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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개혁신앙의 뿌리

본문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수도사로서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명상하며, 주를 섬기며, 또 때로는 고행을 하면서 그 영혼을 깨끗케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혹은 이미 죽은 망령들을 위하여,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기도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엄격히 생각하면수도원 생활이라는 것은 리얼 신(real sin), 실제적인 죄를 범할래도 범할 수가 없습니다. 여자가 없으니 간음죄를 짓지 못할 것이요, 또 사유 재산이 없으니 도둑질하고 욕심부릴 것도 없고, 수도원 안에 있으니 출세하고 얻고 빼앗기고 빼앗는 그런 일들도 없습니다.
오로지 기도와 명상으로 그 수도생활을 하는 루터의 마음 속에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 고민은 오직 하나로 집약이 됩니다. 죄 문제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항상 내 죄, 내 죄, 가슴을 찢으며 죄에 대한 아픔을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견디다 못해 그는 당시에 죄 사함 받을 수 있는 그런 방법 중의 하나라고 하는 고해성사를 가게 됩니다. 고해성사란, 일정한 장소에 가서 초인종을 누르면 신부님이 나와서 이렇게 비스듬히 앉습니다. 그러면 그 귓가에다 대고 자기의 잘못된 죄를 다 고합니다. 그러면 신부께서 그를 위해 기도하고 죄 사함을 선포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이제 고해성사를 가서 죄를 자복했습니다. 조금 와서 생각하니까 또 다른 죄가 생각나서 또 가서 고백했습니다. 하루에도 스무 번 이상 이렇게 신부님을 괴롭혔답니다. 신부께서는 마침내 지겨워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루터야, 죄 좀 모았다 오너라. " 그럴 것 같아요. 저라도 견디기 어렵겠어요. 이렇게 됐단 말이에요. 또 들어보니까 죄가 무슨 도둑질입니까, 간음입니까, 살인입니까, 그런 것 아니에요. 마음 속에 있는 의심과시기와 질투와 정욕과, 어쨌든 심리적으로 마음 속에 있는 그런 것들이에요. 이걸 가지고 자꾸 찾아와서 이랬다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죄가 뭡니까 죄라는 것은 이미 지은 죄, 그것이 죄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이것이 없어지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아요. 아무리 회개하고 오늘부터 바로 산다고 하더라도 이미 지은 죄는 죄입니다. 마치 빚을 진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예컨대, 빚을 져 놓고 그것 놔두고 이제부터 선하게 바르게 산다고 그 빚이 갚아집니까 또 그로 인해서 파급된 손해가 많았는데 그건 무엇으로 보상할 겁니까 설사 극단적으로 말해서, 내가 누굴 죽였다면 이제부터 바르게 진실하게 의롭게 선하게 한평생 산다고 한들 죽은 자가 살아납니까 어떻게 죄를 간단하게 봅니까 그저 바르게 살고 의롭게 살고 오늘부터, 그런 망상을 버리세요. 죄란 사실이에요. 그대로 죄로 남아있는 거예요. 이걸 무서운 줄 알아야지. 그렇지 않습니까 요새도 보니까 십 년 동안 도망다니다가 자수했다고 하니까 감옥에 쳐넣잖아요. 십 년 지난 죄라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이래서 죄는 무서운 거예요.
또 하나는 그 죄가 내 성품에, 내 인간성 속에 타락성으로 남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부터 내가 바르게 산다고 해야 소용없어요. 죄인의 의라는 것은 의가 아니에요. 왜냐 하면, 벌써 생각이 잘못됐고, 감성이 잘못됐고, 판단이 잘못된 그 주제에 의가 무슨 의! 소용없는 겁니다. 내 마음, 성품, 판단, 이성이 전부 다 타락된 가운데 있거든요. 이 자체가 죄예요. 그뿐 아니라 이런 죄인은 미래를 향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수용할 수가 없어요. 말씀이 내 안에서 왜곡됩니다. 말씀에 대한 의심이 많습니다. 근심, 걱정, 불안,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합니다. 이 또한 엄청난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고행도 생각하고 극기도 생각하고 여러 가지를 생각해 봅니다마는, 그런 방법으로 죄를 씻을 수가 없는 것이올시다.
마틴 루터는 오랫동안 벼르고 생각했던 바대로 로마에 있는 스칼라상타라고 하는 성당엘 갔습니다. 지금도 있습니다. 한 번씩 로마를 갈 때마다 누구나 보는 곳입니다. 성 요한 성당 바로 옆에 스칼라상타라고 하는 그런 성당이 있는데, 이 성당은 이처럼 이렇게 교인들이 모여서 예배하는 곳이 아니고, 성당 안에는 오직 커다란 계단 하나가 있습니다. 이 계단은 예루살렘의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님이 끌려 올라갔던 그 계단입니다. 이것을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가 믿음이 좋아서 이것을 예루살렘에서 뜯어서 로마로 옮겨다가 성당 안에다가 그것을 들여놓은 것입니다. 거룩한 계단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올라가면 모든 죄가 사함 받고, 죽은 자를 위해서 기도하면 연옥에 있는 심령들이 구원받을 수도 있다 하는 그런 교리가 함께 하는 그런 성당입니다. 여기에 마틴 루터가 가서 계단마다 입을 맞추며 무릎을 꿇고 한 계단마다 올라갈 때에 주기도문을 외웁니다. 기도문을 외우면서 계속 올라갔어요. 28계탄 다 올라가서 그는 결코 시원함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마음 속에 아주 번개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귀에 쟁쟁하게 들려오는 말씀이 있었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까짓 계단 아무 소용없는 거다. 어떤 모임도 소용없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긍휼로,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것. 의롭다 함을 얻는 그 길 외에 죄 문제의 해결이 없다고 깊이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종교개혁을 단행해서 오늘 우리가 신앙 생활을 바로 하게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의 궁극적 관심은 죄입니다. 바로 의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의롭다함의 문제입니다. `디카이오스우네`, 저스티피케이션(justification), 저스티파이(justify), 이게 문제란 말이에요. 보세요, 종교개혁자의 관심은 정치 문제, 경제 문제, 사회 문제, 번영 문제, 자유 문제, 이런 외적인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죄.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나는 어떤 모양으로 서게 되겠느냐, 여호와 하나님 앞에 있는 나. 죄 문제 하나만 생각하는 것이에요.
자, 이제 우리 생각합시다. 그런고로 종교개혁자는 죄, 그것도 내 죄, 내 마음 속에 있는 죄 문제 가지고 고민을 합니다. 그리고 의의 문제를 생각하고 그 다음에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이 어디 있느냐, 이것을 생각하면서 대표적인 루터, 칼빈 모든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으로 돌아갑니다. 오직 성경에서만 해결이 있어요. 어느 교리 어느 교황의 말이 아니라 오로지 성경 속에서 문제의 해답을 얻게 됩니다. 성경 속에서 사도 바울을 만납니다. 바울의 교리를 생각합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주제인 그 복음 속에서 `디카이오스우네`, 의롭다 함을 얻는 교리를 발견하고 여기서 새롭게 태어납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뿌리입니다. 의롭다 함을 얻는다, 즉 칭의(稱義), 혹은 득의(得義),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도 바울이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고 복음의 진수를 설명할 때에 그 성경적 근거를 구약에 두었습니다. 구약에 두고 거기서 설명을 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설명할 때, 이것은 우리를 의롭다 하게 하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의의 계시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십자가 위에 나타났다, 그로 인하여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할 때에 그 역사적 맥락을 구약에서 찾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에서 읽은 말씀대로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매 의로 여기시고` 하는 거예요. 하박국 2장 4절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함과 같으니라`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바울은 이 두 요절을, 이두 성경 말씀을 아주 소중히 여기고 여기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롭다 함의 교리를 설명하는데, 오늘 역시 종교개혁자들도 마찬가지로 그 믿음으로 돌아가는 것이올시다.
자, 오늘 아브라함의 믿음을 좀 생각해 보십시다. 히브리서 12장 1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고향을 떠나라` 그럽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고향은 편한 곳입니다. 고향은 익숙한 곳입니다. 고향은 안정된 곳입니다. 고향을 떠나라면, 지금처럼 무슨 비자 받아 가지고 떠나는 것도 아니고요, 한 번 떠나면 그야말로 광야입니다. 어디서 어떻게 살라는 얘기입니까 사방이 전부 원수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 내가 네게 자식을 주겠고, 내가 네게 지시할 땅을 주겠다. ` 어디로 가라는 것도 없습니다. 지정표도 없습니다. 그저 떠나라는 거예요. 말씀을 믿고, 약속을 믿고 떠나는 바로 거기에 아브라함의 위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바로 이 같은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떠남으로 의롭다 함을 얻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 이어지는 아브라함의 이야기 속에서는 그 믿음이 무엇인가를 말해 줍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약한 점을 알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분명히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준다고 약속했습니다마는, 그는 흉년이 들 때 그만 그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갔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돌보지 않았더라면 마누라 잃어버리고 자기는 죽을 뻔했습니다. 다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히 돌아옵니다마는. 자, 이렇지요, 이 정도예요. 자식을 주신다고 약속을 받았지마는, 그때 벌써 말씀 처음 들을 때가 75세입니다. 빨리 주셔도 주셔야겠는데, 웬걸요, 세월이 흘러가 무려 10년이 지나가는데. 로마서 4장 19절에 의하면, `마치 죽은 자와 방불한 자기를 알면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생리적으로 볼 때는 나이 100세가 되니까 죽은 자와 마찬가지예요. 마누라는 단산한 지가 오래되었어요. 90세가 되었어요. 여기서 뭘 기다리겠어요. 그래 그도 역시 휘청합니다. 뭐 종자만 내 종자면 되지, 그래서 이스마엘을 또 만들어요. 여호와 하나님은 책망하십니다. 그거 아니라는 거예요. 정당한 길로 가야지 편법으로는 아니다 이거예요. 기어이 90세가 넘은 사라, 그로부터 아들을 주시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의 믿음, 줄기찬 믿음이 되지는 못합니다. 이렇게 휘청휘청 했어요. 다 이 나약함을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때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가 얼마나 마음으로 믿는지 안 믿는지는 중심을 살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 아실 것입니다. 이렇게 나약함을 가지고 있는 아브라함인데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만 하면 또 믿어요. 그 믿음이 뭡니까 말씀을 그대로 수용하는 거예요. 자기의 무자격, 자기의 허물 생각하지 않아요. 말씀만 받아들이는 것이에요. 또한 이미 실패한 과거가 있지 않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도 이렇게 수십 년 동안 이래 실패하고 이리 넘어지고 실수한 것들 많아요. 이것을 자기가 알고 있고 여호와 하나님이 알고 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하실 때에 오늘 또 순종하는 겁니다. 또 받아들이는 거예요.
오늘 성경 말씀대로 보면 그는 소돔 고모라 왕과 전쟁을 벌인 일이 있었어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일시 이기기는 했습니다마는 불안합니다. 저들이 연합을 해 가지고 다시 쳐들어오면 속수무책입니다.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승리하고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불안해함은 믿음이 아닙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바로 이 순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또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참으로 위대한 사람이에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이것을 그대로 수용합니다. 그럴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의로 여기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약속을 확실하게 그대로 믿습니다.
이제 클라이맥스가 옵니다. 100세에 아들을 얻었죠 모름지기 그가 27세쯤 됐을 때 같습니다. 꽤 나이가 많았을 때예요. 이제 장가보내면 돼요. 바로 그런 때인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이삭을 모리아 산에 데리고 가서 제사를 드려라 그래요. 원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거야말로 큰 일입니다. 아브라함도 판단이 있고, 그가 질문할 내용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이 아들을 통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자식을 주신다고 약속하시고, 장가도 보내기 전에 이것을 죽여 바치라고요 약속이 틀리지 않습니까 날더러 아들을 죽이라고요 여호와 하나님이 이런 여호와 하나님입니까` 할 말 많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일체 질문이 없습니다. 반항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셨으니 바치라면 바치는 거지. 약속은 약속대로 이루어질 거지. 여기에 이의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이성적 판단을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그대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이삭을 드리게 됩니다. 이 때에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다. ` 그리고 메시아의 조상이 될 것을 그때에 약속해 주십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믿음, 우리는 종종 믿음을 간단하게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의 이 엄청난 믿음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러하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실수와 잘못이 있기는 합니다마는 의롭게 여기십니다. 믿음을 보시고, 오로지 이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의라고 하는 것은 먼저는 도덕적 의가 있고 종교적 의가 있습니다마는, 인간으로서는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고요. 두 번째는 회개의 의가 있습니다. 회개하고 뉘우치고 그리고 이제부터 바로 해보겠다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그것은 형식 뿐이요 실제는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흔히 우리는 회개하고 뉘우치면 다인지 알지마는, 그것이 해결의 길이 아닙니다. 문제는 여호와 하나님이 의롭다 여기셔야 됩니다. 그 근거는 믿음뿐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믿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말씀을 믿고 이에 따라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수용하고 전적으로 순종하는 그 깨끗한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죄인이지마는 그가 의롭다 하시면 나는 의인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곧 용기입니다. 믿음은 나 자신이 나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아야 됩니다. 우리의 최고 관심사는 뭡니까 아직도 잘사는 겁니까 아직도 부를 원합니까 오래 산다고요 그래서 어쩌자는 겁니까 우리의 최고 관심은 의요, 바로 죄 문제에 있는 겁니다. 참 믿음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이 의롭다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를 내가 수용할 수 있어야 됩니다. 거기에 위대한 종교 개혁적 능력이 있는 것이올시다. 이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을 의로 여기시고` 바로 여기에 개혁 신앙의 뿌리가 있는 것이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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