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종교 개혁의 복음
본문
오늘은 전세계 교회가 종교 개혁 기념 주일로 지키고 있는 참으로 뜻깊은 날입니다. 우리가 종교 개혁이라고 할 때 '개혁'이라는 말의 뜻을 우선 알아야 될 줄 압니다. 영어로는 개혁을 'reformation'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개혁은 혁명(revolution)과는 다릅니다. 혁명은 과거를 완전히 부정해 버리고 뒤집어 엎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혁은 다릅니다.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변질된 것을 없애고 다시금 본래의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개혁의 본질입니다. 초대 교회의 순수했던 신앙으로 우리가 다시금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종교 개혁주의자들이 부르짖었던 취지였습니다.
1517년 10월 31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당시에 자기가 가르치고 있던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 교회 정문 게시판에 당시 로마 카톨릭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95개 항목으로 게재함으로써 종교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확산되어 전 유럽에 종교 개혁의 불길이 번져 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종교 개혁을 말할 때에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게되는 인물이 바로 마틴 루터입니다.
마틴 루터는 공부를 참 많이 한 사람이었습니다. 대학 다닐 때는 문학을 전공했습니다. 석사 학위까지 받았습니다. 나중에는 부모님의 조언에 따라 법률가가 되기 위해서 다시금 법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학교에서 그날 공부를 마치고 자기의 친구와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습니다. 심한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번개가 번쩍하더니 벼락이 떨어졌습니다. 공교롭게도 벼락은 루터와 함께 가던 친구에게 떨어졌습니다. 루터의 친구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 광경을 목격한 마틴 루터의 충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자기가 공부하고 있던 것을 다 중단하고 신부가 되기 위해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루터가 기거하던 수도원 자그마한 방에는 창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창문을 열기만 하면 공동 묘지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루터는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고 거기서 기도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경건한 신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무척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마음속에서 불같이 일어나는 정욕과 욕심, 이기심, 질투심, 불신감 이러한 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나의 죄, 나의 죄'라고 하면서 탄식을 했습니다. 세수 대야에 물을 떠놓고 손을 씻으면서 "내가 하루에도 몇 번씩 손을 씻지만 내 마음은 그래도 더러우니 이것을 어떻게 하나!" 하고 탄식을 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죄를 지었을 경우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신부를 찾아가서 고해 성사를 하곤 합니다. 루터는 마음속으로 죄를 지을 때마다 신부를 찾아가서 고해 성사를 했습니다. 나중에는 신부가 두 손을 번쩍 들고 말았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와서 고해 성사를 하니까 신부가 견디지 못해서 루터에게 이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루터야, 너무 자주 오지 말고 죄를 좀 한꺼번에 다 모아서 가지고 오너라!"
아무튼 마틴 루터는 신부가 됐습니다.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시편과 로마서, 갈라디아서를 강의하게되었습니다.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원해서 깊이 있게 성경 연구를 했습니다. 그런데 루터가 성경을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성경 속에 나와 있는 진리와 당시 로마카톨릭에서 가르치고 있는 교리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한번은 루터가 로마 교황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순례객들은 로마에 가면 빌라도 계단이라고 하는 높은 계단을 무릎을 꿇은 채로 기어올라가면서 기도하는 관행이 있었습니다. 루터도 관행에 따라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힘들게 한 계단 한 계단 기어서 올라갑니다. 그러는 가운데 루터의 마음속에 불현듯 이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이렇게 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며, 과연 이렇게 하는 것이 성경적 인 일일까'
이 때 문득 그의 머리 속에 평소에 자기가 가르치기 위해서 깊이 묵상하던 성경 구절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 로마서 1:17에 있는 이 말씀입니다.
"복음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했는데, 이와 같은나의 행위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 길로 다시 독일로 돌아왔습니다. 루터는 자기가 깨달은 이 진리, 자기가 확신한 이 진리,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믿음으로 되는 것이지 율법의 행위로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힘주어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당시로마 카톨릭은 부패할 대로 부패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직을 매매하고 교황 무오설을 주장하며 구약 제사장과 같은 중보권을 독점하는 사제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한편 레오 10세 때에 로마에서는 지금 로마의 바티칸 시국에 있는 베드로 성당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 성당은 참으로 그 규모가 어마어마합니다. 재정이 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레오 10세는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면죄부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 면죄부 판매를 담당한 사람은 테첼(J. Tetzel)이란 수사였습니다. 그는 누구든지 속죄표를 사기만 하면 어떠한 죄를 지었더라도 다 용서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연옥에 가 있는 영혼을 위해서 속죄표를 사게 될 경우에 그 돈이 연보 궤에 딸그랑 떨어지는 순간에,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천국에 올라간다는 궤변을 늘어놓았습니다.
루터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해서 1517년 10월 31일 자기가 가르치고 있던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회 정문 게시판에 면죄부 등 카톨릭이 범하고 있는 여러 가지 부당성을 지적하는 95개조 항목을 써 붙였고 그 결과 2주만에 종교 개혁의 불길이 전 유럽에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 루터가 95개조로 내건 내용을 간단히 세 가지로 요약하면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e)', '오직 은혜(Sola Gratia)'였습니다. 즉 오직 믿음으로만 죄사함을 받고, 오직 성경만이 최고의 권위이며,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러한 종교개혁의 3대 원리에 근거해서 신앙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오늘 이 시간은 뜻깊은 종교 개혁을 기념하면서 종교 개혁의 모토(motto)가 되었던 로마서 1:16,17의 말씀을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특히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강조한 복음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종교개혁의 모토가 된 복음은 무엇입니까
1. 복음의 본질은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
그렇습니다. 구원은 오직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루터가 외친 '솔라 피데(Sola Fide,오직 믿음)'는 참으로 귀한 말입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의 본질이며 신구약 성경의 핵심입니다(합 2:4 ;롬 4:9).
참된 복음은 행위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을 요구합니다.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있으면 그 어떤 것이라도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은 돈을 많이 내어서 속죄표를 사야 구원 얻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시주나 적선을 해야 구원의 문에 들어갈 수 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물론 선행을 전혀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구원받는 조건은 오직 믿음뿐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그 은혜를 깨닫게 될 때 몸을 바쳐 헌신도 할 수 있고, 헌금도 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이로서 헌신, 헌금, 봉사, 구제하는 것과 구원받기 위해서 선택을 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틴 루터는 구원을 위하여 그 웅장하고 장엄한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며 계단마다 입을 맞추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이 행동이 과연 성경적인가 하는 회의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깨닫게된 것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이 된다는 말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믿음 외에 다른 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수억의 재산을 가지고 있어도 안됩니다. 해박한 지식으로도 불가능합니다. 높은 벼슬이나 지위로써 얻을 수 없습니다. 고행으로도 안됩니다. 만일 재산, 지식, 지위, 고행으로 구원을 받게된다고 할 것이면 그것은 이미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오직 믿음을 요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믿음이란 표를 내밀면 언제 어디서든지 구원이란 선물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복음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 17절에 보면 복음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의'란 바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땅에는 사람이 바르게 되는 의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행동으로 바르게 되는 것을 행동의 의라고 합니다. 양심적으로 바르게 사는 것을 양심의 의라고 합니다. 율법의 말씀 위에서 옳게 사는 것을 율법의 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리켜 '사람의 의'라고 합니다.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심으로 율법으로 바르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는 없었습니다.
행동의 의를 말하지만 행동으로 의롭게된 사람은 없습니다. 또 양심의 의를 말하지만 사람도 양심이 바른 사람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행하고 양심적으로 살아서 의롭다 인정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고 절망적인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3:21에 보면 율법 외에 '여호와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하였습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없으나 예수님은 모든 율법을 지키어 여호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3:22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의로워질 수 있는 것은 예수를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는 모두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근본적으로 죄인입니다. 예수님만 의인입니다. 예수님은 양심으로나 그의 행동으로나 법으로나 완전한 의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면서 완전한 의인이었습니다. 그 의인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값을 다 치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나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과 바르게 되는 칭의 입니다. 믿음으로만 의롭다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의를 믿고 그 의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습니다. 우리는 죄인으로 교회에 옵니다. 그러나 천국에 갈 때는 의인으로 갑니다. 의는 내 의가 아니고 예수의 의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구원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말합니다.
"복음의 한 의가 나타나는데‥‥‥ 여기서 말하는 복음의 한 의는 예수의 의요, 여호와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 의로만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능동적인 것이 아니고 피동적인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능동적인 의를 가지라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능동적인 의가 나타나면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고 그리스도를 통한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는 복음을 믿기만 하면 의로워집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진리를 깨달은 마틴 루터는 유대교를 믿는 어떤 친구에게 "자네가 믿는 종교는 두 글자 종교요 내가 믿는 종교는 네 글자 '종교일세"라고 말했더니 "자네 그게 무슨 뜻인가"하고 친구가 반문했습니다.
영어로 Do는 자기 노력으로 행한다는 뜻이 있고 Done은 남의 노력으로 되어지는 수동형(to be done)의 뜻입니다. 이것으로 루터는 자력 종교와 타력 종교를 설명해 주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의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이 복음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있습니다.
3.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16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십자가의 도'란 바로 복음입니다. 당시 로마인들은 권력을 자랑하고 헬라인들은 문화를 자랑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미련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당시 극악한 죄수가 짊어지는 사형틀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인이나 헬라인이 볼 때 예수는 극악한 죄를 지고 수치스런 죽음을 죽은 자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한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다는 것이 어찌 미련해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복음은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무엇으로도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복음은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었습니다. 이 다이너마이트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다이너마이트는 바위를 깨뜨리거나 산을 뚫어 터널을 만들 때도 사용합니다. 또 살상용으로 사용하면 엄청난 사람을 순식간에 죽음으로 몰아갈 수도 있습니다. 복음에 이처럼 큰 능력이 있습니다. 능력은 헬라어로 '뒤나미스'라고 하는데 다이너마이트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작용하면 죄의 옛 사람이 파괴되고 새 사람이 건설되는 능력이 복음에는 있습니다. 바로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복음의 다이너마이트에 옛 율법의 사람 사울은 파괴되고 새 복음의 사람 바울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복음의 다이너마이트가 불량자요, 싸움꾼으로 소문난 김익두란 청년의 마음속에 작용하였더니 옛 악한 김익두는 파괴되어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새 사람 김익두가 다시 태어나서 유명한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 복음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비하고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 있습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소유하기만 하면 이 능력을 받게 됩니다. 복음에 나타난 능력은 영원에서 영원에 미치는 능력으로 인류의 구원을 위한 획기적인 능력입니다. 우리는 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하여 능력 있는 삶, 힘있는 삶을 삽시다. 담대히 복음을 전합시다. 그리하여 죄로 부패한 이 세상을 개혁하고 변화시켜 나갑시다. 자신은 물론 교회와 사회에 변화와 개혁을 일으킵시다.
히브리서 기자는 11:6에서 믿음이 없이는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믿음이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믿음이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게 합니다.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루터는 이 진리를 깨달았기에 거대한 공룡과 같은 로마 카톨릭을 상대로 종교 개혁의 횃불을 높이 들었습니다. '솔라 피데(Sola Fide)!'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르는 이 진리를 소중히 여기고 우리의 믿음을 말씀의 반석 위에 굳건히 세워나가야 하겠습니다.
1517년 10월 31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당시에 자기가 가르치고 있던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 교회 정문 게시판에 당시 로마 카톨릭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95개 항목으로 게재함으로써 종교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확산되어 전 유럽에 종교 개혁의 불길이 번져 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종교 개혁을 말할 때에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게되는 인물이 바로 마틴 루터입니다.
마틴 루터는 공부를 참 많이 한 사람이었습니다. 대학 다닐 때는 문학을 전공했습니다. 석사 학위까지 받았습니다. 나중에는 부모님의 조언에 따라 법률가가 되기 위해서 다시금 법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학교에서 그날 공부를 마치고 자기의 친구와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습니다. 심한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번개가 번쩍하더니 벼락이 떨어졌습니다. 공교롭게도 벼락은 루터와 함께 가던 친구에게 떨어졌습니다. 루터의 친구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 광경을 목격한 마틴 루터의 충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자기가 공부하고 있던 것을 다 중단하고 신부가 되기 위해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루터가 기거하던 수도원 자그마한 방에는 창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창문을 열기만 하면 공동 묘지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루터는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고 거기서 기도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경건한 신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무척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마음속에서 불같이 일어나는 정욕과 욕심, 이기심, 질투심, 불신감 이러한 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나의 죄, 나의 죄'라고 하면서 탄식을 했습니다. 세수 대야에 물을 떠놓고 손을 씻으면서 "내가 하루에도 몇 번씩 손을 씻지만 내 마음은 그래도 더러우니 이것을 어떻게 하나!" 하고 탄식을 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죄를 지었을 경우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신부를 찾아가서 고해 성사를 하곤 합니다. 루터는 마음속으로 죄를 지을 때마다 신부를 찾아가서 고해 성사를 했습니다. 나중에는 신부가 두 손을 번쩍 들고 말았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와서 고해 성사를 하니까 신부가 견디지 못해서 루터에게 이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루터야, 너무 자주 오지 말고 죄를 좀 한꺼번에 다 모아서 가지고 오너라!"
아무튼 마틴 루터는 신부가 됐습니다.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시편과 로마서, 갈라디아서를 강의하게되었습니다.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원해서 깊이 있게 성경 연구를 했습니다. 그런데 루터가 성경을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성경 속에 나와 있는 진리와 당시 로마카톨릭에서 가르치고 있는 교리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한번은 루터가 로마 교황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순례객들은 로마에 가면 빌라도 계단이라고 하는 높은 계단을 무릎을 꿇은 채로 기어올라가면서 기도하는 관행이 있었습니다. 루터도 관행에 따라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힘들게 한 계단 한 계단 기어서 올라갑니다. 그러는 가운데 루터의 마음속에 불현듯 이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이렇게 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며, 과연 이렇게 하는 것이 성경적 인 일일까'
이 때 문득 그의 머리 속에 평소에 자기가 가르치기 위해서 깊이 묵상하던 성경 구절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 로마서 1:17에 있는 이 말씀입니다.
"복음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했는데, 이와 같은나의 행위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 길로 다시 독일로 돌아왔습니다. 루터는 자기가 깨달은 이 진리, 자기가 확신한 이 진리,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믿음으로 되는 것이지 율법의 행위로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힘주어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당시로마 카톨릭은 부패할 대로 부패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직을 매매하고 교황 무오설을 주장하며 구약 제사장과 같은 중보권을 독점하는 사제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한편 레오 10세 때에 로마에서는 지금 로마의 바티칸 시국에 있는 베드로 성당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 성당은 참으로 그 규모가 어마어마합니다. 재정이 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레오 10세는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면죄부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 면죄부 판매를 담당한 사람은 테첼(J. Tetzel)이란 수사였습니다. 그는 누구든지 속죄표를 사기만 하면 어떠한 죄를 지었더라도 다 용서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연옥에 가 있는 영혼을 위해서 속죄표를 사게 될 경우에 그 돈이 연보 궤에 딸그랑 떨어지는 순간에,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천국에 올라간다는 궤변을 늘어놓았습니다.
루터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해서 1517년 10월 31일 자기가 가르치고 있던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회 정문 게시판에 면죄부 등 카톨릭이 범하고 있는 여러 가지 부당성을 지적하는 95개조 항목을 써 붙였고 그 결과 2주만에 종교 개혁의 불길이 전 유럽에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 루터가 95개조로 내건 내용을 간단히 세 가지로 요약하면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e)', '오직 은혜(Sola Gratia)'였습니다. 즉 오직 믿음으로만 죄사함을 받고, 오직 성경만이 최고의 권위이며,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러한 종교개혁의 3대 원리에 근거해서 신앙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오늘 이 시간은 뜻깊은 종교 개혁을 기념하면서 종교 개혁의 모토(motto)가 되었던 로마서 1:16,17의 말씀을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특히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강조한 복음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종교개혁의 모토가 된 복음은 무엇입니까
1. 복음의 본질은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
그렇습니다. 구원은 오직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루터가 외친 '솔라 피데(Sola Fide,오직 믿음)'는 참으로 귀한 말입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의 본질이며 신구약 성경의 핵심입니다(합 2:4 ;롬 4:9).
참된 복음은 행위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을 요구합니다.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있으면 그 어떤 것이라도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은 돈을 많이 내어서 속죄표를 사야 구원 얻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시주나 적선을 해야 구원의 문에 들어갈 수 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물론 선행을 전혀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구원받는 조건은 오직 믿음뿐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그 은혜를 깨닫게 될 때 몸을 바쳐 헌신도 할 수 있고, 헌금도 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이로서 헌신, 헌금, 봉사, 구제하는 것과 구원받기 위해서 선택을 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틴 루터는 구원을 위하여 그 웅장하고 장엄한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며 계단마다 입을 맞추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이 행동이 과연 성경적인가 하는 회의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깨닫게된 것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이 된다는 말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믿음 외에 다른 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수억의 재산을 가지고 있어도 안됩니다. 해박한 지식으로도 불가능합니다. 높은 벼슬이나 지위로써 얻을 수 없습니다. 고행으로도 안됩니다. 만일 재산, 지식, 지위, 고행으로 구원을 받게된다고 할 것이면 그것은 이미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오직 믿음을 요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믿음이란 표를 내밀면 언제 어디서든지 구원이란 선물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복음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 17절에 보면 복음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의'란 바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땅에는 사람이 바르게 되는 의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행동으로 바르게 되는 것을 행동의 의라고 합니다. 양심적으로 바르게 사는 것을 양심의 의라고 합니다. 율법의 말씀 위에서 옳게 사는 것을 율법의 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리켜 '사람의 의'라고 합니다.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심으로 율법으로 바르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는 없었습니다.
행동의 의를 말하지만 행동으로 의롭게된 사람은 없습니다. 또 양심의 의를 말하지만 사람도 양심이 바른 사람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행하고 양심적으로 살아서 의롭다 인정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고 절망적인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3:21에 보면 율법 외에 '여호와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하였습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없으나 예수님은 모든 율법을 지키어 여호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3:22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의로워질 수 있는 것은 예수를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는 모두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근본적으로 죄인입니다. 예수님만 의인입니다. 예수님은 양심으로나 그의 행동으로나 법으로나 완전한 의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면서 완전한 의인이었습니다. 그 의인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값을 다 치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나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과 바르게 되는 칭의 입니다. 믿음으로만 의롭다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의를 믿고 그 의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습니다. 우리는 죄인으로 교회에 옵니다. 그러나 천국에 갈 때는 의인으로 갑니다. 의는 내 의가 아니고 예수의 의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구원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말합니다.
"복음의 한 의가 나타나는데‥‥‥ 여기서 말하는 복음의 한 의는 예수의 의요, 여호와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 의로만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능동적인 것이 아니고 피동적인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능동적인 의를 가지라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능동적인 의가 나타나면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고 그리스도를 통한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는 복음을 믿기만 하면 의로워집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진리를 깨달은 마틴 루터는 유대교를 믿는 어떤 친구에게 "자네가 믿는 종교는 두 글자 종교요 내가 믿는 종교는 네 글자 '종교일세"라고 말했더니 "자네 그게 무슨 뜻인가"하고 친구가 반문했습니다.
영어로 Do는 자기 노력으로 행한다는 뜻이 있고 Done은 남의 노력으로 되어지는 수동형(to be done)의 뜻입니다. 이것으로 루터는 자력 종교와 타력 종교를 설명해 주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의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이 복음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있습니다.
3.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16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십자가의 도'란 바로 복음입니다. 당시 로마인들은 권력을 자랑하고 헬라인들은 문화를 자랑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미련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당시 극악한 죄수가 짊어지는 사형틀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인이나 헬라인이 볼 때 예수는 극악한 죄를 지고 수치스런 죽음을 죽은 자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한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다는 것이 어찌 미련해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복음은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무엇으로도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복음은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었습니다. 이 다이너마이트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다이너마이트는 바위를 깨뜨리거나 산을 뚫어 터널을 만들 때도 사용합니다. 또 살상용으로 사용하면 엄청난 사람을 순식간에 죽음으로 몰아갈 수도 있습니다. 복음에 이처럼 큰 능력이 있습니다. 능력은 헬라어로 '뒤나미스'라고 하는데 다이너마이트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작용하면 죄의 옛 사람이 파괴되고 새 사람이 건설되는 능력이 복음에는 있습니다. 바로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복음의 다이너마이트에 옛 율법의 사람 사울은 파괴되고 새 복음의 사람 바울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복음의 다이너마이트가 불량자요, 싸움꾼으로 소문난 김익두란 청년의 마음속에 작용하였더니 옛 악한 김익두는 파괴되어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새 사람 김익두가 다시 태어나서 유명한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 복음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비하고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 있습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소유하기만 하면 이 능력을 받게 됩니다. 복음에 나타난 능력은 영원에서 영원에 미치는 능력으로 인류의 구원을 위한 획기적인 능력입니다. 우리는 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하여 능력 있는 삶, 힘있는 삶을 삽시다. 담대히 복음을 전합시다. 그리하여 죄로 부패한 이 세상을 개혁하고 변화시켜 나갑시다. 자신은 물론 교회와 사회에 변화와 개혁을 일으킵시다.
히브리서 기자는 11:6에서 믿음이 없이는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믿음이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믿음이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게 합니다.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루터는 이 진리를 깨달았기에 거대한 공룡과 같은 로마 카톨릭을 상대로 종교 개혁의 횃불을 높이 들었습니다. '솔라 피데(Sola Fide)!'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르는 이 진리를 소중히 여기고 우리의 믿음을 말씀의 반석 위에 굳건히 세워나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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