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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개혁하는 신앙(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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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라가 온통 시끌벅적하고 시끄럽습니다.
한동안 과거사 청산이라는 기치 아래 시끌벅적하더니
이어 대연정인가 뭔가 하는 것 때문에 시끌벅적 하다가
최근에는 강정구 동국대 교수 사건으로 나라가 온통 시끌벅적합니다.
특히 이 강정구 교수 사건은 어떻게 보면 한 개인의 문제를 다룬 사건이 아니라
나라의 근간을 다루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저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김수환 추기경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즘 나라가 진보와 보수, 개혁과 반개혁으로 갈라져 있어 너무 걱정스럽다.
대통령을 비롯한 집권층은 먼저 나라가 이래서는 안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경제를 위해서 국력을 모으는 일이며
현재의 분열상을 극복하기 위해 가장 먼저 나서야 할 사람들은
노무현 대통령과 정권 담당자들이다.
또 김 추기경은 강정구 동국대 교수 사건 그리고 맥아더 동상 철거 논란과 관련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학 교수라는 지성인이 어떻게
자유가 없는 김정일의 독재체제하에 있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무너지고 북한의 인민공화국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굶주리고 죽음 당하는
북한의 인권에 대해선 입 다물고 있던 정권 담당자들이
강 교수의 인권만 앞장 서 보호하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지극히 혼란스럽다.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건진 사람을 원수로 보고
현행법에 저촉되는 말을 한 사람을 검찰이 다스리려 해도
대통령과 법무장관이 나서 검찰을 견제하고
그 사람을 보호하는 까닭을 납득하기 어렵다.
왜 이렇게 나라가 시끌벅적하게 되었는가 하면
너도 나도 나라를 한번 바로 잡아 보겠다.. 개혁해보겠다는 것 때문에
이렇게 시끌벅적하게 되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렇다보니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다 한마디씩 하는 것입니다.
추기경이라고 다 현명하다고 말할 수 없고
나이 먹는다고 다 지혜롭다고 말할 수 없다.
북한주민이건 강정구건 인권이란 다 소중한 법이다.
북한 인권에 큰소리 못치니 강정구 인권은 무시해도 된다는 말인가
북한은 같은 민족이지만 우리의 실정법이 미치지 못하는 실질적인 다른 나라다.
그러나 강정구는 대한민국의 법의 보호를 받는 국민이 아닌가
그러므로 단순 비교는 궤변이며 무식의 소치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김수환 추기경은 현실을 정확히 보고 말씀하시는 분이다.
나라를 바로 끌어 가야할 노무현 대통령과 천정배 법무장관은 어찌하여
김정일의 북한체제를 찬양하는 강정구란 자를 두둔해서
그를 처벌하려는 검찰에 재갈을 물리고
검찰총장의 옷을 벗기면서까지 그를 보호해야할 사연이라도 있는가
행여 대통령께서 김정일과 회담을 하기 위한 수순인가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일은 동국대 강정구 교수가 지난 2000년 8월 통일연대 정책위원장 자격으로
8. 15 통일축전에 참가했다가 김일성 주석 생가인 만경대 방명록에...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위업 이룩하자.
이렇게 글을 썼기 때문에 결국은 구속 기소됐다가 2001년 10월 보석으로 풀려났고
그 후 이 문제는 아직도 재판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는 최근 자신의 만경대 방명록 사건에 대해 이렇게 해명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장소에 가서 방명록을 남길 경우
그 장소와 연관된 글을 남기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나는 만경대에 관한 표현만 했을 뿐 이렇게까지 파문을 일으킬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금년 3월 인터넷 신문 데일리 서프라이즈에 올린 기고문에서
한국의 주적은 미국이고 국방백서에는 미국을 주적(主敵)으로 명시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반도 전쟁의 주범이나 주적은 북한이 아니라 미국이 바로 주범이고 주적이다.
전쟁주범이면서 주적인 미국에게 한미동맹 한미공조 운운하면서 도움을 요청하는 건
도둑에게 곳간 열쇠를 맡기는 것과 같은 자살행위이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일어난 11번의 전쟁 위기 중 9번은 모두 미국이 주도했기에
전쟁주범은 북한이나 남한이 아니라 바로 미국이라는게 명백하다.
이쯤 되면 2004년 국방백서에는 주적을 지울 것이 아니라
주적으로 미국을 명시해야 하는 것 아니냐.
뿐만 아니라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맥아더 장군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맥아더는 민족 비극의 원조인 38선 분단을 집행한 집달리이다.
이제 한국은 통일시대에 접어들었는데 집달리를 찬양하는 동상이
아직까지 국제관문인 인천에 버젓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6. 25전쟁은 통일전쟁 특히 내전으로 북한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인데
맥아더는 남의 집안 싸움인 통일내전 사흘만인 27일
한국전선을 시찰하고 미국 정부에 개입을 요구하고는
곧바로 소사 등에 폭력을 감행한 전쟁광으로
미국의 제국주의적 개입이 없었다면 민족의 분단과 전쟁도 없었을 것이다.
지식인들 중에서는 이렇게 말하는 강정구 교수가 비록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가 학자인 점을 들어 학문하는 사람에겐 학문의 자유도 있는 법이기에
그가 말한 것만 가지고 그렇게 심하게 문제 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이것은 국가정체성에 대한 문제로서
아무리 학문의 자유를 논한다 해도 용납할 수 있는 선이 있고 용납 할 수 없는 선이 있는데
강교수는 그 선을 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만일 기독교에서 신학대학의 한 교수가 신학이란 학문의 자유를 빙자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없다!!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을 만들었다!!...
이렇게 말하면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학문의 자유를 용납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안될 것입니다!!
아마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는 당장 파면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강정구 교수 문제는 마치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적화통일을 막았던 맥아더장군을 민족의 원수라 부르는 것을 가만 놔두는 것이나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철거하려고 해도 수수방관하고 있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저는 웬만하면 설교 시간에 정치 얘기를 하지 않는 사람인데
이번 일은 가만 있으면 안되겠고... 또 오늘 말씀 주제와 연관이 있기에
저도 오늘은... 설교 서두에 한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제가 설교 서두에 말씀 드리는가 하면
개혁이라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며
또 자칫 잘못 하다가는
개혁(改革)이 아니라 개악(改惡)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한주만 있으면 우리는 종교개혁주일을 맞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두 주에 걸쳐서 개혁(改革)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려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원래 수도사였습니다.
말하자면 누가 봐도 중세 시대에 가장 깨끗하게 살던 사람 중의 한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언제부턴가 죄 문제 때문에 몸부림을 치기 시작합니다.
생각해 봅시다.
수도사가 살인죄를 지었겠습니까 간음죄를 지었겠습니까 아니면 도둑질을 했겠습니까
무엇보다 그는 남들에 비해서!!...
여타 일반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깨끗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는데...
그런 그가 죄 때문에 몸부림 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내면에서 부터 끓어오르는 죄책감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신부에게 고해(告解)를 하게 됩니다.
어떤 때는 하루에 20번 이상을 고해(告解)합니다.
그러니 그의 고해(告解)를 받는 신부(神父)도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고해를 받던 어떤 신부는 이렇게 짜증을 냅니다.
그런 것도 죄라고 생각하냐 앞으로 그런 것을 고해하려면 나한테 오지 말라!!
또 어떤 때는 고해를 다 받고 돌아서서 가는 신부를 붙잡고 다시 고해하다가
다음에 오라!! 죄를 한꺼번에 다 모아가지고 오라!!
이러면서 야단 맞기도 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 마틴 루터는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행한 적도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의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내리면서 회개하면
자신의 모든 죄를 사함받는다는 것이 있었는데
루터는 이 전설을 믿고는 성 베드로 성당의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내립니다.
그러다가 무릎에 피가 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문제는 나중에 다루기로 하고
제가 이 시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마틴 루터의 이 진지한 자세는
결국 당시의 부패하고 잘못된 중세 기독교를 개혁하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진지하게 돌아다보는 자세!!
바로 여기에!!... 개혁의 기초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개혁 하면 남부터 고치려 합니다. 혹은 제도부터 뜯어 고치려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진정한 개혁은 자기를 진지하게 돌아다 볼 줄 알 때!!
자기 부터 고치려 할 때!!
그제서야 그가 진정!! 개혁이라는 위대한 위업을 이룰 수 있고
또 그가 개혁의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줄거리는
개미는 더운 여름날인데도 불구하고 겨울을 대비하여 열심히 일을 하였지만
베짱이는 그 기간을 노래나 부르며 즐기면서 허송세월 하고 말았는데
얼마있지 않아 추운 겨울이 닥쳐왔을 때
개미는 그동안 열심히 미래를 준비한 관계로 어렵지 않게 겨울을 지낼 수 있었지만
베짱이는 그 많은 시간동안 미래를 정성껏 잘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저런 고생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그 줄거리입니다.
이 내용을 놓고 사람들은 말하기를 개미는 지혜로운 삶을 살았고
베짱이는 어리석은 삶을 살았다고 평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평하는 이유는
개미는 그의 두뇌가 좋았건 좋지 않았건 또 몸의 순발력이 어떠했던 간에
일단 열심히 미래를 준비했기에
결론

적으로 그 개미의 삶은 지혜로운 삶이라 말하지만
베짱이는 아무리 두뇌가 좋고 순발력이 있었다고 할찌라도
그는 미래를 성실하게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추운 겨울이 닥치자 자기도 힘들도 남도 힘들게 하여
결국 그 베짱이의 삶은 지혜로운 삶이 아니라 어리석은 삶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맥락의 이야기는 신약성경 마태복음 25장에도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처녀 10명이 신부와 함께 신랑을 기다리는 내용으로서
5명의 처녀들은 지혜로와서 미리 등에다 기름을 넣어고 잘 준비하고 있었으나
5명의 처녀들은 어리석어서 등은 가졌으나 기름을 준비하지 않고 늘 놀며 지내다가
신랑이 온다는 전갈을 받자마자 허둥지둥 대면서 기름을 준비하려 했으나 기름이 없자
지혜로운 처녀 5명에게 가서 기름을 좀 달라, 좀 나눠달라 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도 조금 전에 말씀드린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와 비슷한 점이 매우 많은
이야기입니다.
제가 왜 이 이야기를 드리는가 하면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에서 베짱이는 자기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것이고
또 어리석은 처녀 5명도 자기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것인데...
문제는 그렇게 자기 자신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 때만 있고 거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요즘도 있고 또 우리 주변에도 있을 뿐만 아니라!!
혹 내가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하여 정말 정직해야만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하여는 혹독한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는 관대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사람일수록 자기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냉철하게 돌아다 볼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부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부자를 보면 그는 거짓말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남의 것을 도둑질하며 살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살인을 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간음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주 열심히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노력으로 남들이 그렇게 바라는
큰 집 쓰고 살고 창고도 크게 짓고 사는...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가 왜 문제의 인물로 부각되었는가 하면
그는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나온 과거를 돌아다 볼 줄 아는.. 자기 반성을 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기에 문제의 인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그는 비록 열심히 살아 부는 축적하였지만
그의 가치관과 비젼이 전적으로 이 땅에만 달려 있었고 물질에만 달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가치관이 이 땅에만 달려있고 물질에만 달려 있으니
당연히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니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던 부자가 어느 날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은 안됐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어서 안됐고.. 여호와 하나님을 몰라서 안됐으며.. 영생을 얻지 못해서 안됐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주된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삶들
즉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거나 자기 자신을 돌아다 볼 줄 모르는 삶
그러면서도 남을 지도하고 남을 개혁하고자 하는 삶
그러다가 자신의 종말이 비참하게 되는 삶...
이러한 삶의 관점에서 보면
자기를 모르는 강정구 교수나 베짱이나 어리석은 다섯 처녀나 어리석은 부자나...
실은 다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며 어떤 삶이 지혜로운 삶인 것입니까
 첫째는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며
그런 사람의 삶이 지혜로운 삶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인간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이것도 모르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저 열심히만 삽니다.
주어진 생이니까 열심히 살고... 생각하기 싫으니까 열심히만 삽니다.
그러나 그래도 생각은 해야 합니다. 그리고 문제를 풀어야만 할 것입니다.
인간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고린도전서 15:35-36)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공부를 많이 하고 살고, 분주하게 무슨 일들을 많이 하고 살며
무수한 업적을 많이 쌓으며 살았다 할지라도
이것을 모르고 열심히만 산 것은 다 어리석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인생의 집이란 모래 위에다가 지은 집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고 의지하며 살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메시아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의지하며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며
그의 삶이 지혜로운 삶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알 뿐만 아니라 그것을 믿으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신 그 기쁜 소식인 복음을 알고 믿고 사는 사람이
바로 지혜로운 사람이며 그 삶이 지혜로운 삶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 개혁이며.. 개혁적 삶이며... 개혁자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우리 모든 죄인에게 있어서 무엇이 진정한 개혁입니까
제도를 고치는 것이 개혁입니까 다른 사람을 고치는 것이 개혁입니까
물론 개혁이라고 말 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이 시간 짧은 시간이나마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 나에게 있어서 진정한 개혁이냐
죄인이 복음을 듣게 되는 것!!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고 의지하게 될 뿐 아니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
그래서 결국은 자기 자신을 알게 되고 고치게 되고 회개하게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개혁이며 개혁적 삶이며
그러한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 진정한 개혁자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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