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개혁의 계승
본문
1517년 10월 31일 정오는 우리 기독교인으로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그 날은 마틴 루터에 의하여 종교 개혁을 촉구하는 95개조문이 비텐베르그 교회 정문에 나붙게 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을 기념하여 오늘은 세계의 모든 개신 교회가 종교 개혁 기념 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모래로 덮인 넓은 해변을 걷거나, 눈 덮인 들길을 거닐다 보면, 바로 걸어간다고 생각하고 걸었는데도 상당히 구부러지게 걸어온 발자취를 보게 됩니다. 어떤 때는 애초에 바라던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바뀌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생활, 그리고 교회의 움직임도 때때로 그 걸어온 자취를 살펴볼 때 구부러진 흔적을 남기거나, 서서는 안될 자리에 있거나, 또는 가서는 안될 방향으로 행하고 있음을 보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구부러진 것을 바로 하고, 비뚤어진 방향을 바로 잡는 운동이, 교회 역사상 국부적으로 또는 전체적으로 일어났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일으킨 운동은 가장 대표적인 개혁 운동이었으며, 그러기에 종교 개혁 운동 하면 먼저 루터를 생각하게 됩니다. 실로 그는 교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보고 견딜 수 없어서, 95개조 문을 내걸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투쟁하여 교회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서양 세계에서는 종교 개혁이라고 할 때, 종교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고 다만 '그 개혁'(The Reformation)이라고 합니다. 개혁이란 말은 일반적인 추상명사인데도, 1517년 10월 31일 루터에 의하여 시작된 역사적 사건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 나라에서 해방이라는 말이 본시 추상명사이면서도 8. 15 해방을 가리키는 역사적 용어로 쓰여지고 있음과 같습니다. 개혁이라는 말은 혁명이라는 말보다 훨씬 온건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의 개혁은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역사상 어떤 혁명보다도 더 혁명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럽 대륙 전체에 천년간에 걸쳐서 깊이 깊이 뿌리박은 카톨릭 중심 왕국의 뿌리를 흔들어 놓은 사건이 바로 종교 개혁입니다. 종교 개혁은 그저 종교 문제의 개혁에 멈춘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중세 카톨릭 문명 세게 전체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사상 등등 모든 분야의 기반을 흔들어 놓은 사건이었습니다. 종교상의 문제가 어떻게 그토록 광범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중세 카톨릭 교회는 종교 영역만이 아니라 일반 세속적인 문제에까지 깊이 관련하지 않은 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은 일반 세속사 까지 살필 필요는 없고, 다만 루터의 종교 개혁이 무엇 때문에 필요했으며, 또 개혁의 원리들은 무엇이고, 오늘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개혁을 실천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을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젊은 수도자 마틴 루터는 로마 베드로 성당의 돌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오르내리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찾고, 심령의 문제를 해결하고, 위에서 주시는 능력을 얻기 위해 끔찍이도 애쓰고 있었습니다.
왜 돌계단을 오르내리는 고통스러운 일을 하게 되었습니까 그는 카톨릭 교리에 의해서 그와 같은 고행을 통하여 사람은 공을 쌓기도 하며 의롭게 되는 것으로 잘못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무릎이 다 깨어지고 피가 철철 흐르며 돌계단을 오르내려도 루터의 심령은 번민만 더해 갈 뿐 마음에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고민하던 루터는 결국 어떻게 자신의 심령 문제를 해결하고 어떻게 부패해 가는 로마 교회를 새롭게 할 수 있었을까 하는 문제의 해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돌계단을 오르내리는 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루터의 안타까운 기도를 들으시고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네가 고행하지 않아도, 네가 적선하지 않아도, 네가 무슨 공로를 세우지 않아도 구원받는 길은 믿음에 있다'는 교훈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1. 종교 개혁의
첫번째 원리는 오직 믿음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신득의' 'sola fide' 이것은 벌써 구약의 하박국서에, 그리고 바울의 로마서를 통해서 너무도 분명하고 확실하게 가르쳐 준 진리이지만, 천주교에서는 이러한 진리를 고의적으로 은폐해 버리고, 구원의 조건으로 인간의 공로나 적선을 내세우며, 암매한 신도들을 속이게 된 것입니다. 사실 얼마 전까지 천주교에서는 일반 신자들이 성경을 볼 수 없었습니다. 라틴어로 기록되어 신부들이나 볼 수 있었습니다. 천주교가 지배하던 중세를 그래서 암흑시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주교의 그릇된 가르침들을 이 시간 다 말씀드릴 수 없고 그중 몇 가지 가장 비성경적인 교리들만을 살펴보면
1)공덕 축적설-성자들의 공덕은 자신의 구원을 이루고도 남는데, 그 남은 공덕을 교황이 분배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2)연옥설-대다수 완전히 성화 되지 못한 신자들은 천당으로 직행하지 못하고 연옥이란 곳으로 간다고 합니다. 연옥의 기간은 일정하지 않고, 지상의 가족들이나 친지들의 공로에 의해서 길어지기도 하고 짧아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3)면죄부-처음에는 면죄부를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서 팔았다가, 다음에는 죽은 사람을 위해서도 사게 했습니다. 부적을 만들 때에 쓰는 것은 붉은 먹이나 주사 또는 제사를 위해 희생된 동물의 피를 쓰는 것이 원칙이지만 빨강 안료도 쓰인다고 합니다. 주사를 사용할 때에는 경면 주사라야만 된다고들 하는데, 가정보감에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중국 경면산 꼭대기에 사는 원숭이들에게 술을 먹게 한 다음 돌싸움을 붙여서 피를 흘리게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원숭이 피가 스며든 돌을 채취해서 가루로 만들어 사용한 것이 경면 주사의 유래라고 하며, 무당들이 만드는 부적에는 소. 염소. 닭. 자라 같은 짐승의 피를 쓰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중학생 497명을 대상으로 한 어느 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의 24%가 부적을 갖고 있거나, 자기 집에서 부적을 사용한다고 응답했습니다. 부적이 이렇게 많이 사용되는 이유는 귀신을 몰아내고, 재앙을 없애며, 복을 받자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부적이 아무런 효과도 없는 미신적임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만일 부적이 효과가 있다면 모든 운전사들이 자동차에 부적을 붙여 놓으면 사고가 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모든 보험회사들은 부적을 몽땅 붙여 놓으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바로 이 부적 같은 것이 면죄부라는 이름으로 기독교 역사 속에 있었으니, 면죄부를 사게 되면 모든 죄와 벌을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고, 그리스도의 피를 얼마나 더럽히고 욕되게 한 것입니까 이것이 어찌 신앙입니까 미신이고 사기행각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종교 개혁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오늘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해 주는 것은 원숭이 피로 쓰여진 부적도 아니고, 인간의 끄적거려 놓은 면죄부 따위 증서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믿는 믿음뿐인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Sola fide! 오직 믿음으로! 이신득의 진리는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절대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우리의 구원은 주일을 지키는 공로로, 십일조 드리는 공로로, 새벽 기도 드리는 공로로, 예배당 짓는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미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받은 백성들이 마땅히 해야 될 일들인 것입니다.
설혹 어떤 사람이 예배당을 10개를 지어 바쳤다고 해도, 그 공로 가지고 천국에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찬송가의 가사처럼 1)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는 것이고, 2)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하고, 참아도 못하고, 말과 뜻과 행실이 깨끗하고 착해도, 다시 나게 못하니 힘써도 못하네.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하는 신앙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종교 개혁의 두 번째 원리는 오직 성경입니다.
루터와 개혁자들은 신. 구약 66권의 말씀에 진리의 기준을 두었습니다. 열이면 열 사람 백이면 백사람 뜻이 다 다른데, 그 뜻을 통합하고 이끌어 인도하는 말씀인 신. 구약 성경이 표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물론 인간이 따르기 어려운 부분도 있고, 인간의 생각과 같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이나 판단을 극복하고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그들의 종교회의에서 정한 교리들이 바로 진리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황의 교서가, 인간의 뜻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잘못된 교리들은 권위에 대한 예속과 압제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 구약 성경은 정확무오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과 본분에 대한 유일의 법칙임을 제일의 신조로 삼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이름난 목사의 주장이나, 또 어떤 신자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신앙 체험이, 절대로 우리 신앙의 표준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 개혁 주일을 맞이하여, 오늘 이 시대에도 성경을 마음대로 가감하는 무리들이 많은데, 개혁자들의 성경관인 성경이 말씀하면 말하고, 성경이 침묵하면 침묵하고, 성경이 가는데 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데서 멈추는, 이러한 올바른 성경관위에 우리들의 믿음을 세워 나가야 할 것입니다.
3. 종교 개혁의 세 번째 원리는 '신자 개위 사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만인 제사장'이라고도 합니다. 우리의 중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고, 절대로 성모 마리아나 신부가 우리의 중보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직접 회개하고, 직접 기도하고, 직접 예배도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신부에게 고해성사 같은 것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목사에게 죄를 다 고백해야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구약 시대에는 일반 백성들이 직접 성소에 들어가거나, 직접 제사 드릴 수 없고, 반드시 제사장을 통하여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순간, 성전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쫙 찢어지고,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혔던 장벽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되었으며,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언제든지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는 참으로 커다란 축복이요, 또한 커다란 특권임이 틀림없지만, 그러나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제사장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또한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 1:6-10
오늘의 본문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시겠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2천년 동안 세상에서 저주받은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본디오 빌라도'라는 이름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결재해 주었던 로마 사람, 서기 30년 무렵의 유대 총독입니다. 십자가형을 허락하고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무죄하다면서 손까지 씻었으나, 그의 죄는 한번의 손씻음으로 사해질 수 없었습니다. 빌라도의 불행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네가 왕이냐'고 묻는 빌라도에게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고 하실 때,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하더니 그만 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진리를 깨달으려 하지도 않고 제 갈 길을 가 버린 그의 행동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형 판결하는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진리가 과연 무엇입니까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곧 진리라고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고 했습니다. 또한 성경은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이 진리이심을 가르쳐 줍니다. 진리이신 여호와 하나님, 그리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또한 요 14:17의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니라'고 하신 진리의 영, 곧 성령이 진리이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진리를 깨달아야만 합니까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도리를 알게 하시려고, 선지자들을 보내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는데, 인간들은 그 진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핍박을 하고 배반하고 내쫓고 심지어는 톱으로 켜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여호와 하나님은 진리를 알리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들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리 자체요, 진리의 본체가 되시는 분인데도 악한 인간들은 진리를 거부하고, 결국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시겠습니까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깨달으면 어떻게 됩니까 오늘 본문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습니다. 죄를 범했을 때 우리는 죄의 종이고 마귀의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게 되면,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며 마귀의 종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께만 종이고, 모든 것에 대하여 자유 하나, 불신자는 복종해야 할 여호와 하나님께는 항거하면서, 모든 것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돈을 주기만 하면 2시간 동안 주인의 원하는 것을 무슨 일이든지 모두 들어주겠다고 약속한 젊은 남녀 1500명이, 서독 함브르크시의 한 경매장에 모여 현대판 노에 시장을 열었습니다. 그날 경매에서 최고 가격에 낙찰된 노예는 85마르크(35000원)였고, 최저 낙찰 가격은 5마르크(1500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대가를 받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제한된 시간만 종노릇을 하는 것이므로, 자신이 진짜 노예는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비록 자신이 몸으로 섬기게 된 주인은 단지 24시간 동안만 주인이 되지만, 그가 마음으로 섬기고 있는 황금은 평생 동안 그의 주인이 되며, 그래서 그는 24시간 동안만의 일시적인 노예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그는 영원한 황금의 노예가 되는 셈인 것입니다.
종교 개혁을 일으킨 루터는 그의 유명한 저서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죄로부터 자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교권의 탄압으로부터 자유를 역설했습니다. 이러한 자유를 소유한 자만이 진정한 자유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은 결코 죄의 종이 되거나, 황금과 정욕과 권세와 인기의 종이 되거나, 사람의 종이 되거나, 사업이나 일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은 종교 개혁 기념 주일을 맞이해서 개혁의 동기, 개혁의 원리,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개혁의 원리인
1)이신 득의 2)오직 성경 3)신자 개위 사제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고 이러한 원리 위에 우리의 신앙을 세우고, 또 이러한 개혁 원리들을 계승하고 후대에까지 전승시켜 주어야 할 것입니다. 개혁을 일으킨지 484년이 되는 이 때, 오늘 지상의 교회와 한국 교계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면, 신교가 구교 못지 않게 타락한 것이 너무도 많을 것 같습니다. 교권 싸움, 파당과 분쟁, 물량주의, 기복 신앙, 어디서부터 수술해야 좋을지 모를 만큼 부패하고 오염된 것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개혁의 요구가 대내외적으로 빗발치고 있고,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총회는 개혁의 기치를 들고 개혁 총회라 명명하고,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을 모토로 내걸었습니다. 그러나 구호만 그럴듯 해 가지고 개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작금의 노회나 총회 상황을 보면, 개혁의 싹도 보이지 않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비판의 메스를 다른 사람에게만 들이대지 맙시다. (C. C. C 출신 -주일날 장사를 하면서도 교회 비판만을.... )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 시절에 나는 혁명가였고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나의 기도는 이것이 모두였다. '주여, 내게 세상을 개혁할 힘을 주소서' 중년에 이르러 한 사람의 영혼도 고쳐 놓지 못한 채 내 반생이 흘렀음을 깨닫자 내 기도는 이렇게 달라졌다. '주여, 나와 접촉하게 되는 모든 사람들을 변화시킬 은총을 주소서. 그저 가족과 친지들만 개종시켜도 만족하겠나이다' 이제 노인이 되어 죽을 날도 오늘 내일로 다가오니 이제야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알게 되었다. 이제 나의 유일한 기도는 이것이다. '주여, 나 자신을 고칠 은총을 주소서. ' 처음부터 이렇게 빌었던들 일생을 허비하지 않았으련만이라고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또 누군가는 말하기를 '어두움만을 탓하지 말고 네가 작은 촛불이 되라'고 했습니다. 깨끗한 세상을 만드는 최초 최고의 행위는 내가 먼저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남을 재는 잣대로 나를 재고, 남에게 들이대는 날카로운 비판의 메스를 내게 가해서, 내가 먼저 개혁되어지고, 내가 먼저 갱신되어지고, 내가 더 성화 되고, 그래서 더 사랑스런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더 진실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더 좋은 신자가 되고, 이러한 신자들로 이룩된 우리 송정 중앙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생활, 그리고 교회의 움직임도 때때로 그 걸어온 자취를 살펴볼 때 구부러진 흔적을 남기거나, 서서는 안될 자리에 있거나, 또는 가서는 안될 방향으로 행하고 있음을 보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구부러진 것을 바로 하고, 비뚤어진 방향을 바로 잡는 운동이, 교회 역사상 국부적으로 또는 전체적으로 일어났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일으킨 운동은 가장 대표적인 개혁 운동이었으며, 그러기에 종교 개혁 운동 하면 먼저 루터를 생각하게 됩니다. 실로 그는 교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보고 견딜 수 없어서, 95개조 문을 내걸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투쟁하여 교회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서양 세계에서는 종교 개혁이라고 할 때, 종교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고 다만 '그 개혁'(The Reformation)이라고 합니다. 개혁이란 말은 일반적인 추상명사인데도, 1517년 10월 31일 루터에 의하여 시작된 역사적 사건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 나라에서 해방이라는 말이 본시 추상명사이면서도 8. 15 해방을 가리키는 역사적 용어로 쓰여지고 있음과 같습니다. 개혁이라는 말은 혁명이라는 말보다 훨씬 온건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의 개혁은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역사상 어떤 혁명보다도 더 혁명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럽 대륙 전체에 천년간에 걸쳐서 깊이 깊이 뿌리박은 카톨릭 중심 왕국의 뿌리를 흔들어 놓은 사건이 바로 종교 개혁입니다. 종교 개혁은 그저 종교 문제의 개혁에 멈춘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중세 카톨릭 문명 세게 전체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사상 등등 모든 분야의 기반을 흔들어 놓은 사건이었습니다. 종교상의 문제가 어떻게 그토록 광범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중세 카톨릭 교회는 종교 영역만이 아니라 일반 세속적인 문제에까지 깊이 관련하지 않은 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은 일반 세속사 까지 살필 필요는 없고, 다만 루터의 종교 개혁이 무엇 때문에 필요했으며, 또 개혁의 원리들은 무엇이고, 오늘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개혁을 실천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을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젊은 수도자 마틴 루터는 로마 베드로 성당의 돌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오르내리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찾고, 심령의 문제를 해결하고, 위에서 주시는 능력을 얻기 위해 끔찍이도 애쓰고 있었습니다.
왜 돌계단을 오르내리는 고통스러운 일을 하게 되었습니까 그는 카톨릭 교리에 의해서 그와 같은 고행을 통하여 사람은 공을 쌓기도 하며 의롭게 되는 것으로 잘못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무릎이 다 깨어지고 피가 철철 흐르며 돌계단을 오르내려도 루터의 심령은 번민만 더해 갈 뿐 마음에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고민하던 루터는 결국 어떻게 자신의 심령 문제를 해결하고 어떻게 부패해 가는 로마 교회를 새롭게 할 수 있었을까 하는 문제의 해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돌계단을 오르내리는 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루터의 안타까운 기도를 들으시고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네가 고행하지 않아도, 네가 적선하지 않아도, 네가 무슨 공로를 세우지 않아도 구원받는 길은 믿음에 있다'는 교훈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1. 종교 개혁의
첫번째 원리는 오직 믿음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신득의' 'sola fide' 이것은 벌써 구약의 하박국서에, 그리고 바울의 로마서를 통해서 너무도 분명하고 확실하게 가르쳐 준 진리이지만, 천주교에서는 이러한 진리를 고의적으로 은폐해 버리고, 구원의 조건으로 인간의 공로나 적선을 내세우며, 암매한 신도들을 속이게 된 것입니다. 사실 얼마 전까지 천주교에서는 일반 신자들이 성경을 볼 수 없었습니다. 라틴어로 기록되어 신부들이나 볼 수 있었습니다. 천주교가 지배하던 중세를 그래서 암흑시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주교의 그릇된 가르침들을 이 시간 다 말씀드릴 수 없고 그중 몇 가지 가장 비성경적인 교리들만을 살펴보면
1)공덕 축적설-성자들의 공덕은 자신의 구원을 이루고도 남는데, 그 남은 공덕을 교황이 분배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2)연옥설-대다수 완전히 성화 되지 못한 신자들은 천당으로 직행하지 못하고 연옥이란 곳으로 간다고 합니다. 연옥의 기간은 일정하지 않고, 지상의 가족들이나 친지들의 공로에 의해서 길어지기도 하고 짧아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3)면죄부-처음에는 면죄부를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서 팔았다가, 다음에는 죽은 사람을 위해서도 사게 했습니다. 부적을 만들 때에 쓰는 것은 붉은 먹이나 주사 또는 제사를 위해 희생된 동물의 피를 쓰는 것이 원칙이지만 빨강 안료도 쓰인다고 합니다. 주사를 사용할 때에는 경면 주사라야만 된다고들 하는데, 가정보감에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중국 경면산 꼭대기에 사는 원숭이들에게 술을 먹게 한 다음 돌싸움을 붙여서 피를 흘리게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원숭이 피가 스며든 돌을 채취해서 가루로 만들어 사용한 것이 경면 주사의 유래라고 하며, 무당들이 만드는 부적에는 소. 염소. 닭. 자라 같은 짐승의 피를 쓰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중학생 497명을 대상으로 한 어느 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의 24%가 부적을 갖고 있거나, 자기 집에서 부적을 사용한다고 응답했습니다. 부적이 이렇게 많이 사용되는 이유는 귀신을 몰아내고, 재앙을 없애며, 복을 받자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부적이 아무런 효과도 없는 미신적임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만일 부적이 효과가 있다면 모든 운전사들이 자동차에 부적을 붙여 놓으면 사고가 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모든 보험회사들은 부적을 몽땅 붙여 놓으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바로 이 부적 같은 것이 면죄부라는 이름으로 기독교 역사 속에 있었으니, 면죄부를 사게 되면 모든 죄와 벌을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고, 그리스도의 피를 얼마나 더럽히고 욕되게 한 것입니까 이것이 어찌 신앙입니까 미신이고 사기행각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종교 개혁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오늘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해 주는 것은 원숭이 피로 쓰여진 부적도 아니고, 인간의 끄적거려 놓은 면죄부 따위 증서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믿는 믿음뿐인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Sola fide! 오직 믿음으로! 이신득의 진리는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절대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우리의 구원은 주일을 지키는 공로로, 십일조 드리는 공로로, 새벽 기도 드리는 공로로, 예배당 짓는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미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받은 백성들이 마땅히 해야 될 일들인 것입니다.
설혹 어떤 사람이 예배당을 10개를 지어 바쳤다고 해도, 그 공로 가지고 천국에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찬송가의 가사처럼 1)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는 것이고, 2)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하고, 참아도 못하고, 말과 뜻과 행실이 깨끗하고 착해도, 다시 나게 못하니 힘써도 못하네.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하는 신앙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종교 개혁의 두 번째 원리는 오직 성경입니다.
루터와 개혁자들은 신. 구약 66권의 말씀에 진리의 기준을 두었습니다. 열이면 열 사람 백이면 백사람 뜻이 다 다른데, 그 뜻을 통합하고 이끌어 인도하는 말씀인 신. 구약 성경이 표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물론 인간이 따르기 어려운 부분도 있고, 인간의 생각과 같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이나 판단을 극복하고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그들의 종교회의에서 정한 교리들이 바로 진리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황의 교서가, 인간의 뜻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잘못된 교리들은 권위에 대한 예속과 압제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 구약 성경은 정확무오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과 본분에 대한 유일의 법칙임을 제일의 신조로 삼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이름난 목사의 주장이나, 또 어떤 신자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신앙 체험이, 절대로 우리 신앙의 표준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 개혁 주일을 맞이하여, 오늘 이 시대에도 성경을 마음대로 가감하는 무리들이 많은데, 개혁자들의 성경관인 성경이 말씀하면 말하고, 성경이 침묵하면 침묵하고, 성경이 가는데 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데서 멈추는, 이러한 올바른 성경관위에 우리들의 믿음을 세워 나가야 할 것입니다.
3. 종교 개혁의 세 번째 원리는 '신자 개위 사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만인 제사장'이라고도 합니다. 우리의 중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고, 절대로 성모 마리아나 신부가 우리의 중보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직접 회개하고, 직접 기도하고, 직접 예배도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신부에게 고해성사 같은 것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목사에게 죄를 다 고백해야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구약 시대에는 일반 백성들이 직접 성소에 들어가거나, 직접 제사 드릴 수 없고, 반드시 제사장을 통하여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순간, 성전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쫙 찢어지고,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혔던 장벽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되었으며,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언제든지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는 참으로 커다란 축복이요, 또한 커다란 특권임이 틀림없지만, 그러나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제사장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또한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 1:6-10
오늘의 본문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시겠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2천년 동안 세상에서 저주받은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본디오 빌라도'라는 이름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결재해 주었던 로마 사람, 서기 30년 무렵의 유대 총독입니다. 십자가형을 허락하고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무죄하다면서 손까지 씻었으나, 그의 죄는 한번의 손씻음으로 사해질 수 없었습니다. 빌라도의 불행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네가 왕이냐'고 묻는 빌라도에게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고 하실 때,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하더니 그만 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진리를 깨달으려 하지도 않고 제 갈 길을 가 버린 그의 행동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형 판결하는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진리가 과연 무엇입니까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곧 진리라고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고 했습니다. 또한 성경은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이 진리이심을 가르쳐 줍니다. 진리이신 여호와 하나님, 그리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또한 요 14:17의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니라'고 하신 진리의 영, 곧 성령이 진리이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진리를 깨달아야만 합니까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도리를 알게 하시려고, 선지자들을 보내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는데, 인간들은 그 진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핍박을 하고 배반하고 내쫓고 심지어는 톱으로 켜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여호와 하나님은 진리를 알리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들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리 자체요, 진리의 본체가 되시는 분인데도 악한 인간들은 진리를 거부하고, 결국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시겠습니까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깨달으면 어떻게 됩니까 오늘 본문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습니다. 죄를 범했을 때 우리는 죄의 종이고 마귀의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게 되면,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며 마귀의 종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께만 종이고, 모든 것에 대하여 자유 하나, 불신자는 복종해야 할 여호와 하나님께는 항거하면서, 모든 것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돈을 주기만 하면 2시간 동안 주인의 원하는 것을 무슨 일이든지 모두 들어주겠다고 약속한 젊은 남녀 1500명이, 서독 함브르크시의 한 경매장에 모여 현대판 노에 시장을 열었습니다. 그날 경매에서 최고 가격에 낙찰된 노예는 85마르크(35000원)였고, 최저 낙찰 가격은 5마르크(1500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대가를 받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제한된 시간만 종노릇을 하는 것이므로, 자신이 진짜 노예는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비록 자신이 몸으로 섬기게 된 주인은 단지 24시간 동안만 주인이 되지만, 그가 마음으로 섬기고 있는 황금은 평생 동안 그의 주인이 되며, 그래서 그는 24시간 동안만의 일시적인 노예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그는 영원한 황금의 노예가 되는 셈인 것입니다.
종교 개혁을 일으킨 루터는 그의 유명한 저서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죄로부터 자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교권의 탄압으로부터 자유를 역설했습니다. 이러한 자유를 소유한 자만이 진정한 자유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은 결코 죄의 종이 되거나, 황금과 정욕과 권세와 인기의 종이 되거나, 사람의 종이 되거나, 사업이나 일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은 종교 개혁 기념 주일을 맞이해서 개혁의 동기, 개혁의 원리,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개혁의 원리인
1)이신 득의 2)오직 성경 3)신자 개위 사제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고 이러한 원리 위에 우리의 신앙을 세우고, 또 이러한 개혁 원리들을 계승하고 후대에까지 전승시켜 주어야 할 것입니다. 개혁을 일으킨지 484년이 되는 이 때, 오늘 지상의 교회와 한국 교계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면, 신교가 구교 못지 않게 타락한 것이 너무도 많을 것 같습니다. 교권 싸움, 파당과 분쟁, 물량주의, 기복 신앙, 어디서부터 수술해야 좋을지 모를 만큼 부패하고 오염된 것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개혁의 요구가 대내외적으로 빗발치고 있고,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총회는 개혁의 기치를 들고 개혁 총회라 명명하고,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을 모토로 내걸었습니다. 그러나 구호만 그럴듯 해 가지고 개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작금의 노회나 총회 상황을 보면, 개혁의 싹도 보이지 않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비판의 메스를 다른 사람에게만 들이대지 맙시다. (C. C. C 출신 -주일날 장사를 하면서도 교회 비판만을.... )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 시절에 나는 혁명가였고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나의 기도는 이것이 모두였다. '주여, 내게 세상을 개혁할 힘을 주소서' 중년에 이르러 한 사람의 영혼도 고쳐 놓지 못한 채 내 반생이 흘렀음을 깨닫자 내 기도는 이렇게 달라졌다. '주여, 나와 접촉하게 되는 모든 사람들을 변화시킬 은총을 주소서. 그저 가족과 친지들만 개종시켜도 만족하겠나이다' 이제 노인이 되어 죽을 날도 오늘 내일로 다가오니 이제야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알게 되었다. 이제 나의 유일한 기도는 이것이다. '주여, 나 자신을 고칠 은총을 주소서. ' 처음부터 이렇게 빌었던들 일생을 허비하지 않았으련만이라고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또 누군가는 말하기를 '어두움만을 탓하지 말고 네가 작은 촛불이 되라'고 했습니다. 깨끗한 세상을 만드는 최초 최고의 행위는 내가 먼저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남을 재는 잣대로 나를 재고, 남에게 들이대는 날카로운 비판의 메스를 내게 가해서, 내가 먼저 개혁되어지고, 내가 먼저 갱신되어지고, 내가 더 성화 되고, 그래서 더 사랑스런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더 진실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더 좋은 신자가 되고, 이러한 신자들로 이룩된 우리 송정 중앙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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