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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계속되어야 할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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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이 바뀔 때마다 단골 메뉴처럼 등장하는 구호가 있습니다. 바로 "개혁"입니다. 좀 거슬러 올라가 보면 전두환 노태우 정권 때도 비록 정권의 정통성 시비 때문에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부르짖었습니다. 김영삼 정권 때는 군사독재 정권을 청산했다하여 이름을 문민정부라 부르면서 정권의 정통성 위에 고강도 개혁 드라이브를 추진했습니다. 이번 김대중 국민의 정부에 와서도 전방위 개혁이 지금까지 지속되어왔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개혁이 완성되었습니까 보다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습니까 더 이상 부정도 없고 부패도 없는 밝고 맑은 세상이 되었습니까 우리 국민 모두가 체감하고 있는 것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그리고 개혁을 위한 그 많은 노력이 있었지만 정작 개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지적해야 할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개혁이 제도나 시스템 개혁에 치중되었다는 점입니다. 사실 문제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의 의식과 사람의 마인드가 바뀌지 않았는데 제도와 시스템을 바꾼다고 그 개혁이 완성될 리가 없습니다. 단적으로 의약분업 문제만 해도 제도적으로는 보다 진일보한 형태로 개혁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의료인의 의식이 바뀌지 않고, 제약회사의 관행이 바뀌지 않고, 국민들의 마인드가 바뀌지 않으니까 더욱 불편만 가중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제도나 시스템 개혁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생각과 의식이 개혁되어야 합니다.

 둘째, 개혁을 주도하는 세력이 자기 개혁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정권이 바뀌면서 개혁을 하겠다고 덤벼든 세력들이 자기들은 개혁의 주체이고 국민이나 재벌이나 교사 등을 개혁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들은 언제나 정당하고 옳다는 모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문민정부에서도 개혁이 중단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개혁의 주체 세력들의 비리가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아들이 구속되는 지경에 이르면서 개혁은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개혁이 그 힘을 잃고 있는데 그 원인은 개혁 주도 세력들의 비리가 온통 무슨무슨 게이트니 하면서 불거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개혁에서 나는 빼고 너만 개혁하겠다고 하면 그 개혁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나부터 개혁하는 개혁일 때 그 개혁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셋째, 개혁이 지속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권이 바뀌면서 무슨 유행처럼 개혁이 외쳐지다가 정치적인 의도가 달성되면 개혁을 주장하던 목소리가 어느 시점에서부터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개혁은 혁명이 아니기 때문에 지속되어야 합니다. 꾸준히 장기적으로 하나씩 둘씩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 개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 개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사람의 의식, 사람의 믿음이 개혁되어야 합니다. 이것 먼저 된 연후에 제도도 바꾸고, 시스템도 바꾸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너부터가 아니라 나부터의 개혁이 되어야 합니다. 남을 개혁하려하기 보다는 나를 개혁하려하면서 본을 보일 때 그 개혁이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개혁이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단기간의 프로그램이 되어서는 안되고, 일정 기간 동안 밀어 부쳐서 이룰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개혁의 기본 원리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더 이상 로마 천주교의 부패를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면죄부 판매였습니다. 교황 레오 10세는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증축하던 중에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기발한 착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면죄부를 사면 연옥의 고통에서 면제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성경에 나오지도 않는 연옥을 말하면서 이 연옥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면죄부를 사면 그들이 죄사함을 받고 저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믿고 면죄부를 샀던 것입니다. 독일에서는 테첼이라는 사제가 파송을 받아 면죄부 판매에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여기에서도 면죄부를 판매한 액수의 절반 정도가 알베르트라는 신부의 모인츠 대주교직을 사는데 소용된 빚을 갚는데 사용되기까지 했습니다. 루터는 이런 부패상을 더 이상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정치적인 방법을 쓰이 않았습니다. 정치적인 구호를 외치지 않았습니다. 철저히 성경적이요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1517년 자기가 설교하던 교회, 자기가 가르치던 학생들 앞에 95개조항의 성경에 기초한 반박문을 걸고 개혁의 기치를 들었습니다.

이 반박문에 나타난 종교개혁의 기본 원리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오직 믿음입니다. 이태리 로마에 가보면 계단 성당이라고 불리는 성당이 있습니다. 이 성당에는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가 팔레스틴에서 가져왔다는 계단이 성당 중앙에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오르셨던 바로 그 계단을 옮겨다 놓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종교개혁 성지순례 차 이곳을 방문해 본 적이 있습니다. 계단이 28단이었습니다. 나무로 되어있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렸는지 기름칠을 한 것처럼 반질반질했습니다. 이 성당에는 이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면 죄사함을 받는다는 불문율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많은 참배객들이 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도 이 계단 몇 개를 무릎으로 올라보았습니다.

그 옛날 마르틴 루터가 자기의 죄를 사함받기 위해 이 계단을 셀 수 없을 정도로 여러 차례 오르내렸습니다. 그러나 결코 죄사함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가 말씀 안에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바로 우리의 죄사함, 우리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부르짖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우리의 행위로가 아닙니다. 우리가 무슨 공적을 쌓는다고 죄사함을 받거나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갈 2:16을 보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영적 개혁은, 우리의 교회 개혁은 믿음 아닌 것들을 잘라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믿음 아닌 것이 믿음만큼 중요하게 받아들여진다든지, 아니면 믿음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겨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둘째, 오직 성경입니다. 루터는 생각했습니다. 왜 면죄부와 같은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발상을 하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당시 천주교의 지도자들이 말씀을 떠나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황과 추기경들이 모여 공의회를 구성하고 이곳에서 결정된 것들이 당시 천주교의 신앙과 행위의 표준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공의회 결정 사항 가운데 성경 내용을 뛰어넘는 것들이 생겨나곤 했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가 성경을 확대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다양한 문헌들이 생겨났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허구이고 인간적인 의도 하에 생겨난 것들이 많아서 성경에 포함될 것들을 따로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 하에 결정했습니다. 이것들을 정경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외의 많은 문서들 가운데 특히 자료로서 보존 가치가 있는 것들을 외경이라 하여 보관해 왔습니다. 특히 구약과 신약 시대 중간에 나타난 15권의 문서들을 구약의 외경이라고 보관해 왔습니다. 그런데 천주교는 이 문서들 가운데 12권이 자기들의 공의회 결정을 위한 중요한 문헌적 근거를 마련해 준다고 해서 1546년 4월 8일 트렌트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천주교 성경으로 채택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위에서 언급한 책들을, 카톨릭교회에서 해왔던 것처럼, 모두 다 성경의 정경으로 받아드리고 읽지 않으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 그런데 이 외경 안에 그들만의 억지 교리가 실려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카베오 하서 12장 39-45에 보면 연옥이라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집회서 3장 30절에 보면 자선 행위를 통해 구원받는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이 로마 천주교는 자기들의 뜻대로 결정해 놓고 후에 이를 보증할만한 내용을 찾아 성경을 확대하는 작업을 해 왔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성경의 권위를 자기들의 공의회 권위 아래에 두려는 시도입니다. 성경도 초대교회 공의회에서 결정되었기 때문에 성경의 권위 역시 공의회 권위 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공의회 결정도 때로는 성경의 권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논리를 피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그래서 "성경으로 돌아가자(Back to the Bible)"고 외쳤습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를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영적 개혁, 교회의 개혁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외의 주장, 인간적인 논의들을 배격하고 제거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셋째, 오직 은혜입니다.

로마 천주교는 자꾸 무엇인가를 덧붙이려 합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은 우리 개신교와 천주교 사이의 차이를 '오직'과 '그러나'로 구분하려고 합니다. 우리 개신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로마 천주교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여 무엇인가 덧붙이고자 합니다. 그래서 공덕 사상을 첨가시킵니다. 실제로 로마 천주교는 구원받기 위해서는 선행을 해야하고, 고해성사도 해야 하고, 7성례에 참여도 해야 합니다. 특히 고해성사는 죄에 따라 신부들이 죄 값을 치르기 위해 무엇인가 하도록 명합니다. 예를 들어 사도신경을 몇 번 쓰라든지, 주기도문을 몇 번 암송하라든지, 고아원에 가서 청소를 한다든지…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롬 3:23-4을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말씀했습니다. 분명히 '값없이'라고 되어있습니다. 대가 없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물론 우리가 착한 일을 해야 합니다. 덕을 세우고, 공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감사의 응답입니다. 조건이나 자격을 갖추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공덕을 쌓아야만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았기에 이제는 감사한 마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답게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봉사도 하고, 덕도 세우고, 공도 쌓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영적 개혁은 이렇게 은혜 아닌 조건들을 걷어내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원리에서 보듯이 우리의 개혁은 덧붙여진 비본질적인 것들을 걷어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개혁의 기본 원리요 방향입니다.

계속되어야 할 개혁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가셔서 성전을 청결케 하시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정결한 짐승으로 희생제물을 바쳐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율법에 정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먼 곳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오려고 할 때 정한 짐승을 가져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서 성전에서 제물로 쓸 짐승을 사고 팔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20세 이상의 유대 남자들은 반드시 성전세로 반 세겔을 내도록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사용하던 화폐는 로마의 화폐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환전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좋은 뜻으로 시작되었지만 부패하고 썩게 되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상납금을 받는 조건으로 특정 장사치들의 독과점 행위를 눈감아 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전은 밀거래와 뇌물이 오고가는 부패한 곳이 되었습니다. 독과점 업자들이 폭리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제사 행위를 통해서 제사장들과 일부 업자들이 배를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이 잘못된 관행, 부패한 상황을 바로 잡고자 성전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개혁을 단행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성전이 장사하는 곳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입니다. 러시아 소설 모나키라는 책을 보면 왜 러시아 교회가 공산혁명으로 문을 닫아야 했는가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러시아 정교회가 재산을 축적했던 것입니다. 교회가 끊임없이 수익사업에 뛰어들었고, 교인들의 헌금을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쓰지 않고 세의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베풀지 않고 모으고 또 모았습니다. 그러다 끝내는 러시아 내의 부의 2/3를 교회가 가지게 되었습니다. 부에 젖어있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결과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나 교회가 하루 아침에 문을 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세상의 유혹 앞에 노출되어있습니다. 자칫 한 눈 팔다보면 어느새 교회다운 모습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개혁해 가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 교회답지 못한 모습이 어디에 있는 지 살펴서 개혁을 지속해 가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7절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 말씀했습니다. 성전을 성전되게 하려는 노력 때문에 주님께서 큰 고초를 겪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실제로 그 동안 기득권을 누려오던 종교 지도자들, 많은 정치 경제 권력가들에게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개혁을 하려는 사람은 고통을 겪게 됩니다. 기득권을 누리던 세력들에게 저항을 받습니다. 자기 개혁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잘못된 관행에 젖어있던 자아가 이를 거부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래야 개혁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는 교회다운 교회라는 지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를 교회답지 못하게 하려는 세력과 대항해서 싸우는 교회가 되자는 것입니다. 교회답지 못한 모습을 끊임없이 벗어버리는 교회가 되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속적으로 자기 개혁을 하는 교회가 되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개혁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교인이 개혁되지 않고는 교회 개혁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과거의 관행에 안주하려는 세력과 싸워야 합니다. 싸움이기 때문에 힘이 듭니다. 그러나 힘이 들더라도 싸워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교회가 교회다워지기를 원하십니다. 성도가 성도다워지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속적인 자기 개혁 그리고 교회 개혁에 동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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