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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초대교회의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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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마틴 루터가 1517년에 종교를 개혁한 것을 기념하는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를 개혁하였던 종세 시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바와 같이 로마 카토릭 교회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세계를 지배하던 시대이었습니다.
당시의 시대는 교회가 지배하고 있었기 대문에 교회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마치 주민등록증을 받는 것과 같아서 주민등록증이 없이는 공적인 아무일도 할 수 없는것과 마찬가지로 세례를 받지 않고는 공인으로서의 생활을 전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혼도 교회를 떠나서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결혼을 하지 않으면 자식을 낳아도 호적에 올릴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교회를 거역할 수 없었고 왕과 나라까지도 교회 앞에서는 꼼짝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 앞에서는 왕과 나라도 꼼짝을 할 수 없었고 나라와 민족 그리고 백성들을 섬겨야 할 교회는 저들위에 군림하는 교회가 되어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권위가 아닌 세속적인 권위로 인하여 교회는 점점 부패하여져서 교회는 기독교의 모양만 남고 실제적으로는 기독교가 아닌 사교로 까지 전락하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그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교회와 교권주의자들의 이익을 위하여 저들을 지배하기 시작하였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들의 명령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사람으로 교인들을 길들이기 시작하여 무조건 저들의 명령에 복종을 하여야 구원을 얻는 것처럼 백성들을 위협하고 속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극치가 바로 면죄부 사건입니다.
누군가는 이 교회의 잘못을 지적하고 개혁하여야만 했었지만 그 엄청남 교회의 권력앞에 누구도 그 일을 하지 못하고 있었을 때 마틴 루터가 분연히 일어나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s)! ' '오직 은혜(Sola Gratia)!'를 웨치며 로마 교회에 도전을 하였던 것입니다.
왕과 세계까지도 지배하던 당시의 교회앞에 루터는 참으로 미미한 존재이었음으로 그 생명을 보존하기가 극히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루터를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심으로 죽고 망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당시의 교회가 루터를 해하지 못하고 그의 개혁을 막을 수 없었던 까닭은 당시의 교회가 세상은 지배할 수 있었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지배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루터의 편이 되셔서 루터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와같은 상황속에서 루터는 아주 유명한 찬송가 가사를 작사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384장 찬송인 것입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그의 개혁은 성공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개신교라고 불리우는 개혁교회가 이 땅에 생기게 되어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가 그 순수성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고 로마 카토릭 교회에도 결국 그 영향을 끼치게 되어 오늘날의 카토릭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개혁은 마치 세수하고 목욕을 하는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가만 있어도 몸이 더러워지게 마련입니다. 겉으로만 봐서는 잘 몰라도 막상을 목욕을 해보면 때가 밀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그냥 가만 있어도 죄를 짓게 되고 잘못되며 부패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날마다 세수를 하고 자주 목욕을 하듯 개혁을 하여야만 합니다.
끊임없는 자기개혁이 없다면 그는 평생을 세수하지 않고 사는 사람과 똑같은 모습이 될 것입니다.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꼭 그와같은 사람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개혁은 마치 자라나는 아이가 발에 맞지 아니하는 작은 신을 벗어 버리고 자기 발에 맞는 새 신을 신는것과 같습니다. 아이의 발이 커져서 그 신발을 신고는 걸을 수가 없는데도 잘못된 의미의 전통과 보수를 고집하며 신을 바꾸어주지 않는다면 그 아이는 옛날 중국의 여자들이 전족을 당하여 결국 제대로 걷지 못하는 불구자가 되었던 것과 같이 되고 말 것입니다.
신을 바꾸어 주어야 할 때 바꾸어 주지 않아서 발을 절며 뛰지 못하는 사람과 사회가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개혁은 마치 수술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몸에 이상이 있어서 그것이 생명을 위협하게 되면 우리는 과감히 수술을 하여야만 합니다. 수술의 고통은 마치 죽음과 같지만 그 고통이 무섭고 괴롭다고 그것을 회피하고 수술을 받지 않는다면 그는 결국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을 그 대가로 치루어야만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술의 때를 놓치듯 개혁의 때를 놓쳐서 위기를 만난 사람과 사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개혁을 대개 혁명과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개혁은 언제나 혁명과 같은 것만은 아닙니다. 평상시에 늘 자기의 건강을 진단받고 그때마다 체크되는 자신의 문제와 결점을 인정하고 그것을 고쳐나가기 위하여 평상시에 부지런히 노력한다면 대부분의 경우 수술과 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써야 할 자리에 까지 가지 않고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늘 자기 자신을 살피며 자기 반성과 개선을 계속해 나간다면 남이 나를 개혁시키기 위하여 수술의 메스를 들이대지 않게 될 것이며 나도 남을 개혁시키기 위하여 수술의 메스를 들이대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끊임없는 자기 개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면에서 오늘 본문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개혁은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과는 아주 다른 개혁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에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있은 후 교회에는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뿐만 아니라 안디옥 빌립보 고린도 에베소와 같은 곳곳에 교회가 서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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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게 그와같은 교회에는 이방인들이 많이 모여들게 되었는데 이방이들이 교회에 나오게 되자 저들도 유대인들과 같이 할례를 받아야만 하는가하는 문제가 대두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같이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다라고 주장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꼭 그래야만 하는가라고 의의를 제기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와같은 문제가 교회의 큰 문제가 되자 저들은 그 문제를 예루살렘으로 올려보내 결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결국 이 문제를 가지고 예루살렘에서는 총회가 열리게 되었는데 그 총회의 회장이 바로 야고보이었던 것입니다.
그 총회에서도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있었지만 베드로 사도가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의 충만함이 나타났던 것을 예로 들면서 그것을 보아 할례와 구원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의 일이 아닌 것이 분명하니 우리도 지키기 어려운 율법의 무거운 짐을 저들에게 지워주지 말고 다만 음행과 목매어 죽은 것을 먹지 말라는 것을 저들에게 부탁하고 할례 받는 일은 면케 해주자는 주장을 듣고 총회는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을 내려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보통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할례와 율법의 전통을 아브라함때부터 지켜 내려오고 있던 유대인들이 스스로 그것을 개혁하여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의 전통을 요구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는 저들이 참으로 믿음이 좋았던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들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묶인 사람들이었지 그 어떤 전통과 규례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인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이와같은 결정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에 대한 할례의 문제는 당시의 교회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교회로 분리시킬 수 있을만한 큰 문제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 문제를 자기 개혁을 통하여 스스로 해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엄청난 문제를 해결하면서도 교회의 분쟁이 없었고 개혁과 혁명의 진통과 피흘림이 없었던 것입니다.
저들은 타인에 의하여 개혁을 당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말씀과 신앙에 의하여 개선을 하고 개혁을 하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동안교회가 바로 그와같은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개혁하여 초대교회와 같이 갈등과 분쟁없이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이와같은 소원을 가지고 자신과 교회를 위하여 늘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늘 자신과 사회를 개혁해 나가기 위하여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두가지가 늘 있어야만 합니다.
 첫째는 의에 대한 분별력입니다. 의에 대한 분별력이 있어야만 개혁이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는 의(義)에 대한 분별력은 선천적으로 부족하고 이(利에 대한 분별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개혁을 놓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의 경우를 볼 때 아들이 장성하여 결혼을하여 며느리가 집에 들어왔을 때 나름대로 매우 중요한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것은 광의 열쇠를 누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고 며느리에게 그것을 넘겨 주어야 한다면 언제 그것을 넘겨 주어야 하는가가 아주 미묘한 문제가 되어 결과적으로 가정의 위기를 조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시어머니들이 광 열쇠를 며느리에게 넘겨주는 때를 잘 맞추지 못합니다. 남편이
돈을 벌어 올때도 자기 남편이 벌어오는 돈이니 마땅히 내가 광 열쇠를 가지고 살림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아들이 돈을 벌어 올 때도 내 아들이 벌어오는 돈이니 마땅히 그것도 내가 맡아 관리하여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아들은 아내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대부분의 시어머니들은 며느리를 자기집 식구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결혼을하여 며느리를 얻으면 아들과 며느리에 의해 열쇠를 빼앗기기 전에 스스로 기쁜 마음으로 그것을 아들과 며느리에게 내어주는 자기 개혁을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형편에 따라 불가불 결혼 즉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여도 나름대로 그 정확한 때를 놓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가정이 화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정뿐만이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고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때가 되어 물러나게 될 때 그것을 깨끗하게 포기하고 후배들에게 넘겨 줄 수 있을 때 개혁의 큰 진통을 격지 않고 평화적으로 자기 개선과 발전을 해나가는 집단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우리 동안교회는 아주 모범적인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약 5년전 전임 목사님께서 27년을 심혈을 기우려 목회하시고 교회를 성장시켜온 교회의 후임으로 부임하였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전임자가 성공적인 목회를 하시고 원로 목사님으로 은퇴하신 경우 새 목사가 부임하여 목회할 때 많은 진통과 어려움이 있기 마련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보편적인 이유중의 하나는 은퇴하신 목사님께서 광 열쇠를 선뜻 후임 목사에게 넘겨주지 못하고 불안하여 자신이 쥐고 있으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동안교회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은퇴하신 후 아직 젊고 경험이 없는 목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으시고 목회를 완전히 맡겨주셨습니다. 광 열쇠를 깨끗이 넘겨 주셨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목회자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큰 몸살을 하지 아니하고 계속하여 성장하는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교인들과 한국 교계에 보여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이익과 기득권에 대한 과감한 부인과 포기가 있어야만 자기 개혁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와같은 자기 개혁이 있을 때에만 혁명과 같은 피흘리는 개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용기입니다. 개혁하는 삶을 살려고하면 의에 대한 분별력과 함께 그것을 실천하고 실행할 수 있는 용기가 꼭 있어야만 합니다. 저는 운동권 학생들이 시위를 하고 거리로 뛰쳐나와 격렬한 몸 싸움을 하는 것을 볼 때마다 어떤 면에서 스스로 부끄러워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저들에게 있는 용기가 저에게 부족하다라고 하는 부끄러움입니다.
물론 저들의 행동이 진정으로 용기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습니다. 저들에게는 우리의 기준으로 볼 때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분별력이 부족하고 뿐만 아니라 일을 수행하는 방법에 있어서 많은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저들이 옳다고 생각하는(결과적으로 옳지 않을수도 있지만) 그 일을 위하여 몸을 사리지 않는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사물을 바로 판단하고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은 저들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데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위하여 용감하게 나서서 싸울 수 있는 용기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저들의 문제는 악을 악으로 이기려 한다는데 있습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선이 무엇인도 알 고 선한 방법이 무엇인지도 알지만 용기가 없어서 악과 도무지 싸우려 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 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자신의 문제만을 개선하려고 하지말고 사회의 문제도 개선하려고 하는 정신을 가져야만 합니다.
자신들의 문제는 오늘 본문의 초대교회의 교인들과 같이 개선하고 사회와 교회의 구조적인 문제는 루터같이 개혁하려고 하는 정신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 가야만 할 것입니다. 의에 대한 분별력과 용기는 모두가 다 진정한 믿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 가운데 의에대한 분별력과 용기를 가지고 자기 개혁과 사회개혁을 과감하게 해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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