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은혜로의 종교개혁
본문
오늘은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마틴 루터가 로마 카톨릭에 대항하여 종교 개혁을 일으킨지 485주년을 맞는 주일입니다. 마틴 루터가 1517년 10월31일에 비텐베르크 교회정문에 95개조항의 항의문을 걸고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었습니다. 그 때 루터가 종교개혁의 표어로 걸었던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7절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이 말씀이 종교개혁의 깃발이었고 나팔이었습니다.
1415년 어느날 종교개혁자 존 후스가 거리에 나왔다가 두 그림이 나란히 붙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나귀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초라한 모습의 그림이요, 또 하나는 금관을 쓰고 사람들이 어깨에 맨 호화찬란한 가마를 타고 몸종들이 옆에서 양산을 바쳐 들고 로마로 입성하는 로마 교황의 그림입니다. 후스는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누가 왕이고 누가 종이란 말인가' 교황이 왕이고 예수님은 교황의 종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요한 후스는 드디어 외치고 말았습니다.
'누가 저 로마 교황의 가면의 벗길 수가 있다는 말이냐' 결국 1415년 7월6일에 단두대의 이슬로 후스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마틴 루터가 교황을 만나보려고 교황청에 들어갔습니다. 그 때 루터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습니다. 많은 추기경들이 교황의 발가락에 입을 맞추고 있는 광경을 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천주교입니다. 루터는 이 광경을 보고 심령이 너무 컬컬하고 괴로웠습니다.
견딜 수가 없어 위로 받고 은혜 받기를 위해서 당시 거룩한 빌라도의 사닥다리라고 일컫는 층계를 무릎으로 걸어가면서 층계하나 하나 오를 때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이런 축복을 받는 다는 이야기를 연상하면서 올랐으나 루터에게는 무의미 하기가 그지 없습니다. 층계를 오르면서 다른 깊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지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은 로마서 1장17절의 진리를 깨달은 때문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당시의 로마 카톨릭이 얼마나 비 성경적 이었는지 모릅니다.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어찌 면죄부, 종이 쪽지 한 장이 인간의 주홍같이 붉은 죄, 먹장 같이 검은 죄를 깨끗케 할 수가 있다는 말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리아를 숭상했습니다. 마리아는 죄 없는 몸으로 잉태되었고 죽은 후에 부활했고, 그리고 승천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 이런 기록이 있단 말입니까 교황에게는 오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교황무오설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교황보다 낮추면서 교황의 말을 성경시 했습니다. 얼마나 비 성경 적이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모독하는 처사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를 사한다고 하니 얼마나 빗나간 성경해석인지 모릅니다. 어찌 죄인이 죄를 사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러한 형편을 보았던 루터는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종교개혁 485주년을 맞으며 기독교는 이제 세상의 소리를 귀담아 들을 때가 왔습니다.
뼈아푼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종교계가 구조조정 1순위라는 지적입니다. 카톨릭과 불교, 개신교 평신도단체들이 연합해 조직한 ‘개혁을 위한 종교NGO네트워크준비위원회’라는 모임이 있습니다. 이 모임에서는 작년(2001년) 4월 26일 ‘한국의 종교권력과 시민사회’라는 세미나를 개최한 적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화여자대학의 최준식 교수는 한국의 종교들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의 말을 간추려보면 이렇습니다. ‘종교계는 대 사회적으로 해야 할 기능은 터무니없이 약하고 생산성도 별로 없다. 우리 종교계야말로 구조조정 1순위이다. 종교계는 비합리적이고 권위적이며, 독선과 아집에 휩싸였을 뿐만 아니라, 혈연과 지연, 집단이기주의 등의 사회의 불합리한 요소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리고 각자의 철옹성 속에서 배타적인 자세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 현재 종교의 모습이다. ’ 그리고 한 마디를 더 합니다.
“하지만 외부세력이 관여할 수 없고 스스로 개혁하기를 기대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 ”
한 마디로 말하면 ‘종교가 썩을 대로 썩었는데, 거기다 너무 독선적이어서 고쳐질 희망이나 기대를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성공회 신학대학교의 권진관 교수는 ‘종교가 너무 내면화, 개인화 되어 있다’고 비판하고, ‘이런 종교는 기존 질서의 유지 확대에 기여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만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또 ‘종교인이 사회라는 몸 속에 들어가 생명력이 흐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면서 ‘종교가 풍부한 자원으로 사회 속에서 자기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물론 이들의 비판은 기독교 하나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기에 기독교계의 감추어진 선한 면들이 함께 매도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 비판의 기준이 ‘사회 속에서의 역할’에 중점을 두었기에 신앙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비판을 외면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사회와 무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지, ‘너희는 교회 안의 소금이다. 교회 안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주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성전이나 회당보다는, 더 많은 시간을 오히려 밖에서 활동하시면서 사람들을 만나주시고, 그늘진 곳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빛을 주시고, 고통을 받는 환자들을 고쳐주시고,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끌어안아 주셨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신앙생활은 산 속에 들어가 세속과의 연을 끊고 기도와 말씀묵상에만 전념하는 수도원 생활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성전에 올라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능력을 힘입고는, 사회 속으로 파고들어 어둠을 몰아내고 복음을 사람들의 가슴에 심어 이 땅에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역사를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는 지금의 종교가 대 사회적 기능이 터무니없이 약하다는 지적에 대하여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그리고 독선과 아집에 휩싸여 있을 뿐 아니라 혈연과 지연으로 이루어진 집단 이기주의와 같은 사회의 불합리한 요소들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비판에도 고개를 돌려서도 아니 되겠습니다. 그리고 철옹성과 같이 배타적인 자세로 변화의 노력도 잃어버렸다는 지적도 외면 해서도 아니 될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제 우리는 비판을 위한 비판은 걸러내되 진실에 기반한 비판이라면 겸허하게 수용할 때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변화의 시간을 놓치고 있는지 모릅니다. 종교계가 구조조정의 1순위라는 말은 충격에 해당합니다. 그 속에 우리 기독교가 포함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비극인 것입니다.
이런 비판적인 공격은 핍박이 아닙니다. 핍박은 정녕 우리의 신앙에 부끄럼이 없음에도 그 자유를 억압당하는 것이 핍박이지, 지금처럼 기본을 잃어 가는 수준 때문에 사회의 지탄을 받는 것을 핍박이라고 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기업은 구조조정의 때를 놓치면 파산하고 맙니다. 물론 교회야 주님께서 파산하게 하시지는 않으시겠지만, 파산보다 더 심각한 문제들로 주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헤집어놓는 교회라면 이후에 큰 책망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지금 우리는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구교인 카톨릭을 향해 목숨을 건 개혁을 시도했던 것처럼, 지금의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향한 목숨을 건 개혁을 시도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 2002년의 종교개혁 주일을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며 심각한 하루를 보낼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도 종교 개혁자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큰 틀에서 보면 예수님을 종교개혁자로 보는 것은 송구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신앙의 본래의 모습을 찾아주시며 당시 유대인들의 잘못된 신앙을 바로잡아 주셨지, 종교개혁을 감행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종교개혁자로 보고 싶은 것은, 말 그대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가르치신 교훈과 보여주신 삶과 행실이 너무도 파격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교라는 종교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예수님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몇 달 안 되는 공생애 초기부터 바리새인들과 많은 대중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십니다. 그 가르침이 너무나 혁신적이었기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위험한 종교개혁자로 보았습니다.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그들에게 예수님은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새로운 진리로 대중들을 몰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하신 3년 동안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시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바리새파의 잔당들이 있었습니다. 늘 예수님과 이들간에 믿음의 싸움이 계속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결국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고 맙니다. 예수라는 신흥종교세력을 거세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예수님을 제거한 후에 주님께서 심어놓으신 새 부대에 담겨진 새 술은 익어가기 시작했고, 가나의 혼인잔치의 포도주처럼 사람들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배설하시는 잔치자리로 인도되기 시작했습니다. 종교개혁의 시각으로 볼 때 예수님의 개혁은 성공을 거두신 것입니다.
개혁은 말로만 외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는 개혁이라는 말을 참 많이 듣습니다. 정치개혁이니, 교육개혁이니, 사회개혁이니 하는 말을 많이 듣지만, 정작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왜 실패하는 것일까요 개혁을 말하는 외침 속에 정작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용이 있는 개혁은 조용해도 힘있게 개혁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개혁의 역사가 그러했습니다. 조용하지만 힘이 있었고, 힘이 있었기에 이 세상과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말았습니다. 분명한 내용이 있었던 개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개혁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개혁의 중심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 이었고, 또 한 사람은 세리 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는 남을 등쳐먹고, 못되게 살고, 성적으로 난잡한 인간들과는 질이 틀리는 사람입니다. 저기 서 있는 저 세리와는 다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합니다. 십일조도 꼬박꼬박 합니다. ’ 바리새인이 그렇게 기도할 때 세리는 가까이 다가서지도 못하고 감히 눈을 들어 우러러 보지도 못한 채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저를 불쌍히 보아주십시오. 저는 더러운 죄인입니다. ’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 얘들아.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하는데,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다 하심을 받고 내려갔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는 것이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이 이야기 속에서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는 은혜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지, 행위로 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십일조를 잘 하는 것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는 것으로 우리의 믿음을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옳게 사는 것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그런 자세의 신앙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간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은혜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기에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피를 흘려주셨기에 여호와 하나님께 사랑 받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한 행위 때문에 축복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금식을 한 행위 때문에 기도가 응답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 내가 남들 보다 비교적 옳게 사는 행위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우리의 옳은 행위조차 더러운 옷일 뿐입니다. 이사야는 사64:6에서 이렇케 말합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에 비치어진 자기 의는 다른 사람과 비교되는 것모습 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과 자기 양심에 기준하는 의가 아닙니다. 마음속으로부터의 토색,불의 ,간음등은 전혀 도외시한 그럴듯한 모습뿐입니다. 그들은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요,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사람입니다. 폐 일언하고 바리새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을 의식하는 사람들입니다. 종교가 사람을 의식할 때 이미 그 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심각한 것은 지금 우리의 신앙의 모습이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이 바리새인과 너무도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오늘 종교 개혁주일을 맞이하여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철저히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나는 죄인임을 다시한번 고백함으로 개혁의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행위 중심의 신앙이
우리를 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 9절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하시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시는 구절입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이런 모습을 바로 잡아 주시려고 이 이야기를 꺼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는 의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평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의에 대한 판단은 인간 스스로가 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 평가의 기준은 율법의 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대한 믿음에 있습니다.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준행할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서만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고 인정 받을수 있을 뿐입니다. 이 대속의 은총의 근거는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에 있습니다. 인간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도 내게서 나온 사랑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서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은혜로 수용함으로써 갖게 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바울은 로마서13장 10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사랑이 없는 사람은 자기의 의만 주장하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멸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나는 아니라고 부인하지 마십시오. 제가 판단하기로는 한국교회 신앙인의 95% 이상이 자신의 행위를 내세우는 율법적 신앙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바리새인들을 비판합니다. 그런데 뒤집어보면 지금 우리의 신앙이 바로 그 신앙입니다. 행위를 너무 강조합니다. 실은 그대로 실천을 하지도 못하면서도 행위를 강조합니다. 서로 주고받는 메시지가 상당히 비판적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러니 이렇게 고쳐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결단하고 노력하자’는 메시지가 골격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결단과 노력으로 변화가 왔습니까 아닙니다. 되지를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그렇게 의로워질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한다고 생각하기에 교만해집니다. 그리고 이기적인 신앙이 되어버립니다.
‘내가 십일조를 잘하고, 금식기도를 하고, 말씀대로 살아야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내 것 만들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신앙인지 아십니까
카톨릭이 멍든 것도 은혜가 아닌 자신들의 행위에 의지하는 것 때문입니다. 이것이 발전해서 연옥에 갇힌 영혼들까지 내가 이 땅에서 의로운 행위를 하면 풀려날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이 내 중심, 행위 중심의 신앙을 깨뜨려야 합니다.
십일조! 물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물질의 축복을 받으려고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물론 십일조를 하는 이에게 쌓을 곳이 없는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축복에 코가 꿰면 안됩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물질이 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더 받으려고 드리는 뇌물이 아닙니다. 이미 받았기에 그 사랑에 감격한 고백이 십일조인 것입니다.
금식하면 기도가 더 잘 응답됩니까 이거 큰 일 날 생각입니다. 자기의 공로를 의지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에 있어서 의지할 것은 오직 예수의 이름뿐입니다. 감히 어디에다 우리의 행위를 끼워 넣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한 바리새인보다 금식 한 번 못했지만 가슴을 치며 죄인임을 고백한 세리가 더 의롭다 하심을 받고 내려갔다고 말입니다. 행위 중심의 신앙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개혁, 신앙개혁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이 강조하신 것도 행위가 아닌 은혜요, 사도 바울이 강조한 것도 행위가 아닌 은혜입니다. 그리고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외친 것도 행위가 아닌 은혜입니다. 종교개혁자인 칼빈은 “솔라 피데! 솔라 그라티아! 솔라 스크립투라!”라고 외쳤습니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한국 교회가 당면한 문제 중의 하나가 교회안에 의젓한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육수준도 높아지고 사회적 지위도 있는 소위 축복된 자들이 많아서 비천한 사람들이 감히 그 사이에 끼어서 예수믿기가 어럽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의 삶은 남이 알까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자기만의 천국을 누리며 온갖 욕망을 쫒아서 쾌락을 일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이제 우리의 모든 가면을 벗어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로 산다고 말하면서도, 실은 율법에 더 가까운 신앙생활을 합니다. 행위를 중히 여기고, 그것으로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행위는 체면을 중히 여김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이 이기적이고 편협한 신앙이 되어버렸습니다. 감사헌금이나 절기헌금은 이름만 내고 체면 유지비는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의 그 편협한 신앙으로 오늘날 주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기주의의 그 편협한 신앙이 오늘날 기독교가 구조조정 1순위 명단에 들어가도록 한 것입니다.
물론 믿음에는 행위가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으로 행실의 열매가 맺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오직 은혜를 받았을 때 말씀이 내 안에 이루어지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삶 속에서 행위의 열매로 나타나게 되어지는 것뿐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진심 어린 칭송을 받을 수 있고, 이전에는 할 수 없었던 것도 할 수 있게 되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오직 은혜’로의 신앙개혁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개혁이 우리가운데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교만과 허세로 치장한 바리새인의 기도가 아니라 고개초자 바르게 들지 못하고 죄를 고백하는 세리의 기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서서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는 겸손이 있어 진정한 신앙의 개혁이 교회와 그리고 여러분 안에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415년 어느날 종교개혁자 존 후스가 거리에 나왔다가 두 그림이 나란히 붙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나귀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초라한 모습의 그림이요, 또 하나는 금관을 쓰고 사람들이 어깨에 맨 호화찬란한 가마를 타고 몸종들이 옆에서 양산을 바쳐 들고 로마로 입성하는 로마 교황의 그림입니다. 후스는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누가 왕이고 누가 종이란 말인가' 교황이 왕이고 예수님은 교황의 종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요한 후스는 드디어 외치고 말았습니다.
'누가 저 로마 교황의 가면의 벗길 수가 있다는 말이냐' 결국 1415년 7월6일에 단두대의 이슬로 후스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마틴 루터가 교황을 만나보려고 교황청에 들어갔습니다. 그 때 루터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습니다. 많은 추기경들이 교황의 발가락에 입을 맞추고 있는 광경을 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천주교입니다. 루터는 이 광경을 보고 심령이 너무 컬컬하고 괴로웠습니다.
견딜 수가 없어 위로 받고 은혜 받기를 위해서 당시 거룩한 빌라도의 사닥다리라고 일컫는 층계를 무릎으로 걸어가면서 층계하나 하나 오를 때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이런 축복을 받는 다는 이야기를 연상하면서 올랐으나 루터에게는 무의미 하기가 그지 없습니다. 층계를 오르면서 다른 깊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지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은 로마서 1장17절의 진리를 깨달은 때문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당시의 로마 카톨릭이 얼마나 비 성경적 이었는지 모릅니다.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어찌 면죄부, 종이 쪽지 한 장이 인간의 주홍같이 붉은 죄, 먹장 같이 검은 죄를 깨끗케 할 수가 있다는 말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리아를 숭상했습니다. 마리아는 죄 없는 몸으로 잉태되었고 죽은 후에 부활했고, 그리고 승천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 이런 기록이 있단 말입니까 교황에게는 오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교황무오설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교황보다 낮추면서 교황의 말을 성경시 했습니다. 얼마나 비 성경 적이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모독하는 처사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를 사한다고 하니 얼마나 빗나간 성경해석인지 모릅니다. 어찌 죄인이 죄를 사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러한 형편을 보았던 루터는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종교개혁 485주년을 맞으며 기독교는 이제 세상의 소리를 귀담아 들을 때가 왔습니다.
뼈아푼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종교계가 구조조정 1순위라는 지적입니다. 카톨릭과 불교, 개신교 평신도단체들이 연합해 조직한 ‘개혁을 위한 종교NGO네트워크준비위원회’라는 모임이 있습니다. 이 모임에서는 작년(2001년) 4월 26일 ‘한국의 종교권력과 시민사회’라는 세미나를 개최한 적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화여자대학의 최준식 교수는 한국의 종교들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의 말을 간추려보면 이렇습니다. ‘종교계는 대 사회적으로 해야 할 기능은 터무니없이 약하고 생산성도 별로 없다. 우리 종교계야말로 구조조정 1순위이다. 종교계는 비합리적이고 권위적이며, 독선과 아집에 휩싸였을 뿐만 아니라, 혈연과 지연, 집단이기주의 등의 사회의 불합리한 요소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리고 각자의 철옹성 속에서 배타적인 자세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 현재 종교의 모습이다. ’ 그리고 한 마디를 더 합니다.
“하지만 외부세력이 관여할 수 없고 스스로 개혁하기를 기대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 ”
한 마디로 말하면 ‘종교가 썩을 대로 썩었는데, 거기다 너무 독선적이어서 고쳐질 희망이나 기대를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성공회 신학대학교의 권진관 교수는 ‘종교가 너무 내면화, 개인화 되어 있다’고 비판하고, ‘이런 종교는 기존 질서의 유지 확대에 기여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만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또 ‘종교인이 사회라는 몸 속에 들어가 생명력이 흐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면서 ‘종교가 풍부한 자원으로 사회 속에서 자기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물론 이들의 비판은 기독교 하나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기에 기독교계의 감추어진 선한 면들이 함께 매도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 비판의 기준이 ‘사회 속에서의 역할’에 중점을 두었기에 신앙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비판을 외면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사회와 무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지, ‘너희는 교회 안의 소금이다. 교회 안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주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성전이나 회당보다는, 더 많은 시간을 오히려 밖에서 활동하시면서 사람들을 만나주시고, 그늘진 곳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빛을 주시고, 고통을 받는 환자들을 고쳐주시고,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끌어안아 주셨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신앙생활은 산 속에 들어가 세속과의 연을 끊고 기도와 말씀묵상에만 전념하는 수도원 생활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성전에 올라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능력을 힘입고는, 사회 속으로 파고들어 어둠을 몰아내고 복음을 사람들의 가슴에 심어 이 땅에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역사를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는 지금의 종교가 대 사회적 기능이 터무니없이 약하다는 지적에 대하여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그리고 독선과 아집에 휩싸여 있을 뿐 아니라 혈연과 지연으로 이루어진 집단 이기주의와 같은 사회의 불합리한 요소들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비판에도 고개를 돌려서도 아니 되겠습니다. 그리고 철옹성과 같이 배타적인 자세로 변화의 노력도 잃어버렸다는 지적도 외면 해서도 아니 될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제 우리는 비판을 위한 비판은 걸러내되 진실에 기반한 비판이라면 겸허하게 수용할 때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변화의 시간을 놓치고 있는지 모릅니다. 종교계가 구조조정의 1순위라는 말은 충격에 해당합니다. 그 속에 우리 기독교가 포함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비극인 것입니다.
이런 비판적인 공격은 핍박이 아닙니다. 핍박은 정녕 우리의 신앙에 부끄럼이 없음에도 그 자유를 억압당하는 것이 핍박이지, 지금처럼 기본을 잃어 가는 수준 때문에 사회의 지탄을 받는 것을 핍박이라고 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기업은 구조조정의 때를 놓치면 파산하고 맙니다. 물론 교회야 주님께서 파산하게 하시지는 않으시겠지만, 파산보다 더 심각한 문제들로 주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헤집어놓는 교회라면 이후에 큰 책망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지금 우리는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구교인 카톨릭을 향해 목숨을 건 개혁을 시도했던 것처럼, 지금의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향한 목숨을 건 개혁을 시도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 2002년의 종교개혁 주일을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며 심각한 하루를 보낼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도 종교 개혁자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큰 틀에서 보면 예수님을 종교개혁자로 보는 것은 송구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신앙의 본래의 모습을 찾아주시며 당시 유대인들의 잘못된 신앙을 바로잡아 주셨지, 종교개혁을 감행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종교개혁자로 보고 싶은 것은, 말 그대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가르치신 교훈과 보여주신 삶과 행실이 너무도 파격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교라는 종교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예수님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몇 달 안 되는 공생애 초기부터 바리새인들과 많은 대중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십니다. 그 가르침이 너무나 혁신적이었기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위험한 종교개혁자로 보았습니다.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그들에게 예수님은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새로운 진리로 대중들을 몰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하신 3년 동안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시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바리새파의 잔당들이 있었습니다. 늘 예수님과 이들간에 믿음의 싸움이 계속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결국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고 맙니다. 예수라는 신흥종교세력을 거세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예수님을 제거한 후에 주님께서 심어놓으신 새 부대에 담겨진 새 술은 익어가기 시작했고, 가나의 혼인잔치의 포도주처럼 사람들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배설하시는 잔치자리로 인도되기 시작했습니다. 종교개혁의 시각으로 볼 때 예수님의 개혁은 성공을 거두신 것입니다.
개혁은 말로만 외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는 개혁이라는 말을 참 많이 듣습니다. 정치개혁이니, 교육개혁이니, 사회개혁이니 하는 말을 많이 듣지만, 정작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왜 실패하는 것일까요 개혁을 말하는 외침 속에 정작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용이 있는 개혁은 조용해도 힘있게 개혁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개혁의 역사가 그러했습니다. 조용하지만 힘이 있었고, 힘이 있었기에 이 세상과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말았습니다. 분명한 내용이 있었던 개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개혁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개혁의 중심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 이었고, 또 한 사람은 세리 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는 남을 등쳐먹고, 못되게 살고, 성적으로 난잡한 인간들과는 질이 틀리는 사람입니다. 저기 서 있는 저 세리와는 다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합니다. 십일조도 꼬박꼬박 합니다. ’ 바리새인이 그렇게 기도할 때 세리는 가까이 다가서지도 못하고 감히 눈을 들어 우러러 보지도 못한 채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저를 불쌍히 보아주십시오. 저는 더러운 죄인입니다. ’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 얘들아.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하는데,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다 하심을 받고 내려갔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는 것이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이 이야기 속에서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는 은혜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지, 행위로 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십일조를 잘 하는 것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는 것으로 우리의 믿음을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옳게 사는 것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그런 자세의 신앙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간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은혜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기에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피를 흘려주셨기에 여호와 하나님께 사랑 받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한 행위 때문에 축복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금식을 한 행위 때문에 기도가 응답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 내가 남들 보다 비교적 옳게 사는 행위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우리의 옳은 행위조차 더러운 옷일 뿐입니다. 이사야는 사64:6에서 이렇케 말합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에 비치어진 자기 의는 다른 사람과 비교되는 것모습 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과 자기 양심에 기준하는 의가 아닙니다. 마음속으로부터의 토색,불의 ,간음등은 전혀 도외시한 그럴듯한 모습뿐입니다. 그들은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요,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사람입니다. 폐 일언하고 바리새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을 의식하는 사람들입니다. 종교가 사람을 의식할 때 이미 그 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심각한 것은 지금 우리의 신앙의 모습이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이 바리새인과 너무도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오늘 종교 개혁주일을 맞이하여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철저히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나는 죄인임을 다시한번 고백함으로 개혁의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행위 중심의 신앙이
우리를 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 9절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하시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시는 구절입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이런 모습을 바로 잡아 주시려고 이 이야기를 꺼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는 의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평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의에 대한 판단은 인간 스스로가 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 평가의 기준은 율법의 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대한 믿음에 있습니다.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준행할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서만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고 인정 받을수 있을 뿐입니다. 이 대속의 은총의 근거는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에 있습니다. 인간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도 내게서 나온 사랑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서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은혜로 수용함으로써 갖게 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바울은 로마서13장 10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사랑이 없는 사람은 자기의 의만 주장하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멸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나는 아니라고 부인하지 마십시오. 제가 판단하기로는 한국교회 신앙인의 95% 이상이 자신의 행위를 내세우는 율법적 신앙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바리새인들을 비판합니다. 그런데 뒤집어보면 지금 우리의 신앙이 바로 그 신앙입니다. 행위를 너무 강조합니다. 실은 그대로 실천을 하지도 못하면서도 행위를 강조합니다. 서로 주고받는 메시지가 상당히 비판적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러니 이렇게 고쳐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결단하고 노력하자’는 메시지가 골격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결단과 노력으로 변화가 왔습니까 아닙니다. 되지를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그렇게 의로워질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한다고 생각하기에 교만해집니다. 그리고 이기적인 신앙이 되어버립니다.
‘내가 십일조를 잘하고, 금식기도를 하고, 말씀대로 살아야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내 것 만들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신앙인지 아십니까
카톨릭이 멍든 것도 은혜가 아닌 자신들의 행위에 의지하는 것 때문입니다. 이것이 발전해서 연옥에 갇힌 영혼들까지 내가 이 땅에서 의로운 행위를 하면 풀려날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이 내 중심, 행위 중심의 신앙을 깨뜨려야 합니다.
십일조! 물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물질의 축복을 받으려고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물론 십일조를 하는 이에게 쌓을 곳이 없는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축복에 코가 꿰면 안됩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물질이 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더 받으려고 드리는 뇌물이 아닙니다. 이미 받았기에 그 사랑에 감격한 고백이 십일조인 것입니다.
금식하면 기도가 더 잘 응답됩니까 이거 큰 일 날 생각입니다. 자기의 공로를 의지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에 있어서 의지할 것은 오직 예수의 이름뿐입니다. 감히 어디에다 우리의 행위를 끼워 넣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한 바리새인보다 금식 한 번 못했지만 가슴을 치며 죄인임을 고백한 세리가 더 의롭다 하심을 받고 내려갔다고 말입니다. 행위 중심의 신앙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개혁, 신앙개혁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이 강조하신 것도 행위가 아닌 은혜요, 사도 바울이 강조한 것도 행위가 아닌 은혜입니다. 그리고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외친 것도 행위가 아닌 은혜입니다. 종교개혁자인 칼빈은 “솔라 피데! 솔라 그라티아! 솔라 스크립투라!”라고 외쳤습니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한국 교회가 당면한 문제 중의 하나가 교회안에 의젓한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육수준도 높아지고 사회적 지위도 있는 소위 축복된 자들이 많아서 비천한 사람들이 감히 그 사이에 끼어서 예수믿기가 어럽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의 삶은 남이 알까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자기만의 천국을 누리며 온갖 욕망을 쫒아서 쾌락을 일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이제 우리의 모든 가면을 벗어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로 산다고 말하면서도, 실은 율법에 더 가까운 신앙생활을 합니다. 행위를 중히 여기고, 그것으로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행위는 체면을 중히 여김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이 이기적이고 편협한 신앙이 되어버렸습니다. 감사헌금이나 절기헌금은 이름만 내고 체면 유지비는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의 그 편협한 신앙으로 오늘날 주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기주의의 그 편협한 신앙이 오늘날 기독교가 구조조정 1순위 명단에 들어가도록 한 것입니다.
물론 믿음에는 행위가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으로 행실의 열매가 맺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오직 은혜를 받았을 때 말씀이 내 안에 이루어지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삶 속에서 행위의 열매로 나타나게 되어지는 것뿐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진심 어린 칭송을 받을 수 있고, 이전에는 할 수 없었던 것도 할 수 있게 되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오직 은혜’로의 신앙개혁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개혁이 우리가운데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교만과 허세로 치장한 바리새인의 기도가 아니라 고개초자 바르게 들지 못하고 죄를 고백하는 세리의 기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서서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는 겸손이 있어 진정한 신앙의 개혁이 교회와 그리고 여러분 안에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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