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고난의 신비
본문
우리나라 야구가 세계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일은 참으로 장한 일리고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워낙 1등만을 추구하는 민족성을 가지고 있기에, 잔뜩 1등을 기대하다가 2등하니까, 그것도 일본에게 져서 2등을 하니까 내심 서운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일본이나 미국에 비해서 야구라고 하는 스포츠 종목에 대한 저변이 너무 열악한 것을 생각하면, 그만한 성적을 거둔 것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 이기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패배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도 아는 것이 진정 성숙한 사회, 성숙한 인격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야구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별 관심도 없었는데, 이번에 우리 야구 대표팀 덕분에 열심히 응원도 해 보고, 참 재미있게 경기를 보았습니다.
아마도 결승전에 올라갔을때에는 저 뿐 아니라 여러분들도 잔뜩 기대를 걸었을 것입니다. 이 어려운 때에 우승을 하고 돌아오면 우리 국민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는가. 하지만, 결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것도 우리들의 몫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저는 결승전날 아침에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두가지를 가정해 보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오늘 일본을 보기 좋게 꺽고 우승을 하면, 온 나라가 얼마나 떠들썩할까. 반면에 오늘 일본에 패배를 당하면 얼마나 속이 상하고 안타까워 할까. 과연 오늘 오후에 우리는 어떤 감정과 어떤 표정을 하고 있게 될 것인가. 그것은 아직 경기가 시작되지 않은 상태에선 누구도 확답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우리에게는 아쉬운 패배라는 결과가 주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 그들은 자기들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알지도 못하고 예상하지도 못하고 단지, 애굽땅을 떠나게 되었다는 기쁨과 감격에 겨워있었습니다. 그리고 곧 그들은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것은 아시다시피 홍해바닷가에 진을 쳤을때, 애굽 군대가 뒤따라 온 사건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들은 홍해바다가 갈라져서 애굽군대가 자신들을 건드릴 수 없게 되어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질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신 것입니다. 삼일길을 목마름으로 고통하다가 샘물을 발견하고는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러나 그 물이 써서 먹을 수 없는 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들은 얼마나 절망했었는가. 그러나 곧 저들은 그 쓴물이 단물이 되어 먹을 수 있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신 것입니다.
신광야에서 먹을 것이 떨어져서 ‘이젠 무얼 먹고 사는가’하는 문제로 염려하게 될 때, 그들은 잠시후에 여호와 하나님이 만나를 주시고 고기를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을 상상도 하질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놀라운 광경을 눈으로 목격하고 생생하게 체험하게 됩니다. 고난과 위기를 만난 순간, 우리들은 어떤 모습을 보이게 되는가. 그것은 두려움과 절망입니다. 그리고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게 되는 습관이다.
저희 집에서 구독하는 신문이 몇주전 1993년도 세로쓰기 신문을 1면 겉표지로 해서 배달 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영문을 모르고 그 신문을 그날의 신문기사로 읽었습니다. 갑자기 십여년전의 정치인물들의 이름이 등장을 하고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사건들이 오늘 아침의 뉴스가 되어 배달이 되니 당황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곧 알게 된 사실은, 이 신문사가 신문 사이즈를 작게 조정하면서 십여년 전의 신문을 그대로 인쇄해서, 이제 곧 바뀌게 되는 신문과 얼마나 차이가 있게 변화가 되는지 알려 주려는 의도로 그렇게 한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로 깨닫게 된 진리가 있습니다. 1993년 어느날 아침 그 신문을 받아본 사람들은 거기에 난 정치기사, 경제기사가 참으로 심각한 사건들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2009년에 그 신문 기사를 다시 접하는 저의 입장에서는 그것은 지난 과거의 하나의 역사였을 뿐이고, 이미 다 지나간 일들일 뿐, 지금은 심각한 일도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고난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닥쳐온 현실이 참으로 심각하다. 홍해바다를 건넌 다음에는 홍해바닷가에서 전전긍긍했던 마음은 다 잊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막상 그 바닷가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므리바의 반석에서 물이 터진 다음에는 ‘우리가 왜 그리도 목말라 죽겠다고 아우성을 쳤을까’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반석에서 물이 터져나오기 이전에는 목마름의 문제보다 다급한 일이 또 없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현실의 고난이 곧 여호와 하나님의 기적으로 인하여 아무것도 아닌 일로 바뀐다는 사실을 부여잡고, 그 다음에 다가오는 고난앞에 의연할 수 있었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지금 2009년도의 신문이 2020년쯤 (겨우 11년후) 어떤 사람의 눈에 띄어서 그것을 들여다 본다면, 과연 그는 2009년에 ‘힘들다, 장사안된다,
직장이 어렵다’하고 살아갔던 우리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게 될 것인가. 물론 야구 경기 결승전날 아침에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는 게임’을 앞에 두고 두 갈래의 결과를 가정할 순 있었지만, 결과가 어떻게 되었든, 결국 우리는 그 결과에 승복을 하고 그것을 밑걸음 삼아 더욱 발전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 처럼, 2020년에 우리가 어떻게 되어있든지간에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살게 하시고, 현실을 감당하게 하실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사도 베드로는 벧전2장 18절에서 말씀합니다. 고난에는 세가지의 성격이 있습니다. 첫째는 애매히 당하는 고난입니다. 내가 잘못한 결과로 찾아오는 고난이 아니라, 그냥 영문도 모르는채 앉아서 당하는 고난입니다. 둘째는 자기의 죄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입니다. 그 고난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셋째는 의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입니다.
이것은 자원하여 자발적으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이러한 고난의 원인이 어디에 있든지, 결국 내가 이 고난을 어떻게 견디느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고난을 내가 어떻게 해석하느냐, 이 고난을 통하여 내가 어떤 존재로 드러나는가. 내가 어떻게 이 고난을 감수하는가에 따라서 성숙한 인격이 되기도 하고, 전혀 그렇지 못한 경우도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고난에 보이는 반응은 다섯가지로 나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 자체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회피하고자 하는 자세’를 보입니다.
그것이 내 죄때문이던지, 다른 사람이나 상황때문이던지 어쨌든 고난은 면하고자 애를 씁니다. 또 다른 유형은 고난을 만나면, ‘누구 때문이라고’ 원망하는 반응부터 보이는 사람입니다. 정치를 잘못했기 때문이고, 세계경제가 엉망이 되었기 때문이고, 부모때문이고, 아내때문이고, 남편의 무능함 때문이고, 자식이 속을 썩이는 때문이고, 조상때문이고, 여호와 하나님때문이라고 까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책임전가, 원망,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고난을 당하는 모든 원인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유형입니다.
‘다 내 잘못입니다. 내 책임이다’하고 자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넷째는 고난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해석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고난에 적극적으로 대처합니다. 고난을 겪으면서도 이것을 인격성숙의 기회라고 여깁니다. 이것을 인하여 더욱 강하여지고, 좋은 경험을 했고, 여호와 하나님앞에 겸손하게 되었다고 스스로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다섯째, 신앙의 사람은 고난을 ‘여호와 하나님의 뜻으로 수용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으로만 가르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통해서도 나에게 교훈하고 계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모난 데가 많은 나 같은 사람을 여호와 하나님이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당신이 원하는 작품을 이루시기 위하여 강권적으로 역사하시는 과정가운데 이러한 고난이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이 고난에 대한 예수님의 자세속에서 우리는 고난의 신비를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우리 예수님은 고난을 모르고 당하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의미를 알고 당하신 분입니다. 그 분은 당신이 당하실 고난을 미리 예고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29)하고 대답을 한 순간, 예수님은 저들에게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셨다”(31)고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구세주’로서 이 세상에 오신 당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이제 가야 할 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 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길에 자발적으로 한걸음 한걸음 발을 옮기셨습니다. 여러분, 사실 예수님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마시고 갈릴리에 계셨더면, 그 고난을 피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살렘 성전에 가셔서 그곳의 더럽혀짐을 두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도록 그렇게 진노하시는 행동을 하시지만 않았어도 십자가는 피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내심 예수님을 풀어주고 싶어했던 사람입니다. 뭐라고 한마디만 하시면 될 일이었습니다.
‘난 죄없다. 난 억울하다’한마디만 하셔도 빌라도는 로마권력을 등에 엎고 예수님을 놓아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그 고난에 스스로 발을 들여노으려 하신 것일까. 여기 고난의 신비가 숨어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대속의 고난이요, 속죄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신 그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예수님은 자원하여 그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에 들어서고 계시는 것입니다. 대속이란, ‘죄인이 살기 위해서 의인이 대신 고난을 당하는 일’입니다.
“의인이 죄인처럼 죽지 않고는 죄인이 의인처럼 살 수가 없다” 이것이 고난의 신비의 열쇠입니다. 죄 많은 어떤 사람을 살리려면, 죄 없는 내가 그 누명을 고스란히 뒤집어써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고난의 길을 스스로 가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분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모시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요3;16)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희생의 댓가를 기꺼이 지불하시는데 고난의 신비가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비밀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 속에 숨겨진 ‘나의 값어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나 자신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죄인임에 틀림이 없는데, 여호와 하나님은 이러한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 고난을 통해서 사랑의 크기를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고난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는가.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는가. 나는 왜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나는 현실속에서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가. 하였을때, 정말 중요한 것은 그 고난의 원인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이 이 고난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자신이 마땅히 가야만 길’이라고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하여 영혼들이 살아날 것을 바라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을 만났을때, 습관적으로 원망하고 남의 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고난이 지나고 나면, 그속에 숨겨진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그러다가 또 다른 고난이 닥쳐오면 여지없이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곤 했습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고난이 문제가 아니고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문제일 뿐입니다. 고난의 깊은곳에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이 들어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현실의 사건들 속에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신명기 8장3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왜 광야의 고난의 세월을 겪어야 했는지에 대한 이유가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하심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의중을 알고 계시는가. 여호와 하나님의 의중은 살게하시는데 있습니다. 가나안땅에 들이시는데 있습니다. 단지, 그 고난의 과정을 통과하도록 하시면서, 우리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이겨내는 사람이 되게 하시는게 목적이 있을 뿐입니다. 고난의 신비, 십자가의 신비 속에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한 미국의 젊은이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가 당한 고난의 의미를 묵상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사람이 이기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패배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도 아는 것이 진정 성숙한 사회, 성숙한 인격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야구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별 관심도 없었는데, 이번에 우리 야구 대표팀 덕분에 열심히 응원도 해 보고, 참 재미있게 경기를 보았습니다.
아마도 결승전에 올라갔을때에는 저 뿐 아니라 여러분들도 잔뜩 기대를 걸었을 것입니다. 이 어려운 때에 우승을 하고 돌아오면 우리 국민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는가. 하지만, 결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것도 우리들의 몫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저는 결승전날 아침에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두가지를 가정해 보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오늘 일본을 보기 좋게 꺽고 우승을 하면, 온 나라가 얼마나 떠들썩할까. 반면에 오늘 일본에 패배를 당하면 얼마나 속이 상하고 안타까워 할까. 과연 오늘 오후에 우리는 어떤 감정과 어떤 표정을 하고 있게 될 것인가. 그것은 아직 경기가 시작되지 않은 상태에선 누구도 확답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우리에게는 아쉬운 패배라는 결과가 주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 그들은 자기들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알지도 못하고 예상하지도 못하고 단지, 애굽땅을 떠나게 되었다는 기쁨과 감격에 겨워있었습니다. 그리고 곧 그들은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것은 아시다시피 홍해바닷가에 진을 쳤을때, 애굽 군대가 뒤따라 온 사건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들은 홍해바다가 갈라져서 애굽군대가 자신들을 건드릴 수 없게 되어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질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신 것입니다. 삼일길을 목마름으로 고통하다가 샘물을 발견하고는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러나 그 물이 써서 먹을 수 없는 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들은 얼마나 절망했었는가. 그러나 곧 저들은 그 쓴물이 단물이 되어 먹을 수 있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신 것입니다.
신광야에서 먹을 것이 떨어져서 ‘이젠 무얼 먹고 사는가’하는 문제로 염려하게 될 때, 그들은 잠시후에 여호와 하나님이 만나를 주시고 고기를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을 상상도 하질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놀라운 광경을 눈으로 목격하고 생생하게 체험하게 됩니다. 고난과 위기를 만난 순간, 우리들은 어떤 모습을 보이게 되는가. 그것은 두려움과 절망입니다. 그리고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게 되는 습관이다.
저희 집에서 구독하는 신문이 몇주전 1993년도 세로쓰기 신문을 1면 겉표지로 해서 배달 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영문을 모르고 그 신문을 그날의 신문기사로 읽었습니다. 갑자기 십여년전의 정치인물들의 이름이 등장을 하고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사건들이 오늘 아침의 뉴스가 되어 배달이 되니 당황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곧 알게 된 사실은, 이 신문사가 신문 사이즈를 작게 조정하면서 십여년 전의 신문을 그대로 인쇄해서, 이제 곧 바뀌게 되는 신문과 얼마나 차이가 있게 변화가 되는지 알려 주려는 의도로 그렇게 한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로 깨닫게 된 진리가 있습니다. 1993년 어느날 아침 그 신문을 받아본 사람들은 거기에 난 정치기사, 경제기사가 참으로 심각한 사건들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2009년에 그 신문 기사를 다시 접하는 저의 입장에서는 그것은 지난 과거의 하나의 역사였을 뿐이고, 이미 다 지나간 일들일 뿐, 지금은 심각한 일도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고난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닥쳐온 현실이 참으로 심각하다. 홍해바다를 건넌 다음에는 홍해바닷가에서 전전긍긍했던 마음은 다 잊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막상 그 바닷가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므리바의 반석에서 물이 터진 다음에는 ‘우리가 왜 그리도 목말라 죽겠다고 아우성을 쳤을까’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반석에서 물이 터져나오기 이전에는 목마름의 문제보다 다급한 일이 또 없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현실의 고난이 곧 여호와 하나님의 기적으로 인하여 아무것도 아닌 일로 바뀐다는 사실을 부여잡고, 그 다음에 다가오는 고난앞에 의연할 수 있었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지금 2009년도의 신문이 2020년쯤 (겨우 11년후) 어떤 사람의 눈에 띄어서 그것을 들여다 본다면, 과연 그는 2009년에 ‘힘들다, 장사안된다,
직장이 어렵다’하고 살아갔던 우리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게 될 것인가. 물론 야구 경기 결승전날 아침에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는 게임’을 앞에 두고 두 갈래의 결과를 가정할 순 있었지만, 결과가 어떻게 되었든, 결국 우리는 그 결과에 승복을 하고 그것을 밑걸음 삼아 더욱 발전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 처럼, 2020년에 우리가 어떻게 되어있든지간에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살게 하시고, 현실을 감당하게 하실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사도 베드로는 벧전2장 18절에서 말씀합니다. 고난에는 세가지의 성격이 있습니다. 첫째는 애매히 당하는 고난입니다. 내가 잘못한 결과로 찾아오는 고난이 아니라, 그냥 영문도 모르는채 앉아서 당하는 고난입니다. 둘째는 자기의 죄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입니다. 그 고난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셋째는 의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입니다.
이것은 자원하여 자발적으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이러한 고난의 원인이 어디에 있든지, 결국 내가 이 고난을 어떻게 견디느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고난을 내가 어떻게 해석하느냐, 이 고난을 통하여 내가 어떤 존재로 드러나는가. 내가 어떻게 이 고난을 감수하는가에 따라서 성숙한 인격이 되기도 하고, 전혀 그렇지 못한 경우도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고난에 보이는 반응은 다섯가지로 나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 자체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회피하고자 하는 자세’를 보입니다.
그것이 내 죄때문이던지, 다른 사람이나 상황때문이던지 어쨌든 고난은 면하고자 애를 씁니다. 또 다른 유형은 고난을 만나면, ‘누구 때문이라고’ 원망하는 반응부터 보이는 사람입니다. 정치를 잘못했기 때문이고, 세계경제가 엉망이 되었기 때문이고, 부모때문이고, 아내때문이고, 남편의 무능함 때문이고, 자식이 속을 썩이는 때문이고, 조상때문이고, 여호와 하나님때문이라고 까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책임전가, 원망,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고난을 당하는 모든 원인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유형입니다.
‘다 내 잘못입니다. 내 책임이다’하고 자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넷째는 고난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해석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고난에 적극적으로 대처합니다. 고난을 겪으면서도 이것을 인격성숙의 기회라고 여깁니다. 이것을 인하여 더욱 강하여지고, 좋은 경험을 했고, 여호와 하나님앞에 겸손하게 되었다고 스스로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다섯째, 신앙의 사람은 고난을 ‘여호와 하나님의 뜻으로 수용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으로만 가르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통해서도 나에게 교훈하고 계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모난 데가 많은 나 같은 사람을 여호와 하나님이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당신이 원하는 작품을 이루시기 위하여 강권적으로 역사하시는 과정가운데 이러한 고난이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이 고난에 대한 예수님의 자세속에서 우리는 고난의 신비를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우리 예수님은 고난을 모르고 당하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의미를 알고 당하신 분입니다. 그 분은 당신이 당하실 고난을 미리 예고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29)하고 대답을 한 순간, 예수님은 저들에게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셨다”(31)고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구세주’로서 이 세상에 오신 당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이제 가야 할 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 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길에 자발적으로 한걸음 한걸음 발을 옮기셨습니다. 여러분, 사실 예수님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마시고 갈릴리에 계셨더면, 그 고난을 피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살렘 성전에 가셔서 그곳의 더럽혀짐을 두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도록 그렇게 진노하시는 행동을 하시지만 않았어도 십자가는 피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내심 예수님을 풀어주고 싶어했던 사람입니다. 뭐라고 한마디만 하시면 될 일이었습니다.
‘난 죄없다. 난 억울하다’한마디만 하셔도 빌라도는 로마권력을 등에 엎고 예수님을 놓아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그 고난에 스스로 발을 들여노으려 하신 것일까. 여기 고난의 신비가 숨어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대속의 고난이요, 속죄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신 그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예수님은 자원하여 그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에 들어서고 계시는 것입니다. 대속이란, ‘죄인이 살기 위해서 의인이 대신 고난을 당하는 일’입니다.
“의인이 죄인처럼 죽지 않고는 죄인이 의인처럼 살 수가 없다” 이것이 고난의 신비의 열쇠입니다. 죄 많은 어떤 사람을 살리려면, 죄 없는 내가 그 누명을 고스란히 뒤집어써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고난의 길을 스스로 가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분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모시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요3;16)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희생의 댓가를 기꺼이 지불하시는데 고난의 신비가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비밀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 속에 숨겨진 ‘나의 값어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나 자신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죄인임에 틀림이 없는데, 여호와 하나님은 이러한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 고난을 통해서 사랑의 크기를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고난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는가.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는가. 나는 왜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나는 현실속에서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가. 하였을때, 정말 중요한 것은 그 고난의 원인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이 이 고난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자신이 마땅히 가야만 길’이라고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하여 영혼들이 살아날 것을 바라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을 만났을때, 습관적으로 원망하고 남의 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고난이 지나고 나면, 그속에 숨겨진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그러다가 또 다른 고난이 닥쳐오면 여지없이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곤 했습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고난이 문제가 아니고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문제일 뿐입니다. 고난의 깊은곳에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이 들어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현실의 사건들 속에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신명기 8장3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왜 광야의 고난의 세월을 겪어야 했는지에 대한 이유가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하심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의중을 알고 계시는가. 여호와 하나님의 의중은 살게하시는데 있습니다. 가나안땅에 들이시는데 있습니다. 단지, 그 고난의 과정을 통과하도록 하시면서, 우리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이겨내는 사람이 되게 하시는게 목적이 있을 뿐입니다. 고난의 신비, 십자가의 신비 속에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한 미국의 젊은이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가 당한 고난의 의미를 묵상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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