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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개혁의 재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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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지 486년째 되는 날입니다. 종교개혁으로 시작된 ‘개신교’라고도 하고 ‘개혁파 교회’라고도 하는 교회는 지난 5백 년 동안 해마다 10월 마지막 주일을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주일로 지켜왔습니다. 저도 이 강단에서 종교개혁에 대한 얘기를 여러 차례 했는데, 아마 들은 사람들은 익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해서, 오늘은 조금 색다른 방향으로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5백 년 전에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이 종교개혁은 카톨릭 교회에 대한 저항으로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루터는 겁이 많은 사람이었고, 신경이 좀 과민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스물두 살 때 자기 친구랑 길을 가다가 친구가 벼락을 맞아 죽는 걸 보고서, 이건 여호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아 죽었다고 생각하고서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나도 이런 벼락을 언제라도 맞을 수 있는 죄인이 아닌가!’ 루터는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공포심에 떨고 있다가 드디어 1505년 7월 17일에 독일 엘골트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수도사로서 철저하게 수행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안 받고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되기 위해 기가 막힌 수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일을 루터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낮이나 밤이나 나는 심판에 대한 공포심에 떨며 절망의 눈물을 흘렸다. ” 이러한 고통을 안고서 수도사가 되었고 그 이후에 공부를 계속해 가지고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수로서 성서 강의를 계속했는데, 1515년 4월부터 그는 로마서를 강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읽은 로마서 1장 16절, 17절을 강의하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거기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는 복음에 나타난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심판이란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인데, 그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은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라는 말씀에 깜짝 놀란 것입니다. 그 구절에 이어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이 구절을 읽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가슴이 갑자기 뜨거워지며, 지금까지 나를 짓눌러오던 그 죄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갑자기 나는 새로 태어난 사람처럼 기쁨에 가득 차 버렸다. ” 바로 이 루터의 깨달음서부터 종교개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여기서 제가 긴 얘기 할 수는 없고, 놀라운 사실은 루터가 결코 로마서를 처음 읽지 않았다는 겁니다. 로마서를 수십 번 읽었고 또 강의할 준비도 다 하고 그랬는데, 이걸로 강의하다가 왜 갑자기 뜨거워지고 깨달음을 얻게 되었느냐 이건 성령의 역사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철두철미해졌습니다. ‘우리가 죄의 사함을 얻고 구원을 얻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서이다. 이 복음은 기쁜 소식, 그리고 기쁜 소식을 믿는 것, 그것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이다. ’ 그래서 '솔라 피데(sola fide),' '오직 믿음으로만,' 하는 것이 종교개혁의 슬로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종교개혁에서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고, 계속 확인하고 나가야 될 것은 우리가 죄 사함을 얻고 구원을 얻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잘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성서를 철저하게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가는 길에서 갑자기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이후에, 철저한 율법주의자, 율법을 어기는 기독교인들은 모조리 없애버리겠다고 나선 바울이 완전히 바뀝니다. 그렇게 철두철미하던 율법주의자가 바로 이 복음에 부딪힌 이후에 완전히 180도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개혁파 교회가 오늘 한국에서만 아니라 도처에서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사도 바울과 루터가 그토록 강조해서 말한 것, 곧 우리의 구원은, 여호와 하나님의 의는 복음에 나타나고, 우리가 바로 그 복음,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산다는 진리를 뒤집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할 이야기가 많아서, 한 가지만 예를 들려고 합니다. 저는 평소에 기독교 방송을 잘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동차를 타고 다닐 때는 꼭 틀어놓고 듣습니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아주 많이 듣습니다. 기가 막힌 것은, 이렇게 구름처럼 많은 교회 목사들의 설교에서 복음을 들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구약성서를 가지고 설교를 하면서 예수라는 말 한마디도 없이 이야기를 끝내는 것을 수없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냐 바울이 말한 “믿음으로만,” 루터가 그처럼 외친 이 “믿음으로만”이,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자유와 기쁨이 넘치게 하던 그것이, 결국에는 도그마로 화해 버리고 율법으로 화해버렸다는 데에 우리 개신교의 가장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루터도 역시 사람입니다. 5백 년 전 독일이라는 상황에서, 그 당시 카톨릭 교회의 어마어마한 잘못들 가운데에서 이러한 운동을 일으키는 동안에, 루터 역시 잘못 생각한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잘못된 것은 ‘믿음으로만’이라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그 믿음으로 사는 것이 구체적으로 뭐냐 하는 점을 확실히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서에서는 사랑을 함께 행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야고보서입니다.
사도 바울과 마르틴 루터는 성서를 절대 존중한 사람입니다. 카톨릭에서는 교황을 절대적으로 받들었지만, 루터는 성서를 교황 위에 놓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성서는 아기 예수가 태어나신 말구유’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만나자면 성서로 가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가 태어난 말구유에는 구정물도 있고 지푸라기도 있다는 것이고, 그 구정물과 지푸라기 같은 것이 야고보서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을 주장하면서 소위 행동이라고 하는 것, 사랑이라고 하는 것, 그것이 등한시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바로 복음이란 뭡니까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예수님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오늘 여러분이 읽은 요한복음 15장에서 확실하게 말씀했습니다. “내 명령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이 말씀은 요한복음 13장 34절에도 나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사랑의 강조입니다.
어쨌든 사도 바울의 이 ‘믿음으로만’의 강조가 그 이후 바울과 루터의 뜻과는 달리 하나의 도그마가 되어버리고 만 것은 대단히 유감스런 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듯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사랑이 없는 복음이란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또 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사랑에 대한 확실한 응답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루터가 이 ‘믿음으로만’을 강조하다 보니까,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수만 믿으면 아무 짓을 해도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내놓은 기준이 양심을 따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심이란 것이 뭐냐를 물을 수밖에 없게 되고, 그래서 ‘양심지침서’란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또 다른 율법이 되고 말았습니다. 같은 양심이라 하더라도 살인강도의 양심과, 작은 잘못에도 벌벌 떠는 사람의 양심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 이후에, ‘믿음만’에 대한 강조가 교리화하고 사랑이 간과됨으로써, 결국 분열이 생기고 대립이 생겨서 개신교회는 조각조각 갈라졌습니다. 우리교회도 개신교 가운데 장로교만 일흔 여덟 개 교파로 갈라져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교회 지도자들은 참된 종교개혁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계속해 개혁해 나가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개혁의 재개혁!
개혁의 재개혁이 가장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20세기에 들어와서 시작된 에큐메니컬 운동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1948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시작된 세계교회협의회운동입니다. 우리 경동교회는 한국에서 그 운동에 가장 먼저 참여한 교회이고, 제가 세계교회협의회의 중앙의원을 지냈고, 지금 우리 박종화 목사님이 중앙위원으로 있습니다. 바로 이 에큐메니칼 운동이 두 번째 종교개혁 운동입니다. 종교개혁의 ‘믿음으로만’이 잘못됨으로써 조각조각 갈라진 교회가 이렇게 하나로 뭉치게 되고, 또한 사랑이 아니라 양심을 얘기하던 교회가 제1차 2차 세계대전을 보면서 이 사회와 역사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운동으로 전개하게 된 것은 너무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제3의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한다고 말씀드립니다. 오늘 여러분이 처음에 경동찬송가 14장을 불렀습니다만, 경동교회 14장은 제가 가사를 쓴 찬송입니다. 그 가사를 읽어봐도 알겠지만, 저는 벌써 오래전부터 제3의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의 에큐메니컬 운동을 그만두자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로마서 1장 16절에 근거해서 시작되었지만, 저는 제3의 종교개혁은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 20절까지가 텍스트가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골로새서를 읽어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것은 2천 년 전에 쓰인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천지만물이 창조되기 전에 계신 분, 바로 그리스도, 요한복음 1장에서 언급되는 로고스 그분, 전 피조물이 그분을 통하여 창조되었고 오늘도 그분 안에서 만물은 유지된다고 합니다. 20절에 가게 되면 그리스도는 그의 몸인 교회의 머리로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피조세계와, 만물과 여호와 하나님 사이에 화해를 이루는 일을 하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가 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만물을 창조하고, 만물을 유지하고, 만물을 살리는 그리스도, 여호와 하나님! 이것은 우리가 등한하게 여기고 넘어가지만,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 19절에서 모든 피조물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모든 피조물은 다 함께 신음하고 진통을 겪고 있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서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쓴 말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말씀을 대단히 등한하게 읽어 왔습니다. 역시 루터가 로마서를 여러 번 읽었지만, 어느 때 깨닫듯이, 이 말씀의 뜻을 오늘의 시점에서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벌써 한 60년 전에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히틀러에 의해서 처형당한 본회퍼라고 하는 신학자는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데, 전 피조물이 겪고 있는 고통의 바로 그 밑바닥에 계신 그리스도를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이 그리스도가 겪는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이라고 본회퍼는 얘기했습니다.
그 후 1952년에 죽은 카톨릭 사제였던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이야기도 결국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부활하시고 성령이 오시므로 우리가 구원을 이루었는데, 구원을 이루었다고 하는 이것은 무슨 말이냐 “사랑의 인력권”을 만든 것이다. 이 인력권 안에 있는 공동체 곧 교회에서는 뭘 하느냐 하면, 바로 앞을 향하여 그리고 위로 향하여 계속 전진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어디를 향해 가느냐 하면, 오메가 포인트,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때까지 계속해서 전진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인력권 안에 있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우리가 등한시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서 지금은 깨달아야 합니다. 제1차 종교개혁이 카톨릭 교회의 잘못에 저항해서 일어났고, 제2차 종교개혁인 에큐메니컬 운동은 조각조각 서로 대항하고 갈라진 교회가 합치되어 세상을 위해서 일하자는 뜻으로 일어났습니다만, 제3의 종교개혁 운동은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하신 만물이 인간들의 죄로 인하여서 산산조각 파괴되고 죽어가고 신음하고 고통받고 있음을 직시하고, 바로 이 지경에서 만물을 해방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만물을 이 고난에서 해방시키는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길,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서도 나오는 그 길을 향해 역사를 움직여 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바로 이 역사의 가운데 서 있어야 됩니다.
제가 오래 전부터, 코스믹 크라이스트(cosmic Christ), 우주를 만들고, 우주 안에 있고, 우주를 완성시키는 바로 그 우주적 그리스도를 얘기하고 찬송가도 그렇게 지은 이유는 결코 괜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다고 해서 우주를 위해, 만물을 위해 우리가 당장 나가서 뭘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너무 크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제가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박 목사님에게 얘기했지만, 이 교회가 현대식 난방시설이 있기 전에는, 12월 첫 주일이 지난 다음에 난로를 놓았습니다. 근데 시월인데도 날씨가 왜 이렇게 추워졌습니까 왜 가을이 없어지고 봄이 없어져 갑니까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공기를 오염시켜서 지구가 더워져서 이렇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한반도에서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여기서 수백만의 사람이 죽고 다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우리 현실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자살하는 사람의 수가 사고로 죽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다고 합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런 것이 우리 눈앞에 있는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교회는 모여서 예배드리고 크리스마스 때나 헌금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면 된다는 식의 사고를 완전히 뒤집어엎어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도, 우리가 하는 봉사에도, 적어도 오늘의 전 피조물이 고통을 겪고 해방의 날을 기다리는 바로 그 고난의 한복판에 와 계신 그리스도와 그 그리스도의 몸인 이 교회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 교회 속에서 우리는 화해를 성취시켜 나가는 ‘화해의 사도’로서, 고린도후서 5장 18절의 말씀대로, 전쟁을 평화로 바꾸고 오염과 파괴를 제거하여 이 세계를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한 올바른 질서로 바꾸는 길에 나서야 합니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나눠진 기독교가 연합하자는 것이었으나, 우주 만물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서는 교회만의 일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기독교만 아니라, 우주만물을 위해서 창조만물을 위해서 오염을 막고 전쟁을 막으려고 애쓰는 모든 종교들과, 그리고 모든 비종교인들과, 그뿐만 아니라 그 전체와 함께 힘을 합쳐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사람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생물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공기와 태양과 흘러가는 물까지로 확대되어야 합니다. 진정 구체적으로 만물을 사랑하는 그러한 교회운동, 이것이 제가 말하는 제3의 종교개혁 운동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전 유럽의 역사를 뒤집어놓았듯이, 이 운동은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하시는 운동이기 때문에 반드시 새 하늘과 새 땅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함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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