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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개혁자의 신앙원리

본문

오늘 주일은 우리에게 두 가지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주일입니다. 첫째는 오늘은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이 시작된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마틴 루터가 95개 항목으로 천 주교에 대한 항의서를 비텐베르그 대학 성당 정문에 써 붙인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시발점 으로 종교개혁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날이 1517년 10월 31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날을 기념해서 시월 마지막 주일을 종교개혁 기념주일로 지킵니다.
또 하나 오늘 주일이 우리에게 뜻 깊은 것은 오늘이 우리 교회 설립 기념주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교회가 첫 예배를 드린 날이 1976년 10월 31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우리 교회 설 립 23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더욱 뜻 깊은 것은 우리 교회는 처음부터 개혁주의 교회를 목적으로 세워졌다는 사실입니다. 개혁주의라는 말은 한 마리로 종교개혁 당시에 개혁자들의 신앙과 자세를 이어 받겠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바른 신앙, 그 성경중심의 신앙을 이어 받아 그 신앙을 계승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러므로 개혁주의 신앙의 교회가 종교개혁 기념주일에 설립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라 하 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의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는 흔히 나는 세 상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전에 시무 하던 교회에서 기관별 찬양대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은혜롭고 즐거운 참 좋은 행사였 습니다. 그런데 한 십 년 이 행사를 해 왔을 때 저는 이 행사가 잘못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기관별 찬양대회를 왜 합니까 첫째는 찬양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서입니다. 둘째는 찬양을 통해 성도들이 은혜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셋째는 찬양을 준비하는 동 안 기관에서 회원들이 교제를 나누고 유익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 교회에서도 이런 이유로 찬 양대회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한 십 년을 하고 나니 찬양하는 분들의 관심이 달라집니다. 가장 큰 관심은 누가 일등을 하느냐 여기에 집중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심사 결과에 예민해지고, 심 사를 공정하게 하기 위해 전문가를 모셔오게 됩니다. 우리는 해봐야 등수에 들지 못하고 들러리 만 서니 나가지 않겠다고 하는 기관도 생겼습니다. 여러분, 합창을 해서 일등을 하는 것, 이것은 세상적 가치관입니다. 교회가 세상적 가치관의 영향을 받아 변질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점을 지적하고 이 행사를 중단시킨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세속화나 타락을 말할 때 거창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엄청난 사건들을 이야기 합니다. 거창하게만 생각할 것 없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영향으로 변질되는 것이 모든 것이 세 속화요 타락입니다. 이것은 언제나 적은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순수하게 교회의 모습은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살피고 그래서 개혁되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개혁은 결코 부정적이 의미가 아닙니다. 지금 있는 것을 무작정 고치자는 데 개혁 의 목적이 있는 것 아닙니다. 개혁은 오히려 옛 것을 간직하자는 것이요, 예 것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본래에서 떠났기 때문에 본래로 돌아가는 거기에 개혁의 참된 원리가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 공회에 붙잡혀가서 공회의 심문을 받은 장면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고 그 능력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그 이적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공회가 소집되고 마침내 공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 심문을 합니다.
생각해보면 이 공회는 예수님을 죽이는 결의를 했었고 베드로로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 고 부인한 일생일대의 큰 실수를 범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현장에 베드로가 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지난날과 너무도 달랐습니다. 공회의 위협과 협박에 대해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담대히 진리를 선언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보다 더 옳은가 판단하라' 고 실로 용감하게 외칩니다.
여러분, 이 장면을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여기 한 편에 공회가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마주하고 섰습니다. 공회는 이스라엘 교회의 대표입니다. 그 의장은 대제사장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제 오순절로 탄생한 새 교회의 대표입니다. 그러니 본문의 이야기는 단순히 공회와 베 드로의 충돌이 아니라 옛 교회와 새 교회의 충돌입니다.
이 두 교회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보십시다. 우리는 주님 당시 이스라엘의 교회가 얼마나 부 패해 있었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거짓과 위선과 외식으로 언제나 주님의 책망의 대상이었습니다. 남을 속이는 회칠한 무덤이요, 자기는 지지 않는 짐을 남에게 지우는 올가미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을 십자 가에 못 박은 것은 스스로 구약을 저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당시 이스라엘의 교회는 변질 되어 있었습니다. 본래의 교회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이제 오순절 새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새 교회는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어 디까지나 구약 성경을 기초로 이루어졌습니다. 구약의 완성이신 주님을 통해 세워졌습니다. 그 러므로 초대교회는 구약의 부정이 아니라 전정한 의미의 구약 교회의 회복입니다. 주님 당시 이 스라엘이 구약에서 떠났기 때문에 다시 구약을 회복하고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본문은 단순히 베드로와 요한이 공회에 끌려와 심문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닙 니다. 오늘 본문은 사실상 첫 번째 종교개혁입니다. 본래에서 떠나 형식과 위선에 빠져버린 잘 못된 당시 교회를 향하여 베드로와 요한이 개혁의 역사를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공회 앞 에 선 베드로와 요한, 그들은 교황의 권세 앞에 선 마틴 루터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가 관심을 갖고자 하는 것은 베드로와 요한의 그 놀라운 개혁신앙의 동력입니다. 어떻게 저들이 그토록 놀라운 신앙의 능력을 소유할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개혁 주의 신앙인으로서 사명을 감당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에게는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처럼 담대하지를 못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나약합니다. 진실로 우리에게도 베드로와 요한과 같은 그러한 신앙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디에서 그런 신앙의 능 력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첫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재발견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말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우리 가 너희 말 듣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 무슨 뜻입니까 "여호와 하나님 앞 에서" 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 나와 함 께 하시는, 나를 사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내가 그 여호와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입 니다.
공회가 얼마나 무서운 곳입니까 갈릴리 촌사람들에게 대제사장과 공회의 위력은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앞에 있는 사람들을 본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 님을 보고 나니 세상의 그 무엇이 두려울 이유가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공회원들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는 저들이 전문 가들입니다. 저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전문적으로 섬기는 제사장 율법사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은 성경 속에만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요, 전통 속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종교 의 식 속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여호와 하나님이십니까 베드로의 여호와 하나님입니까 공회원들의 여호와 하나님 입니까 오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성경책 속에 가두어 둡니다. 설교 속에, 기도 속 에, 예배 속에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그러면서 내 구체적인 현실 속에 살아 역사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살아 나오시게 해야 합니다. 예배 속에 기도 속에 가 두어 둔 여호와 하나님을 내 현실 속으로 모셔와야 합니다. 지금 구체적인 내 이 현실 속에 살아 나오시 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 나와 함께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진정 한 능력이 있습니다.
루터의 용기의 원천도 여기 있었습니다. 당시 천주교가 얼마나 막강했습니까 세계를 지배하 는 천주교요 왕들 위에 군림했던 교황이었습니다. 그 막강한 권력 앞에 루터는 홀로 섰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루터에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이라는 엄청난 일을 해나가다보니 반대도 많고 배 신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저런 걱정이 쌓여갑니다. 잠을 이루 수 없을 정도로 견디기가 어 렵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잠자리에 들 때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 세상이 저의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것입니까 이 교회가 여호와 하나님의 것입니까 제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세 상,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라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돌보십시오. 저는 잠을 자겠습니다. " 재미있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는 결코 드릴 수 없는 기도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위대하고 마틴 루터도 위대하니까 여호와 하나님 함께 하셨지만, 여호와 하나님 나 같은 사람 과도 함께 하실까 생각되십니까 여러분,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은 선지자를 쓰시고 제 사장을 쓰신다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선지자도 아니고 제사장도 아닙니다. 초라한 사람들이요 갈릴리 어부들이었습니다. 더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 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여호와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이 확 신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위대한 사람들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닙니다. 비록 부족하지만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거기 능력이 있고 거기서 개혁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두 번째는 말씀의 재발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너희 말 듣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 우리가 지금 행하는 이 일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순종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들의 말을 들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분명한 확신, 이것이 또한 저들에게 능력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성경을 믿었습니다. 예언을 믿었고 선지자들의 말을 믿었습니다. 특별히 그들은 율법에 대해 열심이었습니다. 그들의 율법에 대한 열심은 정말 생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지금 이루어져 가고 그래서 그 말씀이 내게 복이 되고 은혜가 되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말씀은 오히려 짐이었습니다. 얽어매는 사슬이었습니다. 그래서 구 약성경에 그토록 많은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예언이 성취되었는데 믿지를 못했습니다. 죽어 있는 말씀이요 구속하는 말씀이었을 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달랐습니다. 말씀이 약속이요 축복이었습니다. 말씀이 이루어져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도 말씀의 성취요, 십자가의 사건도 말씀의 응답이며 오순절 성령 강림도 예언 의 성취였습니다. 심지어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 마져도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루어지는 말씀,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이제 내게 힘이 되고 은혜가 되고 능력이 되는 말 씀이었던 것입니다.
중세의 종교개혁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회복이었습니다. 중세교회는 말씀을 외면했습니다. 교회 의 결정과 권위를 말씀 위에 두었고 그래서 성경에 위배되는 교리를 마음대로 고안해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진리에서 완전히 떠났습니다. 여기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개혁자들의 일관된 주장이었습니다. 말씀만이 절대 표준이요, 말씀은 오늘도 살아서 우리의 신앙과 삶에 충분한 힘이 되고 능력이 된다는 확신입니다.
말씀의 능력을 새롭게 발견해야 합니다. 읽고 듣고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순종하는 말씀이요 실천하는 말씀입니다. 내 생활 가운데서 그대로 이루어 져가고 응답되어 가고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능력이 있고 힘이 있고 은혜가 있고 복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신앙의 재발견입니다. 본문의 베드로와 요한을 보십시오. 우리 본문 앞부분을 보면 공회 앞에서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여호와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했다고 담대히 복 음을 전합니다. 이것은 관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학문적인 이야기도 종교의식의 이야기도 아 닙니다. 그대로가 생명이요 능력입니다. 이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살아계셔서 오늘도 역사하 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함으로 언제 어디서나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도 신앙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지켰고, 기도를 드렸으며 제사를 드 렸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생명력 있는 신앙의 능력은 없었습니다. 신앙이 곧 관습이 되고 형식 이 되었습니다. 종교의식의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타락하면 신앙은 형식만 남습니다. 중세교회가 그러했습니다. 로마에 가 면 성 계단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콘스탄틴의 황제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부탁을 해서 예수 님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올라갔던 계단들을 뜯어다가 로마로 가져와 교회를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예배당 안에 들어가 보면 아무 것도 없고 계단만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계단을 무릎으로 기 어오르면 죄사함을 받는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도 기어오르고 있습니다. 이 천년동안 얼 마나 많은 사람들이 순례를 했는지 계단이 닳아서 푹 패여 있습니다. 이것이 로마교회입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거기 무슨 살아있는 믿음이 있고 능력 있는 믿음이 있겠습니까 계단을 수 만 번 오르내려 보십시오, 죄사함 받고 구원 얻는 역사가 이루어지겠습니까 계단뿐만이 아닙니다. 온갖 고행을 다 시키고 심지어 죽은 사람도 구원받는다고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여기 무슨 생명 이 있고 능력의 역사가 있겠습니까
루터도 이런 고행 다 해보았습니다. 계단을 기어오르면서 계단마다 입을 맞추기도 했고, 하루 에 20번씩 고행도 했습니다. 당시 교회가 가르쳤던 대로 공로가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했습 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 것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의식이요 형식이요 빈 껍데기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마침내 믿음으로 의롭다 얻는 진리를 깨달았을 때 그는 벌떡 일어섰습니다. 생 명력 있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 믿음이 바로 개혁의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일본은 예수 믿는 사람이 적기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나라입니다. 한 시골학교에 새로 전학 온 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전교생 중에 이 학생만이 예수를 믿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어 도시락을 먹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그냥 먹는데 이 학생만은 식사 전에 두 손을 모으고 한참동안 중 얼중얼 기도를 합니다. 이 광경을 본 아이들이 수상쩍어 선생님에게 일러주었습니다. "얘가 정 신이 나갔나봐요 이상해요. " 선생님이 학생을 불러 "너 무슨 짓을 했느냐" 물었습니다. "별거 아닙니다" 저는 기독교인인데요,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음식을 먹게되어 감사하므로 여호와 하나님 좋은 음식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선생님이 이 말을 듣자 눈물을 흘립니다. "사실 은 나도 예수 믿는 사람이다만 나는 창피해서 기도를 못한다. 너는 참 위대하다 참 용기가 있구 나" 하고 칭찬을 하며 "나도 앞으로는 식사할 때 꼭 기도를 하겠다. "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종교개혁이 따로 없습니다. 무슨 거창한 일을 해야 하는 것 아닙니다. 어디서든지 당 당하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 바로 그 용기와 그 신앙이 걔혁입니다. 내게 주어진 자리에 서 여호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말씀이 살아 있음을 믿고, 내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됨을, 말씀대로 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적은 것 같 지만 이 적은 신앙이 모여 개혁의 역사를 이룹니다. 이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두려움도 죄악도 불의도 유혹도 갖가지 시험도 다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떤 환경, 어떤 여건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뜻 을 이루며 살아갑니다. 진실로 이 믿음으로 승리하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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