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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요시야왕의 개혁운동

본문

10월 마지막 주일은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개혁자 루터(M. Luther)가 윗덴벍 대학에서 95개조에 달하는 논제를 걸고 교황청에 도전하며 개혁의 선언을 한지 484년이 되었습니다. 개혁(Reform)이라는 말은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 판을 짜는 혁명과 같은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변질되고 탈선되는 길에서 본래의 길, 또는 바른 길로 되돌린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보아 성도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바른길에서 이탈하여 멸망으로 향하게 될 때 그 길에서 돌이켜 생명의 길로 그 방향을 틀어준다는 뜻을 가집니다.
예레미야 18:15에 "대저 내 백성은 나를 잊고 허무한 것에게 분향하거니와 이러한 것들은 그들로 그 길 곧 그 옛길에서 넘어지게하며 곁길 곧 닦지 아니한 길로 행케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예레미야 6:16에는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길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개혁자 칼빈(J. Calvin)은 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 이후 모든 사람은 자기의 삶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배치되는 요소를 두고 이를 쳐서 복종시키며 여호와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바를 좇아 살도록 부단한 노력을 하여야 됩니다.
본문 말씀에는 유대나라 16대왕(B. C. 639-608)인 요시야의 개혁운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조부 므낫세와 부친인 아몬이 저지른 우상숭배의 죄악으로부터 여호와의 종교로 개혁하는 일을 과감하게 단행하였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어두움이 짙게 깔리고 백성들의 가치관이 혼미해져 버리면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됩니다.
인류역사에 이와같은 생명적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일은 기독교 복음이 이루어놓은 능력이요 도전입니다.
지금 우리는 구약시대 위대한 개혁자 요시야의 사적을 보면서 오늘날 개혁교회가 수행하여야 될 개혁 운동의 과제를 조명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1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
중세 기독교회가 로마 카톨릭의 교권에 의하여 종교적 암흑시대로 전락되었을 때 혜성처럼 일어나서 진리의 봉화를 밝혀 주었던 개혁자들의 구호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SOLI DEO GLORIA)이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교황 무오설을 주장하며 사람을 우상처럼 내세웠으나 성경은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영원자존자시며 영광을 받으실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롬11:36).
따라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에 진력하여야 됩니다.
본문 성경의 주인공인 요시야왕은 즉위하면서부터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정치를 펴기로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1-2절에 "요시야가 위에 나아갈 때 나이 팔세라 예루살렘에서 삼십일년을 치리하니라 …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1) 우상 종교로 전락한 시대
요시야가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을 때 백성들은 이미 여호와 하나님과 등진지 오래 되었고 온갖 이방신을 섬기며 배도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이와같은 현상은 요시야의 조부인 므낫세로 말미암아 되어진 일입니다.
므낫세는 그 부친 히스기야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나 히스기야의 신앙노선을 저버리고 미친 듯이 우상숭배의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열왕기하 21:1-6에는 므낫세의 범죄행위가 나열되어 있는데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이방신을 섬겼다고 하였습니다.
히스기야가 헐어버린 산당을 다시 세웠습니다.
바알과 아세라의 목상을 만들었고 하늘의 천체들을 숭배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 마당에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는 또 우상 종교의 의식을 좇아 아들을 불가운데로 지나게 하였으며 박수와 술객과 점쟁이를 신임하였습니다.
(2)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이 퇴락하였습니다.
므낫세의 폭정아래 제사장의 종교행위는 둔화되었고 이로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의식이나 성전예배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성전은 방치되어 퇴락한 건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는 곧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을 뜻하며 동시에 자기 땅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짓밟히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옛날 그들의 조상 다윗과 솔로몬왕 때 예루살렘에다 성전을 짓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사해에 떨치게 하였던 것에 비하면 너무나 대조적인 현상인 것입니다(왕상9:1-5).
이에 요시야왕은 즉위한지 18년이 되었을 때 서기관 사반을 제사장 힐기야에게 보내어 백성이 바친 돈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전을 수축하도록 분부하였습니다(왕상22:1-7).
요시야는 무너진 성전을 수축하므로 이스라엘에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잃어버린 영광을 회복하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행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려할 때 흡족히 여기시며 축복을 선언하였습니다.
학개 2:9에 "이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3) 백성들을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일
성전을 수축하는 일은 허물어진 건물을 다시 세우는 것 이상으로 큰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과 멀어져 있는 백성들의 마음을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이켜 놓는 일인 것입니다.
요시야는 그의 조부 므낫세가 55년이나 되는 오랜기간 왕위에 있으면서 너무나 조직적이고 집요하게 백성들을 바알과 아세라 우상에게 밀착시켜 놓은 것을 알았습니다.
열왕기하 21:9에 보면 "이 백성이 듣지 아니하였고 므낫세의 꾀임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열왕보다 더욱 심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요시야가 정성을 들여 퇴락한 성전을 수축하고 서기관이나 제사장이 그들의 직무에 충실하게 하므로써 백성들의 마음속에 오염된 이방신의 잔재를 씻어내고 여호와 하나님 종교로 돌아오게 하는 일을 수행한 것입니다.
2 말씀의 권세를 드러내었습니다.
중세기 종교개혁 운동의 모토(Motto)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었습니다.
로마 카톨릭에서 내세우는 교황의 교서(敎書)나 주교회의의 결정문이나 또 그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의식이나 제도, 어떤 관행이나 습관보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주권이 있음을 주장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신앙의 원리요 기초입니다.
요시야도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2절).
"그 조상 다윗의 길"이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법도를 뜻합니다.
일찌기 다윗은 왕위를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물려주면서 "네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고 하였습니다(왕상2:3).
이와같은 다윗의 유지(遺志)는 이스라엘 열왕들에 의하여 계승되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이미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선포하신 왕도(王道)이기도 합니다(신17:18-19).
다만 요시야 이전의 왕들이 이 길을 저버렸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백성들은 혼미해졌습니다.
요시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되찾고 그 권세를 만천하에 드러내게 하였습니다.
(1) 율법책을 찾아내었습니다.
본문 말씀 8절에 "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하고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요시야왕의 명에 따라 제사장이 인부들을 데리고 성전공사를 진행하다가 그 안에서 율법책을 찾아내었습니다.
성전공사를 하는 현장에서 방치되어 있던 율법책을 발견하였다는 것은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큰 것입니다.
율법책이 성전안에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오랜 세월 성전과 멀리했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에 접근할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백성에게 있어서 불행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므낫세를 비롯한 왕의 권력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웠던 시대의 현상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속에 바알과 아세라를 위시하여 온갖 거짓신과 이방 사상들이 가득차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수 없었던 불행입니다.
오늘날도 건물은 있으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사장(死藏)된 교회, 인본주의와 세속주의 사상에 마음을 내어준 채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신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요시야의 종교개혁, 그 의미를 되새겨 보게 합니다.
(2) 말씀앞에 굴복 하였습니다.
율법학자요 서기관인 사반이 제사장 힐기야에게서 받은 율법책을 가지고 와 요시야 왕의 어전에서 낭독하였습니다.
이때 요시야는 옷을 찢으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왕의 권위도 자존심도 다 벗어던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앞에 굴복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10-11절에는 "또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왕의 앞에서 읽으매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의 옷을 찢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생전처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대할 때 왕은 엄청난 충격과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회개하는 태도를 보인 것입니다.
그는 이어서 제사장과 서기관을 불러놓고 이 백성이 어떻게 해야 될 것인지 여호와 하나님께 물어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과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진노를 받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13절)
(3) 말씀을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열왕기상 23:1-3에 보면 왕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또 제사장과 선지자들까지 다 여호와의 성전에 모이게 하고 그 발견한 율법책의 내용을 낭독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직접 대위에 높이 서서 백성들을 상대로 자기가 먼저 여호와께 순종하여 그 계명과 법도를 준수할 것이라고 선언을 하였습니다.
거기 모인 모든 백성은 다 왕과 함께 그렇게 하기로 언약하였습니다.
이것은 개혁 운동의 중심이 말씀 운동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중세기 개혁자들이 오직 성경을 외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당시 로마 카톨릭의 교권주의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감추어둔채 백성들에게는 저희가 필요로하는 부분만 외우게 하고 성경에 접할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였습니다.
마틴 루터가 개혁운동을 벌일 때 라틴어로 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반포하므로써 사제들의 전유물로 감추어져 있던 성경을 백성들이 직접 읽고 깨닫게 하였습니다.
사실상 이 일이 종교개혁을 성공하게 만든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3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였습니다.
일찌기 사도바울은 과거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으나 훗날 여호와 하나님의 일꾼으로 새출발할수 있었던 것을 두고 "나의 나 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간증하였습니다(고전15:10).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는 멸망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용서를 받게되고 나아가서 더 큰 사랑과 축복을 받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나 구원받게 되는 비결은 사람의 선한 행위와 공덕으로 말미암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바울의 신학의 원리대로 오직 은혜(SOLA GRATIA)만을 주장하였습니다.
여기 요시야의 신앙행위를 보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접근하는 비결을 배울수 있습니다.
(1) 할수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요시야는 처음 서기관 사반이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할 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11절에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 옷을 찢으니라"고 하였습니다.
13절에는 "우리 열조가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발하신 진노가 크도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율법의 말씀을 통하여 저희들이 저지른 과오를 알게 되었고 그 결과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마땅하다고 시인하였습니다.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말씀의 거울에 비취는 자기의 모습을 정확하게 발견하고 범죄한 자기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바울은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고 하였습니다(롬7:9).
(2)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의 과오로 인하여 불행이 닥치게 된 것을 알게될 때 어떻게 대처해야 될 것인지 그 방법을 몰라 당황하게 됩니다.
로마서 7:24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하고 탄식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곧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도움을 요청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14절 이하에 요시야왕은 제사장 힐기야에게 명하여 즉시 훌다라는 여선지자를 찾아가게 하였습니다.
그 선지자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어차피 죄를 지었고 벌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래도 긍휼이 풍성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의 과오를 인정하고 겸손히 머리숙이는 자를 용서하시며 살길을 열어 준다는 사실에 착안한 것입지다.
이것이 곧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3) 철저한 회개를 단행한 것입니다.
성경적 신앙은 믿고 고백하는 바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척도에 따라 자기의 과오가 드러나면 지체없이 회개를 하여야 되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을 때 즉각적인 감사와 보답하는 행위가 따라야 됩니다.
요시야는 백성들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기로 서약을 하였습니다(왕하23:3).
또한 그는 이미 저지른 과오에 대하여 철저하게 회개하고 죄악의 요소들을 척결하였습니다.
열왕기하 23:4-23에 보면 유다와 예루살렘에 산재한 모든 우상의 전각과 형상들 그리고 거기 쓰여졌던 기구들까지 모두 불살라 버렸습니다.
므낫세가 만들어 놓은 신상들은 모조리 빻아서 가루를 만들었고 우상숭배에 앞장섰던 제사장들의 무덤을 파고 그 유골을 불살랐습니다.
이토록 철저하게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한 세력이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요소들을 제거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을 지키기 위한 회개의 행동입니다.
그후에 백성들과 함께 성대하게 유월절 절기를 지켰습니다(왕하23:21-23).
성경은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고 하였습니다(왕하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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