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TOP
DOWN

[종교개혁] 느헤미야의 개혁

본문

요즘 우리는 그 어느 때 보다 개혁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또한 듣고 있습니다. 개혁이란 새로 뜯어 고치고 혁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구세대의 구태의연하고 안일한 사고방식과 생활 패턴을 뜯어 고치겠다는 신세대적 사고방식으로 오해할 수 있는 묘한 정치세대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혁이란 젊은 세대가 늙은 세대를 대상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늙은 세대가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남녀노소 불문한 모든 세대가 그 대상이며 또한 그 개혁의 성질도 여러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몇 번 느헤미야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은결론적인 부분으로 그 느헤미야의 신앙개혁에 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느헤미야가 유다 총독으로 재임한 기간은 12년간으로서 바사 왕 아닥사스다 즉위 20 년부터 32년까지였습니다(느 5:14). 그러나 그는 이 12년(B. C. 444-432)동안을 계속 예루살렘에 거주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처음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예루살렘 귀환(1차 귀환) 허락을 받을 때에 어느 '기한'을 정하고(느 2:6) 예루살렘에 왔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고 민족의 재통합이 이루어진 후에, 그 기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나 그는 수산 궁으로 돌아갔던 것이 틀림없으며, 그러다가 예루살렘의 신앙 부패 소식을 듣고 그의 총독 임기가 완료되는 아닥사스다 왕 32년에 그는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2차 귀환) 신앙 개혁을 단행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2차 귀환 기간도 그리 길지는 않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말미'를 청했다는 데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느 13:6). '말미'란 '짧은 기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느헤미야가 얼마나 왕에게 사랑을 받았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의 '그 날'은 느헤미야가 2차로 예루살렘에 돌아온 초기의 '어느 날'이며, 그 날은 느헤미야의 신앙 개혁이 시작된 날입니다.
1. 그의 개혁은 율법 책을 낭독함으로써 시작한 신앙개혁이었습니다.
율법, 즉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각성시켰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과 같습니다. (히 4:12)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어 죄를 찢으시고 회개하도록 합니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은 엠마오로 내려가던 사람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은 웨슬레의 마음을 뜨겁게 하여 회심을 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큰 종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개혁의 시작은 율법을 낭독하여 모든 백성들이 듣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그리고 어떤 결단과 삶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여 줍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도 삶의 새로운 도전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2. 개혁은 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백성들 속에 섞인 무리를 분리시켰습니다.
섞인 무리란 암몬과 모압 사람들을 비롯해 일부 잡족들 이었습니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들의 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를 악으로써 물리친 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평지에 이르렀을 때 모압 왕 발락이 선지자 발람을 뇌물로 유혹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사주한 죄입니다(민 22:1-6).
이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민 22:12)고 하셨습니다. 복을 받은 자를 축복하면 복을 받고 저주하면 저주하는 자가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창 12:3). 그리하여 모세는 그들이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할 것(신 23:3)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총회에 들지 못한다는 선언은 가장 처참한 저주입니다.
지금 느헤미야는 지난 날 모세를 통해 말씀하셨던 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므로 개혁을 하였습니다. 특히 암몬 사람 도비야는 이스라엘 중에 섞여서 여전히 마귀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성곽 건축을 악평하고 훼방하는 것이었습니다.
도비야는 그렇더라도 그래도 뭔가 어떤 뜻을 가지고 이스라엘과 더불어 함께 살고 있는 이방인들을 분리하고 갈라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더구나 이들 중에 상당수는 이미 유대인들과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룬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이 사표를 낼지언정 결단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래서 회사의 구조조정을 기피하고 도피생활을 하는 사람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일본의 닛산을 살리기 위해 뼈를 깎는 구조조정의 개혁을 한 사레도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살펴 볼 때 이스라엘 속에 있는 이방인이나 잡족들은 여부스 족속들을 비롯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상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내부의 암적 존재들이었습니다. 우상을 섬기게 하는 모체였고, 이스라엘이 어려울 때 항상 선동하고 불평불만을 유포시켜 정치 사회를 더욱 혼란케 하는 온상이기도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지금 이러한 요인들을 제거하는 개혁을 시도한 것입니다.
3. 암몬 사람 도비야와 대제사장 엘리아십을 축출했습니다.
지난 날 성벽 재건을 집요하게 방해했던 암몬 사람 도비야(느 2:10, 19; 4:3, 7, 8; 6:17)가 성전 안의 성물을 두는 골방을 개조하여 그의 전용 거실로 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단적으로 이것을 허락해 준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부패와 타락에서 온 것입니다. 그는 뇌물을 먹고 자기의 유익을 꾀했을 뿐만 아니라 암몬 사람인 그를 백성들이 존경하도록 유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유다의 대적 산발랏의 딸과 그의 손자를 혼인시켰습니다. (느 13:28) 대제사장이 이방인과 통혼을 하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산발랏도 유다의 성곽을 건축하는데 방해를 하였습니다. 백성들이 생각을 할 때 도무지 헷갈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산발랏과 동맹하여 유다를 대적하던 암몬 사람 도비야를 위하여 성전 안에 특실을(느 13:4, 5) 만들어 거하게 한, 대제사장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신성 모독을 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도비야뿐만 아니라 대제사장 엘리아십까지도 축출해 버렸습니다(느13:28, 29).
그리고 느헤미야는 '명하여 그 방을 정결케 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전의 기명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놓게'(9절) 하였습니다.
이제 이방인으로 인해 더럽혀진 성전은 다시 깨끗하게 회복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죄를 더럽혀진 마음을 회개를 통하여 죄를 추방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마음을 정결하게 씻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이렇게 언제나 종교는 외부의 적 때문이 아니라 내부의 적에 의하여 부패하고 그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을 지키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 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환경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이 영적으로 건강하기만 하면 우리도 바울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할렐루야!
4. 레위 사람들의 생활비를 회복시켰습니다.
레위 사람들이 성전 직무를 버리고 그들의 밭이 있는 땅으로 돌아가게 된 것은 그들이 보수를 받지 못한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민장(장로)들을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궁극적인 책임은 대제사장 엘리아십에게 있었습니다. 그의 타락이 성전이 모든 예배의 기능을 사실하게 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더라도 레위인들 역시 자신에게도 책임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믿음이 모두 떨어 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생활비를 다시 지급하도록 하여 성전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회복되도록 하였습니다.
(느 12:47) 스룹바벨과 느헤미야 때에는 온 이스라엘이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날마다 쓸 것을 주되 그 구별한 것을 레위 사람들에게 주고 레위 사람들은 그것을 또 구별하여 아론 자손에게 주었느니라
이렇게 느헤미야는 성전의 정상적 기능을 위해 항상 성전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도 특별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 신앙생활의 의무와 제도를 준수하도록 강한 리더십을 발휘하였습니다.
느헤미야에 의하여 성전 직무는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흩어졌던 레위인들이 성전으로 돌아오고 백성들은 다시 십일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안식을 거룩하게 지키게 되었으며(안식일에는 성을 출입하지 못하도록 성문을 닫았다), 이제 이방인과는 혼인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였습니다. 이방인과 결혼한 집의 경우 아이들이 히브리어, 즉 모국에 살면서도 모국어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느헤미야는 분개하였습니다. 12절 이하에 있는 모든 내용들입니다.
솔로몬 왕도 엄밀히 생각을 해 보면 이방 여인들 때문에 그 말년이 불행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느헤미야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느헤미야의 개혁도 사실은 에스라의 개혁과 같이 강하고 단호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의 말씀입니다. 누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개혁을 합니까 그것은 개혁의 목소리가 큰 것이 아니고 자신이 먼저 변화된 사람이요, 자신이 먼저 개혁이 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