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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무엇을 원하셨나?

본문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2)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3)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14)
마가복음 11장 12~14절
할렐루야!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여호와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여호와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종려주일
오늘은 무거움이 느껴지는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타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개선장군에게나 흔들던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호산나”외쳤던 것을 기억하며 …
고난주간을 맞을 준비를 하고 경건하게 지내는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고난주간에 대부분의 교회에서 금식하고, 새벽기도를 하고
성찬식을 하는 등 여러 가지 특별행사를 합니다.
강단에 장식되어 있는 꽃만 봐도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고난주간을 의미하는 가시와 빨강색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이번 고난주간에 경건함을 드러내고
엄숙하게 지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열매 맺는 삶을 사는가
우리는 도처에서 기독교 비판 혹은 교회 비판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비판들은 대부분 횡단면만 보고 하는 비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교인 한 개인의 생활을 보고
교회 전체에 환멸을 느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혹은 자기 자신의 신앙형태와 맞지 않을 때
그 단체 전체에 대하여 실망했다고 말합니다.
어느 역사든지 횡단면만 들여다보면
비관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자라도 오점(汚點)이 있고
성도가 모였다는 교회도 실수가 많고 잘못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역사를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로 볼 때
빛을 찾고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를 보세요.
거기에는 간음이 있었고, 싸움이 있었고,
당파가 있었고, 많은 죄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 …”이라고 했습니다.
그토록 오점이 많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성도”라고 한 것은
바울의 역사를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큰 강과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도도히 흘러갑니다.
다소 물이 흐릴 때도 있고, 바위를 부딪치면서 소리가 커질 때도 있고,
또 협곡을 지나면서 물살이 빠를 수도 있고,
넓고 깊은 곳을 흐를 때는 천천히 소리 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렁차게 힘 있게 흘러가는 것이 큰 강입니다.
그러므로 강 전체를 보고 말해야지
어느 한 부분을 보고 강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사는 인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 받은 크리스챤을 보실 때
전체도 보시지만 한 개개인의 삶도 보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각자가
‘어떻게 사는가 어떤 빛을 내는가 열매 맺는 삶을 사는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내쫓으시고 … 둘러엎으시고
본문 말씀은 고난주간 첫날인‘월요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베다니는 감람산 동쪽에 있는 작은 마을로
우리 성경에는 예루살렘에서 5리 정도
떨어져 있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요11:18)
영어성경에는 2miles, 즉
3. 2km 정도 떨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베다니는 하류층 사람들이 살고 있던, 변두리였습니다.
베다니라는 이름도 ‘가난한 자의 집’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곳에 살았던 나병(한센병) 환자 시몬이나
나사로의 가족은 모두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2005.
3. 2
1. 국민일보 29면. 참조)
예수님은 그 가난한 마을에서
식사를 하시지 못하셨던 것 같습니다(막11:12).
같은 내용을 기록한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그때가 “이른 아침”이라고 했습니다(마21:18).
이른 아침에 베다니에서 나오시면서
아무것도 드시지 못하시고 배가 고프셨던 모양입니다.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가까이 가보았지만
그곳에서 열매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막11:14).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마자
무화과나무는 말랐다고 했고(마21:19),
제자들은 이상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마21:20)
오늘 말씀은, 해석하는 사람들에 따라서
다른 해석을 하여 때로는 당황스럽게 합니다.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이유는 때가 아닌데
예수님께서 그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구하시고
그로 인해서 그 나무를 저주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버트란트 러셀 같은 철학자도 그가 지은 책
“Why I am not a Christian 나는 왜 크리스챤이 아닌가”에서
예수를 믿지 않은 이유 가운데 하나를 제시할 때
이 말씀을 그 예로 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간단하게도 이스라엘의 자연 조건에 대한 무지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무화과나무 철이 아니라도 항상 약간의 열매는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전혀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는
이미 생명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이러한 자연적 배경의 무지 때문에
엉뚱한 성서해석이나 결론이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때인 유월절의 절기는
요즘의 계절로 봄(3월~4월)입니다.
무화과가 먹을 만 하게 열리는 계절(6월)이 아니었습니다.
-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을까요
- 단지 시장하셔 그랬을까요
- 예수님이 무화과 열매가 풍성하게 열리는 때를 몰라서 그랬을까요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사건 이전에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 가셔서 하신 일이
‘성전정화’(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일) 였습니다.
마태복음 21장 12절에 보면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마 21:12)
성전 안에 있는 제사장이나 사람들이
진정으로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욕망과 이익을 위해 성전을 이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마21:13)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일과
무화과를 저주하신 사건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예배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 뿐 아니라,
예배드리는 자로서의 열매가 없는 것을 책망한 것입니다.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의 믿음의 열매를 찾으시는 때가 언제 일지…
그 때를 모른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때쯤 오시겠지, 이때쯤 열매를 구하겠지’하는
그 때가 아니라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는 때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열매를 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에게 믿음의 열매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오셔서 열매를 찾으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열심히 신앙생활 하여
믿음의 열매, 사랑의 열매, 소망의 열매, 전도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생활 속에서 빛 되고 소금된 삶을 살아
다른 사람이 나를/우리를 보고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살아있는 나무에 물을 주면 자라고 잎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죽은 나무에 물을 주면 썩어 냄새나고 추함을 보입니다.
생명 있는 나무와 죽은 나무의 차이가 큰 것처럼
생명력 있는 성도, 살아있는 성도, 일하는 성도,
열매 맺는 성도와 생명력이 없는 성도, 죽은 것 같은 성도,
열매 없는 성도와의 차이는 엄청나게 큰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열매 맺지 못한 나무, 열매를 갖지 못한 나무,
잎만 무성한 나무의 종말과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먼저 우리가 살펴볼 것은, 사람은 무화과처럼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자유(自由)를 귀하게 여깁니다.
전도서 11장 9절에 보면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 ”(전11:9)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모든 일로 인하여
심판하실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전11:9)
이것은 마치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구함처럼
우리들에게서 열매를 찾을 때가 있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사람이 한번 죽는다는 것은 다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 뒤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는 계산의 때가 있음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계22:12, 시 62:12, 렘 17:10, 마 16:27, 고후 5:10, 벧전1:17)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판단 받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길다 여기든지 짧다 여기든지 사람의 한평생이
단지 무덤으로 혹은 화장하여 거둔 한줌의 재로 끝나겠습니까
그걸로 끝이 아닙니다.
사람들 중에 살면 좋은 것이고, 죽으면 끝이라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죽으면 끝입니까
어떤 청년이 시장에 가서 전도하면서 한 할머니에게
“할머니, 세상살이가 짧죠. 그런데 이 세상보다 더 멋있는 천국이 있어요.
예수 믿고 구원 받으셔서 영원히 사는 천국의 주인공이 되세요.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할머니가
“죽어서 무슨 세상이 또 있어 죽으면 끝이야. 그런 소리 마”하시자
청년이 “할머니, 그럼 지옥으로 안녕히 가세요. ”라고 했습니다.
그 할머니가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그 청년 혼쭐이 났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으로 끝이다’라고 단정 지어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 속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전도서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3:11)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 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불쌍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예배의 자리에 오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항상 준비하고(살전 5:1~9) 주의 뜻대로 행해야 합니다. (마 7:21~27)
복을 주시며 … 다스리라
정상적인 사람은 가족과 이웃 그리고 사회에 대해,
조물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 여러분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일’이라는 것을 에덴동산에서 처음 인간이 타락한 벌로
인간에게 부여된 고통이라고 단정지어서는 안됩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도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에게 ‘일하며 살라’고 명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기 전에 모든 것을 만드시고
“ …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하시고
창세기 1장 28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창 1:28) 했습니다.
다시 말해 타락하기 전에 인간에게 부여된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이었습니다.
그러나 타락 후의 일은 사람에게 고통이 되었습니다. 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벌어먹고 사는 것도 …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도 …
힘들고 어려운 벌이었던 이런 일들을
예수 믿음으로 구원 받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은 기쁨으로 변해야 합니다.
일이 기쁨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찬양대원으로 봉사하는 것’
하기 싫은데 어떻게 잘못 걸려들어서 억지로 하고 있다거나,
안하자니 찬양대 대장에게 혼날 것 같아
벌 받고 있다는 느낌으로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복임을 알아 감사하며 해야 합니다.
‘소리를 낼 수 있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라고 복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제가 교회에서 일하는 부목사, 전도사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 기쁨과 감사로 일하는가
- 성도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찾아가 기도해야 하고,
- 성도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 밤이든 낮이든 심방해야 하는 일이
기쁨과 감사가 아니고 벌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일 맡겨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며 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설교하는 목사가 ‘어떻게 주일은 이렇게 빨리 돌아오나
가수들이 신곡을 발표하면 석 달정도는 그 곡 하나를 부르던데
목사는 매주 신곡 발표를 해야 한다니 …
미치겠다. 미치겠어'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벌입니다.
그러나 주일이 기다려지고 기쁨과 감사로 말씀을 전한다면
그것은 감사요 기쁨이요 복입니다.
교회학교 교사, 속회인도자, 지역장 … 등 무슨 일을 하든지
여러분이 기쁨으로 감사로 한다면 복이지만 벌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벌입니다.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이 복이고 감사한 일이 되어야지
자식 기르는 것이 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자식이 웬수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하고 사는 것에 대해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 …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은
놀고먹으며 살려는 생각은 부끄러움인 줄 알아야 됩니다.
놀고먹으려는 생각은 일하지 않음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땀 흘림으로 얻은 것을 빼앗아 먹는 삶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일하고 살아야 하는 사명자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일을 해야 하며 가족과 이웃과 사회에 대한 일을 해야 하고
일하고 살 수 있다는 것이 감사가 되어야 합니다.
일하고 사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거둘 것이 있어야 합니다.
많이 배웠으면 배운 것으로 다른 사람에게 나눠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열매, 가족과 이웃과 사회에 대한 열매,
여호와 하나님 앞에 맺어야 하는 열매가 있습니다.
열매 없는 삶은 저주 받은 무화과처럼 되고 맙니다.
꽃 성도와 열매 성도
무화과(無: 없을 무, 花: 꽃 화, 果: 실과 과)는
사실 꽃이 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꽃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보기 좋게 화려한 꽃이 아니라 열매입니다.
그런데 … 교회에는 ‘꽃 성도’가 있고, ‘열매 성도’가 있습니다.
꽃 성도는 드러나는 일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입니다.
이름이 나야하고, 무대에 서야하고, 자기가 나서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꽃을 보고 감탄하듯이
자신의 드러남으로 사람들이 지르는 탄성과 칭찬을 듣기 좋아하는 사람은
‘꽃 성도, 꽃 집사, 꽃 권사, 꽃 장로, 꽃 목사’입니다.
그들은 누가 알아주지 않으면 하지 않으려 합니다.
반면에 열매성도는
이름이 나든 나지 않든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들려고 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아 찬사는 받지 못해도
목회자의 가슴을 뛰게 하고 설레게 하고 감동을 주는 사람입니다.
없는 듯 드러나지 않지만 귀한 결실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 열매 성도입니다.
여러분은 꽃 성도가 되기 원하십니까
열매 성도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께서 고난 주간 첫 번째 날 행하셨던 이 일을 통해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고난주간을 의미 있게 보내야 합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고난주간이 되면 여러 가지 행사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이번 고난주간을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여러 가지를 준비했습니다.
내일 새벽부터 5시 30분에 비전센타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무슨 찬송을 부를 것인지, 본문 말씀은 어디인지,
무슨 설교를 할 것인지 … 등을 모아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도저히 새벽에 교회에 올 수 없는 먼 곳에 사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도 예배 후 책을 가지고 가셔서 가정에서 예배드리시기 바랍니다.
인터넷으로 중계 할 것입니다.
교회에 오기 어려운 이들 중에
인터넷 연결이 가능한 분들은 새벽예배 중계를 보세요.
내일 새벽부터 매일 매일 주제성구가 들어있는 십자가를
한 개씩 나눠 드릴 것입니다.
제가 1월에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기독교서점에 갔다가 십자가 카드를 보는 순간
이번 고난주간에 적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다시 요일별로 주제와 성구를 담아 디자인하였습니다.
월요일부터 매일 나오는 분들은 7개의 십자가를 받게 될 것이고
3일 나오는 분들은 3개만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주간에 ‘릴레이기도’를 할 것입니다.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비전센타에서 있습니다.
매일 밤 9시부터 10시까지는 ‘촛불기도회’로 모입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새벽은 비전센타에서 모이고
부활주일 새벽은 본당에서 모입니다.
부활의 기쁨과 감사로 부활절 아침에 부활절 감사헌금을 할 것입니다.
이렇게 고난주간을 의미있게 보내려고 합니다.
이 고난주간을 의미있게/경건하게 보내며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면서
무화과나무 열매를 구하셨던 사건’을 통해
저나 여러분이나 삶의 열매가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악하고 게으른 종”이란 책망을 들으시겠습니까
우리를 자유케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에 감동하면서도
그 자유에 따른 의무, 그리고 그 후의 심판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개인의 의무, 가정에서의 의무, 이웃에 대한 의무, 사회에 대한 의무,
교회에 대한 의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의무 … 많은 의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벌로 여기지 말고 복으로 여기고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 열매를 거두는
복된 삶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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