까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주셨는데, 우리들은 과연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얼마나 드리고 있습니까
이름조차도 밝혀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귀한 나귀를 드린 이 사람과 같이 저와 여러분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드리고 있습니까
이처럼 이 세상에서도 진정으로 고마운 사람에게는 아까운 것이 없습니다. 더욱이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주신 예수님께 무엇인들 못 드리겠습니까 늘 드려도 그저 아쉽고 부족한 마음뿐임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82장 1절)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을 영적으로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구속의 기쁨이 없고 감사가 없어서 항상 여호와 하나님께 인색하기만 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주님께서는 이 자리에 찾아와 계십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 마음에, 저와 여러분 가정에, 그리고 우리교회에 입성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주님을 이 시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신령과 진정한 마음으로 환영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주님의 장사를 위하여 향유를 부어드린 여인을 묵상해야 합니다.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께서 식사를 하실 때, 죄 많은 한 여인이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그분의 장사를 준비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마가복음 14장 9절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이 시대에 주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들도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기념이 될 만한 아름다운 감사와 믿음의 행함이 있는 축복의 절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향유를 담아두었던 옥합을 깨뜨린 여인처럼 믿음의 큰일은 못해도 항상 기도를 게을리 하지 말고, 할 수 만 있다면 하루라도 금식을 하며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프리카의 유명한 선교사인 리처즈 목사님은 그곳 흑인들에게 신약성경인 누가복음을 그들 말로 번역하여 하루에 10절씩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번은 누가복음 6장 30절로 31절 말씀인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성경 말씀을 건너뛰고 가르쳤답니다.
그러나 리처즈 목사님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데 이렇게 하면 안 되지!’ 하는 마음속으로부터 가책이 와서 그 말씀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는 그날부터 그들은 보는 것마다 있는 것마다 달라고 보채더랍니다.
그래서 할 수없이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다 주니까, 나중에는 그곳 흑인들이 오히려 그 목사님께 감동을 받아 그간에 가져간 것들을 도로 가져다가 주면서 당신은 참 여호와 하나님의 종이라 하면서 그때부터 더욱더 그 선교사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저와 여러분들도 할 수만 있다면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주님을 위하여, 어렵고 힘든 이웃을 위하여 아무런 조건 없이 아낌없는 바치고 베풀 때,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모습을 보시고 몇 배로 갚아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고난주간에 처음으로 성만찬 예식이 시작된 것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13절로 1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감람산에 이르자 제자 중에 두 명을 보내시며 이렇게 앞날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 그 말씀도 한 번 찾아서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 중에 둘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자리를 베풀고 예비 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의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하니라!” 아멘!
이와 같이 주님의 말씀대로 성내에서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던 한 여인은 누가 미리 부탁하지도 않았지만 예수님을 위하여 다락방을 제공하고 또 만찬을 예비하였다는 사실입니다.
한때는 예수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고 마태복음 8장 20절을 통하여 탄식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때만큼은 큰 다락방을 제공한 믿음의 여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지상 최후의 유월절 만찬을 드시면서 당신의 몸과 언약의 피를 기념하는 예식을 행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다락방은 그 후 120명의 문도들이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은 곳이 되기도 하였으며, 베드로가 잡혀갔을 때 성도들이 모여 열심히 기도하여 베드로가 여호와 하나님의 기적으로 살아나올 수 있게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행12:12)
그 후부터 예수님의 부탁대로 고난주간에는 교회마다 이 성만찬 예식을 행하면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계기가 되었음으로 이러한 거룩한 성만찬 예식을 행할 때마다 속죄와 은혜와 치료가 넘치는 은사가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서 다락방을 제공해 준 아름다운 믿음의 그 여인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이 고난주간에 예수님께 무엇을 드릴까를 생각해 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드림으로써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한 여인의 회생처럼은 못하더라도, 집을 팔아 주님께 다락방을 제공해 드리지는 못하더라도,
땅을 사서 예수님의 무덤을 만들어 드리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빈 마음을 열어드리므로 저와 여러분들의 심령 속에 온전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모든 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묵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있는 성지 예루살렘에 가면 감람산 남쪽에 겟세마네 동산이 있는데, 거기에는 아주 오래 된 감람나무 여덟 그루가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 한 그루를 ‘애통의 나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그 나무 옆에는 예배당이 있고, 그 안에는 큰 바위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로 그 나무 밑에서 기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겟세마네란 이름의 뜻은 ‘기름을 짜는 틀’이란 뜻으로서 주님께서는 이곳에서 자신의 몸의 진액을 짜시며 기도하심으로 우리들은 이 겟세마네 동산을 기억할 때마다 새로운 은혜를 입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마치시고 감람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 중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명의 제자들을 끝까지 데리고 가셔서 죽음을 앞둔 최후의 기도를 드리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몇 시간 후면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사형장으로 끌려가실 주님의 겟세마네의 기도는 심혈을 기울인 최후의 기도였습니다.
때문에 누가복음 22장 44절을 보면,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피와 땀을 흘리시며 하신 기도의 내용은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간절한 심령으로 기도를 하셨다고 마가복음 14장 36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주님께서 피 흘리시며 기도하신 것이 자기 자신의 소망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바로 이 세상의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기도였기에 오늘날 우리들은 그분의 희생적인 사랑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류의 역사상 그 어떠한 성현들이, 또한 위인들이, 그리고 종교가들이,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주님처럼 간절한 기도를 한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또한, 우리는 주님께서 이 동산을 자주 찾으셨음을 누가복음 22장 39절로 46절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8장 1절로 2절에서도 예수님을 팔았던 가룟 유다도 이곳 지리를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주님의 모습을 다시금 생각하면서 주님의 음성을 다시 듣게 되는 귀한 은혜를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앞으로 있을 고통 때문에 고민을 하시고 슬퍼하셨다고 마태복음 26장 36절로 38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말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27장 47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그 후 십자가에 달리신 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으신 바, 이 비통의 부르짖음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이 고백과 같은 비통을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 고백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통을 묘사할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 ”라고 히브리서 5장 7절에 기록을 하였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마태복음 26장 39절과 42장 44절에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는 엎드려 기도를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엎드려 기도하신 사실에 대하여는 공관 복음에 다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4장 35절에는 주님께서 엎드려 기도를 하셨다고 하였고, 누가복음 22장 41절에서는 주님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셨다고 하였으며,
오늘 본문에서는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를 하셨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즉, 이와 같은 모습은 주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정성을 드려 간절히 그리고 겸손히 기도를 하셨다는 뜻이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실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 중에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시여”를 부르면서 환영하던 사람들은 불과 일주일도 못 가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며 배신한 사람들이었지만,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은 절대로 주님을 환영하는 마음이 변하지 말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의 고난인 쓴잔을 받으셨고, 참혹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저와 여러분들은 다시 한 번 우리들 가슴에, 우리들 가정과, 우리 교회에, 또한, 우리들 직장과 사업장에, 이러한 예수님을 영접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사망의 굴레에서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내 가슴으로 뜨겁게 믿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그럴 것이다. ’라는 추상적으로나, 관념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이러한 사실을 온전히 믿음으로서 주님의 십자가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물이 쏟아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베다니 마을의 나귀를 드린 이름 없는 사람과 같이, 그리고 겉옷을 벗어서 주님 앞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부르는 마음으로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 주님께서 흘리신 보혈의 의미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과연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마음속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흘리신 고통의 보혈의 피는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죗값으로 흘리신 것입니다.
때문에 주님의 이러한 보혈로 인하여 죽어야 할 저와 여러분들의 육신이 살았고, 내가 죽어야 할 것을 주님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은혜를 받고서도 무감각적인 형식적인 믿음의 생활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고난주간을 통하여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6:17)고 고백을 한 것과 같이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 모두에게 체험되어지는 이번 주간이 되어 더욱더 큰 은혜로 충만케 되는 온전한 믿음의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종려주일’로서 오늘부터 시작하여 1주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종려주일이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제자들은 너무 기뻐서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나귀에 안장을 지우기도 하고
길에 펴기도 하였으며, 수많은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어대면서 예수님을 앞뒤로 호위를 하며 예루살렘으로 성 안으로 들어가면서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시여! 하늘에서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 라고 예수님을 환영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호산나라는 말의 뜻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뜻입니다. 또한, 종려나무는 키가 약20여m나 되는데 관상수로서도 참으로 아름다운 나무입니다.
그래서 구약 아가서 7:7절에도 보면, 사랑하는 사람의 키와 유방을 가르쳐 종려나무 같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 당시 여리고 성은 종려나무가 많아서 종려 도시라고도 하고 카톨릭에서는 종려나무를 성별하여 성수(聖樹)라고도 합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 보면 겟세마네 동산 건너편에 황금의 문(Golden Gate)이 있는데, 아치형으로 된 두 개의 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나귀를 타고 이 문으로 들어오셨다고 합니다.
때문에 오늘은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오실 때에 수천 명의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부르면서 예수님을 환영하던
그 예루살렘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오늘의 우리들도 이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주님을 이 시간 우리들의 마음에 영접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10장 40절로 4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그 말씀을 찾아서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아멘!
이처럼 우리 인간들이 누구를 영접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이 달라집니다. 누구와 함께 어울리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품이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강도를 영접하여 그와 같이 어울려 논다면, 그 사람은 분명 강도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불량배와 같이 어울려 놀게 되면 십중팔구는 분명 불량배가 될 것입니다.
또한, 사기꾼을 영접하여 그와 같이 어울려 논다면, 분명히 그 사람도 사기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탄 마귀를 영접하여 그와 어울린다면, 그 사람 또한, 마귀의 종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이 죄인이라고 정죄해 버린 세리와 창기들과 억눌린 사람,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식사도 같이 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비방하고 배척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들이 온전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구원받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영생을 얻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1절로 12절에 보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최후의 한 주간을 예루살렘에서 지내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에는 벌써 그를 죽이려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어떠하던지 약점을 잡으려는 무리들이 뒤를 따르고 있었으나, 그래도 뜨겁게 환영하는 무리들이 있었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실 때부터 한 주간 동안 숨 가쁘게 전개되었던 사건들을 묵상해 보면서 ‘예루살렘 성의 입성’이란 제목으로 우리 모두가 은혜 받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고난주간에 이루어지는 사건들은 4복음서에 모두 기록이 되어 있는데, 마태복음에서는 21장부터, 마가복음에서는 11장부터, 누가복음에서는 19장부터, 요한복음은 12장에서부터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고난주간에 일어난 사건 중에 가장 먼저 시작된 사건이 바로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1.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위하여 나귀 새끼를 제공한 사람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 당시 사람을 죽이고 약탈하는 전쟁에서는 말을 타고 전쟁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만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말을 타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평화의 상징인 나귀를 타시고 들어오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나라의 농촌에서는 나귀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또한 그 당시에는 나귀가 중요한 교통수단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 BC 520년에 스가랴 예언자의 예언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그 말씀이 기록된 스가랴서 9장 9절을 한번 찾아서 읽어 보겠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아멘!
이처럼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시기 위하여 제자들을 벳바게 맞은편 마을 베다니로 보내시면서 마을 어귀에 매인 나귀가 있을 것이니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마을로 내려가 보니 정말 나귀가 매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매여 있는 나귀의 줄을 풀어 끌고 가려고 하자, 갑자기 주인이 나타나서 왜 남의 나귀를 가져가려하느냐 고 합니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님이 쓰실 것입니다. ”라고 하자 이 나귀 주인은 아무 말 없이 선뜻 허락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 나귀를 제공한 사람이 누군지 이름조차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쓰시겠다. ”는 이 말에 선뜻 자신의 전 재산일지도 모를 나귀를 내어준 것을 보면, 그는 아주 믿음이 좋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나귀의 주인은 그동안 자신이 정성을 다하여 고이 길러서 한 번도 타보지도 않고, 부려보지도 않고, 짐을 실어보지도 않은 귀한 나귀를 주님께 제공해 드렸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저와 여러분이 느낄 수 있는 큰 교훈은 주님께서 필요하다고 하자, 그 나귀의 주인은 두말없이 그 말에 순응했다는 사실입니다.
즉, 베다니 마을의 나귀 주인은 주님께서 쓰시겠다는 말 한마디에 자기의 전 재산이나 마찬가지일지도 모를 그 나귀를 아무런 조건도 없이 바로 주님을 위해 드렸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바치라고 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여 자신의 아들을 아낌없이 바침으로서 그는 위대한 신앙인이 되었으며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그를 인정하시게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 3절에 보면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고 한 말씀 중에 ‘주가 쓰시겠다. ’는 주님의 말씀이 심령에 강하게 부딪쳐 오지 않으십니까
벳바게 맞은편 마을의 한 무명의 사람은 예수님과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주가 쓰시겠다고 하니” 서슴지 않고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예수님께 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에 무리들이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다 펴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 하면서 지상 최고인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을 장식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주님을 위하여 그동안 무엇을 드렸습니까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주셨는데, 우리들은 과연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얼마나 드리고 있습니까
이름조차도 밝혀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귀한 나귀를 드린 이 사람과 같이 저와 여러분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드리고 있습니까
이처럼 이 세상에서도 진정으로 고마운 사람에게는 아까운 것이 없습니다. 더욱이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주신 예수님께 무엇인들 못 드리겠습니까 늘 드려도 그저 아쉽고 부족한 마음뿐임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82장 1절)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을 영적으로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구속의 기쁨이 없고 감사가 없어서 항상 여호와 하나님께 인색하기만 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주님께서는 이 자리에 찾아와 계십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 마음에, 저와 여러분 가정에, 그리고 우리교회에 입성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주님을 이 시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신령과 진정한 마음으로 환영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주님의 장사를 위하여 향유를 부어드린 여인을 묵상해야 합니다.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께서 식사를 하실 때, 죄 많은 한 여인이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그분의 장사를 준비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마가복음 14장 9절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이 시대에 주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들도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기념이 될 만한 아름다운 감사와 믿음의 행함이 있는 축복의 절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향유를 담아두었던 옥합을 깨뜨린 여인처럼 믿음의 큰일은 못해도 항상 기도를 게을리 하지 말고, 할 수 만 있다면 하루라도 금식을 하며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프리카의 유명한 선교사인 리처즈 목사님은 그곳 흑인들에게 신약성경인 누가복음을 그들 말로 번역하여 하루에 10절씩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번은 누가복음 6장 30절로 31절 말씀인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성경 말씀을 건너뛰고 가르쳤답니다.
그러나 리처즈 목사님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데 이렇게 하면 안 되지!’ 하는 마음속으로부터 가책이 와서 그 말씀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는 그날부터 그들은 보는 것마다 있는 것마다 달라고 보채더랍니다.
그래서 할 수없이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다 주니까, 나중에는 그곳 흑인들이 오히려 그 목사님께 감동을 받아 그간에 가져간 것들을 도로 가져다가 주면서 당신은 참 여호와 하나님의 종이라 하면서 그때부터 더욱더 그 선교사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저와 여러분들도 할 수만 있다면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주님을 위하여, 어렵고 힘든 이웃을 위하여 아무런 조건 없이 아낌없는 바치고 베풀 때,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모습을 보시고 몇 배로 갚아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고난주간에 처음으로 성만찬 예식이 시작된 것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13절로 1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감람산에 이르자 제자 중에 두 명을 보내시며 이렇게 앞날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 그 말씀도 한 번 찾아서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 중에 둘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자리를 베풀고 예비 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의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하니라!” 아멘!
이와 같이 주님의 말씀대로 성내에서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던 한 여인은 누가 미리 부탁하지도 않았지만 예수님을 위하여 다락방을 제공하고 또 만찬을 예비하였다는 사실입니다.
한때는 예수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고 마태복음 8장 20절을 통하여 탄식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때만큼은 큰 다락방을 제공한 믿음의 여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지상 최후의 유월절 만찬을 드시면서 당신의 몸과 언약의 피를 기념하는 예식을 행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다락방은 그 후 120명의 문도들이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은 곳이 되기도 하였으며, 베드로가 잡혀갔을 때 성도들이 모여 열심히 기도하여 베드로가 여호와 하나님의 기적으로 살아나올 수 있게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행12:12)
그 후부터 예수님의 부탁대로 고난주간에는 교회마다 이 성만찬 예식을 행하면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계기가 되었음으로 이러한 거룩한 성만찬 예식을 행할 때마다 속죄와 은혜와 치료가 넘치는 은사가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서 다락방을 제공해 준 아름다운 믿음의 그 여인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이 고난주간에 예수님께 무엇을 드릴까를 생각해 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드림으로써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한 여인의 회생처럼은 못하더라도, 집을 팔아 주님께 다락방을 제공해 드리지는 못하더라도,
땅을 사서 예수님의 무덤을 만들어 드리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빈 마음을 열어드리므로 저와 여러분들의 심령 속에 온전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모든 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묵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있는 성지 예루살렘에 가면 감람산 남쪽에 겟세마네 동산이 있는데, 거기에는 아주 오래 된 감람나무 여덟 그루가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 한 그루를 ‘애통의 나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그 나무 옆에는 예배당이 있고, 그 안에는 큰 바위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로 그 나무 밑에서 기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겟세마네란 이름의 뜻은 ‘기름을 짜는 틀’이란 뜻으로서 주님께서는 이곳에서 자신의 몸의 진액을 짜시며 기도하심으로 우리들은 이 겟세마네 동산을 기억할 때마다 새로운 은혜를 입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마치시고 감람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 중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명의 제자들을 끝까지 데리고 가셔서 죽음을 앞둔 최후의 기도를 드리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몇 시간 후면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사형장으로 끌려가실 주님의 겟세마네의 기도는 심혈을 기울인 최후의 기도였습니다.
때문에 누가복음 22장 44절을 보면,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피와 땀을 흘리시며 하신 기도의 내용은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간절한 심령으로 기도를 하셨다고 마가복음 14장 36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주님께서 피 흘리시며 기도하신 것이 자기 자신의 소망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바로 이 세상의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기도였기에 오늘날 우리들은 그분의 희생적인 사랑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류의 역사상 그 어떠한 성현들이, 또한 위인들이, 그리고 종교가들이,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주님처럼 간절한 기도를 한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또한, 우리는 주님께서 이 동산을 자주 찾으셨음을 누가복음 22장 39절로 46절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8장 1절로 2절에서도 예수님을 팔았던 가룟 유다도 이곳 지리를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주님의 모습을 다시금 생각하면서 주님의 음성을 다시 듣게 되는 귀한 은혜를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앞으로 있을 고통 때문에 고민을 하시고 슬퍼하셨다고 마태복음 26장 36절로 38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말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27장 47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그 후 십자가에 달리신 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으신 바, 이 비통의 부르짖음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이 고백과 같은 비통을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 고백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통을 묘사할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 ”라고 히브리서 5장 7절에 기록을 하였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마태복음 26장 39절과 42장 44절에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는 엎드려 기도를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엎드려 기도하신 사실에 대하여는 공관 복음에 다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4장 35절에는 주님께서 엎드려 기도를 하셨다고 하였고, 누가복음 22장 41절에서는 주님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셨다고 하였으며,
오늘 본문에서는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를 하셨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즉, 이와 같은 모습은 주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정성을 드려 간절히 그리고 겸손히 기도를 하셨다는 뜻이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실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 중에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시여”를 부르면서 환영하던 사람들은 불과 일주일도 못 가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며 배신한 사람들이었지만,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은 절대로 주님을 환영하는 마음이 변하지 말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의 고난인 쓴잔을 받으셨고, 참혹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저와 여러분들은 다시 한 번 우리들 가슴에, 우리들 가정과, 우리 교회에, 또한, 우리들 직장과 사업장에, 이러한 예수님을 영접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사망의 굴레에서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내 가슴으로 뜨겁게 믿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그럴 것이다. ’라는 추상적으로나, 관념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이러한 사실을 온전히 믿음으로서 주님의 십자가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물이 쏟아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베다니 마을의 나귀를 드린 이름 없는 사람과 같이, 그리고 겉옷을 벗어서 주님 앞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부르는 마음으로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 주님께서 흘리신 보혈의 의미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과연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마음속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흘리신 고통의 보혈의 피는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죗값으로 흘리신 것입니다.
때문에 주님의 이러한 보혈로 인하여 죽어야 할 저와 여러분들의 육신이 살았고, 내가 죽어야 할 것을 주님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은혜를 받고서도 무감각적인 형식적인 믿음의 생활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고난주간을 통하여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6:17)고 고백을 한 것과 같이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 모두에게 체험되어지는 이번 주간이 되어 더욱더 큰 은혜로 충만케 되는 온전한 믿음의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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