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종교개혁을 이룰 수 있는 동기와 계기
본문
모든 성경이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중요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로마서를 가리켜서 "성경 중의 성경"이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꽃"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교회 역사에서 로마서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새 생명을 얻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암울하고 타락했던 중세 로마교회로부터 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을 이룰 수 있는 그 동기와 계기도 로마서 해석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마틴 루터와 칼빈이 이신칭의의 교리를 발판으로 개혁을 이루게 된 힘이 로마서에서 나왔습니다.
이처럼 교회역사에서 로마서는 다른 성경보다도 더욱 관심의 대상이었고 직간접적으로 많은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은 로마서를 통해서 자신들의 신학적인 토대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마서를 교리의 책, 이신칭의의 교리를 조직적이고 신학적으로 가르쳐 주는 책으로 여기며 믿고 있습니다.
로마서를 바울이 기록할 때 어떤 조직적이고 완벽한 신학적인 교리를 체계화시키기 위해서 로마서를 기록한 것인가
겸손하게 로마서를 통해서 말하는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은 로마서의 전반적인 서론적인 문제들을 생각하겠습니다.
기록한 사람과, 대필자
로마서를 기록한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1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 그런데 바울이 직접 친필로 쓴 것이 아니라 더디오가 대필했습니다.
16장 22절입니다. "이 편지를 대서하는 나 더디오도 주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
바울은 자신의 신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합니다.
이 종이라는 말은 구약의 여호와의 종이라는 표현을 배경으로 하는 표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응시켜서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종임을 소개합니다.
기록 배경과 목적
기록한 배경과 목적은 바울이 서바나 즉 스페인으로 복음을 전파하러 갈 때에, 로마 교회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복음으로 로마 교회를 견고케 하려는 것입니다.
(읽음)롬1장 11-15절입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제4차 선교여행을 통해서 이방인을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에 인도하는 일에 생을 다했습니다.
이때 바울의 이런 선교사역을 지원한 교회가 시리아에 있는 안디옥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바울의 선교를 지원하므로 바울이 로마제국의 동반구를 복음으로 봉사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로마제국의 동반구는 복음을 전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로마 제국의 서반구로 가서 이방인을 추수하는 일에 사명을 다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선교전략입니다. 바로 이 선교사역을 위하여 로마 교회가 이 일에 동참하고 바울을 지원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목적 때문에 바울이 로마 교회를 방문하기를 원했던 것이며, 지금 먼저 로마서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를 기록한 목적은
로마교회와 복음안에서 교제하고 피차 안위를 얻고 나서 로마교회를 지원을 통해서 로마제국의 서쪽 끝인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로마교회에 바울이 소원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전체에서 바로 복음을 논리적인 흐름을 따라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로마서가 복음에 대해서 가장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의 주제
그러므로 로마서의 내용은 복음입니다.
이제 아들안에서 나타내신 여호와 하나님의 새로운 의의 복음이 로마서의 중심 주제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능력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가 복음인 것은 복음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의 주제는 복음인데,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입니다
1장 16-17절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교회를 다니시는 분에게 정작 복음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을 잘 못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복음은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입니다.
우리 몸으로 말한다면 심장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장이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장기인 것처럼 복음이 기독교의 진리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다니시는 분들 중에는 복음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가지고 있지 못하고 계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복음이라고 합니까
"좋은 소식”“복된 소식”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만 알고 있는다면 수박 겉 할기입니다.
수박의 맛을 알려면 그 수박을 쪼개어 먹어 보아야 합니다. 먹어 보지 않으면 그 수박이 단지, 익었는지 모릅니다.
또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과 교제를 해 보아야 합니다. 교제해 보지 않으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어느 회사에서 신입 사원을 채용하고 있었습니다. 회사 측에서는 지원자의 이력서와 학교 성적만 가지고 채용 여부를 가리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회사는 한 가지 문제를 냈습니다. 소금과 설탕을 앞에 놓고 어느 것이 소금이고 어느 것이 설탕인 것을 말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원자들은 책상 위에 놓인 것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소금도 희고 설탕도 희기 때문에 잘 알아 맞추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 지원자는 달랐습니다. 그는 앞에 놓인 것을 좀 보고 있더니 그 중 하나를 찍어 먹었습니다. 맛을 본 다음 이것이 소금이고 저것은 설탕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지원자는 말할 것도 없이 그 회사에 채용되었습니다.
무엇이 소금인지, 무엇이 설탕인지 알려면 먹어 보아야 합니다.
복음도 이와 같습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알려면 내가 직접 체험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추상적이고 표면적인 이야기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이 믿는 복음을 체험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누가 물어볼 때도, 남에게 설명해줄 때도 막히지 않고 거침없이 술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내가 체험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복음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고는 복음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먼저 머리로 알고 다음은 가슴으로 알아야 합니다.
머리로 아는 것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고 가슴으로 아는 것은 체험으로 아는 것입니다. 지식적으로 알려면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체험적으로 알려면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서 나를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어느 목사님이 신약속에 사건들을 전설로 취급하고 사람들에게 지성적인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가 빠진 합리주의적인 사상으로 가득찬 설교를 하였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날도 매우 논리적이고 지성적인 설교를 했다고 스스로 만족해 하며 강단을 내려 왔습니다. 그 때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한 노인이 그의 앞으로 닦아왔습니다. “목사님, 오늘 설교는 참으로 유익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다음 주일부터는 부디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해 주십시오. ”
노인의 요구에 못 이겨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다시 살펴 보았습니다.
그의 내면으로부터 영적 각성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복음의 진수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본적인 신학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그는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중점적으로 설교하였습니다.
교회는 복음의 불이 붙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다시 복음으로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복음에 대한 체험은 신앙에 대한 그의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헌신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도 복음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격적으로 체험하고
십자가 아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붙잡혔을 때에
죽음도 불사하지 않고 복음을 위해 몸 바쳐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복음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복음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복음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들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복음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2절부터 4절까지를 다시 보겠습니다.
성경에는 2절과 3절 사이가 끊어진 것으로 되어 있지만 원본에는 마침표가 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복잡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처음에 무엇으로 시작합니까
‘이 복음은’이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2절 중간에는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끝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마칩니다. 그러니까 앞과 중간과 뒤를 연결하면 무엇이 됩니까
“복음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 됩니다.
즉 복음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 분이 기쁘고 좋은 소식입니다.
앞으로 복음이 무엇이냐라는 질문하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다. ”라고 하면 백점입니다.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면 거의 다 된 것입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에다가 양념위해 "십자가"를 붙이면 아주 훌륭하고 완벽한 복음이 됩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이 일을 하기 위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을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죽은 곳입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은 죄의 용서와 형벌이 치뤄졌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것을 믿고 죄를 회개하는 사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이 되는 진리로서 성경 66권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는 서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습니다.
바늘에 실이 가듯이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는 항상 같이 갑니다.
십자가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십자가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라는 희생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이면 복음의 의미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 복음의 개념을 머리 속에 꽉 넣고 이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순식간에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게 됩니다. 심판에서 면제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이 세상에 이 보다도 더 좋고 기쁜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서 죽을 사람이 살게 되고 형벌을 받을 사람이 면제되며 지옥에 갈 사람이 천국에 간다는 소식보다 더 좋은 소식을 없을 것입니다.
불신자들의 귀에는 별로 이해가 안되고 기쁜 소식이 되지 않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이 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에서 이 복되고 기쁜 소식이 자주 들려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 그리고 그 분이 무엇을 하였는지 자주 말해야 합니다.
그래서 참된 복음이 성도님들 마음 속에 뜨겁게 살아나게 하여야 합니다.
마음속에 구원의 감격이 되살아나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5절에서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로마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이미 예수를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쓴 당시에 로마 교회는 적어도 20년 정도가 된 교회였습니다. 초신자도 아니고 오래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바울을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복음은 안 믿는 사람에게 전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 상대가 불신자인 것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 20년이 된 로마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간절한 심정으로 전하고 싶어합니다. 바울이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그것은 로마 교인들로 하여금 복음의 순수성과 열정과 감격을 다시 회복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들었던 복음이지만 다시 전하려고 하였습니다.
신앙이 20년이라는 긴 세월은 당초 복음을 처음 체험했을 때의 열정을 시들게 하였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무미 건조하고 나태해졌습니다. 감격도 다 살아져 버렸습니다.
복음의 순수성도 잃어 버렸습니다. 한 마디로 해서 영적 불감증에 걸렸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열정과 순수성을 잃어버린 그들을 다시 한번 새롭게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교회나 개인이나 역사와 전통이 오래될 수록 복음이 죽어 있기가 쉽습니다.
겉은 오래되어 웅장하고 화려하지만 안으로는 믿은 지 오래된 사람들은
그 마음이 화석과 같이 굳어져 변할 줄을 모릅니다.
이런 교회와 성도는 십자가 앞에서 다시 한 번 깨어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다시 한 번 녹아져야 합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에서는 십자가의 희생보다 기복 신앙, 귀를 즐겁게 하는 변질된 복음이 자리바꿈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옛날 2천 년 전에 있었던 한 역사적 사실로만 기억되고 있습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짖던 중년 부부가 서울로 이사를 왔습니다. 이 부부가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참기름을 먹어 보고는 통탄했습니다.
시장에서 팔고 있는 참기름이란 것이 낙화생 기름을 섞은 것이거나 참깨 깻묵에다 다른 기름을 넣고 한 번 더 짜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짜 참깨로 참기름을 짜서 팔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손님이 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 사간 사람들은 다시 오지를 않았습니다. 몇 달 후 가게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가짜 참기름을 먹고 살아온 사람들이 진짜 참기름 맛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참된 복음의 진리가 가짜 참기름과 같이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참된 복음을 멀리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희생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피를 이야기하고
죄와 죽음과 심판과 지옥을 이야기하면 시대에 뒤진 설교자로 여깁니다.
그런 것 말고 듣기 좋고 평안을 주며 위로하는 설교를 듣고 싶어합니다.
일주일 동안 세상에서 상처 받고 당하며 살았는데 교회 와서는 좀 위로를 받겠다는 것입니다. 듣기 싫은 말을 하면 교회도 성장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미국 수정 교회의 목사 로버트 슐러 박사가 우리나라에 와서 교회 성장학 세미나를 하였습니다. 이 분이 세미나에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죄에 대해서 설교하지 마십시오, 대신 용서에 대해 설교하십시오. 심판에 대해 말하지 마십시오. 대신 은혜에 대해 말하십시오. 부정적인 것보다는 긍정적인 것을 설교하는 교회가 성장합니다. ”
그러나 이 제안은 반 복음적이고 비성경적인 주장입니다.
참된 교회는 죄에 대해 집요하게 설교하고 그래서 성도들로 하여금 죄로 인해 더러워진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해야 합니다.
복음은 심판이 아닙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멸망이 아닙니다.
복음은 구원이고 십자가는 용서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사건은 자주 선포되어야 합니다. 또 듣고 또 들어서 우리 전 인격 속에 꽉 들어차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 사람들은 그저 앞 뒤 안 보고 전도했습니다.
그들은 복잡한 교리 같은 것을 잘 몰랐습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을 믿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 복음을 진정으로 가슴 속 깊이 체험했습니까
그 사랑과 은혜가 고마워서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었습니까
과거 뜨거웠던 경험은 있었지만 지금은 다 식었습니까
그래서 지금은 십자가를 보아도 아무 감동이나 감각이 없습니까
다시 한 번 복음을 확신하고 과거에 뜨거웠던 마음을 다시 한 번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희생의 체험 없이 내 신앙은 자랄 수 없습니다.
헌신과 희생을 경험하지 않고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로마서를 가리켜서 "성경 중의 성경"이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꽃"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교회 역사에서 로마서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새 생명을 얻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암울하고 타락했던 중세 로마교회로부터 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을 이룰 수 있는 그 동기와 계기도 로마서 해석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마틴 루터와 칼빈이 이신칭의의 교리를 발판으로 개혁을 이루게 된 힘이 로마서에서 나왔습니다.
이처럼 교회역사에서 로마서는 다른 성경보다도 더욱 관심의 대상이었고 직간접적으로 많은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은 로마서를 통해서 자신들의 신학적인 토대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마서를 교리의 책, 이신칭의의 교리를 조직적이고 신학적으로 가르쳐 주는 책으로 여기며 믿고 있습니다.
로마서를 바울이 기록할 때 어떤 조직적이고 완벽한 신학적인 교리를 체계화시키기 위해서 로마서를 기록한 것인가
겸손하게 로마서를 통해서 말하는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은 로마서의 전반적인 서론적인 문제들을 생각하겠습니다.
기록한 사람과, 대필자
로마서를 기록한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1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 그런데 바울이 직접 친필로 쓴 것이 아니라 더디오가 대필했습니다.
16장 22절입니다. "이 편지를 대서하는 나 더디오도 주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
바울은 자신의 신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합니다.
이 종이라는 말은 구약의 여호와의 종이라는 표현을 배경으로 하는 표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응시켜서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종임을 소개합니다.
기록 배경과 목적
기록한 배경과 목적은 바울이 서바나 즉 스페인으로 복음을 전파하러 갈 때에, 로마 교회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복음으로 로마 교회를 견고케 하려는 것입니다.
(읽음)롬1장 11-15절입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제4차 선교여행을 통해서 이방인을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에 인도하는 일에 생을 다했습니다.
이때 바울의 이런 선교사역을 지원한 교회가 시리아에 있는 안디옥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바울의 선교를 지원하므로 바울이 로마제국의 동반구를 복음으로 봉사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로마제국의 동반구는 복음을 전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로마 제국의 서반구로 가서 이방인을 추수하는 일에 사명을 다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선교전략입니다. 바로 이 선교사역을 위하여 로마 교회가 이 일에 동참하고 바울을 지원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목적 때문에 바울이 로마 교회를 방문하기를 원했던 것이며, 지금 먼저 로마서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를 기록한 목적은
로마교회와 복음안에서 교제하고 피차 안위를 얻고 나서 로마교회를 지원을 통해서 로마제국의 서쪽 끝인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로마교회에 바울이 소원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전체에서 바로 복음을 논리적인 흐름을 따라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로마서가 복음에 대해서 가장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의 주제
그러므로 로마서의 내용은 복음입니다.
이제 아들안에서 나타내신 여호와 하나님의 새로운 의의 복음이 로마서의 중심 주제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능력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가 복음인 것은 복음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의 주제는 복음인데,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입니다
1장 16-17절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교회를 다니시는 분에게 정작 복음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을 잘 못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복음은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입니다.
우리 몸으로 말한다면 심장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장이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장기인 것처럼 복음이 기독교의 진리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다니시는 분들 중에는 복음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가지고 있지 못하고 계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복음이라고 합니까
"좋은 소식”“복된 소식”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만 알고 있는다면 수박 겉 할기입니다.
수박의 맛을 알려면 그 수박을 쪼개어 먹어 보아야 합니다. 먹어 보지 않으면 그 수박이 단지, 익었는지 모릅니다.
또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과 교제를 해 보아야 합니다. 교제해 보지 않으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어느 회사에서 신입 사원을 채용하고 있었습니다. 회사 측에서는 지원자의 이력서와 학교 성적만 가지고 채용 여부를 가리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회사는 한 가지 문제를 냈습니다. 소금과 설탕을 앞에 놓고 어느 것이 소금이고 어느 것이 설탕인 것을 말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원자들은 책상 위에 놓인 것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소금도 희고 설탕도 희기 때문에 잘 알아 맞추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 지원자는 달랐습니다. 그는 앞에 놓인 것을 좀 보고 있더니 그 중 하나를 찍어 먹었습니다. 맛을 본 다음 이것이 소금이고 저것은 설탕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지원자는 말할 것도 없이 그 회사에 채용되었습니다.
무엇이 소금인지, 무엇이 설탕인지 알려면 먹어 보아야 합니다.
복음도 이와 같습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알려면 내가 직접 체험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추상적이고 표면적인 이야기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이 믿는 복음을 체험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누가 물어볼 때도, 남에게 설명해줄 때도 막히지 않고 거침없이 술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내가 체험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복음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고는 복음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먼저 머리로 알고 다음은 가슴으로 알아야 합니다.
머리로 아는 것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고 가슴으로 아는 것은 체험으로 아는 것입니다. 지식적으로 알려면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체험적으로 알려면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서 나를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어느 목사님이 신약속에 사건들을 전설로 취급하고 사람들에게 지성적인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가 빠진 합리주의적인 사상으로 가득찬 설교를 하였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날도 매우 논리적이고 지성적인 설교를 했다고 스스로 만족해 하며 강단을 내려 왔습니다. 그 때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한 노인이 그의 앞으로 닦아왔습니다. “목사님, 오늘 설교는 참으로 유익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다음 주일부터는 부디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해 주십시오. ”
노인의 요구에 못 이겨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다시 살펴 보았습니다.
그의 내면으로부터 영적 각성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복음의 진수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본적인 신학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그는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중점적으로 설교하였습니다.
교회는 복음의 불이 붙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다시 복음으로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복음에 대한 체험은 신앙에 대한 그의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헌신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도 복음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격적으로 체험하고
십자가 아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붙잡혔을 때에
죽음도 불사하지 않고 복음을 위해 몸 바쳐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복음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복음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복음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들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복음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2절부터 4절까지를 다시 보겠습니다.
성경에는 2절과 3절 사이가 끊어진 것으로 되어 있지만 원본에는 마침표가 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복잡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처음에 무엇으로 시작합니까
‘이 복음은’이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2절 중간에는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끝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마칩니다. 그러니까 앞과 중간과 뒤를 연결하면 무엇이 됩니까
“복음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 됩니다.
즉 복음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 분이 기쁘고 좋은 소식입니다.
앞으로 복음이 무엇이냐라는 질문하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다. ”라고 하면 백점입니다.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면 거의 다 된 것입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에다가 양념위해 "십자가"를 붙이면 아주 훌륭하고 완벽한 복음이 됩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이 일을 하기 위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을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죽은 곳입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은 죄의 용서와 형벌이 치뤄졌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것을 믿고 죄를 회개하는 사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이 되는 진리로서 성경 66권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는 서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습니다.
바늘에 실이 가듯이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는 항상 같이 갑니다.
십자가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십자가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라는 희생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이면 복음의 의미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 복음의 개념을 머리 속에 꽉 넣고 이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순식간에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게 됩니다. 심판에서 면제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이 세상에 이 보다도 더 좋고 기쁜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서 죽을 사람이 살게 되고 형벌을 받을 사람이 면제되며 지옥에 갈 사람이 천국에 간다는 소식보다 더 좋은 소식을 없을 것입니다.
불신자들의 귀에는 별로 이해가 안되고 기쁜 소식이 되지 않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이 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에서 이 복되고 기쁜 소식이 자주 들려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 그리고 그 분이 무엇을 하였는지 자주 말해야 합니다.
그래서 참된 복음이 성도님들 마음 속에 뜨겁게 살아나게 하여야 합니다.
마음속에 구원의 감격이 되살아나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5절에서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로마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이미 예수를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쓴 당시에 로마 교회는 적어도 20년 정도가 된 교회였습니다. 초신자도 아니고 오래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바울을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복음은 안 믿는 사람에게 전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 상대가 불신자인 것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 20년이 된 로마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간절한 심정으로 전하고 싶어합니다. 바울이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그것은 로마 교인들로 하여금 복음의 순수성과 열정과 감격을 다시 회복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들었던 복음이지만 다시 전하려고 하였습니다.
신앙이 20년이라는 긴 세월은 당초 복음을 처음 체험했을 때의 열정을 시들게 하였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무미 건조하고 나태해졌습니다. 감격도 다 살아져 버렸습니다.
복음의 순수성도 잃어 버렸습니다. 한 마디로 해서 영적 불감증에 걸렸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열정과 순수성을 잃어버린 그들을 다시 한번 새롭게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교회나 개인이나 역사와 전통이 오래될 수록 복음이 죽어 있기가 쉽습니다.
겉은 오래되어 웅장하고 화려하지만 안으로는 믿은 지 오래된 사람들은
그 마음이 화석과 같이 굳어져 변할 줄을 모릅니다.
이런 교회와 성도는 십자가 앞에서 다시 한 번 깨어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다시 한 번 녹아져야 합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에서는 십자가의 희생보다 기복 신앙, 귀를 즐겁게 하는 변질된 복음이 자리바꿈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옛날 2천 년 전에 있었던 한 역사적 사실로만 기억되고 있습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짖던 중년 부부가 서울로 이사를 왔습니다. 이 부부가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참기름을 먹어 보고는 통탄했습니다.
시장에서 팔고 있는 참기름이란 것이 낙화생 기름을 섞은 것이거나 참깨 깻묵에다 다른 기름을 넣고 한 번 더 짜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짜 참깨로 참기름을 짜서 팔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손님이 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 사간 사람들은 다시 오지를 않았습니다. 몇 달 후 가게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가짜 참기름을 먹고 살아온 사람들이 진짜 참기름 맛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참된 복음의 진리가 가짜 참기름과 같이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참된 복음을 멀리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희생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피를 이야기하고
죄와 죽음과 심판과 지옥을 이야기하면 시대에 뒤진 설교자로 여깁니다.
그런 것 말고 듣기 좋고 평안을 주며 위로하는 설교를 듣고 싶어합니다.
일주일 동안 세상에서 상처 받고 당하며 살았는데 교회 와서는 좀 위로를 받겠다는 것입니다. 듣기 싫은 말을 하면 교회도 성장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미국 수정 교회의 목사 로버트 슐러 박사가 우리나라에 와서 교회 성장학 세미나를 하였습니다. 이 분이 세미나에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죄에 대해서 설교하지 마십시오, 대신 용서에 대해 설교하십시오. 심판에 대해 말하지 마십시오. 대신 은혜에 대해 말하십시오. 부정적인 것보다는 긍정적인 것을 설교하는 교회가 성장합니다. ”
그러나 이 제안은 반 복음적이고 비성경적인 주장입니다.
참된 교회는 죄에 대해 집요하게 설교하고 그래서 성도들로 하여금 죄로 인해 더러워진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해야 합니다.
복음은 심판이 아닙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멸망이 아닙니다.
복음은 구원이고 십자가는 용서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사건은 자주 선포되어야 합니다. 또 듣고 또 들어서 우리 전 인격 속에 꽉 들어차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 사람들은 그저 앞 뒤 안 보고 전도했습니다.
그들은 복잡한 교리 같은 것을 잘 몰랐습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을 믿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 복음을 진정으로 가슴 속 깊이 체험했습니까
그 사랑과 은혜가 고마워서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었습니까
과거 뜨거웠던 경험은 있었지만 지금은 다 식었습니까
그래서 지금은 십자가를 보아도 아무 감동이나 감각이 없습니까
다시 한 번 복음을 확신하고 과거에 뜨거웠던 마음을 다시 한 번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희생의 체험 없이 내 신앙은 자랄 수 없습니다.
헌신과 희생을 경험하지 않고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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