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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야곱의 신앙개혁

본문

2절 말씀을 봅시다.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이방신상을 제하여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오늘은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한지 488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바다에서 배가 항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정북을 향하는 나침판입니다. 배가 아무리 방향을 틀어도 나침판은 항상 스스로 움직여 정북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침판은 움직여서 돌아야만 제구실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나침판이 고정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고장 난 나침판이고 결국은 쓸모가 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의 현대사회는 급변하는 시대라고 합니다. 그리고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변해가기는 가는데 도무지 방향을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급변합니다. 가치 기준이 달라지기 때문에 근본적인 뿌리가지 흔들리는 혼란한 세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급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입니다. 변하는 시대 속에서 가만히 있는다고 제자리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변화라는 시대의 한 가운데 자리를 잡고 살기 때문에 스스로 원래의 위치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아니하면 결국 따라서 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원래의 자리를 찾는 것이 바로 개혁입니다.
‘사람은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세 가지로 자세로 반응한다' 로체스터의 유명한 크리스토퍼 모드 채버스 주교가 말했습니다. 무조건적으로 반대하는 반동적 자세가 있습니다. 사람은 안주해 버리려고 합니다. 변화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수구세력들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한꺼번에 무조건 뜯어 고치고자 하는 혁명적 자세가 있습니다. 우리는 혁명이라는 말을 이제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한꺼번에 바꾸어지는 것은 많은 부작용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결국 혁명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엔 발전적 자세가 있습니다. 이것은 변화하는 상황의 도전에 대해서 언제나 적극적으로 자기를 적응시켜나가고자 하는 태도인 것이다. 자연계에 있어서도 적자생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변화하는 환경에서 적응하지 못하면 자연도태 되고 마는 것이다.
변화와 성장은 삶의 본질입니다.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려면 생명력과 유연성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개혁인 것이다. 개혁은 혁명처럼 요란한 소리는 없어도 조용하지만 지속적으로 그리고 내면적인 변화부터 추구하기 때문에 힘이 있는 것이고 공감대를 형성하여 모든 사람이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개혁도 이와 같습니다. 원래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대로 여호와 하나님께로 바로 돌아가는 것이 신앙의 개혁입니다. 우리 개신교를 개혁주의 교회라고 합니다. 걔혁라는 말은 (Reformd)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은 원래의 형태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곧 원점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입니다. 원래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이고, 본래적인 진리에게로 돌아가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개혁해 나가야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개혁해야 하느냐 하면 곧 원래의 진리가 변절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뿐만아니라 참된 진리를 찾고자하는 끊임없는 노력이 있을 때 비로소 개혁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침판이 배가 움직이더라도 스스로 움직여서 정북을 가리키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은 급변하는 세대 속에 휩싸이지 말고 스스로 움직여서 말씀대로, 성경으로 돌아가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바로 돌아가는 운동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마르틴 루터가 시작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 보면 계속적으로 일어난 운동이 종교 개혁입니다. 나라가 부패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부르셔서 율법으로 돌아가라. 또는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열왕들 중에서는 아사왕이나 여호사밧왕, 또는 히스기아왕과 요시아왕들을 대표적인 개혁왕이라고 손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그 보다 훨씬 이전에 아마 1,000년 전에 벌써 개혁운동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마 최초의 종교 개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본문의 주인공은 야곱입니다. 야곱은 20여 년 전에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채고 난 후 형을 피하여 밧단아람으로 가던 중에 벧엘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서원하였습니다. 이곳이 여호와 하나님의 집인 벧엘이 되게하겠다고 했습니다. 어언 20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거부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그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형 에서의 문제였습니다. 형 에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그는 얍복강에서 철야기도를 하고 여호와 하나님과 승리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형의 마음이 풀어졌습니다.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니 그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약속을 깡그리 잊어 버렸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밧단아람에서 야곱을 부르신 것은 벧엘로 보내시기 위하여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벧엘로 올라가지 않고 세겜성 부근에다가 장막을 쳤습니다. 왜냐하면 세겜성은 당시에 어느 정도의 마을 형성하여 사람이 살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만 벧엘은 광야였기 때문입니다.
야곱에게 문제가 없어지고 고난이 없고 걱정이 없어지니 여호와 하나님과의 약속도 잊어 버렸던 것입니다. 아마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그는 고의적으로 벧엘을 회피했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는 4사람의 아내와 아들 열하나와 딸 하나 있었을 뿐 아니라 많은 가축과 종들이 있었기에 어려운 환경인 벧엘 보다는 우선적으로 생활하기는 세겜이 더울 편했기에 거기서 눌러 살 작정으로 세겜성 앞에 은 100개를 주고 거기에 장막을 쳤던 것입니다.
성경에 서원한 것은 속히 갚으라고 했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는 여호와 하나님께 서원해 놓고는 형편이 풀리고 문제가 해결되고 잘되면 언제 그랬던가 하고는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누구와 같은 사람들입니까 야곱과 같은 사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린 세겜의 생활은 어떤 생활이었습니까 처음에는 평화로운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가 깨어졌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딸 디나가 세겜 성주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을 당합니다. 결국은 결혼조건으로 세겜성의 모든 사람들을 할례받으라 해 놓고는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가지고 모든 세겜 사람들을 다 죽여 버렸습니다. 세겜성이 야곱의 아들에 의해서 남자들이 다 죽었다는 사실을 들은 다른 주변의 족속들이 야곱을 치려고 다 모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평화롭기만 하던 야곱의 가정에 야곱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치욕적인 일과 생명의 위협을 받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이때의 사건은 야곱의 평생에 있어서 가장 긴장되고 위기에 처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을 때도 이두 아들을 저주하고 죽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야곱에게 있어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에게 시련과 어려움이 옵니까 일차적으로는 여호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시련은 축복일수가 있습니다.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가 편했을 때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지만 그가 고난에 처해 어려울 때 여호와 하나님은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1절 말씀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야곱의 이름이 벌써 32장에 얍복강에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야곱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스라엘이라는 합당한 삶을 살지 못했기에 여호와 하나님은 아직 야곱이라고 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벧엘에서 단을 쌓으라고 말씀하기는 것입니다. 과거 형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를 회상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던 모습을 회상하고 거기서 여호와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그 언약과 그 믿음을 회복하기 위하여 단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나그네 입니다. 나그네 된 우리가 저 천성을 향하여 올라가는 생활을 하지 않고 마치 야곱처럼 세겜에 밭을 사서 거기서 안주하여 세상에 휩싸여 세상의 물결이 치면 치는 대로 파도가 치면 치는 대로 휩싸여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다시금 벧엘로 올라가는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벧엘로 올라가지 전에 해결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2절에 야곱은 모든 식솔들에게 "너희 중에 이방 신상을 제하여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개혁입니다. 원래의 위치 참된 진리로 돌아가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곳에 가기 위해서는 우선 버릴 것이 있습니다. 모든 개혁은 버림에서 시작됩니다. 세상에 물든 것을 그대로 가져갈 수 없는 것입니다. 세속적이고 이방적인 것들을 다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종교개혁은 우상을 버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종교개혁이었습니다.
먼저 이방신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이방신의 대표적인 것이 라헬의 드라빔이었습니다. 이것을 가진 자는 상속권이 있기 때문에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12장 30절에 보면 이방인들이 어떻게 그 신을 섬기는가 하는 호기심도 갖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벧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렇기에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우상이 무엇입니까 골3:5에는 탐심은 우상 숭배라고 했는데 주님 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데 조금이라도 방해 거리가 있다면 그것을 다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자신을 정결케 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더러운 것을 씻어내는 것을 말합니다. 곧 쉽게 말하면 목욕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전의 사람 그대로 가지 말고 완전히 새사람이 되어서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의복을 바꾸라고 했습니다.
의복은 그 시대의 문화와 환경에 맞추어서 입게 됩니다. 그래서 패션이라고 합니다.
곧 유행을 말합니다. 야곱은 그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겨왔지만 오랫동안 이방에서 생활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옷도 이방사람들과 거의 비슷한 장신구나 부적 같은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꾸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더 나아가서 삶의 방식을 바꾸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자기중심의 사람이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활 방식이 여호와 하나님 중심으로 변해가야 합니다.
4절에 야곱은 그 모든 것을 상수리나무 아래 다 묻어 두었습니다. 그들의 손에 있는 이방신상을 싸구려 인형이 아니었습니다. 값비싼 물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귀걸이도 보석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 묻어버렸습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아직 세상 것에 연연해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까 아직도 생각나고 그리운 것이 있습니까 완전히 다 묻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5절에 드디어 야곱이 발행하였습니다. 은 100개나 주고 싼 땅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는 벧엘로 이제 올라갑니다.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고 있을 때 그때부터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결단에 있습니다.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고 있지만 추격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호와 하나님 뜻대로 살기로 결단하고 떠나는 사람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손길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대적들로 하여금 꼼짝 못하도록 두려운 마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대적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단하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행하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사형통한 길로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시작부터 만사형통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벧엘에 돌아온 축복(9-13)
그는 벧엘에 올라가서 여호와 하나님을 다시금 만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축복을 여호와 하나님 자신입니다. 야곱은 그 여호와 하나님을 다시금 만났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복을 주셨는데 그 복을 보면 야곱이라 부르시지 않고 이스라엘로 완전히 불러주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 이름에 합당하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불러 주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성도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 이름에 부끄러움이 없습니까. 이름답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름값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과 아름다운 땅을 자자 손손에게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축복은 아무 곳에서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축복이 얍복강에서 약속 되었지만 축복을 받는 것은 벧엘이었습니다. 곧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집인 것입니다.
곧 오늘에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살기 좋은 세겜이 있을 때는 부끄럽고 어려운 일만 있었지만 그러나 벧엘에서는 올라 올 때부터 복을 주셔서 그 복을 영원히 누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야곱이 벧엘로 올라온 목적이 무엇입니까
3절에 여호와 하나님께 단을 쌓으려고 하노라. 고 했습니다. 곧 여호와 하나님 바로 섬기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개혁, 개혁 이라고 하는데 무슨 개혁입니까 개혁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경대로 돌아가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돌릴 바른 신앙생활을 하자는데 있는 것입니다.
오늘 종교 개혁주일을 맞이하여 우리의 신앙생활을 다시금 점검해 보고 버릴 것을 버리고 묻을 것을 묻고 씻을 것을 씻어 버립시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으로 날마다 올라가는 신앙생활이 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바로 나와서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섬겨서 약속된 축복을 받아 누리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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