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TOP
DOWN

[부활절] 부활은 확실하다 (고전 15:1-11)

본문

부활은 확실하다 (고전 15:1-11)


 


제목 : 부활은 확실하다  

본문 : 고린도전서 15:1-11 ; (신약 282 쪽) 그리스도의 부활  


(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3)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1)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I. 봄은 막을 수 없다  

“몇 십만의 인간이 한곳에 모여 자그마한 땅을 불모지로 만들려고 갖은 애를 썼어도, 그 땅에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게 온통 돌을 깔아 버렸어도, 그곳에 싹트는 풀을 모두 뽑아 없앴어도, 검은 석탄과 석유로 그을려 놓았어도, 나무를 베어 쓰러뜨리고 동물과 새들을 쫓아냈어도 도시에 돌아오는 봄을 막을 수는 없었다. 태양은 따사롭고 풀은 소생한다.” 

인류의 고전으로 사랑받는 톨스토이의 『부활』 첫머리이다. 이 대목만으로도 우리는 『부활』이라는 작품이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세상 무엇으로도 다시 살아나는 생명의 힘을 막을 수 없다는 것, 그래서 톨스토이는 작품의 제목을 ‘부활’(보스크레세니에)이라 했다. 그 어떤 것으로 막으려 하고 또 아무리 부정해 본다 할지라도 새 생명의 부활은 엄연히 존재한다. 하나님께서는 왜 부활이 있게 하시고 그것을 우리 인간에게 믿도록 말씀하고 계시는 것일까? 



올해도 어김없이 부활절이 왔고,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봄이 다시 찾아왔다. 작년에는 유독 봄이 더 빨리 왔었고 벚꽃도 일찍 피어 강렬하게 봄의 부활을 알려 주었던 기억이 있다. 모처럼 봄을 즐겨 보려고 우리 가족은 작년 4월 첫 주일에 예배를 드린 뒤 벚꽃의 명소인 ○○대학교 교정을 찾았다. 그러나 한발 늦어 이미 벚꽃은 절정을 지나 꽃잎이 떨어지는 상태였다.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톨스토이의 글을 생각하며 벚나무들에게 이렇게 인사를 건넸다. “우리 인간이 계속 환경을 어지럽히고 식물들을 못살게 군다 할지라도, 너희 벚나무들아! 내년에도 다시 아름답게 꽃을 피워다오. 나도 때를 잘 맞춰 너희들을 찾아올테니 생명의 봄에 다시 만나자.” 

해마다 거듭 깨닫게 되는 것이지만, 부활이야말로 우리가 확신해야 할 궁극적 믿음이라는 사실이다. 부활 주일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지난 한 주간, 고난의 일정을 보내왔다. 예수님께서 군중의 환호 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무서운 음모가 급박하게 진행되고, 드디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된다. 부활의 날이 오기까지 죽음을 넘어서는 고난의 시간들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고난의 날에 부활을 더욱 확신할 수 있다. 성경은 죄와 고난, 그리고 부활을 어느 것 하나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연결선상에 올려놓았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3b-4절). 



II. 예수님은 부활 생명이시다  

본문은 ‘성경대로’를 강조한다. 여기서의 성경은 구약을 가리키지만, 그 말씀대로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고 부활 신앙을 가르치셨다. 그 배경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며칠 전이다. 예루살렘에서 오리 정도 떨어진 베다니 마을에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라는 세 남매가 살고 있었다. 이 가족은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하며 헌신의 모범이 되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젊은 나사로가 그만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예수님은 그때 요단 강 건너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계셨는데(요 10:40), 그곳 이름도 우연히 베다니였다(요 1:28). 베레아의 베다니라 부르는 그곳에서 예루살렘 부근 베다니까지는 꼬박 하룻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사역으로 인해 이틀 후에야 비로소 출발하실 수 있었다. 이미 나사로의 육신은 무덤에 들어갔고 시신에서 냄새가 나는 상태였다. 

예수님은 슬픔에 잠긴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요 11:23)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24절)라고 대답했다. 마르다의 이 말은 당시 유대인의 신앙으로서는 좀 생소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구약의 유대교는 죽음 후의 부활과 생명에 대해서 확실한 믿음을 주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스겔 37장의 말씀처럼 마른 뼈 집단이 군대를 이루어 살아나는 환상의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개인의 부활이 구체적으로 제시된 것은 아니었다. 예언서의 경우에도 거의 유사한 문제들이 제기된다. 


이사야 말씀에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사 26:19)라는 예언이 있다. 부활의 예고가 틀림없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예언을 부활의 약속보다는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의 회복으로 먼저 해석하였다.


또 다니엘의 예언에는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단 12:2) 하는 말씀이 있어 종말에 일어날 부활을 알려 준다. 하지만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 환상과 계시로 내리신 말씀으로 보았다. 오히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3b절)는 영광스런 약속이 더 강조되었다.


그렇다면 마르다는 어떻게 마지막 날의 부활 신앙을 가질 수 있었을까? 아마도 얼마 전 유대인의 명절 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부활 선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 말씀은 이렇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 예수님은 생명의 부활이든 심판의 부활이든, 그때는 모든 사람이 무덤에서 다 일어난다고 하셨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지막 때의 부활을 믿음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다는 마지막 부활은 믿었어도 지금 눈앞에 서 계시는 예수님께서 부활 그 자체가 되신다는 것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우리도 역시 성경말씀을 믿는다 하면서도 막상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 그 자체이시며 부활 생명이라는 가장 본질적인 사실을 잊어버릴 때가 많다. 그리고 나도 그를 믿으면 생명의 부활을 하게 된다는 사실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때 예수님은 참으로 중요한 말씀을 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셨다. 이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다섯 번째 ‘아이 엠’(I am)으로서 예수님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신 대목이다. 앞서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 세상의 빛, 양의 문, 선한 목자라 하신 예수님은 이제 궁극적으로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라 선언하셨다. 

이것은 육체적인 차원을 초월하는 말씀이다. 죽어도 산다고 하시고,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시니 듣는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모든 사람은 육체를 갖고 살다가 죽음에 이르면 육신이 끝나게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음은 결코 종말이 아니며 그 후에 부활이 있고, 부활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해 영생으로 이어질 것임을 말씀하셨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주님은 이미 죽어 냄새나는 나사로를 일으키셨다. 

나사로가 살아났다. 이 소식은 예루살렘 지역에 살던 사람들에게 엄청난 특급 뉴스였다.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요 12:11)는 기록을 보라. 역시 사람들은 죽음의 문제에 부딪쳐야 믿음이 생기는 법이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님께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대제사장들은 크게 당황한 나머지 나사로를 죽이려고 모의했다. 어떻게 살아난 사람인데 또 죽이려 하다니!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그토록 열렬히 환영한 것은 얼마 전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표적이 급속하게 퍼졌기 때문이었다(요 12:17-18). 

예루살렘 사람들이 뒤늦게 알아서 그렇지, 실은 갈릴리 지역에서 예수님은 두번이나 죽은 사람을 살리신 적이 있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12살 어린 나이로 죽었던 것을 예수님께서 일어나게 하셨다. 그 유명한 “달리다굼.”(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막 5:41)은 이때 하신 말씀이다. 또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어 사람들이 관을 메고 나오는 것을 멈추게 하시고 그 관 속에 누운 청년을 살리셨다(눅 7:11-17). 갈릴리 사람들의 놀라움이 얼마나 컸겠는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고 계심을 깨닫기 시작했을 것이다. 



III. 부활 예수님을 보았다  

2014년 2월 28일, 놀랄 만한 일이 일어났다. 미국 미시시피 주에 살던 월터 윌리엄스라는 사람이 사흘 전에 죽어 의사로부터 사망 판정을 받았다. 78세 되는 노인이었다. 그런데 시신이 보관용 비닐에 담겨 장의사로 옮겨 간 뒤에 그가 살아난 것이다. 담당자가 방부제 처리를 하려 하자 시체의 다리가 움직이면서 노인이 깨어났다. 검시관은 기적이라 말했다. 완전한 사망 확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계의 언론이 앞을 다투어 보도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도 보도를 통해 보았을 것이다. 사실 나도 그 사람이 얼마를 더 살 것인지가 궁금했다. 윌리엄스 노인은 2주 후 다시 사망했다. 가족들은 짧은 날들을 보낸 뒤 또다시 그와 작별해야 했다. 그러나 가족들은 그가 죽음에서 살아나 함께한 1분 1초가 정말 귀중한 생명의 시간이었다고 말하며 울먹였다. 다시 보도가 없었으므로 윌리엄스가 두 번째로 살아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런 경우 그것을 부활이라 말하기 어렵다. 주님과 함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한 것이 아니고 곧 다시 죽은 까닭이다. 그래서 소생이라는 용어를 써야 옳다는 주장이 있다.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은 부활이 확실하지만, 야이로의 딸이나 나인성의 청년이 경험한 바는 소생이다. 그리고 나사로의 경우,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말씀하셨기에 그가 살아난 사건이 부활의 예증은 될 수 있어도 성격상으로는 소녀나 청년처럼 소생으로 봐야 한다.


 


구약의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렸고(왕상 17:17-24),


엘리사 선지자 역시 수넴 여인의 아들을 일으켰지만(왕하 4:17-37) 성경에 부활이라고 기록되지는 않았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다비다를 살린 것이나(행 9:36-43),


바울이 유두고를 살린 일도(행 20:7-12) 모두 소생에 해당한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되고 오직 그의 주관하심 속에 영생으로 이어진다. 


본문은 참된 부활의 의미를 말하기 전에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을 열거하고 있다.


바울 사도가 이 서신을 기록할 무렵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들이 아직 생존하고 있었으므로 부활의 증언자가 될 수 있어서 그만큼 전파가 용이하다는 점이 고려되었다. 베드로, 열두 제자, 오백여 형제, 주님의 동생 야고보, 그리고 사도 중에 작은 자인 바울까지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한다. 여기에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 외에도 막달라 마리아,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의 두 제자 등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부활을 전파하였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들은 삶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 전파하고 싶은 의욕과 용기가 일어났다. 단순한 소생과 구별할 수 있는 분별력도 생겼다. 영생에 대한 기쁨과 확신이 넘치게 되었다. 그러나 부활을 믿지 않고 교회를 적대시하는 사람들은 죽은 자가 부활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박한다. 



IV. 부활을 확신한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부활하지 못했다는 말이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고,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거짓이며,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불쌍한 자가 되고 말 것이 아니겠는가? 부활이 없다면 신앙 자체가 완전히 붕괴된다는 뜻이다. 

기독교인이란 예수님께서 인간들의 죄악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일종의 지식일 뿐, 정작 신앙은 그 다음부터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죽음을 당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셔서 사망을 이기고 부활 승리를 주셨다. 이것을 믿음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신앙이 시작되고, 그 부활을 이룸으로써 신앙이 완성된다. 

오늘 본문을 잇는 말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의 ‘첫 열매’라 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이스라엘 자손들은 가나안 땅에 이르러 추수할 때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레 23:10b)을 명령받았다.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린 후에 백성들은 추수한 곡식을 먹고 기뻐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앞으로 인간에게 주실 부활의 보증이며 약속이라는 점을 구약의 제사의식과 연결시켜 표현한 구절이다. 

예수님이 처음 부활이시고, 부활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로 믿는 우리도 그를 따라 부활할 것이다. 이 영광의 소망을 가슴에 품고 부활 신앙을 확고히 가져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부활이야말로 우리 믿음의 마지막 종착점이라는 사실이다.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성경에서도 극단적으로 ‘망하였다’(고전 15:18), ‘더욱 불쌍하다’(고전15:19) 등 과격한 용어를 쓰고 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망한 것이다. 부활을 믿고 세상의 욕심을 억눌렀으니 불쌍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다. 망할 것을 각오하고 나섰으므로 이제 우리는 부활 신앙에 올인할 수밖에 없다. 인생 전부를 쏟아부어 영원을 얻는 믿음의 행로에 나서야 한다. 

이 행로를 걸으면서 분명히 해 둘 일이 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부활에 대한 믿음이 희미한 사람들이 많다.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라고 예배 때마다 신앙고백을 하지만 영생의 확신을 갖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부활 신앙을 갖기까지 혼란스러웠던 시절이 있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만약 부활이 없다 해도 하나님의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으니 망한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하기도 했다고 한다. 부활 신앙은 아무나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활의 전 단계로 죽음이 있다. 백 년이 지나면 우리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죽어 이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부활 신앙을 가졌든 갖지 못했든, 가진 체했든 희미하게 가져 보려 했든 간에 모두 죽을 수밖에 없다. 의사는 우리의 사망진단서에 죽음의 원인을 여러 가지로 기록해 놓았으리라. 뇌혈관 파열, 심근경색, 교통사고에 의한 흉부압착 등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원인을 한 가지로 보신다. 무엇인가? 죄, 바로 그것 때문이다. 

무덤에서 내 육신은 썩고 태워지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오면 죄인 모두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때 천국에서 영생하는 부활과, 지옥의 고통에 들어갈 부활로 나누어질 것임을 명백히 말씀해 주셨다. 



V. 변하게 하실 것이다  

마지막 고민이 있다. 그날에 부활한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노인으로 쭈글 쭈글 주름진 상태라면 어떻게 할까? 장기기증을 해서 눈 없이 부활하게 된다면 어떻게 할까? 허리 아프게 살다가 그 모양으로 부활하면 계속 힘들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이 부활을 맞이하는 인간들의 고민이라 하겠다. 

이 모든 염려를 단숨에 제거하는 말씀이 있다. 생명의 부활은 완전한 변화와 함께 온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 15:52). We will be changed, 바뀐다고 하신다. 부활의 때 우리는 벌써 썩지 않은 변화체로 바뀌어져 있을 것을 알려 주고 있다. 죽었던 것처럼 땅에 묻혔던 씨가 변화되어 푸르게 자라나는 싹이 되는 것과, 보잘것없이 꿈틀거리던 애벌레가 봄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나비와 잠자리로 바뀐 것을 보라. 우리도 변화될 것이다. 죽음이 생명으로 변화되고, 영원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완전한 변화가 이루어지게 되리라. 



고난의 인생길이다. 그러나 이 인생 후에 영광스런 변화가 찾아온다는 확신이 곧 부활 신앙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고 있는 우리의 약한 몸, 병든 몸, 제한된 인생을 어떻게 하실까?


어떤 모습으로 바꾸어 주실까?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우리들에게 주신 성경의 약속이 여기 있다.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1).


벌레처럼 천했던 이 육신이 부활하신 영광의 그리스도와 같은 형체로 변하게 될 것을 우리는 확실히 믿는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