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자신을 통한 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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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교개혁 485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마틴 루터가 독일의 비텐베르그 교회 문 앞에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내 건 것이 발원이 되어서 독일을 위시해서 유럽 전역에 종교개혁이 시도되어졌습니다. 사실 종교 개혁의 발생원인은 사회적인 여러 요인들이 있기도 하였지만 교회밖의 요인보다는 교회 내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었고 그것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을 했다고 봅니다.
로마 교황청에서 면죄부를 판매하게 한 것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고 교회가 비성경적인 가르침을 시행해 왔고 교권주의와 성직을 매매하는 일들이 있었는데다가 성도와 성직자의 무지와 타락, 비도덕적인 생활 등의 여러 가지 요인이 합쳐져서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독일의 마틴루터, 스위스의 츠빙글리, 칼빈 같은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서 성경의 권위를 회복하고 우리의 신앙이 성경에 기초한 신앙이 되는,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모토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어떤 행위의 열매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는 성경적인 진리와 특정한 종교인들, 특히 사제들만이 제사장이 아니고 이 세상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제사장임을 선언하는 만인제사장 사상 등이 16세기 종교개혁의 근간을 이루었던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 특별히 21세기를 사는 우리 한국의 상황을 돌아보았을 때 어쩌면 16세기 종교개혁의 전야보다도 더 혼탁한 실정이라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회 외적으로, 교회 내적으로 지금 우리는 많은 문제점들을 지니고 있음을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물론이고 불교 등의 타종교조차 종교계가 그 사회를 이끌어나가고 사회를 정화시키는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데 한국의 여러 종교들은 이런 역할을 지금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종교계, 특히 우리 기독교인들은 인정을 하고 우리 자신들을 바로 세우는 그런 노력이 있어야 되리라 생각됩니다. 불교계에서도 여러 종파로 나뉘어지고 교권 다툼으로 공권력이 동원되어지고, 각목파티가 벌어지는 그런 모습을 우리가 언론 보도를 접할 때가 있습니다만
우리 기독교 안에도 그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지나친 교권싸움으로 말미암아서 공권력이 동원되어지는 그런 일들이 사실 있어왔던 것을 우리가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수치를 모르고 탐욕에 찌들린 잘못된 종교인들 때문에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오히려 한 가지로 비난을 받는 그런 경우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라고 한다면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은 기복주의적인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세 종교개혁이 일어날 그 무렵에 로마 천주교회가 중심이 되엇 소위 교인들을 영적인 무지로 몰아갔고 교인들에게 성경을 읽히지 않아서 교인들로 영적으로 바로 서지 못하게 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는 지나친 기복주의적인 샤머니즘 사상이 한국 교회를 지배하고 있어 누구든지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우리 종교학자들은 한국 민족성 속에는 샤머니즘적인 피가 흐르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 한국 기독교 속에는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아주 건전한 부흥사들도 많이 있지만 심지어 사이비 부흥사들도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무당 흉내를 내고 점쟁이 흉내를 내면서 교인들의 마음을 도둑질하고 사기치는 사기꾼들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정말 교인들의 영성을 더 풍부하게 하고 여호와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고 또 기도할 수 있는 그런 기도원이 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기도원들 가운데는 불건전한 기도원들이 있어서 이런 타락한 또, 탈선한 부흥강사들과 합작이 되어서 교인들의 마음을 도둑질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바른 신앙에서 이탈하게 하는 일들이 수없이 많은 것을 우리는 고백해야 될 줄로 생각됩니다.
또한 교회안에 성직 매매현상이 16세기 종교 개혁당시에는 아주 심각했습니다. 16세기 유럽 사회를 지배했던 정치적인 세력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였습니다. 칼 5세라는 합스부르크의 왕이 저멀리 포르투칼에서부터 북유럽까지 유럽 전 대륙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집안이 얼마나 골치아픈 집안이었는지 모릅니다. 그 전에는 제가 한국에서 교회사 책을 읽으면서 이해를 잘 못했는데 유럽에 가서 공부를 하면서 왜 그 당시 상황이 그렇게 고질적인 병에 들었을까 하고 고민을 하면서 교회사를 살피는 중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카톨릭의 말단 신부들이나 주교, 추기경, 교황에 이르기까지 종교적인 성직자들이 있었는데 오스트리아 같은 경우에는 왕자들이 여러명 있었는데 한 사람만 왕이 되게 되고 보니 나머지 왕자들이 성직을 나눠먹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왕자는 어느 지역의 추기경이 되기도 하고 어떤 왕자는 주교가 되어서 그 지역은 왕권이 미치지 못하고 주교가 다스리는 비솝툼이라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다스리게 된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 사람은 자신이 신학을 공부한 것도 아니고 신앙심이 돈독한 것도 아니고 오로지 정치적인 이유로 그 지역을 나누어서 성직을 가지고 다스리는 이런 현상이 생겼습니다. 그러다보니 그 사람들이 자기 영역을 다스리면서 그 성직을 팔어먹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어느 자리는 얼마, 어느 자리는 얼마는 하는 식이 된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성경이 대부분 라틴어로 되어 있었는데 심지어는 이 성경을 읽을 줄도 모른는 사람들이 성경을 들고 와서 주일날 미사를 집행하고 강론을 한다고 엉터리 쇼를 하는 일들이 다반사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을 부르짖으면서 가장 먼저 한 것이 성경을 번역하는 것이었습니다. 마틴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성경 번역을 통해서 일반 성도들이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성경을 읽으면서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전에는 사기꾼 같은 성직자들이 거짓말을 해도 아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엉터리 성직 매매를 통해서 엉터리 교회 지도자들이 생겨나게 되고 그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서 교회가 이끌려 나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교회가 타락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도 정말 이 무인가 신학교에서 무자격 성직자들을 배출하면서 이 부분은 우리 한국 교회가 힘을 합쳐서 극복해야 할 부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상적인 자격을 갖춘 신학교가 하나가 있다고 한다면 무자격 신학교는 10 곳 정도가 됩니다. 교인들이 그것을 분별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신학을 아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신학은 학문들 가운데 가장 어렵고 힘든 학문입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다른 것을 하다가 잘 안 되면 신학을 하겠다고 하고, 정상적인 기초 교육과정도 마치지 않은 사람이 신학을 하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얼마전에 신학을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저를 찾아왔길래 제가 신학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제가 신학을 하지 말라고 하니까 그 분이 섭섭하게 생각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신학이라는 것이 이런 학문이고 정말 고도의 학문적인 기초가 있는 사람들이 신학을 할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이 신학을 했을 때 바른 신학이 될 수 있다고 했더니 그 사람들이 머리가 좋아서 즉각적인 발론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드로도 쓰시지 않았느냐 무식한 베드로도 사용하셨는데 나같은 사람이 못할 것이 무엇이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참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대전땅에도 정말 바로 인가가 나지 않고 정상적인 신학교가 아닌 엉터리 신학교가 꽤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야간에 어디에 가서 성경 공부를 하겠다는 것은 말릴 필요가 없지만 신학을 해서 성직자가 되겠다는 것은 심각하게 고려해 보아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국가 고시를 치르러서 국가 고시를 통과한 사람만 성직자가 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또 교회 안에서 교회 장로가 되고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는 것은 교회를 위해서 죽도록 일을 하기 위해서 세운 직분인데 그 직분을 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뭐 장로되는 것은 1억이라든가 권사가 되는 것은 천만원, 혹은 이천만원의 돈을 교회에서 요구하고 그 돈을 바치고 그 직분을 사듯이 자격이 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교회 직분자가 되었을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한국교회는 16세기 종교 개혁 이전의 영적인 혼탁함이 우리 한국 교회 안에도 아주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을 해야 할 것입니다.
지나친 교파나, 교회 분리, 또 교회 안에서 헌금을 지나치게 강요하는 것,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예물을 바치는 것은 성경적인 원리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의 주머니를 노리고 헌금을 강요하는 것, 성경적인 원리를 떠나서 헌금을 내지 않으면 안 되도록 상황을 몰아가는 행위들은 한국 교회가 개혁되어져야 할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가장 깨끗해야 할 교회에서 가장 더러운 돈 문제를 가지고 교인들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끝까지 내지 않겠다고 버티는 사람에게 교묘한 수법을 써서 헌금을 강요하는 것은 분명 문제입니다. 한국 교회 헌금 제목가운데 6. 25기념 감사 헌금, 광복 기념 감사헌금 등 희한한 감사헌금이 다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도원에 가 보면 별미 헌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별미를 해서 아버지에게 바치고 이삭이 그 별미를 먹고 아들을 축복한 것처럼 별미 헌금이라고 해가지고 봉투에다가 헌금을 드리는 것입니다. 게다가 요즘은 사기꾼들이 하는 것인데 봉투 사역이라는 것이 있어서 헌금을 드리면 그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기도해 주는 이런 작태가 우리 한국 교회안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원에 한번 갔다온 사람들이 옆에 있는 교인들을 다 선동해서 같이 데리고 가서 봉투를 바치고 오늘 저 부흥 강사가 얼마나 영험한지 보자며 점쟁이를 찾아가는 가는 심보와 꼭같은 심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바로 사기꾼들과 그 사기꾼에 놀아나는 말씀 중심에, 말씀에 바로 서 있지 않은 엉터리 교인들이 만들어 낸 합작품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깨달아야 할 줄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인들과 성직자들의 비도덕적인 생활 등은 16세기 종교개혁 전야와 같은 그런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불신자들이 저지르는 죄악보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종교인들이 바른 자세로 바른 신앙을 가지지 못하고 저지르는 일들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불교나 유교나 다른 모든 종교를 비롯해서 종교가 그 사회에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도리어 사회를 더 어둡게 만들고 사회를 더 부패하고 더럽게 만드는 장본인들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운데 빠져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지난번 김영삼 정부에서 김대중 정부까지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를 거치면서 우리는 개혁이라는 말을 정말 신물이 나도록 듣지 않았습니까 정말 개혁이라는 말은 숭고하고 엄숙한 용어인데 이 두 정부를 거치면서 개혁이라는 용어가 남용되어지고 이 개혁이 자기의 정적을 처단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개혁의 칼자루를 들고 칼춤을 추웠던 그런 비극적인 현장들을 우리가 목도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혁은 너를 향한 개혁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을 향한 개혁에서부터 시작되어질 때 그 개혁이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절대 네가 개혁되어져야 할 대상이다라고 생각할 때는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 때 개혁은 실패하고 말게 됩니다. 개혁은 원죄의 속성을 지니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하고 진실되게 살지 못하고 온전하게 서지 못한 나를 향해서 칼을 들여대는 개혁, 나를 향해서 회개를 촉구하는 그 개혁을 부르짖을 때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며 오늘 이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세우길 바랍니다.
자, 여러분 오늘 분문을 보십시요.
11절에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었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다가 깰때가 벌써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을 성공하고 실패하는 사람들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때를 아는 것과 때를 모르는 것의 차이입니다. 때를 알고 그 때를 바로 자기 삶에 활용하고 주어진 때에 긍정적인 반응을 하는 사람은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때를 놓치고 때에 대하여 자기의 주어진 때를 잘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3장에서는 우리에게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 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라고 인생의 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자다가 깰 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우리를 향해서 자다가 깰 때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16세기 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까지 카톨릭이 지배했던 중세 1000년은 유럽 역사에서 암흑 시대라고 불리는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중세 1517년을 기점으로 해서 일어났던 이 종교개혁은 깊은 영적인 잠에 빠져 있던 영혼들을 불러 깨우는 그런 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이 성경 본문은 사실 방탕하기 짝이 없이 30년 이상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어긋난 길을 걸어가던 어거스틴을 회개하고 돌아오게 한 말씀입니다.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다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가정에서 아이들을 기르면서 이 녀석이 자기가 일어나서 스스로 공부해야 할만큼 동창이 훤히 밝았고 해가 중천에 올라서 벌써 학교갈 시간이 지났는데도 잠에서 깨지 못하고 늦잠을 자는 자식을 보는 부모의 심정 못지 않게 여호와 하나님의 심정이 우리를 향해서 애타는 심정을 가지고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는 이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세우면서 내가 지금 잘못된 삶을 살고, 잘못된 길을 가고 내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이것을 지금 다 청산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이 때를 바로 알고 바로 설 수 있는, 내 자신을 개혁해야 할 때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내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는 때가 바로 오늘 이시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때가 악하다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악하고 어둔 때에 어두움을 밝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우리 자신을 다시 세워나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자 여러분 다시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우리 자신이 청산해야 할 것을 청산하고 새롭게 무장하고 새롭게 결단하자는 촉구가 여기에 나와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벗어던져야 할 것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입어야 할 것을 바로 입지 못하는 그런 신앙의 행태를 보이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우리가 벗어야 할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며 오직 주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방탕과 술취함, 음란과 호색함, 쟁투와 시기함, 정욕을 위햐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이 모든 일들을 벗어던지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한다고 우리를 향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이것은 내가 청산해야 하는데…’,‘이것은 내가 버려야 하는데…’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정리하지 못하고 버리지 못하고, 청산하지 못하고 오늘까지 그냥 그렇게 흘러오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이 말씀으로 여러분 자신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나의 과거의 부끄러웠던 나쁜 행실들, 나쁜 습관들, 고질적인 나의 악습들을 오늘 다 과감하게 벗어던질 수 있는 결단을 오늘 이 시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 사회를 돌아다 보면 세계 술소비량이 어떻고, 음란 문화가 온 나라를 뒤덮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를 미주 공화국이 아니라 음란 공화국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여러분 유흥 업소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120만명이 넘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음란하고 얼마나 타락되어져 있는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중고등학생들인 청소년들 뿐만 아니라 초등학교 1,2학년 학생들에게까지도 음란 싸이트에 들어가서 눈을 부릅뜨고 여기저기를 두리번 거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초등학생들 가운데 커플링을 주고 받는 식의 예전에는 중고등학생들이 했던 일들을 초등학생들이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꼭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 음란 문화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를 드러내는 한 단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가장 어필하는 용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섹시하다’는 것입니다. 유치원 아이가 그 뜻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도 우리 선생님은 섹시하다고 그런다고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 가득한 쟁투와 시기를 보십시요.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쟁투와 시기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답답한지 모릅니다. 거짓말이 판을 치고 거짓말이 확대 재생산 되는 언론 기관들이 어느 것이 거짓말이고 어느 것이 진실인지를 대강 알만도 한데 아무렇게나 써대고 소리를 질러대다 보니까 온 국민들이 헷갈려서 어느 것이 정말이고 어느 것이 진짜인지 거짓말과 참말이 분간이 안 되고 경계가 없어져 버립니다. 목소리 큰 사람,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진실인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쟁투와 시기가 판치고 권모술수가 판치는 이 시대를 우리가 보면서 정말 이 조국과 민족, 국가를 위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에 ‘유혹에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대통령이 될 사람들이나 역대 지도자들에 대해서 비난하고 손가락질 할 것이 아니라 우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내 자신을 개혁하고 내 자신을 혁신하고 내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결단이 있다고 하면 위에서부터의 어떤 개혁이 아니라 아래에서부터의 개혁, 아래에서부터의 혁신이 있어진다고 한다면 우리 사회에는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3절에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들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우리가 나쁜 짓을 하며 바른 삶을 살지 못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한 것은 이제 이 시간 이전에 한 것으로 족하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런즉 지금부터는 우리는 벗어야 할 것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올바른 자세로 우리 자신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0절에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니라’여호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에베소서 4장 24절에 우리에게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영을 좇는 자가 아니라 육을 좇는 자였기에 우리는 가지 말아야 할 엉뚱한 곳을 찾아 갔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했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거역된 일들을 너무나 많이 했습니다. 진실된 일보다는 진실되지 못한 일에 기웃거리며 그것을 추구했고 그것에 욕심을 부렸던 그런 경우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 485주년을 맞이해서 내 속에 청산해야 할 요소가 무엇인가, 내 자신을 어떻게 개혁해야 할 것인가, 내가 내 자신을 어떻게 개혁해 나갈 것인가 하는지 리스트를 작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해가 다가기전에 여호와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내가 청산하고 개혁해야 할 것에 대해 리스트를 작성하고 적극적으로 그것을 개혁해 나가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19장 8절에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앞에서 새로운, 깨끗한 세마포 새 옷을 입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의 옳은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행실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세마포 새 옷을 입어야 하는데 우리는 누더기 옷같은 것을 입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구습을 좇는, 유혹의 욕심을 좇았던 삶을 살아왔던 것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우리 자신을 바로 세워나가야 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 장로교를 유럽에서는 개혁교회라고 합니다. 개혁은 완성된 용어가 아니라 끝없이 추구해야 할 용어인 것입니다. 우리 장로교의 시조인 칼빈은 ‘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져야 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으로 개혁이 끝난 것이 아니고 20세기에도 21세기에도, 아니 22세기에도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교회는 날마다 날마다 개혁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날마다 개혁되어지기 위해서는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입각해서 개혁되어지지 않으면 이 교회가 개혁되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종교개혁의 중요한 모토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개혁의 중심 사상은 성경 중심의 원리로 우리 신앙을 바로 세우자는 것이었습니다.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정말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나아가서 무릎 꿇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될 때 우리는 개혁적인 신앙, 개혁적인 사상을 가진 신앙인이 될 수 있고 우리 교회를 개혁하고 우리 사회를 개혁하며 온 세계를 개혁해 나가는 개혁의 주체 세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바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개혁은 너를 향한 개혁이 아니요, 나를 향한 개혁, 우리 자신을 향한 개혁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개혁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우리 모두가 개혁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로마 교황청에서 면죄부를 판매하게 한 것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고 교회가 비성경적인 가르침을 시행해 왔고 교권주의와 성직을 매매하는 일들이 있었는데다가 성도와 성직자의 무지와 타락, 비도덕적인 생활 등의 여러 가지 요인이 합쳐져서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독일의 마틴루터, 스위스의 츠빙글리, 칼빈 같은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서 성경의 권위를 회복하고 우리의 신앙이 성경에 기초한 신앙이 되는,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모토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어떤 행위의 열매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는 성경적인 진리와 특정한 종교인들, 특히 사제들만이 제사장이 아니고 이 세상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제사장임을 선언하는 만인제사장 사상 등이 16세기 종교개혁의 근간을 이루었던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 특별히 21세기를 사는 우리 한국의 상황을 돌아보았을 때 어쩌면 16세기 종교개혁의 전야보다도 더 혼탁한 실정이라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회 외적으로, 교회 내적으로 지금 우리는 많은 문제점들을 지니고 있음을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물론이고 불교 등의 타종교조차 종교계가 그 사회를 이끌어나가고 사회를 정화시키는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데 한국의 여러 종교들은 이런 역할을 지금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종교계, 특히 우리 기독교인들은 인정을 하고 우리 자신들을 바로 세우는 그런 노력이 있어야 되리라 생각됩니다. 불교계에서도 여러 종파로 나뉘어지고 교권 다툼으로 공권력이 동원되어지고, 각목파티가 벌어지는 그런 모습을 우리가 언론 보도를 접할 때가 있습니다만
우리 기독교 안에도 그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지나친 교권싸움으로 말미암아서 공권력이 동원되어지는 그런 일들이 사실 있어왔던 것을 우리가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수치를 모르고 탐욕에 찌들린 잘못된 종교인들 때문에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오히려 한 가지로 비난을 받는 그런 경우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라고 한다면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은 기복주의적인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세 종교개혁이 일어날 그 무렵에 로마 천주교회가 중심이 되엇 소위 교인들을 영적인 무지로 몰아갔고 교인들에게 성경을 읽히지 않아서 교인들로 영적으로 바로 서지 못하게 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는 지나친 기복주의적인 샤머니즘 사상이 한국 교회를 지배하고 있어 누구든지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우리 종교학자들은 한국 민족성 속에는 샤머니즘적인 피가 흐르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 한국 기독교 속에는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아주 건전한 부흥사들도 많이 있지만 심지어 사이비 부흥사들도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무당 흉내를 내고 점쟁이 흉내를 내면서 교인들의 마음을 도둑질하고 사기치는 사기꾼들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정말 교인들의 영성을 더 풍부하게 하고 여호와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고 또 기도할 수 있는 그런 기도원이 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기도원들 가운데는 불건전한 기도원들이 있어서 이런 타락한 또, 탈선한 부흥강사들과 합작이 되어서 교인들의 마음을 도둑질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바른 신앙에서 이탈하게 하는 일들이 수없이 많은 것을 우리는 고백해야 될 줄로 생각됩니다.
또한 교회안에 성직 매매현상이 16세기 종교 개혁당시에는 아주 심각했습니다. 16세기 유럽 사회를 지배했던 정치적인 세력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였습니다. 칼 5세라는 합스부르크의 왕이 저멀리 포르투칼에서부터 북유럽까지 유럽 전 대륙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집안이 얼마나 골치아픈 집안이었는지 모릅니다. 그 전에는 제가 한국에서 교회사 책을 읽으면서 이해를 잘 못했는데 유럽에 가서 공부를 하면서 왜 그 당시 상황이 그렇게 고질적인 병에 들었을까 하고 고민을 하면서 교회사를 살피는 중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카톨릭의 말단 신부들이나 주교, 추기경, 교황에 이르기까지 종교적인 성직자들이 있었는데 오스트리아 같은 경우에는 왕자들이 여러명 있었는데 한 사람만 왕이 되게 되고 보니 나머지 왕자들이 성직을 나눠먹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왕자는 어느 지역의 추기경이 되기도 하고 어떤 왕자는 주교가 되어서 그 지역은 왕권이 미치지 못하고 주교가 다스리는 비솝툼이라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다스리게 된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 사람은 자신이 신학을 공부한 것도 아니고 신앙심이 돈독한 것도 아니고 오로지 정치적인 이유로 그 지역을 나누어서 성직을 가지고 다스리는 이런 현상이 생겼습니다. 그러다보니 그 사람들이 자기 영역을 다스리면서 그 성직을 팔어먹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어느 자리는 얼마, 어느 자리는 얼마는 하는 식이 된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성경이 대부분 라틴어로 되어 있었는데 심지어는 이 성경을 읽을 줄도 모른는 사람들이 성경을 들고 와서 주일날 미사를 집행하고 강론을 한다고 엉터리 쇼를 하는 일들이 다반사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을 부르짖으면서 가장 먼저 한 것이 성경을 번역하는 것이었습니다. 마틴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성경 번역을 통해서 일반 성도들이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성경을 읽으면서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전에는 사기꾼 같은 성직자들이 거짓말을 해도 아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엉터리 성직 매매를 통해서 엉터리 교회 지도자들이 생겨나게 되고 그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서 교회가 이끌려 나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교회가 타락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도 정말 이 무인가 신학교에서 무자격 성직자들을 배출하면서 이 부분은 우리 한국 교회가 힘을 합쳐서 극복해야 할 부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상적인 자격을 갖춘 신학교가 하나가 있다고 한다면 무자격 신학교는 10 곳 정도가 됩니다. 교인들이 그것을 분별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신학을 아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신학은 학문들 가운데 가장 어렵고 힘든 학문입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다른 것을 하다가 잘 안 되면 신학을 하겠다고 하고, 정상적인 기초 교육과정도 마치지 않은 사람이 신학을 하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얼마전에 신학을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저를 찾아왔길래 제가 신학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제가 신학을 하지 말라고 하니까 그 분이 섭섭하게 생각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신학이라는 것이 이런 학문이고 정말 고도의 학문적인 기초가 있는 사람들이 신학을 할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이 신학을 했을 때 바른 신학이 될 수 있다고 했더니 그 사람들이 머리가 좋아서 즉각적인 발론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드로도 쓰시지 않았느냐 무식한 베드로도 사용하셨는데 나같은 사람이 못할 것이 무엇이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참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대전땅에도 정말 바로 인가가 나지 않고 정상적인 신학교가 아닌 엉터리 신학교가 꽤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야간에 어디에 가서 성경 공부를 하겠다는 것은 말릴 필요가 없지만 신학을 해서 성직자가 되겠다는 것은 심각하게 고려해 보아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국가 고시를 치르러서 국가 고시를 통과한 사람만 성직자가 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또 교회 안에서 교회 장로가 되고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는 것은 교회를 위해서 죽도록 일을 하기 위해서 세운 직분인데 그 직분을 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뭐 장로되는 것은 1억이라든가 권사가 되는 것은 천만원, 혹은 이천만원의 돈을 교회에서 요구하고 그 돈을 바치고 그 직분을 사듯이 자격이 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교회 직분자가 되었을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한국교회는 16세기 종교 개혁 이전의 영적인 혼탁함이 우리 한국 교회 안에도 아주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을 해야 할 것입니다.
지나친 교파나, 교회 분리, 또 교회 안에서 헌금을 지나치게 강요하는 것,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예물을 바치는 것은 성경적인 원리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의 주머니를 노리고 헌금을 강요하는 것, 성경적인 원리를 떠나서 헌금을 내지 않으면 안 되도록 상황을 몰아가는 행위들은 한국 교회가 개혁되어져야 할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가장 깨끗해야 할 교회에서 가장 더러운 돈 문제를 가지고 교인들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끝까지 내지 않겠다고 버티는 사람에게 교묘한 수법을 써서 헌금을 강요하는 것은 분명 문제입니다. 한국 교회 헌금 제목가운데 6. 25기념 감사 헌금, 광복 기념 감사헌금 등 희한한 감사헌금이 다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도원에 가 보면 별미 헌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별미를 해서 아버지에게 바치고 이삭이 그 별미를 먹고 아들을 축복한 것처럼 별미 헌금이라고 해가지고 봉투에다가 헌금을 드리는 것입니다. 게다가 요즘은 사기꾼들이 하는 것인데 봉투 사역이라는 것이 있어서 헌금을 드리면 그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기도해 주는 이런 작태가 우리 한국 교회안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원에 한번 갔다온 사람들이 옆에 있는 교인들을 다 선동해서 같이 데리고 가서 봉투를 바치고 오늘 저 부흥 강사가 얼마나 영험한지 보자며 점쟁이를 찾아가는 가는 심보와 꼭같은 심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바로 사기꾼들과 그 사기꾼에 놀아나는 말씀 중심에, 말씀에 바로 서 있지 않은 엉터리 교인들이 만들어 낸 합작품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깨달아야 할 줄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인들과 성직자들의 비도덕적인 생활 등은 16세기 종교개혁 전야와 같은 그런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불신자들이 저지르는 죄악보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종교인들이 바른 자세로 바른 신앙을 가지지 못하고 저지르는 일들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불교나 유교나 다른 모든 종교를 비롯해서 종교가 그 사회에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도리어 사회를 더 어둡게 만들고 사회를 더 부패하고 더럽게 만드는 장본인들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운데 빠져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지난번 김영삼 정부에서 김대중 정부까지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를 거치면서 우리는 개혁이라는 말을 정말 신물이 나도록 듣지 않았습니까 정말 개혁이라는 말은 숭고하고 엄숙한 용어인데 이 두 정부를 거치면서 개혁이라는 용어가 남용되어지고 이 개혁이 자기의 정적을 처단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개혁의 칼자루를 들고 칼춤을 추웠던 그런 비극적인 현장들을 우리가 목도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혁은 너를 향한 개혁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을 향한 개혁에서부터 시작되어질 때 그 개혁이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절대 네가 개혁되어져야 할 대상이다라고 생각할 때는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 때 개혁은 실패하고 말게 됩니다. 개혁은 원죄의 속성을 지니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하고 진실되게 살지 못하고 온전하게 서지 못한 나를 향해서 칼을 들여대는 개혁, 나를 향해서 회개를 촉구하는 그 개혁을 부르짖을 때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며 오늘 이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세우길 바랍니다.
자, 여러분 오늘 분문을 보십시요.
11절에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었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다가 깰때가 벌써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을 성공하고 실패하는 사람들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때를 아는 것과 때를 모르는 것의 차이입니다. 때를 알고 그 때를 바로 자기 삶에 활용하고 주어진 때에 긍정적인 반응을 하는 사람은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때를 놓치고 때에 대하여 자기의 주어진 때를 잘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3장에서는 우리에게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 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라고 인생의 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자다가 깰 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우리를 향해서 자다가 깰 때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16세기 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까지 카톨릭이 지배했던 중세 1000년은 유럽 역사에서 암흑 시대라고 불리는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중세 1517년을 기점으로 해서 일어났던 이 종교개혁은 깊은 영적인 잠에 빠져 있던 영혼들을 불러 깨우는 그런 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이 성경 본문은 사실 방탕하기 짝이 없이 30년 이상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어긋난 길을 걸어가던 어거스틴을 회개하고 돌아오게 한 말씀입니다.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다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가정에서 아이들을 기르면서 이 녀석이 자기가 일어나서 스스로 공부해야 할만큼 동창이 훤히 밝았고 해가 중천에 올라서 벌써 학교갈 시간이 지났는데도 잠에서 깨지 못하고 늦잠을 자는 자식을 보는 부모의 심정 못지 않게 여호와 하나님의 심정이 우리를 향해서 애타는 심정을 가지고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는 이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세우면서 내가 지금 잘못된 삶을 살고, 잘못된 길을 가고 내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이것을 지금 다 청산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이 때를 바로 알고 바로 설 수 있는, 내 자신을 개혁해야 할 때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내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는 때가 바로 오늘 이시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때가 악하다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악하고 어둔 때에 어두움을 밝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우리 자신을 다시 세워나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자 여러분 다시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우리 자신이 청산해야 할 것을 청산하고 새롭게 무장하고 새롭게 결단하자는 촉구가 여기에 나와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벗어던져야 할 것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입어야 할 것을 바로 입지 못하는 그런 신앙의 행태를 보이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우리가 벗어야 할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며 오직 주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방탕과 술취함, 음란과 호색함, 쟁투와 시기함, 정욕을 위햐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이 모든 일들을 벗어던지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한다고 우리를 향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이것은 내가 청산해야 하는데…’,‘이것은 내가 버려야 하는데…’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정리하지 못하고 버리지 못하고, 청산하지 못하고 오늘까지 그냥 그렇게 흘러오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이 말씀으로 여러분 자신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나의 과거의 부끄러웠던 나쁜 행실들, 나쁜 습관들, 고질적인 나의 악습들을 오늘 다 과감하게 벗어던질 수 있는 결단을 오늘 이 시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 사회를 돌아다 보면 세계 술소비량이 어떻고, 음란 문화가 온 나라를 뒤덮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를 미주 공화국이 아니라 음란 공화국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여러분 유흥 업소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120만명이 넘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음란하고 얼마나 타락되어져 있는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중고등학생들인 청소년들 뿐만 아니라 초등학교 1,2학년 학생들에게까지도 음란 싸이트에 들어가서 눈을 부릅뜨고 여기저기를 두리번 거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초등학생들 가운데 커플링을 주고 받는 식의 예전에는 중고등학생들이 했던 일들을 초등학생들이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꼭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 음란 문화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를 드러내는 한 단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가장 어필하는 용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섹시하다’는 것입니다. 유치원 아이가 그 뜻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도 우리 선생님은 섹시하다고 그런다고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 가득한 쟁투와 시기를 보십시요.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쟁투와 시기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답답한지 모릅니다. 거짓말이 판을 치고 거짓말이 확대 재생산 되는 언론 기관들이 어느 것이 거짓말이고 어느 것이 진실인지를 대강 알만도 한데 아무렇게나 써대고 소리를 질러대다 보니까 온 국민들이 헷갈려서 어느 것이 정말이고 어느 것이 진짜인지 거짓말과 참말이 분간이 안 되고 경계가 없어져 버립니다. 목소리 큰 사람,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진실인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쟁투와 시기가 판치고 권모술수가 판치는 이 시대를 우리가 보면서 정말 이 조국과 민족, 국가를 위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에 ‘유혹에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대통령이 될 사람들이나 역대 지도자들에 대해서 비난하고 손가락질 할 것이 아니라 우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내 자신을 개혁하고 내 자신을 혁신하고 내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결단이 있다고 하면 위에서부터의 어떤 개혁이 아니라 아래에서부터의 개혁, 아래에서부터의 혁신이 있어진다고 한다면 우리 사회에는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3절에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들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우리가 나쁜 짓을 하며 바른 삶을 살지 못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한 것은 이제 이 시간 이전에 한 것으로 족하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런즉 지금부터는 우리는 벗어야 할 것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올바른 자세로 우리 자신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0절에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니라’여호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에베소서 4장 24절에 우리에게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영을 좇는 자가 아니라 육을 좇는 자였기에 우리는 가지 말아야 할 엉뚱한 곳을 찾아 갔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했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거역된 일들을 너무나 많이 했습니다. 진실된 일보다는 진실되지 못한 일에 기웃거리며 그것을 추구했고 그것에 욕심을 부렸던 그런 경우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 485주년을 맞이해서 내 속에 청산해야 할 요소가 무엇인가, 내 자신을 어떻게 개혁해야 할 것인가, 내가 내 자신을 어떻게 개혁해 나갈 것인가 하는지 리스트를 작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해가 다가기전에 여호와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내가 청산하고 개혁해야 할 것에 대해 리스트를 작성하고 적극적으로 그것을 개혁해 나가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19장 8절에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앞에서 새로운, 깨끗한 세마포 새 옷을 입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의 옳은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행실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세마포 새 옷을 입어야 하는데 우리는 누더기 옷같은 것을 입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구습을 좇는, 유혹의 욕심을 좇았던 삶을 살아왔던 것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우리 자신을 바로 세워나가야 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 장로교를 유럽에서는 개혁교회라고 합니다. 개혁은 완성된 용어가 아니라 끝없이 추구해야 할 용어인 것입니다. 우리 장로교의 시조인 칼빈은 ‘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져야 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으로 개혁이 끝난 것이 아니고 20세기에도 21세기에도, 아니 22세기에도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교회는 날마다 날마다 개혁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날마다 개혁되어지기 위해서는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입각해서 개혁되어지지 않으면 이 교회가 개혁되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종교개혁의 중요한 모토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개혁의 중심 사상은 성경 중심의 원리로 우리 신앙을 바로 세우자는 것이었습니다.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정말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나아가서 무릎 꿇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될 때 우리는 개혁적인 신앙, 개혁적인 사상을 가진 신앙인이 될 수 있고 우리 교회를 개혁하고 우리 사회를 개혁하며 온 세계를 개혁해 나가는 개혁의 주체 세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바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개혁은 너를 향한 개혁이 아니요, 나를 향한 개혁, 우리 자신을 향한 개혁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개혁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우리 모두가 개혁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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