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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개혁의 근원

본문

오늘은 종교 개혁 주일로 지킵니다. 우리 자신이나 교회의 생활과 모습에서 개선할 점이나 고쳐야 할 모습들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라 봅니다. 오늘 종교 개혁 주일을 맞이하여 구약 성경의 느헤미야 서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느헤미야 서는 에스라 서와 같이 연결된 책입니다. 그래서 보통 "에스라-느헤미야"라고 함께 부르기도 합니다. 이 "에스라-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민족이 멸망해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후, 약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다가, 바벨론이 멸망하게 됨으로 다시 고국인 유대 땅으로 돌아와서 활동한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활동상을 그린 책입니다. 그러므로 이 "에스라-느헤미야"에는 피폐된 조국을 재건하고자 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포로생활 70년을 지내고 돌아온 고국은 모든 것이 다 허물어지고 황폐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여기에 좌절하지 않고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황폐한 조국을 재건하는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느 8장은 이러한 재건이 어느 정도 진행된 가운데에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모습을 그린 내용의 말씀입니다.
이러한 느 8장의 말씀을 오늘 종교개혁 주일 예배 설교 본문으로 삼은 이유는 이러한 이스라엘 민족이 새롭게 일어나고자 하는 모습에서 우리 신시내티 한인 장로교회가 지녀야 할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처럼 오늘 우리들도 새로운 도전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 우리들이 지녀야 할 모습이 무엇인가를 오늘 본문을 통하여 발견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 교회의 상황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1. 신시내티 한인 장로교회의 상황(Context)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갱신하고 개혁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의 상황을 잘 알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한 줄 압니다. 우리 교회는 "신시내티 한인 장로교회"입니다. 이 교회의 이름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우리의 상황이 있습니다. 하나는 신시내티라고 하는 이름에서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곳은 미국의 한 도시 신시내티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국에 있는 어느 교회와는 상황이 전혀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 하나는 우리는 "한인" 교회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인이 중심이 된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앞의 신시내티란 말과 함께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민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민자라는 독특한 모습의 상황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우리는 "장로 교회"라는 점입니다. 다른 여러 교파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장로교라는 전통 속에 있는 교회임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른 교파와는 무언가 다른 우리들 나름대로의 전통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에서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주체성(Identity)을 지님과 동시에 허물어져 있는 곳은 새롭게 수축하고, 고쳐야 할 것은 과감하게 고칠 수 있는 신앙의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자세를 어느 기간에 한정하여 갖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언제나 이러한 자세와 모습으로 새로워지고자 하는 지속적인 갱신의 자세를 지니는 것이 바로 개혁교회로서의 모습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민자로서 이루어진 교회라는 상황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이스라엘 민족과 비슷한 형편일 것입니다. 포로 생활을 하다가 황폐한 고국에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처럼 우리들도 맨땅에서 우리의 가정과 기업과 교회를 이루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도 다른 민족이 거하는 땅에서 이 일을 감당해야 하는 더 어려운 모습이 있습니다. 언어소통이 불편한 현실에서 경제적인 기반을 닦기 위해서 말할 수 없는 노력을 해야하는 우리들의 현실이 그러합니다. 그러면서도 되는대로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염두에 두며 바르게 살고자 하는 데에서 정신적인 부담도 더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고, 또 주일날 교회에 나오는 데에는 상당한 노력과 용기가 필요한 줄 압니다. 공부하는 우리 학생들도 학교에 제출해야 할 많은 reports들도 있는데, 이렇게 주일날 교회에 나온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또한 이민 사회나 교회의 형편을 볼 때, 모두들 이러한 어려움 속에 있지만 때로는 사업상으로 경쟁해야 하는 모습도 있고, 인간적인 갈등으로 인하여 서로 마음 상하는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또한 경제적인 이유로 서로 불신하게 되는 경우도 상당히 있습니다. 또한 교회는 교회대로 서로간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기보다는 경쟁하고 때로는 비방하는 일들도 많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신시내티 교회도 이러한 일들을 겪어본 경험이 있는 교회라고 봅니다. 그리하여 현재 우리의 모습은 모든 것에 있어서 안정된 자리에 있다기보다는 좀 더 안정된 모습으로 나아가야 하는 그러한 모습 속에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선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는 가운데 미국 장로교 총회와 신시내티 노회와 주변 교회의 도움을 받는 가운데 있습니다. 또한 많은 젊은 층의 부부들이 교회를 떠난 관계로 주일학교와 중고등부 학생들이 없는 가운데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때로는 우리 교회로 오고 싶어하는 사람들 중에 어린 자녀를 가진 분들이 선뜻 오지 못하는 이유가 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우리 신시내티 한인 장로교회가 처하고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2. 우리의 현실에 따른 개혁의 정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오늘 종교 개혁 주일을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지녀야 할 종교개혁의 정신은 과연 무엇이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이나 어떤 공동체나 할 것 없이, 무엇인가 세워지고 만들어질 수 있는 계기는 반드시 위기 가운데에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려서 배운 사실이지만, 세계 문명의 발생지들을 보면 반드시 조건이 좋은 곳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척박하고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에서 세계 문명이 발생했다고 배웠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신앙적으로 새로움을 가져다 준 사건도 바로 이러한 위기 속에서인 것입니다. 하나는 출애굽 사건입니다. 애굽에서 400여 년 동안의 종살이가 이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신앙의 불을 붙인 사건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바벨론 포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동안에 신앙적인 각성이 일어났습니다. 바벨론 포로 사건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들이 갖고 있는 구약 성경은 아마 구경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벨론 포로기간 동안에 이스라엘 민족은 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수집하고 간직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위기라고 하는 현실이 무언가를 창조해 낼 수 있고, 만들어 낼 수 있게 해주는 동기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개혁의 기본 자세요 정신입니다.
문제는 위기를 만났을 때, 어떻게 처신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위기를 만났을 때, 바르게 잘 처신하면 귀한 것을 창출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 하나의 개혁의 정신입니다. 만일 위기를 만났을 때, 바르지 않은 방법으로 그 위기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중세 시대에 로마 천주교회는 하나의 큰 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성 베드로 성당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워낙 큰 성당을 짓는 일이었기 때문에 막대한 예산을 세워 시작하였지만 역시 돈이 모자랐습니다. 그 때, 로마 천주교 입장에서는 사람들에게 돈을 걷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시작한 일이 결국 종교 개혁을 일으키게 되는 불씨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면죄부를 파는 일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면죄부를 사고자 이 통에 동전을 딸랑하고 넣는 순간, 여러분의 죽은 부모나 형제는 연옥에서 천당으로 올라갈 것"이라고 하면서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이는 진정 죽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모자라는 성당 건축비를 마련하고자 했던 인간적 술수였습니다. 이러한 인간적 술수에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러한 면죄부 사건이 바로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위기를 만났을 때, 이를 편법으로 극복하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이러한 또 다른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또 사업상 위기를 만났을 때, 우리는 최소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또 다른 죄를 짓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개혁의 정신을 간직하면서 오늘 우리 교회가 지녀야 할 개혁의 요소를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찾아보도록 하십시다.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에서 에스라-느헤미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이렇게 성전을 수축하기는 하였지만, 이들의 오래된 포로 생활의 습관이나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모습이 쉽게 고쳐지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은 황폐한 고국을 재건하면서 겪게된 경제적 위기, 방해하는 자들로 인한 위기 등을 어떻게 해결하고자 하였습니까 이러한 가운데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깨우쳐 주고자 여러 가지로 애를 많이 썼습니다.
2-1. 예배 정신의 확립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놀라운 결과가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1절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칠월에 이르러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 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 우리가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자발적으로 모였고, 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원하여 학사 에스라를 청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모습은 바로 예배의 갱신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정신과 자세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해 준 첫 번째 모습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신시내티 한인 장로교회 역시 우리의 예배 드리는 현실을 갱신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물론 우리는 주일마다 예배를 드립니다. 하지만 이러한 예배 드림에 있어서 몇 가지 제고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배에 대한 용어부터 바르게 써야 할 것입니다. 흔히들 "예배 본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카톨릭 신도들은 "미사 드린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제사 지낸다" 혹은 "제사 드린다"라고 말합니다. "제사 본다"고 말하는 사람을 아직 못 보았습니다. 하지만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배라는 말 자체에는 바로 이런 엄숙함이 배어 있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여기에는 예배에 대한 우리들의 기본적인 마음이 들어있을 수 있습니다. 군인에게 있어서 기본 자세는 차렷 자세입니다. 제가 논산 훈련소에서 처음 군인 훈련받을 때, 한 조교가 이런 말을 한 것이 기억납니다: "너희가 차렷 자세만 확실하게 하면 Two Star가 아니라 Three Star가 와도 너희를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라"고. 예배는 신앙인의 기본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인에게 있어서 기본 자세라고 할 수 있는 이 예배 드리는 자세를 분명하고도 바르게 지닐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예배 본다"고 말하지 말고 "예배 드린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예배에 대한 자발성과 함께 꼭 필요한 것은 하나된 자세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는 "모든 백성"이란 표현이 10번이나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배에 대한 자발성과 더불어 간절한 마음이 표출된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예배를 갱신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된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우리 개신교가 개혁해야 될 부분이 있다면 이렇게 하나되는 정신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신시내티 한인 장로교회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자원하는 심령으로 나아오되, 모두가 함께 나아올 수 있는 "예배에 대한 자원함과 하나됨"을 이룰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2. 말씀에 대한 깨달음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우리 신시내티 한인 장로교회가 추구해야 할 모습 한 가지를 또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를 바로 드릴 때 주어지는 결과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 8절에 나와 있습니다: "에스라가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백성들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깨달음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배에 대하여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예배를 이러한 깨달음의 차원보다는 감정해소(Catharsis) 차원으로 예배를 오해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어떤 모습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나 혼자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교회는 이러한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나 관점에 편승하여 우리의 예배와 신앙의 자세를 변질시키기보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닫게 되는 역사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이러한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이 구약의 제사의 모습을 극복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형태로 새롭게 태어나는 그러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깨달음이란 어떤 모습으로 발견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깨달음에는 뒤따라 나오는 순종의 자세와 맞물리는 것임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에스라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 다 울게 됩니다. 이에 에스라와 느헤미야 그리고 함께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이들을 향해 울지 말라고 합니다. 이 때, 느헤미야가 전하는 말씀이 10절입니다: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 이러한 느헤미야의 권고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봅니다. 12절,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주고 크게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그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앎이니라. " 우리는 여기서 말씀을 깨달은 자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말씀에 따른 순종의 자세와 모습에서입니다. 이렇게 말씀의 깨달음에는 거기에 따르는 어떤 표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시내티 한인 장로교회는 이러한 말씀에 대한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행할 수 있는 그러한 성도들이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
2-3. 장로 제도의 모범으로서의 "에스라-느헤미야"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장로 제도의 모델을 제공하여 줍니다. 9절 말씀 보십시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 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우리는 여기서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인 에스라의 역할을 봅니다.
에스라는 제사장입니다. 하지만 그는 무엇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을 "모세의 율법"중심의 공동체로 회복시키는데 주력한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에서 돌아와 예루살렘 성을 개축하고 해이해진 사회 기강을 바로 잡는 사회 정치적 질서를 회복시키는 일익을 담당한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는 원래 페르시아에서 왕의 시중을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왕의 술잔을 맡았던 사람인데 고대 시대에서 이 왕의 술잔을 맡았다는 것은 왕의 상당한 신임을 얻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직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술에 독을 타서 왕을 암살하는 일이 많았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느헤미야는 유능하고 솔선 수범하는 청렴한 총독이었고 이스라엘 전체 역사 중 위대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에스라는 학자처럼 조용하고 깊이 있는 모습이었다면, 느헤미야는 활기 있고 능동적이며 예민한 통찰력과 자기를 낮추는 자세로 무기력하고 감상에 빠져 있는 유대 민족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잘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모습에서 오늘날 교회에서의 "목사와 장로"의 모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며 가르치는 목사,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입각하여 성도들을 잘 이끄는 장로의 역할이 이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모습에서 발견됩니다.
우리 장로교는 교회의 이러한 지도 체제를 성경에서 발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오늘 본문의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모델에서 그리고 초대 교회의 사도와 집사 제도의 모델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가 바른 모습으로 이루어지는 데에는 이보다 더 좋은 지도 체제가 없으리라고 봅니다. 목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가르치고 기도하는 일에 힘쓰고, 장로는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교인들을 잘 인도한다면 아마 교회가 평안하고 온전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리라 믿습니다. 어떤 점에서 오늘날의 많은 장로교회가 교회가 해야 할 사명을 바로 감당하지 못한다면 그 원인이 이러한 "목사와 장로"의 모습과 역할이 교회 내에서 바르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해야 할 일 보다는 하지 않아도 될 일에 영적인 에너지를 소모하게 된다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모델"을 갖고 있는 우리 장로 교회는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귀한 뜻을 이룰 수 있는 비결을 이미 간직하고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이러한 장로와 목사의 역할과 자세가 바르게 잘 이루어질 수 있어야 될 것입니다.
우리 신시내티 한인 장로교회는 이제 공천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이제 교회 일꾼을 뽑아서 이러한 에스라-느헤미야 체제를 갖춤으로 인하여 교회가 해야 할 많은 일들을 바르게 감당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종교 개혁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이러한 세 가지의 갱신을 생각하며 다짐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첫째는 자발적이며 하나된 마음과 자세를 지닌 예배를 드림으로 여호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음으로 우리의 실제 삶에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순종의 삶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셋째는 장로교회의 모범에 따라 교회의 리더십을 잘 구축함으로 교회의 사명을 바르게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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