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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개혁이냐? 멸망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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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500여년 전 교회는 은혜의 복음을 잃어버리고 암울한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이 때에 그의 교회를 사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 마르틴 루터와 칼빈 같은 이들을 불러일으켜 세우셔서 타락한 교회의 잘못을 밝히시고 개혁의 횃불을 들게 하셨습니다. 루터가 개혁의 횃불을 든 날이 1517년 10월 31일이었으므로 오늘 마침 그 10월 31일 주일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반드시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마르틴 루터나 요한 칼빈의 영웅적이고 위대한 업적을 찬양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주일이 그 몇몇 개혁자들의 업적을 높이기 위해 있는 날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종교개혁 정신에 맞지도 않을 뿐더러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다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가 세우신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교회가 교회답게 되도록 주의 종들을 사용하시어서 교회를 개혁해 나간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의 개혁은 개혁자들의 몫이나 우리의 의지이기 전에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며, 성령 여호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개혁은 16세기에 한 번 일어난 것으로 만족한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개혁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라는 경구가 생긴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가 계속 개혁되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은 죄로 인해 어두워져서 비록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교회를 섬긴다고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의 뜻에서 멀어지는 일들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이라는 것은 혁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보다 복음의 본질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영어로 개혁이라는 단어는 Reformation입니다. 이 말은 다시 본래의 모습을 잡는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날마다 그리스도인의 본 모습,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어떤 것인지 계속 Reform해야 합니다. 교회도 본래의 교회의 모습으로 계속 Reform해야 합니다.
이제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 주일을 맞이하면서 선지자 아모스가 바라보며 지적하는 그 시대의 암울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점검하고 이 시대에 다시금 우리를 Reform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아모스를 통해 말씀의 빈곤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선지자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죄와 심판을 예언하면서 가장 우선적으로 문제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11절을 봅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wl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아모스 선지자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어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자기들 생각대로 살아가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심판의 하나로 말씀의 빈곤이 임할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없는 시대 그것은 곧 암흑의 시대입니다. 말씀이 없는 시대는 갈함의 시대, 목마른 시대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그것을 보았습니다. 교회는 많고 사제들은 많았지만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지 않았던 시대, 그 말씀이 없는 암흑의 시대, 말씀이 없는 목이 마른 시대를 바라보면서, 이라고 외친 것입니다.
당시 강단에서 설교를 하는데 전혀 성도들은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로 설교를 했습니다. 심지어 주님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신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저는 오늘 아모스 시대의 이스라엘이나 종교 개혁당시의 교회들을 비판이나 하고 있자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오늘 우리입니다.
우리는 과연 말씀이 말씀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성경보다 더 우위에 둘 수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리고 교회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가장 우위에 있어야 합니다. 모든 판단의 잣대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오랜 경험이 어떤 일을 판단하는 판단의 기준이 된다면 개혁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개인 혹은 가정의 모든 영역에 그리고 교회의 모든 영역에 가 외쳐져야 합니다.
개인적인 부흥 교회적인 부흥 혹은 국가적인 부흥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부흥이 일어날 때 따라왔던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열심이나 그 어떤 것을 통해 부흥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될 때에 거기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의견이 Yes라고 모아졌다고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No라고 거절한다면, 거절하는 것, 그것이 말씀이 말씀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아무리 어떤 일을 하고 싶어도 그래서 모두가 그 일을 행하기로 뜻을 모았다고 할지라도 성경이 해서는 안 된다고 거절하면 그 일을 거절하는 것, 그것이 말씀으로 말씀되게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여러분이 아무리 하기 싫어도 모두가 다 하지 말자고 해도 성경이 그것을 하라고 하면 그 일을 행하는 것이 바로 말씀으로 말씀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 한 예를 저는 기드온과 그 성읍 사람들을 들고 싶습니다. 기드온 당시에 그 성읍에 바알의 단과 아세라 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우상들이 자기들에게 복을 주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에게 말씀이 임합니다. 그 바알의 단과 아세라의 상을 다 파괴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사기를 통해 볼 수 있듯이 기드온은 두려워서 그 일을 행하는 것이 썩 내키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읍 사람들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환한 대낮에 그 일을 하지 못하고 밤중에 그 일을 합니다. 그러나 기드온이 낮에 행했든 밤에 행했든, 혹은 그 성읍 사람들이 반대를 하든 기드온이 그 일을 하기 싫든 간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바알과 아세라 상을 파괴하는 것이 말씀으로 말씀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오늘도 바로 우리들에게서 계속 개혁은 진행되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되게 하는 의 삶이 여러분 자신과 가정과 교회 위에 늘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2. 아모스를 통해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14절에서 무릇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거나라고 지적합니다. 여러분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이 무엇입니까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은 마치 우리 나라가 남과 북으로 나뉘듯이 둘로 갈라졌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중심으로 남쪽 유다가 그 정통성을 이었고,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북쪽 이스라엘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여로보암은 큰 고민이 하나 생긴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지키는 삼대 절기가 되면 예루살렘으로 모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쪽 유다의 땅에 예루살렘이 있고, 여로보암이 다스리는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남쪽 유다의 편이 되면 어떻게 하나하는 고민이 바로 여로보암의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기껏 생각하고 연구해 낸 것이 두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 뒤에, 예루살렘까지 가지 말고 그 가까운 곳에서 제사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시편 같은 곳을 보면 알겠지만 그 예루살렘을 향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을 가지고 그 예루살렘 시온성을 향해 갔습니다. 예루살렘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만나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의 장소입니다.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그 백성들이 나아가는 장소입니다. 예루살렘 그 자체에 무슨 신비한 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니엘도 머나먼 이국 땅에 포로로 끌려와서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어놓고 하루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근거한 믿음의 기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사하는 그 자체에 무슨 신비한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피를 보고 긍휼을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제단에 나아가고 믿음으로 예루살렘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사마리아의 그 죄된 우상을 섬기는 것은 곧 믿음을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어떤 행위만 있으면 어떤 선행만 있으면 다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행동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도 같은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당시 타락한 중세교회는 어떤 선행이나 고행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심지어 소위 연옥설을 주장하면서 먼저 가신 조상들이 연옥에 있는데, 그 후손된 자녀들이 헌금궤에 금전을 땡그랑하고 넣는 순간 연옥에 있던 그 부모님들이 천국으로 간다고 하는 참 허무맹랑한 가르침마저 있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때에 을 외친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된다는 선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종교개혁의 핵심은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믿음은 행위가 수반된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믿음과 행위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나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튼 당시 구원을 얻기 위해서 궁전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며 계단마다 입을 맞춘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어느 시대보다 더 믿음이 강조되어야 하는 시대입니다. 주님이 오실 날이 점점 가까워오면서 믿음의 사람들을 찾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의 그 외침이 여러분 자신과 가정 그리고 교회 위에 늘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3. 아모스를 통하여 브엘세바의 길이 지적됩니다.
14절의 오늘 본문은 브엘세바의 위하는 것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라고 한글 성경에 번역이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정확히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브엘세바의 위하는 것이라는 말은 브엘세바의 길입니다. 또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하는 말은 원문에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 부분은 번역한다면 브엘세바의 길로 가는 자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현대어 성경이 그래도 조금 더 잘 번역해 놓았습니다.
사마리아의 단과 브엘세바의 성소로 우상들을 섬기러 찾아 다니는 자들도
여기 브엘세바의 길이라는 것은 소위 모슬렘교도들이 메카의 길이라는 것과 흡사한 말입니다. 즉 브엘세바는 북방 이스라엘 땅에 있지 않고 남방 유다에 있는 땅이요, 족장시대 이래 유서 깊은 제단이 있어 북방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곳까지 마치 순례하듯이 찾아 나서곤 했다는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5:4-6上에서 아주 분명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한 번 찾아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사람들은 어떤 공로를 내세워서 구원받기를 기대합니다. 그 조상들이 예배했던 브엘세바에 다녀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 선지자 아모스는 여호와 하나님을 찾으라고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것처럼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강조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어떤 공로가 있어서 우리가 남들보다 더 잘난 것이 있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남은 생애를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은혜를 입은 자답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을 다녀와야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요, 우리가 헌금을 많이 한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고 그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봉사도하고 구제도하고, 헌금도하고, 뭔가 행하는 것입니다. 이제 구원받았음을 기억하면서 그 놀라운 은혜를 받은 자답게 남은 생애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 론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바라보면서 개혁하라고 말한다면 비난이 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Reform 해야 합니다. 우리가 개혁되지 않으면 선지자 아모스의 경고처럼 비틀거리는 시대를 맞이할 것입니다.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시대를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되게 하는 의 삶이 나 자신과 가정과 교회가 되고,
의 그 외침이 나 자신과 가정 그리고 교회 위에 늘 나타나며,
구원받았음을 기억하면서,
그 놀라운 은혜를 받은 자답게 남은 생애를 돌리며 살아가는 진정한 개혁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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