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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개혁자 느헤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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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는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어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 헌신된 그리스도인
성숙한 신앙인 자기중심여호와 하나님 중심, 육체적인 기질, 인간의 지식이나 지성 중심이 아닌 전인격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룬 사람
헌신된 그리스도인 자기희생과 손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현대사회의 조류에 밀려 개인주의 신앙이다. 자기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면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피부에 문제가 위협이 다가와야만 비로소 부르짖기도 하고 심각성을 깨닫는다. 깨어있는 신앙인은 시대와 역시 앞에 현실을 분별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부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다. 용기있게 자신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사람이다.
오늘 교회의 현실, 우리의 신앙생활 지금에 만족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싫어한다. 현재상태가 최선과 최적은 아니더라도 별수 없는냥 여기고 지낸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런 점을 못마땅해 하신다. 느헤미야는 호화로운 왕궁-집에 거했다. 부러울 것이 없었다. 자신의 삶에 만족을 느끼지 못했다.
느헤미야는 자아를 극복한 사람이었다. 환경이라는 울타리에 머무를수 없었다. 그는 자신보다는 더 큰 조국과 민족의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자신의 삶을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드렸다.
1. 뷸신의 세상 가운데서도 오염되지 않았다. 분별력을 잃지 않았다. 1절
수산궁 거주/ 1:11 술관원/왕이 마시는 술을 먼저 시음하고 독이 있는지를 분별하는 직책/유대 토빗서라는 외경-국무총리직/왕의 최측근-왕의 생명과 직결된 매우 중요한 자리-가장 신임하는 사람이 맡았다/느헤미야는 당시 대제국 페르시아-소수민족-인정을 받고 왕의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일/
어떻게 느헤미야가 그와 같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우리는 여러 가지 추측을 할수 있다. 느헤미야서 13장 전체를 단숨에 읽어보면 그의 성품을 알게 된다.
1)성실한 사람, 강직한 사람, 사리가 분명한 사람.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서 유다에 가서 준비 계획 실천에 옮기는 하나하나를 보면 그는 매우 치밀한 사람이었다. 소수민족으로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많이 만났을 것이다. 굴하지 아니하고 최고의 자리에까지 이를수 있었던 것은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남들로부터 신뢰를 받기 시작. 그의 나이가 구체적으로 얼마인지는 모르나 수산성 페르샤에 살았다.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이야말로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는 사람이다라는 인정을 받았다.
우리는 흔히 공무원들이나 공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같은 요구를 한다. 그러나 그같은 성실성과 강직함은 240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모든 사람에게 삶의 현장에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이다.
공무원/청백리로 불리우는 사람/불신자가 사장으로 상관으로 있는 직장에 근무하는 사람과 같다. 느헤미야에게는 아파트 몇채를 살수 있는 뇌물도 술도 여자도 먹혀들지 아니하는 사람. 때로는 모함 중상 비방이 와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아니하고 맡은 일을 끝까지 처리하는 사람이다.
회식, 청탁, 불의한 일을 요구/ 먹히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는데는 어색하고 왕따를 받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없으면 일이 돌아가지 않는다. 그에게 주어진 일은 아무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완벽에 가깝다. 때로는 맘에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가진 성실, 정직, 철저함, 확실함은 아무도 따라오지 못했다.
2.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지 않은 사람이다.
1)귀족, 황실근무, 부와 귀가 전부가 아님을 알았다. 1:1 2:1
그는 황실에 근무, 왕의 최측근, 정부의 각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국사를 논하는 핵심적인 자리에 있었다. 그는 보장된 사람이었다. 더 이상의 고민이나 갈등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다. 그의 마음 속에 늘 부담이 있었다.
여호와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에 관 한 것이었다. 누가 살렘에 대해서 말하기만 하면 귀가 쫑긋해졌다. 가슴이 뛰기도 했다. 자신이 언젠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도성을 위해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헌신해야 할텐데라는 부담을 안고 있었다. 부모로부터 신앙교육을 철저히 스스로 자기인식에서 출발 알수 없으나 성경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들의 한결같은 특징을 그도 갖고 있었다.
2)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에 언제든지 응할 준비가 된 사람.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필요로 하신다면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을 과감하게 버릴 용기가 있는 사람. 그는 지금 자신이 누리는 부귀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잊지 않았다. 이 모든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지상에서 우리가 누리는 모든 혜택들이 주님을 위해 쓰임받을 때에 진정한 가치가 발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불신과 불확실성의 시대, 세속의 도시, 권력과 환락의 일번지 가운데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았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어떤 사람은 황금을 갖고도 똥보다 더 못하게 추하게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 느헤미야는 겸손한 사람의 전형이다. 무력하거나 나약하지 않았다. 예루살렘을 향한 거룩한 열정이 그의 가슴 속에 타오르고 있었다.
3)어느날 그의 형제 친동생 7:2 하나니와 두사람이 유다로부터 왔다. 2절 당연하게 그는 유다사람과 예루살렘의 형편에 대해서 물었다. 그의 대답은 기가 막혔다.
3~4 유대인들이 큰 환란을 만났다. 능욕을 받았다. 성은 훼파되었고 성문은 불에 탔다.
예루살렘은 B. C 586년에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함락, 불에 탔다. 536년부터 3차례에 걸쳐서 예루살렘 귀환이 시작, 고레스라는 왕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남북 이산가족상봉을 결정하듯 꿈같은 일이 이루어졌다. 성전의 재건과 봉헌 516년, 70년 세월이 지난 후에 회복시켰다.
그 내용이 에스라서-본래 느헤미야와 에스라는 한권의 책이었다가 분리. 느헤미야서는 그 이후의 일들이 기록되었다. 즉, 아닥사스다 왕의 464년에 성벽은 거의 복구되었다.
느헤미야가 등장하는 시기는 아닥사스다 왕의 제20년 B. C 444~5년으로 추정한다. 사마리아인들의 방해와 음모로 성벽은 파괴되었다. 이미 있었던 일이나 느헤미야가 접한 소식은 가장 최근의 일로서 최악의 상태인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당시의 페르샤는 정정이 불안정한 상태였다. 지방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형제들의 반란도 꿈틀거리는 시기였다. 바사의 왕이 느헤미야를 총독으로 임명 예루살렘의 주변국들이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정도의 실세일텐데…, 권력의 누수현상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또한 유다와 예루살렘이 바사와는 겉으로는 우호적이고 가까운 관계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에집트에 더 가까이 다가서 있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인 상황이 왕이 느헤미야에게 호의를 베푼 배경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유다는 완충적인 역할을 했다.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들어 사용하시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를 회복시키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세상 가운데 거하고 있었으나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한 사람을 지명하시어 그를 부르셨다.
3. 기도의 사람 4~5
느헤미야는 견딜 수 없는 슬픔에 잠겼다. 수일동안 음식을 전폐하고 기도했다. 그가 슬픔에 잠긴 이유는 자신의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자식이나 아내가 불행한 일을 당한 것이 아니었다. 느헤미야 개인에게 비극이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느헤미야는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슬퍼해야 하는 때가 언제인지를 가르쳐준다. 그는 그의 조국 유다사람들이 받은 환란과 능욕 때문이었다. 예루살렘 성문과 성벽이 불에 탄 것 때문이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모국-조국이 처한 현실과 유다인들이 당한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여겼다. 현대는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과 연관이 없으면 침묵하는 시대이다.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는 시대/눈물이 없는 시대, 모두들 자신이 당면한 문제에만 관심이 있다. 회사는 망해도 나만 살면 된다는 의식으로 가득찼다.
느헤미야는 모든 사람들이 절망이다.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끝났다고 손을 놓고 있는 시점에 일어선 사람이다. 아무도 선 듯 나서지 않는 현실을 안타까워한 사람이다.
이 시대에 누가 이런 사람을 찾을 수 있는가 이런 분을 만난 적이 있는가 솔직히 말해서 만난 적이 없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오늘 이 시대 교회가 원하는 사람이다. 교회는 이런 사람들로 양육되어지고 훈련되어져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도성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회복을 꿈꾸며 회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거룩함에의 열정과 불타는 비젼을 소유한 사람들로 인해서 이 땅은 소망이 있다. 그 존재가치가 인정된다. 만약 교회가 이와 같은 거룩에의 열정과 영광스러운 비젼을 잃어버린다면 더 이상 지상에 있어야 할 타당성이 없다.
4. 촉구한다.
1)최근 지나온 1~2주 내에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눈물 흘려 본적이 있는가
2)주님의 몸된 교회와 성도를 가슴에 안고 뜨겁고도 간절한 기도한 적이 있는가
3)주님은 느헤미야를 통해서 우리의 가슴이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충만해지기를 원하신다.
느헤미야는 분명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그는 모세처럼 애굽의 부귀영화와 권세를 과감하게 떨쳐버린 사람이다. 그는 예수님께서 광야 40일간의 금식 기도 후에 마귀의 시험을 물리친 것처럼, 자아를 극복하고 환경을 이긴 사람이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 앞에 두고 싯딤에서 모압 여자들에게 반해서 음행-여호와 하나님께서 진노/이스라엘 자손 한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의 목전에 미디안 여자를 데리고 자기의 장막에 들어갔다.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 그들에게 들어가서 창으로 찔러 죽였다. 염병이 그쳤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내가 진멸하지 않게 하였다. 민25:1~
어떤 사람은 신념과 민주주의를 위해 한 생명을 불태우기도 했다. 온몸에 기름을 끼얹고 노동악법철폐, 독재타도, 민주주의 만세, 갖가지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우리의 신앙이 그들이 외쳤던 구호나 신념보다 저급한 것이었나 무엇이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었는가
이 시대를 위해 거룩에의 열정으로 가득찬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야 한다. 교회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한 생애를 기꺼이 헌신하려는 그리스도인들 넘쳐나야 한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시시한 건물에 그럭저럭한 사람들이 모였다고 말할지 모르나,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주목하신다.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 움직인다. 성벽재건은 매우 인상적이다.
기독교계에도 갖가지 말들이 들려온다. 세습, 명예, 부패-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날은 그 어느때보다도 느헤미야처럼 여호와 하나님께 사로잡힌 사람을 필요로 한다. 누가 그처럼 살수 있는가 성령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같은 마음을 불어 넣어주시지 아니하면 아무도 이 길을 가지 못한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말미암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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