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나를 개혁합시다
본문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개혁과 변화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것은 국내외적으로 상상치도 못했던 엄청난 변화와 개혁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만 해도 거센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으며, 여러 가지 면에서 변화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구조 조정이라고 하는 지구촌이 된 세계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뼈를 깎는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그래야 만이 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선진국에서 다섯 사람이면 할 수 있는 일을 우리 나라는 여덟 명 열 명이서 하고 있으니 그렇지 않아도 뒤떨어진 나라가 경쟁이 안될 것은 뻔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대로 이 개혁이 쉽게 되지를 않습니다. 잘못된 것을 바꾸려고 하니까 지금까지 안주하던 세력의 반대가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습관을 보아도 바꿔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지금까지의 타성 때문에 쉽지 않은 것을 우리는 압니다. (예-아침 일찍 일어나는 일)
그러나 더 잘 살기 위해서는 개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체질 개선을 하는 것처럼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산성화-질병, 병을 고치는 것 보다 병들지 않는 몸으로 몸을 바꾸는 것이 필요)
전에 충남 공무원 교육원에서 당시의 충남대학교 총장이던 박희범 박사가 도내 234명의 읍면장들에게 강연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해서 신문에서 크게 말썽을 일으킨 일이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이 이루어진 미국이나 영국, 덴마크, 스웨덴, 스위스 같은 나라들은 다 잘되고 발전해 왔는데 쿠바, 스페인 ,포르투갈, 이태리 같은 천주교가 성한 나라는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은 참으로 생각할 일이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모신 개인!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가정,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한 나라들은 지상에서 천국의 복을 부분적으로나마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 484주년을 맞이하는 종교개혁 기념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에 95개조의 논제를 내걸고 로마 교황청과 정면 대결함으로써 교회를 새롭게 한 종교개혁을 되새기면서 오늘 우리가 무엇부터 먼저 개혁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연애를 할 때는 몰랐는데 결혼을 하고 보니 아내의 모든 것이 너무나도 자기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는 물을 마셔도 물을 먹고서는 바로 컵을 씻어서 제자리에 놓습니다. 누가 씻어도 씻을 컵이고, 언제 씻어도 씻을 것이니 바로 먹고 씻어서 두면 개운하고 보기도 좋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내는 찬장에 남아있는 마지막 하나까지 그릇을 사용하고서는 한꺼번에 씻습니다. 그리고는 몸살이 납니다.
자기는 어질어져 있는 것을 못 보는 성격이라 바로바로 치우는데 아내는 그 사이를 딛고 다닙니다. 나갔다 들어오면 양말은 양말, 옷은 옷, 가방은 가방 제멋대로 굴러다닙니다.
자기는 어디 갈 일이 있으면 새벽같이 일어나서 모든 것을 준비합니다. 이쑤시개, 손톱깎이, 휴지, 심지어 나오지도 않는 똥까지도 억지로 누고 챙기고 또 챙깁니다. 그런데 아내는 전혀 준비도 안하고 있다가 갈 때가 되면 그제야 화장실에 들어가서 일을 봅니다. 남편은 답답해서 미리미리 하지 않고 그런다고 하면 나오는 똥을 어떻게 하느냐고 이 집구석에서는 똥도 내맘대로 못 싸겠다고 하면서 도리어 성질을 낸다는 것입니다.
화장을 할 때도 뚜껑을 있는 대로 열어놓고서는 그냥 두고 맙니다. 하도 화가 나서 그렇게 뚜껑 다 열어놓으면 냄새 다 빠져나가고 물 되고 말 것인데 물만 바를 것이냐고 하면서 물이 그렇게도 좋으면 내가 양동이로 부어줄까
그래도 전혀 바꿔지지를 않더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늘어나는 것은 잔소리요 큰소리요 편할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면서 세마포와 머리 수건을 잘 정리하셨는데(요 20장) 부활하신 그 바쁜 와중에도 그렇게 하신 것을 당신 같은 사람 좀 배우라고 그러신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당신 성경을 믿냐고, 부활을 믿냐고' 하면서 성경을 들이대도 전혀 바꿔지지를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힘이 들어서 앞으로 어떻게 같이 살 것 생각하니 암담해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그 때 마음으로부터 들려오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네 아내 바꿀 생각 말고 네가 바꿔져라 라는 감동이 왔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보이는 대로 치우고 정리를 했다고 합니다. 화장할 때도 옆에 있으면서 하나 쓰면 '이거 다 썼어' 하고는 뚜껑을 닫고 하면서 배려를 하니 그때부터 아내가 조금씩 변화가 되더라고 합니다.
지금은 둘 다 가정사역 강사가 되어서 행복한 가정 만들기 하는 일에 함께 수고하는 좋은 부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개혁의 주체가 바로 나 자신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변하지 않고는 세상의 변함이 나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개혁이라는 말을 언급할 때마다 모두가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의 개혁만을 생각합니다. 하나같이 나 외의 다른 사람에 대한 개혁만을 생각하고, 기대하고, 강요합니다. 그래서 문제입니다. 그래서 걱정입니다.
언제 우리 모두 하나하나가 '개혁 그래, 이것은 내게 있어야 할 일이다, 내가 먼저 고쳐져야지'라고 생각을 하겠습니까 남의 개혁만을 기대하고 있고, 여기서만 멈추고 있다면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 개혁이라는 것은, 한 성도의 진실한 신앙적 고민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한 사람이 바뀌었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예수를 믿지 않던 사람이 믿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원래가 믿던 사람입니다. 더욱이 수도원에 들어가 있는 사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 평생을 바치기로 한 사람입니다. 바로 그 사람, 마르틴 루터 한 사람의 심령 속에 이루어진 변화가 그 인격과 그 생활을 바꾸고, 나아가 세계를 바꾸어놓는 역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이라는 이 엄청난 사건은 세계를 지향하면서 외친 구호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이 마침내는 정치개혁도 이루고, 문화개혁도 이루고, 사회개혁도 이루고, 세계마저도 개혁했습니다. 본래 이 역사가 그렇듯 거창하게, 세계 지향적으로 시작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유다왕 요시야 임금께서 일으킨 개혁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개혁자들은 대부분 예언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들 말고도 히스기야, 요시야, 에스라 같은 사람들도 개혁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요시야 왕의 개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요시야 왕이 유다왕들이 (더럽히고)헐어 버린 성전을 수리하게 합니다.
이같은 성전 수리는 단지 낡은 건물을 손질하는 정도의 일이 아니라, 그의 선조들이 이방 종교를 받아들이면서 훼손한 여호와의 성전을 본래의 모습대로 되돌리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2)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 책을 발견하였습니다.
이것이 요시야 개혁의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3) 여선지자 훌다가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에 적힌 말씀의 뜻을 풀어 주는 일을 합니다.
여선지자의 등장은 교회 개혁에 있어서 여자들의 역할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요시야의 개혁 운동의 특징을 말한다면, 모든 사람, 온 국민이 함께 이 일에 동참했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 힐기야, 서기관 사반과 그의 아들, 그 밖의 두 신하, 여예언자 홀다, 유다 곳곳의 장로들과 온 백성들이 뜻을 함께 모았습니다. 여기에서 특히 여성이 한 몫을 톡톡히 담당 하였습니다.
(4) 여선지자 홀다로 부터 율법책과 말씀이 뜻하는 바를 확실히 알게 된 요시야 왕은 그 내용을 온 백성들로 하여금 언약을 세우게 합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온 백성으로 하여금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고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말씀에 순종한 것을 약속하는 일입니다.
(5)요시야 왕은 예루살렘 성전과 유대 전역에 널리 퍼져 있던 이방 종교의 요소들을 없이하는데 힘썼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과 해와 달과 별들을 위해서 만든 모든 그릇과 아세라 상을 끄집어내어 성 밖 기드론 골짜기에서 불살랐으며 (4절, 6절)
여기 저기에 세워진 산당들을 헐었습니다. 요시야 왕이 가슴아프게 생각하며, 통곡했던 것은 이방 종교를 받아들인 선조들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훼손 당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전과 온 땅이 이방 종교의 요소들로 가득차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요시야 왕은 선조들이 훼손시킨 성전을 수리하고, 이방 종교들로 더럽혀진 성전과 유다땅의 곳곳에 베어 있는 이방 종교의 요소들을 제거하는 일에 혼신을 다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요시야가 행하였던 개혁 운동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개혁해야 할 것인가를 본문을 통해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개혁은 율법책에 기록된 그 말씀을 진지하게 듣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이것이 개혁의 출발이며,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먼저, 대제사장 힐기야의 주도하에 성전 수리를 하던 중에 율법책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힐기야 대제사장은 이 책을 서기관 사반에게 주었습니다. 사반은 먼저 그 책을 읽어 본 후, 임금에게 가지고 가서 보고를 합니다 그리고, 요시야 왕 앞에서 그 책을 읽었습니다. 요시야 왕은 그 말씀을 듣자, 옷을 찢습니다. 이는 슬픔과 놀람과 회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 율법책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여 선지자 홀다에게 사람들을 보내어 그 내용을 더 깊이 본 뜻을 알아보려 하였습니다. 이것은, 요시야왕은 율법책을 읽을 때, 자기 나름대로 율법책의 내용은 이해했지만, 스스로 어떤 조치를 취하기 앞서서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자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요시야 왕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경청하려고 하는 겸손한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위대한 모습! 여기에서 확실해 지는 것은, 율법책이 발견된 것도 중요하지만, 그 율법책이 효력을 제대로 낼 수 있었던 것은 이 율법책을 새롭게, 진지하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시야 왕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개혁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듣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말씀을 새롭게 발견하지 않고는 개혁이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로마서를 새롭게 발견함으로서 가능했으며, 칼 바르트 선생이 로마서 강해서를 새롭게 씀으로 유럽의 신학과 교회들의 개혁이 가능했습니다. 오늘날, 이 땅의 교회와 교인들이 개혁되기 위해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겸손하게 들어야 합니다.
본문 21절 말씀에 우리 열조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쏟으신 진노가 크도다라는 심판의 말씀이 있습니다. 요시야는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가슴 속 깊이 새겨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개혁의 원동력은 말씀입니다.
이 개혁의 시대에! 우리 자신이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이 나라, 이민족, 우리 사회가 개혁되어야 합니다. 온 백성들이 새롭게 개혁되어야 우리가 진실로 살 수 있습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심판의 말씀 앞에서 `어찌할꼬' 하며, 옷을 찢는 회개만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종교 개혁주일을 맞이하여 내가 먼저 개혁되는 혁명적 변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어떤 성자의 기도문 가운데 이러한 기도가 있습니다.
청년 시절,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주여 ! 나에게 이 세상을 개혁할 힘을 주소서.
어느덧 나는 중년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동안 단 한 사람의 영혼도 고쳐놓지 못했다.
그러자 나의 기도는 이렇게 달라졌다.
'주여 ! 제 주변의 사람들만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 주소서. ' 세월은 흘러 노인이 되었다. 임종(臨終)할 준비를 해야 했다.
그제서야 지난날의 쉬 뜨거워지고, 쉬 식었던 일들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지금의 내 유일한 기도는 이렇다.
'주여 ! 나 자신을 고쳐 주소서. '
여러분, 세상이 바꾸어지기를 바랍니까 먼저 나 하나가 바꾸어지기를 조용히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의 변화에 대해서는 잠깐 잊어버리십시오. 나 하나의 심령이 어떻게 개혁을 이루느냐에 따라서 세상은 세상대로 달라질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정말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홀로 새로운 모습으로 서게 될 때, 이것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이 땅에 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안일하게 권위주의에 머물던 로마 가톨릭교회를 뒤흔들어 놓았고, 새로운 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과거의 영광에 연연하여 안주할 때, 여호와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를 통하여 뒤흔들리게 될 것이며, 자칫 잘못하면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나 자신의 개혁을 이루도록 준비하여야 하겠습니다. 언제나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유롭게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구조 조정이라고 하는 지구촌이 된 세계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뼈를 깎는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그래야 만이 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선진국에서 다섯 사람이면 할 수 있는 일을 우리 나라는 여덟 명 열 명이서 하고 있으니 그렇지 않아도 뒤떨어진 나라가 경쟁이 안될 것은 뻔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대로 이 개혁이 쉽게 되지를 않습니다. 잘못된 것을 바꾸려고 하니까 지금까지 안주하던 세력의 반대가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습관을 보아도 바꿔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지금까지의 타성 때문에 쉽지 않은 것을 우리는 압니다. (예-아침 일찍 일어나는 일)
그러나 더 잘 살기 위해서는 개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체질 개선을 하는 것처럼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산성화-질병, 병을 고치는 것 보다 병들지 않는 몸으로 몸을 바꾸는 것이 필요)
전에 충남 공무원 교육원에서 당시의 충남대학교 총장이던 박희범 박사가 도내 234명의 읍면장들에게 강연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해서 신문에서 크게 말썽을 일으킨 일이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이 이루어진 미국이나 영국, 덴마크, 스웨덴, 스위스 같은 나라들은 다 잘되고 발전해 왔는데 쿠바, 스페인 ,포르투갈, 이태리 같은 천주교가 성한 나라는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은 참으로 생각할 일이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모신 개인!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가정,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한 나라들은 지상에서 천국의 복을 부분적으로나마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 484주년을 맞이하는 종교개혁 기념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에 95개조의 논제를 내걸고 로마 교황청과 정면 대결함으로써 교회를 새롭게 한 종교개혁을 되새기면서 오늘 우리가 무엇부터 먼저 개혁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연애를 할 때는 몰랐는데 결혼을 하고 보니 아내의 모든 것이 너무나도 자기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는 물을 마셔도 물을 먹고서는 바로 컵을 씻어서 제자리에 놓습니다. 누가 씻어도 씻을 컵이고, 언제 씻어도 씻을 것이니 바로 먹고 씻어서 두면 개운하고 보기도 좋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내는 찬장에 남아있는 마지막 하나까지 그릇을 사용하고서는 한꺼번에 씻습니다. 그리고는 몸살이 납니다.
자기는 어질어져 있는 것을 못 보는 성격이라 바로바로 치우는데 아내는 그 사이를 딛고 다닙니다. 나갔다 들어오면 양말은 양말, 옷은 옷, 가방은 가방 제멋대로 굴러다닙니다.
자기는 어디 갈 일이 있으면 새벽같이 일어나서 모든 것을 준비합니다. 이쑤시개, 손톱깎이, 휴지, 심지어 나오지도 않는 똥까지도 억지로 누고 챙기고 또 챙깁니다. 그런데 아내는 전혀 준비도 안하고 있다가 갈 때가 되면 그제야 화장실에 들어가서 일을 봅니다. 남편은 답답해서 미리미리 하지 않고 그런다고 하면 나오는 똥을 어떻게 하느냐고 이 집구석에서는 똥도 내맘대로 못 싸겠다고 하면서 도리어 성질을 낸다는 것입니다.
화장을 할 때도 뚜껑을 있는 대로 열어놓고서는 그냥 두고 맙니다. 하도 화가 나서 그렇게 뚜껑 다 열어놓으면 냄새 다 빠져나가고 물 되고 말 것인데 물만 바를 것이냐고 하면서 물이 그렇게도 좋으면 내가 양동이로 부어줄까
그래도 전혀 바꿔지지를 않더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늘어나는 것은 잔소리요 큰소리요 편할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면서 세마포와 머리 수건을 잘 정리하셨는데(요 20장) 부활하신 그 바쁜 와중에도 그렇게 하신 것을 당신 같은 사람 좀 배우라고 그러신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당신 성경을 믿냐고, 부활을 믿냐고' 하면서 성경을 들이대도 전혀 바꿔지지를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힘이 들어서 앞으로 어떻게 같이 살 것 생각하니 암담해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그 때 마음으로부터 들려오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네 아내 바꿀 생각 말고 네가 바꿔져라 라는 감동이 왔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보이는 대로 치우고 정리를 했다고 합니다. 화장할 때도 옆에 있으면서 하나 쓰면 '이거 다 썼어' 하고는 뚜껑을 닫고 하면서 배려를 하니 그때부터 아내가 조금씩 변화가 되더라고 합니다.
지금은 둘 다 가정사역 강사가 되어서 행복한 가정 만들기 하는 일에 함께 수고하는 좋은 부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개혁의 주체가 바로 나 자신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변하지 않고는 세상의 변함이 나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개혁이라는 말을 언급할 때마다 모두가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의 개혁만을 생각합니다. 하나같이 나 외의 다른 사람에 대한 개혁만을 생각하고, 기대하고, 강요합니다. 그래서 문제입니다. 그래서 걱정입니다.
언제 우리 모두 하나하나가 '개혁 그래, 이것은 내게 있어야 할 일이다, 내가 먼저 고쳐져야지'라고 생각을 하겠습니까 남의 개혁만을 기대하고 있고, 여기서만 멈추고 있다면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 개혁이라는 것은, 한 성도의 진실한 신앙적 고민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한 사람이 바뀌었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예수를 믿지 않던 사람이 믿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원래가 믿던 사람입니다. 더욱이 수도원에 들어가 있는 사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 평생을 바치기로 한 사람입니다. 바로 그 사람, 마르틴 루터 한 사람의 심령 속에 이루어진 변화가 그 인격과 그 생활을 바꾸고, 나아가 세계를 바꾸어놓는 역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이라는 이 엄청난 사건은 세계를 지향하면서 외친 구호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이 마침내는 정치개혁도 이루고, 문화개혁도 이루고, 사회개혁도 이루고, 세계마저도 개혁했습니다. 본래 이 역사가 그렇듯 거창하게, 세계 지향적으로 시작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유다왕 요시야 임금께서 일으킨 개혁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개혁자들은 대부분 예언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들 말고도 히스기야, 요시야, 에스라 같은 사람들도 개혁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요시야 왕의 개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요시야 왕이 유다왕들이 (더럽히고)헐어 버린 성전을 수리하게 합니다.
이같은 성전 수리는 단지 낡은 건물을 손질하는 정도의 일이 아니라, 그의 선조들이 이방 종교를 받아들이면서 훼손한 여호와의 성전을 본래의 모습대로 되돌리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2)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 책을 발견하였습니다.
이것이 요시야 개혁의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3) 여선지자 훌다가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에 적힌 말씀의 뜻을 풀어 주는 일을 합니다.
여선지자의 등장은 교회 개혁에 있어서 여자들의 역할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요시야의 개혁 운동의 특징을 말한다면, 모든 사람, 온 국민이 함께 이 일에 동참했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 힐기야, 서기관 사반과 그의 아들, 그 밖의 두 신하, 여예언자 홀다, 유다 곳곳의 장로들과 온 백성들이 뜻을 함께 모았습니다. 여기에서 특히 여성이 한 몫을 톡톡히 담당 하였습니다.
(4) 여선지자 홀다로 부터 율법책과 말씀이 뜻하는 바를 확실히 알게 된 요시야 왕은 그 내용을 온 백성들로 하여금 언약을 세우게 합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온 백성으로 하여금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고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말씀에 순종한 것을 약속하는 일입니다.
(5)요시야 왕은 예루살렘 성전과 유대 전역에 널리 퍼져 있던 이방 종교의 요소들을 없이하는데 힘썼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과 해와 달과 별들을 위해서 만든 모든 그릇과 아세라 상을 끄집어내어 성 밖 기드론 골짜기에서 불살랐으며 (4절, 6절)
여기 저기에 세워진 산당들을 헐었습니다. 요시야 왕이 가슴아프게 생각하며, 통곡했던 것은 이방 종교를 받아들인 선조들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훼손 당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전과 온 땅이 이방 종교의 요소들로 가득차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요시야 왕은 선조들이 훼손시킨 성전을 수리하고, 이방 종교들로 더럽혀진 성전과 유다땅의 곳곳에 베어 있는 이방 종교의 요소들을 제거하는 일에 혼신을 다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요시야가 행하였던 개혁 운동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개혁해야 할 것인가를 본문을 통해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개혁은 율법책에 기록된 그 말씀을 진지하게 듣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이것이 개혁의 출발이며,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먼저, 대제사장 힐기야의 주도하에 성전 수리를 하던 중에 율법책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힐기야 대제사장은 이 책을 서기관 사반에게 주었습니다. 사반은 먼저 그 책을 읽어 본 후, 임금에게 가지고 가서 보고를 합니다 그리고, 요시야 왕 앞에서 그 책을 읽었습니다. 요시야 왕은 그 말씀을 듣자, 옷을 찢습니다. 이는 슬픔과 놀람과 회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 율법책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여 선지자 홀다에게 사람들을 보내어 그 내용을 더 깊이 본 뜻을 알아보려 하였습니다. 이것은, 요시야왕은 율법책을 읽을 때, 자기 나름대로 율법책의 내용은 이해했지만, 스스로 어떤 조치를 취하기 앞서서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자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요시야 왕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경청하려고 하는 겸손한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위대한 모습! 여기에서 확실해 지는 것은, 율법책이 발견된 것도 중요하지만, 그 율법책이 효력을 제대로 낼 수 있었던 것은 이 율법책을 새롭게, 진지하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시야 왕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개혁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듣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말씀을 새롭게 발견하지 않고는 개혁이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로마서를 새롭게 발견함으로서 가능했으며, 칼 바르트 선생이 로마서 강해서를 새롭게 씀으로 유럽의 신학과 교회들의 개혁이 가능했습니다. 오늘날, 이 땅의 교회와 교인들이 개혁되기 위해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겸손하게 들어야 합니다.
본문 21절 말씀에 우리 열조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쏟으신 진노가 크도다라는 심판의 말씀이 있습니다. 요시야는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가슴 속 깊이 새겨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개혁의 원동력은 말씀입니다.
이 개혁의 시대에! 우리 자신이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이 나라, 이민족, 우리 사회가 개혁되어야 합니다. 온 백성들이 새롭게 개혁되어야 우리가 진실로 살 수 있습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심판의 말씀 앞에서 `어찌할꼬' 하며, 옷을 찢는 회개만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종교 개혁주일을 맞이하여 내가 먼저 개혁되는 혁명적 변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어떤 성자의 기도문 가운데 이러한 기도가 있습니다.
청년 시절,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주여 ! 나에게 이 세상을 개혁할 힘을 주소서.
어느덧 나는 중년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동안 단 한 사람의 영혼도 고쳐놓지 못했다.
그러자 나의 기도는 이렇게 달라졌다.
'주여 ! 제 주변의 사람들만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 주소서. ' 세월은 흘러 노인이 되었다. 임종(臨終)할 준비를 해야 했다.
그제서야 지난날의 쉬 뜨거워지고, 쉬 식었던 일들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지금의 내 유일한 기도는 이렇다.
'주여 ! 나 자신을 고쳐 주소서. '
여러분, 세상이 바꾸어지기를 바랍니까 먼저 나 하나가 바꾸어지기를 조용히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의 변화에 대해서는 잠깐 잊어버리십시오. 나 하나의 심령이 어떻게 개혁을 이루느냐에 따라서 세상은 세상대로 달라질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정말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홀로 새로운 모습으로 서게 될 때, 이것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이 땅에 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안일하게 권위주의에 머물던 로마 가톨릭교회를 뒤흔들어 놓았고, 새로운 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과거의 영광에 연연하여 안주할 때, 여호와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를 통하여 뒤흔들리게 될 것이며, 자칫 잘못하면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나 자신의 개혁을 이루도록 준비하여야 하겠습니다. 언제나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유롭게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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